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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호-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
달란트의 비유에서 배우는 교훈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의 때가 가까웠음을 보여 줄 징조를 말씀하신 후,“깨어 있으라”경고하시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것은 무료하게 기다리는 일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었는데, 주님께서는 이 교훈을 달란트의 비유로써 가르쳐 주셨다.
그분께서는 “천국”은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 가운데서 다른 지방으로 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나타난 자들은 저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라는 초청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봉사를 위하여 구속함을 받았다. 그리스도 자신이 일꾼이셨으며 그분을 따른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의 법칙, 곧 하나님과 저들의 동포에게 대한 봉사의 법칙을 주셨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고상한 생애의 개념을 세상에 보여 주셨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봉사의 법칙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는 동시에 우리 동포들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성령의 선물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게 위탁하신 달란트는 특별히 성령이 나누어 주시는 선물과 축복을 나타낸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8-11.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선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종들 각자에게 어떤 종류의 성령의 선물을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위하여 믿음과 기도로써 저희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성령의 부어 주심을 받았다. 그와 같이 이 하늘의 선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마음을 주님께 굴복하여 열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데에 달려 있다.
다른 달란트들
그러나 특별한 성령의 선물만이 비유에 나오는 달란트라고 할 수 없다. 이 달란트는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것, 또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계없이 모든 선물과 재능을 다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 자신을 아울러 그분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바친 것을 순결하게 하시고 고상하게 하셔서 그것으로 동료 인간들을 축복하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도록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셨다. 달란트는 아무렇게나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저희가 더 큰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신 분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각자가 그 맡은 달란트를 잘 활용할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사용해야 하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고후 8:12)신다.
달란트의 사용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관계되는 문제는 내가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가 아니고,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온갖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동포를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의무이다. 재능과 유용성이 날마다 자라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할 때 주님의 일꾼으로써 우리가 가능한 한 최고의 표준에 도달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각 기능을 최대한 완전하게 개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루어야 할 큰 사업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대리자들을 택하시고 그들로 날마다 같지 않은 환경에 처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는 일념으로 당신의 대리자들을 택하시되 그들이 완전하기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과 연합함으로 완전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대리자들에게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워주신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결코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악으로 기울려는 우리의 성벽에 맞추기 위하여 의의 표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품성의 불완전함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품성의 모든 의로운 특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특성을 가질 특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원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도와주시지만,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일, 곧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각 기능을 최대한 완전하게 개발해야 한다.
아무것도 이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운명이라는 것이 아무리 사람을 단단히 붙잡아 매어도 그것을 타개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경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일으킨다. 하나의 장벽을 깨뜨릴 때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더욱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옳은 방향으로 매진하라. 그리하면 역경이 그대의 방해자가 되는 대신에 오히려 돕는 자가 될 것이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품성의 아름다움을 닦기 위하여 대망을 품으라. 그대가 품성을 닦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에녹이 비록 부패된 시대에 살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험도 그를 타락시키지 못했던 저 신실한 정치가 다니엘과 같이 굳게 서라. 그대의 죄를 없이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그대를 사랑하신 그분을 실망시키지 말라.
그는“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기억하라. 비록 지금까지 실수했다 할지라도 그대가 그 실수를 하나의 경고로 삼을 것 같으면 그대는 틀림없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대는 패배를 승리로 바꾸게 되어 그대의 원수로 실망하게 하고 그대의 구주를 높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꼴 지워진 품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세로 가지고 갈수 있는 유일한 재물이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우리의 품성을 개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성령님과 하늘의 천사들은 단호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행실에까지 완전함을 나타낼 그러한 품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협력할 것이다. 이 일에 힘쓰고 있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네 오른편에 서서 너를 돕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이 협력할 때에 그것은 전능한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힘을 의지하여 이룰 수 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명하는 모든 것은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의 도우심을 구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늘과 연결시켜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품성을 이룰 수 있으며, 이것은 또 달란트를 활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권두언
강병국 목사
신약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를 꼽으라면 아마도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고 있노라면 그 분명하고도 논리적인 설명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힘이 있고 정열적인 설명들에 설복 당하게 되지요. 정말 성령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영감의 글을 쓰게 하시어 성경의 일부들로 삼으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러한 사도 바울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 달려가서 물어 볼 것들이 많은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 분의 말씀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해하기가 조금 힘든 면들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에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어떤 이들은 바울의 말씀을 읽고 나서 그 원래의 의도를 오해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함으로 뒤로 넘어지게 되니 조심하라고 경고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로마서에 기록된 복음에 대한 그의 설명들은 우리가 앞 뒤를 잘 살펴 보면서 연구해야만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오해 할 수 있는 여지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는 가상적으로, 사도 바울에게 직접 물어 보아 답을 얻는 형식의 기사들처럼 꾸며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복음에 대한 가장 명확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해서 사도 바울의 여러 다른 편지서들 까지 포함하여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신 복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되는 점들을 보편 타당하게 그리고 문맥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이해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꾸며 보았습니다.
진리를 확신하기 위하여 갈급함을 가지고 정독하시는 여러분들께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3.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17가지 계명
행복한 결혼을 원하는 부부들은 서로의 행복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원칙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 원칙들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신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생활을 위한 그분의 규칙들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규칙들을 준수하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된다.
