페이스북에서 읽은 원병묵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원문은 뉴욕타임스 기사이고 아래 링크가 있으니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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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눈치란?
*뉴욕타임스 (2019-11-02)
http://nyti.ms/34lJK1Z
“행복과 성공에 이르는 한국인의 시크릿”
눈치에서 필요한 것은 눈과 귀와 조용한 마음뿐이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권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비밀 대화를 나누실 때 한국어로 소통하셨고 나와 자매는 전혀 한국어를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국어 단어는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처음 배운 단어 중 하나가 ‘눈치’였다. 글자 그대로 하면 ‘눈 측정’이다. 눈치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기술이다. 특정 개인이 아닌 집단에 집중하며 방의 분위기를 빠르게 읽는 기술이다. 아마도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단어일지 모른다.
대부분의 한국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너는 왜 눈치가 없니?’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눈치’를 부정적으로 배웠다. 한국의 전통적인 자녀 양육에서 눈치는 ‘길을 건너기 전에 양쪽을 살펴라’거나 ‘동생을 때리지 마라’와 거의 동격이다.
한국에서 눈치는 일상과 얽혀 있다. 명함을 예로 들어 보자. 링크드인(LinkedIn)의 시대에도 여전히 한국인들은 명함을 교환하며, 명함 교환은 거의 의례적 수준이다. 양손에 명함을 주고 받으며, 마치 깨질듯이 애지중지, 몇 초 동안 명함을 정중하게 공부해야 한다. 지갑에 곧바로 넣으면 안된다. 이 의례는 모든 이들에게 잠시 동안 눈치를 사용하도록 기회를 준다. 즉, 내재된 계층 구조를 파악하여 미래의 동지가 될 것인지 아닌지 눈으로 측정한다. 그리고 제공자와 수신자를 연결하여 신뢰의 토대를 마련한다.
'사회 생활의 절반은 눈치다'라는 한국 말이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실용적인 의미에서 그들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눈치가 필요하다. 눈치는 ‘속도'가 중요하다. 눈치가 대단한 사람은 ‘눈치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은 방에 들어설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몇몇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반면, 눈치가 대단한 사람은 방 전체를 마음속으로 훑는다. 방의 분위기가 밝은지 무거운지? 왜 그런지? TV에서 축구 경기를 보고 있는지? 방금 전 누가 방에 들어왔는지? 등등.
아마도 눈치가 있다면, 집주인이 넌지시 당신이 떠났으면 하는 때를 감지할 수 있을까? 동료들 앞서 언제 위험이 닥칠지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을까? 이것을 안다면 눈치가 빠른 것이다. 업무 회의가 끝나려고 하는데, '질문이 하나 있는데'라고 당신이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눈을 동글동글 굴리던가? 그렇다면 눈치가 좀 더 필요하다.
눈치의 가장 큰 장점은 부자거나 특권이 있거나 무드가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눈치가 ‘사회적 약자의 비밀 무기'라고 말한다. 눈치는 나처럼 모순된 의견에 지친 직장 여성들과 소수자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모순된 의견이 그들과 관련 있든 없든 말이다.
난처한 사람들이 통제 가능한 환경 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눈치가 존재한다.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최고의 타이밍이 필요할 뿐이다.
눈치는 나처럼 사회적 불안을 겪는 사람에게도 유용하다. 불안은 종종 판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며, 이럴 땐 마치 연극을 보고 있듯 '방에 집중하는 (눈치를 보는)' 것보다 더 나은 해독제는 없다.
영어에는 '공감'이나 '감성 지능' 같은 눈치와 관련된 모호한 말이 있다. 하지만 공감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서양에서는 공감이 미덕들 사이에서 최상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공감은 소시오패스로부터 당신이 구별되도록 하지만 소시오패스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는 없다.
과도한 공감은 위험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은 공감하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는다. 역지사지는 훌륭한 것이지만 자칫 논리의 확장으로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은 불안정하다. 반면, 눈치는 먼저 조용히 관찰하며 다른 사람들을 경청하는 동안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하도록 돕는다.
게다가, 공감과 감성 지능 같은 개념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기술이 가능하게 한 은둔과 다른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것과는 경쟁할 수도 없다.
눈치는 한국 문명 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속도와 적응이 필수인 현대에 아주 적합하다. 눈과 귀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어렵지만 '조용한 마음'이 필요하다.
눈치가 그렇게 대단한데, 세상은 왜 진작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눈치의 면면은 21세기 서양인들의 마음에 끔찍한 것이며, 그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눈치는 당신에게 집단주의, 내향성, 그리고 무엇보다 입다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나는 눈치가 작동하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12살 때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한국어를 전혀 몰랐던 나는 한국 학교에 들어갔고, 그 땐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한국의 교육은 ‘눈치’ 교육이다. 수업 동안 학생들은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학용품부터 시험을 보는 것까지 모든 정보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전달했다. 심지어 눈치를 사용하여 이러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이 교육의 일부였다.
1년 후 나는 반에서 최우등에 올랐고 18개월 후 부반장이 되었다. 내 한국어가 형편없는 데도 말이다. 나의 성공은 강제로 갈고닦은 ‘눈치’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