1. 그대 자신들만의 가정을 설립하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인용하여, 결혼을 하면 부부는 반드시 부모를 떠나서 자신들만의 가정을 세워야 된다고 역설한다. 만일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구약시대에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의 결혼 생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들은 결혼을 한 이후에도 부모의 영적 감화력을 계속해서 받으면서 살았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 2장 24절의 말씀에서“부모를 떠나”라는 말의 의미를 단순히 부모와 따로 산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영향력으로부터의 독립으로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만일 부모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고상한 감화력을 가지고 있다면,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살든지 살지 않든지를 불문하고, 새롭게 가정을 시작하는 부부는 부모의 아름다운 사랑과 감화력을 계속해서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자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면, 남자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위치를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 자신의 가정을 영적으로 독립 유지 하기 위하여 남편은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돈이 없어서 단칸방에 세들어 살더라도, 남편과 아내는 자신들의 가정을 정신적으로 또는 재정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첫번째 원칙이다. 만일 이 원칙을 조심스럽게 따랐더라면 수천건의 이혼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2. 결혼 전에 가졌던 관심을 계속 유지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 남편은 (아내를) 칭찬하(고)”(잠 31:28). “시집간 자는…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고전 7:34). “(서로)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결혼생활에서 결혼 전에 보였던 관심과 예절을 계속 유지 하라(혹은 되살리라). 성공적인 결혼생활은 어쩌다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런 애정의 표현도 없고, 노력도 없는 결혼은 자칫 잘못하여 파멸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마음 속의 사랑을 따뜻하고 친절한 말로 표현하고, 그러한 애정을 통하여 사랑이 자라나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죽고 그대들은 서로 낯선 사람들처럼 되고 만다. 사랑과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때 더욱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서로간의 사랑을 계발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함께 무엇을 하면서 보내라. 항상 기쁘고 밝은 얼굴로 서로를 맞이하는 법을 배우라. 작은 예절과 격려와 애정어린 행동들을 간과하지 말라. 작은 선물들로 서로를 놀라게 하라. 상대방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려고 시도해 보라. 그대가 투자한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획득하려 하지 말라. 이혼 자체가 결혼을 가장 크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결핍이 가장 큰 파괴자이다. 한번 시도해보라. 사랑은 언제나 승리한다.
3. 그대들을 결혼시킨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마 19:5,6).
그대의 가정에서 사랑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는가? 가정의 파괴자인 마귀가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대들을 결혼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분은 그대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만일 그대들이 그분이 주신 법칙들(계명들)을 순종한다면 그분은 그대들의 생애에 행복과 사랑을 선사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실망하지 말라. 미개한 지역의 문둥병자들을 사랑할 마음을 한 선교사에게 넣어주신 하나님께서 그대가 그분께 기회를 드릴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을 그대에게 주실 수 있다.
4. 그대의 생각의 문을 잘 지키라. 그대의 감각이 그대를 함정에 빠뜨리지 못하게 할.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옳으며..정결하며..사랑할만하며..칭찬할만하며..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그릇된 종류의 생각은 그대의 결혼을 파멸로 이끌고 갈 것이다. 마귀는 다음과 같은 생각들로 그대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할 것이다: “우리 결혼은 실수야.”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필요하다면 우린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어.” “친정집에 갈테야.” “그이가 그 여자를 보고 웃었어.” 이런 생각들은 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결혼은 끝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생각과 감각은 그대의 행동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불순결한 생각이나 불충실을 암시하는 어떤 것도 보거나 말하거나 읽거나 듣거나, 그런 사람과 사귀는 것도 금하라. 한번 그런 상상력에 빠지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타고 언덕을 내려 달리는 것과도 같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늘 파멸이다.
5. 서로 속에 분을 품은 채 잠자리에 들지 말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빌 3:13).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크던 작던 어떤 문제로 인해 속 상한 것이나 분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신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그 문제가 그대의 마음과 태도에 깊은 확신으로 남아있게 되어 그대의 전반적인 생애의 철학을 역행시키는 것이 된다. 바로 이유 때문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분노를 다 풀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무엇이든지 용서해 줄 수 있으며, 진지한 마음으로 “잘못했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사람이 되라.
6. 함께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약 5:16).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서로에게 대한 진정한 사랑과 용서와 힘과 지혜와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라는 개인적인 보장을 하셨다. 하나님의 도움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가족은 하나도 무너진 적이 없다.
7. 그리스도를 그대의 가정의 중심에 늘 모시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 법칙은 다른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위대한 법칙이다. 그리스도를 첫째로 모시라! 가정에서의 진정한 행복의 비결은 독재나 통제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들은 결코 서로 멀리 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가정생활을 하면 결혼은 성공적인 것이 될 것이다. 복음은 적개심과 쓰라림과 실망으로 가득 채워진 모든 결혼생활들을 위한 치료제이다. 또한 기적적으로 사랑과 행복을 되찾게 해줌으로써 수천 가정의 이혼을 방지해 준다. 복음은 또한 그대가 원하기만 하면 그대의 결혼생활도 성공적인 것이 되도록 해줄 것이다.
8. 이혼이 해답이 아닌 것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상호간의 성격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그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이혼함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너무나 유약하고 무분별한 처사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은 파경과 위기에 처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풍성한 능력을 제공한다. 서로를 진정으로 용서하라. 상대방에 대한 감미로운 기억들만을 머리 속에 두라. 친절의 법이 그 입술에 있게 하라. 마귀는 “이혼이 해결책이다”라고 계속 속삭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연합이 힘이다”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9. 가정의 방어선을 탄탄하게 지키라.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 31:11,12).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 2:14).
“이것이 너를 악한 계집에게서 지켜…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흘리지 말라…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잠 6:24-29).
부부가 누리는 친근함은 결코 다른 사람, 심지어는 부모와도 함께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칙을 어기는 큰 죄요, 큰 비극이다. 제 삼자에게 동정심을 기울이거나 불평의 말을 듣는 것은 사단이 부부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조작이다. 그대의 가정의 문제를 비밀리에 해결하라. (그대의 목사나 결혼 상담인을 제외한) 아무도 그 일에 관여치 못하게 하라. 서로에게 항상 진실하며, 절대 서로 사이에 비밀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농담은 하지 말자. 서로를 위해서 열렬하게 변호하며, 모든 침입자들이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지키라.
(어떤 결혼 상담인들은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간음은 늘 그대 자신과 그 일에 관여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정서의 구조와, 무엇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며, 무엇이 우리를 돕는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분의 법칙을 무시하는 자들은 대단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만일 무분별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하면 즉시 그것을 뽑아 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생애에 절대 걷힐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우게 될 것이다.
10. 어떤 것도 과도히 하지 말고 절제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 13:5).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너희는 죄를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롬 6:12,13).
무엇에든지 과도히 하는 것은 그대의 결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너무 적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 사랑, 휴식, 운동, 놀이, 예배, 식사, 사교적인 접촉 등은 그대의 결혼 생활에서 주의 깊게 균형을 맞춰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가 끼어들 것이다. 과로와 수면과 적절한 음식과 운동의 결핍은 사람을 비판적이고도 조급하며 부정적으로 만든다. 끊임없는 과식은 동물적인 욕구를 강화시키고 양심을 둔하게 만들기 쉽다. 성의 남용은 거룩한 사물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며,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결혼은 성의 남용을 위한 자격증을 주는 것이 아니다. 부절제한 성행위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파괴한다. 성경(고전 7:3-7)은 절조 있는 성생활을 명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의 사교적 접촉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진정한 사랑은 고립된 중에서는 발견 될 수 없다. 우리는 건전한 사교를 통하여 즐기고 웃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너무 과도히 심각하게 되는 것은 위험하다. 무엇이든 과도히 하거나 게을리 하는 것은 마음과 몸과 양심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할 수 있는 역량을 약화시킨다. 부절제가 그대의 결혼생활을 파괴시키지 못하도록 하라.
11. 비난과 바가지 긁는 것은 사랑을 파괴한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19).
비난, 바가지 긁는 것, 상대방을 조정하거나 강요하거나, 그리고 잘못을 꼬집어 내는 일을 중단하라. 잘못을 간과하고 좋은 점들을 찾으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의 가진 사랑을 파괴하기만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 성공적인 결혼의 비결은 바른 배우자를 소유하는데 있기 보다는 바른 배우자가 되는 데 있다.
12. 하나님게서 묘사하신 사랑의 표준에 이르도록 힘쓰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이것이 하나님께서 묘사하신 진정한 사랑이다. 그대는 어느 정도 달하였는가? 사랑은 감상주의적인 충동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국면과 행동을 포함한 거룩한 원칙이다. 진정한 사랑으로 수 놓아진 그대의 결혼은 실패할 수 없다. 그런 사랑 없이 그대의 결혼은 성공할 수 없다.
13. 상대방의 개인적인 권리와 사생활을 존중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각자는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각 개인의 사생활의 권리가 있다. 결혼한 당사자들은 서로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결코 성격의 변화를 강요하려 하지 말라.
14. 정결하고, 정숙하며, 질서정연하고, 의무에 충실하라.
“그는……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잠 31:13,27).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사 52:11).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가정은 깨끗하고 질서정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평화와 고요함, 그리고 만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게으름, 무질서, 더러운 것은 서로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파괴하기 위한 마귀의 무기들이다.
15.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라.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그대의 배우자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기로 결심하라. 분노는 올바른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한다. 종종 공격을 받을 때 침묵하는 것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화나거나 피곤하거나 실망했을 때에 하는 결정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분노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다. 그리고 그대가 말할 때면 그 말이 언제나 조용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되도록 하라.
16. 돈 문제에 있어서 합리적이 되라.
“사랑은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13:4,5).
결혼 생활에서의 모든 소유물과 수입은 “우리의 것”이지 “당신의 것”이나 “내 것”이 아니다.
17. 함께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의논하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잠 15:32).“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 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6:12).
모든 중요한 결정을 위해 함께 의논하는 것처럼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직업을 바꾼다거나 집을 사는 문제, 자동차나 가구나 값비싼 옷이나 돈이 드는 다른 모든 문제들을 함께 의논하는 것은 결혼을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많은 실책들을 방지해 줄 것이다. 만일, 많은 의논과 간절한 기도 후에도 서로의 견해가 다르다면 아내가 남편의 결정에 순복 해야 한다. (엡 5:22-24). 또한 자녀들 앞에서 늘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 것은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신뢰심을 높여줄 것이다.
사회는 각각의 가정들이 모여서 구성되고, 각각의 가정은 그 가정의 남편들의 신앙과 행위에 따라 좌우된다. “생명의 근원”(잠 4:23)은 마음에 있고 사회와 교회와 국가의 중심은 가정에 있다. 사회의 안녕, 교회의 성공, 국가의 중심은 가정에 있다. 장차 오는 사회의 향상이나 퇴폐는 가정에서 자라는 청년들의 태도와 품행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원칙들을 지킴으로 가장 감미로운 그리스도의 정신이 지배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좋은 가정의 감화와 환경 하에서 자란 아이들의 생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달려 있다. 이번 기사에서 언급한 17가지 원칙들을 따름으로써, 독자 여러분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아름다운 감화를 나누어 주게 되기를 바란다.
4.엄마, 소젖은 싫어요!
현대의 결혼한 젊은 여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모유수유를 원하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모유수유가 엄마를 번거롭게 하며, 젖이 흘러 불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 젖가슴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며, 일을 하는 여성들은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고, 끝낼 수 없는 일은 시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밤에도 꼭 데리고 자야하고, 속박 당하기를 원하지 않고, 몸매를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서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장호르몬제, 항생제등, 첨가물들이 가득한 우유
이러한 이기적인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정보 때문에 젊은 어머니들은 모유를 기피하고 분유를 선택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유의 우수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후 선진국에서는 우유나 분유에서 모유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많은 소들이 항생제와 영양제가 가득 들어있는 사료를 먹고 자랐으며 또한 소의 젖은 송아지를 키우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 젖을 먹일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많은 수의 젊은 엄마들은 여러 가지 핑계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 하지 않는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모성들이 어떻게 소젖을 먹이는 우를 범하는 것일까? 분유는 과잉성장을 초래한다. 소의 성장기는 4-5년으로 20-25년의 성장기를 지닌 인간과 비교할 때 1/4에 불과하다. 성장기가 짧은 소의 젖에 풍부한 성장호르몬과 단백질을 성장기가 긴 인간이 주식으로 섭취할 경우 영양과잉을 가져와 과잉 성장이 되는 것이다.
분유 속의 각종 첨가물들이 주는 질병들
우유만으로는 부족한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까지 첨가하여 만들어진 영양가 높은 분유, 그러나 분유 속에 들어있는 필요이상의 영양분과 첨가물들은 체내에 유해독소를 만들고 건강한 세포를 해치게 된다. 염증과 종기, 종양을 만들어 어린이 질병의 성인화[비만, 당뇨, 간질환, 위장장애, 신경성, 암 등]를 유발하는 유해독소는 과잉 영양된 분유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우유 속의 각종 첨가물들이 주는 질병들
과거에 소들은 4년 동안의 성장기를 거쳐야 우유를 생산하는 소가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다량의 성장호르몬제와 항생제 등으로 불과 8개월이면 우유를 생산하는 소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우유를 먹고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아이들의 조숙으로 10대 성문제는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나아가 조숙은 곧 조로를 가져와 노인성질환인 퇴행성질환, 암, 골다공증 등을 유발 시킬 위험이 있으며 또한 폐경기 때에도 고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유에 얼마만큼의 성장 호르몬제나 항생제가 들어있는지는 우리나라에서도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틀림없이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을 사실일 것이다. 1등급우유는 괜찮을 것인가? 아니다. 더욱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다. 1 등급 우유란 세균수가 적다는 것으로 세균의 수가 적으려면 위생환경이 철저 하거나 더욱 많은 양의 항생제가 투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이러한 우리나라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산 우유는 식품으로서 부적절하다는 이유이다.
분유를 먹고 자란 아이의 또 다른 큰 문제는 정서적인 것이다. 어머니와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감이 배속에 있을 때부터 형성되며, 태어난 이후 젖을 먹임으로써 강화한다. 엄마 젖으로 키운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원만한 인격을 형성하는 토대를 갖지만 엄마 젖을 먹지 못한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귀중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분유를 먹고 자란 아이는 정서적, 사회적으로 문제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래세계를 짐작하려거든 미래를 짊어지고 갈 아이들을 보라. 젊은 어머니들이, 모유가 우리의 아이들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다 같이 배워보도록 하자.
지혜로운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귀여운 아가에게 모유만큼 완벽한 영양은 다시없고 엄마의 젖이야말로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엄마의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다. 송아지 양육에는 소젖(우유)이 좋은 것처럼 인간인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은 엄마의 젖이다. 항상 무균상태로 신선하게 값싸고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최상의 영양원이며, 특히, 출산 후 7∼10일 동안 분비되는 노르스름한 모유(초유)는 대변을 묽게 하는 성분이 함유되어 대변을 쉽게 보고 탈수를 방지하며 각종 면역성분과 영양분이 농축되어 있다.
모유의 장점
초유 속의 면역물질은 질병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한다. 엄마 젖의 장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면역기능이다. 엄마 젖 속에는 아기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줄 수 있는 면역 글로불린이나 병균을 처리하는 대식세포가 가득 들어 있다. 성장을 도와주며 또한 항감염인자가 들어 있다. 엄마 젖을 먹고 자란 아이는 인공우유로 양육한 아이보다 설사, 폐렴, 호흡기 질환과 중이염 등 각종 질환에 강하고 질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더 빨리 회복된다. 모유 속의 면역성분은 신생아기 때만이 아니라 2∼3세가 될 때까지 몸 안에 남아 있어 질병을 막아주고 건강하게 자라게 해준다.
알레르기를 예방 할 수 있다
최근 오염된 공기와 각종 먼지로 알레르기성 질환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소아 알레르기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전체아이의 1/4 이상이 알레르기로 고생하고 있다. 소아 알레르기의 주원인은 우유 속에 있는 베타락토글로블린(B-lactoglobulin)으로 이 성분은 엄마 젖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유를 먹고 자란 아기는 알레르기에 걸린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아기의 IQ가 5정도 높다
모유를 먹은 아기들의 IQ가 분유를 먹은 아기들에 비해 3-5정도 더 높다. 주 연구자이자 켄터키 대학의 내과와 임상영양학 교수인 James W. Anderson 박사는 높은 IQ어머니의 모유에서 발견되는 “뇌 음식” 때문이라고 하였다. 모유에는 도코사헥산(Docosahexaenoic acid: DHA)과 아라키돈산(Arachidonic acid: AA)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는 뇌의 발달을 돕는 긴 사슬의 다중포화 지방산이다. 이 영양물질이 시중에서 팔리는 제조분유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켄터키 대학에 이루어진 발표에서 Anderson 박사는 이 연구는 모유에 있는 영양소들과 어머니와의 긴말한 “유대관계”가 IQ에 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모유수유를 받지 못한 아기들은 모유수유를 받은 아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낮은 IQ, 더 낮은 교육적 성취, 그리고 더 부적절한 사회적응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많다”라고 지적하였다. 연구자들은 보고에서 평균 IQ 3.2점의 증가가 모유에 있는 영양소에 기인한 것 일수 있으며 추가적인 IQ 2.1점의 증가는 모유수유에 의해 양육된 아기들과 어머니와의 긴밀한 유대관계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보고했으며, 이러한 이득은 생후 6개월부터 15세까지 보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빈혈, 성인병 예방, 치아를 튼튼하게 한다
엄마 젖은 사람의 신체와, 지능의 성장에 맞춰 그 성분이 변한다. 모유에 들어 있는 철분은 우유보다 훨씬 흡수율이 높아 철분 결핍으로 인한 빈혈을 예방할 수 있다. 모유 속의 지방비율은 시기에 따라 달라져 아기의 식욕을 조절하는데 도움이 된다. 엄마 젖은 어른이 된 이후의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데 모유에 들어 있는 다량의 콜레스테롤을 유아기에 소화하기 때문에 성장한 후에도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낮아진다. 엄마 젖을 빨 때는 분유를 먹을 때보다 60배 정도의 힘을 더 들여야 하며, 턱을 앞뒤로 움직이며 잇몸으로 열심히 빨아야 하기 때문에 영구치가 건강하고 곧게 나오도록 도와주며, 입 근육과 혀의 활동은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모유수유를 하면 모유가 입 속 중간지점에서부터 흘러 유치에 거의 닿지 않으나 우유 수유시는 우유가 입 속 가득 흘러 유치에 닿아 충치를 유발한다.
귀의 염증을 감소한다
아기의 중이는 아직 이관이 짧고, 곧고, 좁아 성인에 비해 중이염의 빈도가 높은데, 모유 수유할 때는 아기 스스로 빨고, 삼키고, 숨쉬는 것이 조절되지만 우유병은 아기가 빨지 않아도 흘러 우유가 중이로 들어가 염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아기에게 사랑을 심어준다
모유는 신체적인 건강에 미치는 영향 못지않게 성격형성에도 큰 영향을 준다. 10대 소년범죄자들 중에서 모유를 먹지 않고 자란 아이들이 90%나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유가 주는 장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접촉(touching of love)일 것이다. 강한 면역성, 뇌의 발달, 훌륭한 영양소에 있어서도 모유는 지대한 영향을 주지만 엄마의 사랑이 아이에게 체온이 담긴 피부로 전달된다는 것은 모유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갖도록 한다. 귀여운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서 젖을 빨고 비비고 매만지며 엄마는 아이를 쓰다듬고 껴안아 주며 지나는 순간들이 인간에게 도덕성을 높여주고 인간성을 형성하고 인간관계를 결속시키고 신앙심을 일깨워 주는 축복된 시간들인 것이다.
모유 수유하면 엄마에게 좋은 점
산후 출혈을 예방한다
아기에게 엄마 젖을 먹이면 “옥시토신(Oxytocin)”이라는 호르몬이 생산되는데 이 호르몬은 임신으로 이완된 산모의 자궁을 임신 전 상태로 빨리 복귀시킨다. 비수유 산모는 아기에게 수유한 산모의 자궁보다 더 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임신 중에 늘어난 체중은 아기에게 하루에 8-12회 수유함으로써 열량의 소모량이 많아져 서서히 살이 빠지게 된다. 엄마 젖을 먹이는 산모의 90%이상이 3-6개월간 월경을 하지 않음으로써 철분의 손실을 막아 빈혈이 있거나 허약한 엄마에겐 더욱 도움이 된다. 또한 98%의 피임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산후우울증 예방과 체중 조절을 한다
프로락틴(prolactin) 호르몬이 모성애를 자극하여 아기를 사랑하고 잘 돌보게 하는 감정이 생기며, 산후 회복을 돕고, 산후우울증이 덜 오게 한다.
여성암을 예방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골다공증과 여성암 즉, 자궁암, 자궁경부암, 난소암, 그리고 유방암 등의 발생률이 엄마 젖을 먹인 여성들이 먹이지 않은 여성보다 낮다고 한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다
모유는 언제, 어느 장소에서든지 세척 등 준비과정이 요구되지 않으며, 젖이 떨어지거나 상할 염려가 없고, 알맞은 온도와 멸균된 상태로 활용이 가능하고, 밤에도 젖을 줄 수 있고 여행을 하기 편안하다. 또한 모유수유를 함으로써 분유에 들어가는 돈을 절약할 수 있고,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는 일이 드물기에 병원비 또한 절약되며, 아기 영양공급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모유수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
초유를 먹이는 동안 인내하라.
아이가 태어난 후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아이의 건강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3일 동안 묽은 초유만 먹는 것이 아이의 배속에 태변을 모두 배출하는데 도움을 주고 아이의 면역성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의 건강에 많은 유익을 준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 엄마들은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충분히 잘 먹어야 건강하게 된다고 생각하기에 모유수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 출산 후 처음 2~3일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모유가 나오지 않고 누렇고 투명한 초유가 나온다. 초유는 그 양이 모유에 비해 적고 색깔이 투명해 아이가 충분히 먹는지 먹지 않는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처음 며칠 모유수유를 시도해 보고 초유를 생각지 않은 채 모유가 안 나온 다는 이유로 모유수유를 포기하고 분유를 먹인다. 모유보다 초유를 먼저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인내하며 초유부터 순리대로 꾸준히 젖을 물리면, 반드시 모유가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모유수유를 처음부터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젖병으로 우유를 먼저 먹이지 말라
한번 젖병으로 분유를 먹은 아기는 엄마의 젖을 빨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젖병으로 분유를 먹는 것은 엄마 젖을 빠는 것보다 훨씬 쉽고 그 맛이 더 달기 때문이다. 처음 초유수유 기간 동안 모유가 안 나온다고 생각하여 분유를 젖병에 넣어 먹이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들이 몇 번이고 경험하는 것은 모유 양이 아이의 필요를 다 못 채워 주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3개월이 지나면서 또는 6개월이 지나면서 분유를 모유와 함께 번갈아 먹인다. 그러다 보면 모유의 양이 당연히 적어지고 얼마 가지 않아 분유만 먹는 아이를 보게 될 것이다.
한 소아과 전문의사는 아이가 9개월까지 모유만 먹어도 그 양이 충분하고 모든 영양소가 다 충족된다고 말한다. 모유는 완전 식품이다. 모유처럼 모은 영양소가 적당히 배합되어 있는 음식은 없다. 그리고 모유의 양은 아이가 자람에 맞추어 그 양도 늘어난다.
최근 과학자들은 아이의 필요만큼, 엄마의 뇌에서 모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전달하여 엄마의 몸이, 모유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것은 꼭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모유를 수유해본 엄마들은 다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유의 양이 줄었다는 이유로, 모유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유를 먹이면 그것을 모유수유를 끝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모유의 양이 모자란 것 같이 느끼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꾸준히 모유수유를 하면 젖은 아이의 필요만큼 만들어질 것이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잘 교육 시키고 싶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엄마들의 가장 큰 바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유수유부터 시작하라. 분유를 먹음으로 오늘 많은 질병들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다. 아이에게 건강을 선물한다면 그 건강을 가지고 신앙과 도덕심에 있어서 함께 잘 자랄 것이다.
만약 엄마가 모유수유의 기회를 아이에게 주지 못한다면, 먼 훗날 지금을 뒤돌아 볼 때 생의 가장 큰 선물을 엄마와 아이가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삶에 있어서 우리가 후회하게 되는 것은 이미 행한 어떤 일보다는 다시는 오지 않는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이다.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는 아이의 일생에 있어서 그리고 엄마의 인생에 있어서는 오직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이다. 이것들을 다시 한번 가장 소중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5.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1
많은 경우에 우리는 다른 제 삼자들을 통하여 전해 듣기 때문에 그 사실들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 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는 면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특히 신약 성경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거나 잘못 해석하게 만드는 경우들이 참으로 많다.
사도 베드로도 바울의 서신들에 대한 오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후서 3:15-18.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사도 바울에게 직접 물어 보는 가상 인터뷰를 만들어 보았다. 사도 바울 자신이 직접 기록한 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답변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 보도록 하자. 그러면 많은 부분의 오해들이나 잘못된 이해들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편집실에서 바울의 말씀의 요약을 곁들여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는데, 진리를 듣지 못하고 살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시나요?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리적이시며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개인 개인이 받은 빛대로 심판하십니다. 그가 진리의 빛을 받은 만큼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빛의 양에 따라서, 그것을 토대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양심을 따라 심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아니더라도 천연계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찾는 기본적인 양심의 소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동기와 자기의 소원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행동으로 노출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지 못한 자들에게는 양심의 소리가 율법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자들도 어차피 자기의 생애와 삶의 행한바 대로 심판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애의 삶과 행동 자체가 자기가 믿는 진리와 도리를 진실되게 믿으며 살고 있는 지를 보여 주는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들이 행한 대로 값아 주시겠다고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18-25.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로마서 2:6-16.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2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 받는 것인데, 왜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행함도 우리의 구원의 조건에 들어 가는 것인가요?
사도바울의 답변 요약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역사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한갓 정신적인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감사함으로 나타내는 나의 반응으로서 내 온 마음과 정성을 바치며 나의 전체를 드리는 일을 포함하는 나의 생애의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나의 행동과 생활을 포함한 나의 삶 자체가 믿음인 것입니다. 또한 은혜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봐 주시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믿는 자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그 사람의 속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셔서 새로운 생애를 살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자체를 지칭하여 은혜라고 부리는 것입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들은 자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과 뜻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은혜의 역사가 마음 속에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행함과 생활 자체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사들이 우리의 생애를 살피고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1-2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10.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3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더는 계명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이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음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법을 격하시키려고 애쓰는 다음과 같은 변론을 듣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더는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순종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인가요? 이것에 관한 성경절이 로마서 6장14,15절에서 발견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쉽게 혼란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어찌하리요?”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라는 말입니다. 그의 대답에 유의해 보세요.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오해함으로써, “은혜아래 있으니 율법을 범해도 괜찮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바울은 이를 심히 염려하였기 때문에 덧붙여서 설명하기를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법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강력한 언어로 바울은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법을 범할 수 있는 면허증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은 바울의 분명한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는 로마서 3장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법을 범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이유인 것입니다. 그들은 법을 범하지 않음으로써, 법에 의해 정죄 당하지 않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요 은혜의 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계속 되는 그의 논증에서, 바울은 은혜의 능력이 죄의 세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진리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는 죄의 권세를 누르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케 하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이 주는 죄책감과 그 정죄 아래 있지 않는 이유이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인 것입니다.
한 살인자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가정합시다. 형 집행 날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법 아래 있는 것이며, 죄책감 속에서, 정죄함 아래서, 사형 선고 하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하루 전에, 대통령이 이 죄수의 형편을 재검토하고 난 후, 용서해 주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대통령이 그 정상을 참작하여 자기의 권한을 이용해서 그 죄수를 완전 석방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법이 더는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법률의 고소에 대하여 완전히 죄 없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로이 걸어나갈 수 있으며 어느 경찰이라도 그를 체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은혜 아래 있고 더는 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법률을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법률을 더 잘 순종할 의무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그 국가의 법을 조심스럽게 존중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 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기 때문에 율법을 더는 소용없는 것으로 폐하는가 라고 우리에게 질문 합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대답하고 있는데, 그것은 은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는 율법이 세워지고 재 강조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여서 재차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순종하기를 피하려고 교묘히 이유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 더 이 문제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속도위반으로 경찰에게 붙들린 경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잘못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당황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경찰이 법규위반 보고서를 쓰고 있는 동안, 여러분이 정말 급한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설득력 있게 경찰에게 호소했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는 쓰고 있던 보고서 용지를 천천히 접더니 찢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좋습니다. 이번만큼은 용서해 드리지요. 그러나...” 이제 경찰이 말하는 “그러나...”라는 말에는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을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나 다시는 속도 위반하면 안됩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요. 경찰의 이러한 용서(은혜)가 여러분에게 법을 불순종해도 좋다는 길을 열어 줍니까? 그 반대로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강하게 재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만일 여러분들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순종은 사랑의 시금석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깨끗함을 받게 하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는 법이 필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고, 정결케 하는 예수의 십자가로 다시 인도해 주는 율법의 감시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그리스도인 경험 가운데서 올바른 위치로 잡아주는 거울의 역할이 항상 필요로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경쟁하면서 상대방을 없애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협력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둘의 참다운 관계를 잘 배합시킨 아름다운 성경구절이 계시록 14장 12절 입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니라.” 믿음과 행함에 대한 얼마나 완전한 묘사입니까? 믿음과 행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성도들 가운데서 발견 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행위가 사랑의 참다운 테스트(시금석)입니다. 행함은 참된 그리스도인 임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20. 어떤 남자도 입으로 하는 말로만 가지고 순수한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꽃을 주는 일도 없고, 헌신적인 행동도 없으며, 사랑의 선물도 없다면, 순결하고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러한 남자의 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마태복음 7:21.
말과 공언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참 증거는 순종입니다. 요즈음 자동차의 범퍼에 붙어 있는 스티커들은 얄팍한 사랑에 대한 관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미소를 지으세요”, “만일 당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경적을 울리세요”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한복음 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미소나 손을 흔드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이 사랑을 환영하지만, 그것이 생활 전체를 뒤흔들고 변화를 요구할 때에는 대다수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고 편안하고 안락한 종교 즉, 자신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길대로 살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있는 종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는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가 요한 일서 2장 4절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 요한이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성경에서 가장 확고하고 깊게 수립된 진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여 주여” 하고 말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들을 행한다고 주장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청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주께서는 슬픔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의 확고한 말씀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주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요한이 우리에게 확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이리하여 우리는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어떻게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의 생애와는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한일서 5:3.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가능한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은 영적인 것이요,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완전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견해는 진리 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표준인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돌 위에 열 가지 법을 기록하셔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는 어떤 다른 숨겨진 의미가 있습니까? 십계명에 기록된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의미나 “결코 지킬 수 없다”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율법을 순종하실 수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오직 예수님만이 단 한번의 죄도 범하지 않고 사셨던 유일하신 분입니다. 주께서 그러한 완전하고 승리하는 생애를 사셨던 비결이 로마서 8장 3절,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점을 놓치지 마세요. 예수께서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육신을 취하시고도 완전하게 사심으로써 죄를 죄로 정하여 우리 속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위의 성경 절에서 사용된 “의”라는 단어의 헬라어 “디카이마”는 문자적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도 그분께서 쟁취하신 것과 동일한 승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마귀를 정복하시고 육신가운데서도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모본을 보여주시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 오셔서, 당신께서 얻으셨던 승리의 경험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겠다고 제안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힘과 내재하시는 능력으로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의지와 능력만으로는 십계명을 지킬 수 없지만, 예수님의 가능케 하시는 힘을 통하여 그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의의 깨끗함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우리의 승리의 생애를 위하여 당신의 의를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오셔서, 당신의 생애에서 하늘 아버지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심으로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만 의지하여 사는 자들은 동일한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율법으로 심판 받음
이제, 율법에 관한 마지막 질문은, “사람이 십계명 중 몇 가지를 범해야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 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야고보서 2:10-12.
모든 사람들이 결국 위대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중 하나를 범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십계명은 열 개의 고리를 가진 사슬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고리가 깨어질 때에 그 사슬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꼭 그와 같습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자들은 10계명으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도둑질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거절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적질하는 자는 하늘을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기를 거짓말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 탐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십계명이 그러한 일들을 금지하고 있는 데, 모든 인간은 결국 율법으로 심판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도 십계명중 어느 하나라도 고의로 범하면서 하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계명 중 하나를 범하는 것은 모두를 범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은 행위를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사랑을 자격요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한복음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고 있는 죄를 계속 범하는 것은 저들이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내어쫓는 것이지, 불순종의 행위 자체가 그들을 막는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불순종의 동기를 심판 합니다. 순종의 동기가 사랑일 때에만, 그것이 하나님께 받아 드려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어떠한 행위도 헛된 것이요,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희생의 효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14-23.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4
성경에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가요?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십 계명으로서 당신의 손가락으로 돌 비에 직접 써 주신 계명이 바로 그것이요, 또 하나는 모세를 통하여 책에 적어서 법궤 옆에 보관하여 두라고 분부하신 의문의 율법입니다. 의문의 율법은 언약의 율법 혹은 모세의 율법 이라고도 불리워 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십계명의 정신을 가지고 살도록 가르치시기 위한 목적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교육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신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세의 율법에는 먼저 그들 자신이 노예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후에, 그들 자신이 노예들을 가지게 될 때에, 어떻게 종들을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법칙들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세부 법칙들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의문의 율법은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는 의식들인 절기제도들과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경험을 가르치시기 위한 성소 제사 제도 같은 것들이 들어 있는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상징하는 절기들이나 성소 제사 의식 같은 것들을 행함으로는 그들이 실재로 의를 얻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상징으로 주신 실물 교훈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가르치는 도구들에 불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마치 이방인들처럼, 의문의 율법들을 행하는 그 행위들과 의식 자체들이, 다시 말해서, 절기들을 지키고 제사들을 드리는 그 행위들 자체가 그들에게 의를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의 율법들은 그들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수단이었지 의 자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 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서 주신 의문의 율법 이외에 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소에서 죽이는 양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상징 해 온 것처럼 말입니다. 아울러 십계명 자체도 우리에게 의를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주님께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은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계속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지, 우리의 마음이 계속 죄에서 해방되어 살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 외에 나타난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마태 복음 5:17,18 참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20-31.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5
인간의 죄의 본성은 악해서 어느 누구도 죄를 안 지을래야 안 지을 수가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은혜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의 말씀을 해석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고 있는 경험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의 경험을 하기 전에, 머리로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직 성령으로 중생의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며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마는 계명의 요구를 순종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울부짖고 있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 아래 팔려 있다든지, 원하지만 선을 행하는 대신에 악을 행한다는 표현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간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듭나기 이전의 갈등에 대한 묘사를 가지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매일의 생활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 말씀의 의도를 오해하여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고 울부짖는 모습을 그리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힘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의로운 생활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7장에서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7장의 울부짖음에 대한 해답을 그 다음 장인 8장에서 명쾌하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면서, 그는 성령을 좇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힘에서 벗어나게 되며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본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울부짖던 사람이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게 된 이후에 더는 죄와 죄의 본성의 힘에 눌려서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승리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바울의 말씀을 직접 읽어 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14.
여기서 잠시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인성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불리우는 신신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해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함
잘못된 신학은(신신학 또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리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견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신신학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중요한 논증의 자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네 가지의 핵심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인간은 원죄(original sin)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기독교 사상 가운데 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그는 이교 사상으로부터 이것을 받아들였는데, 이 사상의 골자는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태어날 때부터, 심지어는 수태되었을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 혹은 하나님 자신까지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주장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해 두셨다는 가설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기독교 신자들은 다윗이 드린 회개의 기도를 들어 이 견해를 뒷바침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기 위하여 대개 현대역 성경을 인용하는데 그 번역된 구절 속에는 번역자의 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원죄에 관한 편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흠정역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그러나 새 국제역(NIV) 은 똑 같은 구절을 의역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원죄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나의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을 때부터 죄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51:5 (NIV 영어 성경 번역).
히브리 원전의 이 성경절에는 어떤 원죄나 범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살펴보면 다윗은 밧세바로 더불어 지은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중심의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 51:6,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이 구절들은 다윗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상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죗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려고 하는 본질적인 경향이 있음을 지적해 줍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자연스럽게 죄를 범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출애굽기 32:3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0.
이런 성경 구절들은 원죄라고 불리우는 신신학의 교리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죄인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원죄의 사상이 성경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침례 요한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15.
아담이 범한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짓는 죄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2.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생과 멸망에 관해 미리 예정해 놓지 않으셨다.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논리적으로 결국 예정설을 인정하게 된다. 성경은 인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수께서 갈바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셨지만, 각 개인은 이미 손에 쥐어진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인간의 구원은 조건적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사단의 이론이 신신학(자유주의 신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르침이 상당히 미묘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든지 이기지 못하든 지를 불문하고 결국에는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사단의 거짓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의 전제 조건은 순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거듭하여 단언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38.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행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야고보서 2:5.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17,18.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6,17.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4. 성도들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케 하는 능력이 공급됨.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참된 성경적인 진리는 성도들이 죄를 지금 이 순간에 이길 수 있고, 또 이길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은 성도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서 24.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4-6.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린도전서 15:3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4.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8.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14:4,5.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요한계시록 22:11.
위에 인용한 성경절들은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신신학의 도덕적 패배주의 이론을 꼼작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신신학의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엉뚱한 가정 중 한가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A)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늘로 데려가심으로서 하늘 나라를 다시 죄로 오염되게 하실 것이다.
B)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중에서 하늘로 데려갈 수 있는 성도들을 당신 자신이 임의대로 만드실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6
로마서 10: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이 말씀은 예수께서 모든 것을 우리를 대신하여 다 이루셨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께 나아가면 모든 의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를 얻게 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며, 그 목적과 목표(goal)을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26-31.
참조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7,18.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로마서 1:5.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6:26,27.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7
바울은 예정설을 믿고 가르쳤나요?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택력을 무시한채 누구는 구원 받을 것이고, 누구는 아무리 잘 믿으려고 해도 멸망 당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예정론을 믿거나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미리 예정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예정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5,6. 이와 같은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한 것이지, 우리의 선택이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강제로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모든 것을 이미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지 예정이지요. 사도행전 2장 23절은 하나님의 미리 아신 대로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다는 뜻이지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바울은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 놓으신 것이라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는 초청이 되고 마는 것이며, 또한 불신자를 전도하는 일 조차 아무 의미도 없고 필요 없는 일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과 멸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도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싫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싫든 좋든 간에 이기적인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출생에 관한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죄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죄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영생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본성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의 당당한 권리입니다. 이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입니다. 이 선택은, 죄의 본성을 따라서 살다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품성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제공된 이 선택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 하셨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너희들의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가지 결정권을 줄게! 일단 네가 구원받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너는 결코 다시 멸망 당할 수 없단다. 너는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어. 네가 그리스도를 너희 구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너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다. 나중에 네가 생각을 바꾸어서 너의 결정을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너무 늦었단다. 아무리 네가 멸망 당하기를 원하고, 네가 과거에 하였던 회개를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너는 결코 영생을 피할 수 없단다. 네가 아무리 큰 반역을 일으키고 고의로 신성을 모독하고 악한 생애를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 받기로 한 너의 결정은 바뀔 수 없지. 나는 네가 예수를 너의 구주로 받아들인 후에 더는 어떤 선택도 하도록 허락할 수 없단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보장의 교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입니다. 한편 또 다른 그룹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우리가 마음을 자의로 바꿀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번의 번복할 수 없는 선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개인적 관계에 기초된 것으로 믿으며, 고의적인 불순종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질 때, 신자는 이제 참 신자가 아니며 구원에 대한 어떤 보장도 가질 수 없게 된다고 믿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유를 또 하나 읽어보면, 신자들에 대한 용서는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왕이 자기 종의 간청에 응하여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 종이 자기에게 약간의 빚을 진 동료 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나서 분노하여, 그가 전에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많은 빚을 취소하고,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놓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아무도 이 비유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지만, 그 용서가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함으로써, 이미 받은 용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33장 13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이 원칙은 18절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
영원한 구원의 비결은 구원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24:13)고 하셨습니다.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구원 받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무조건적인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 말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지만,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명확합니다. 이기지 못하는 자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 는 그들의 이름이 지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구절들은 똑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영생에 대한 보장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요한일서 2:24.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38.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요한복음 15:6.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8:51.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로마서11:22.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베드로후서 1:10.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로마서8:13.
버림 받을 위험이 있음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죄의 성향을 재갈먹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버림”이라는 말은 꽤 흥미로운 말입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아도키모스”로서 다른 곳에서도 버리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버리운(아도키모스) 자의 마음에 거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디도서1장16절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아도키모스)” 자들의 가증함과 순종치 아니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시 죄에 사로잡히도록 허용한다면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중생(거듭남)을 경험한 신자들이 파멸을 당할 가능성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9.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며, 구원을 함께 나누어 가졌던 교인들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1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신자가 “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을 당하게 될 수 있음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나는 영생에 대한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내 자녀는 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그들은 항상 나의 자녀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난 존재이다. 나의 자녀와 나의 관계 즉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다. 자녀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를 불문하고, 그는 항상 나의 자녀인 것이다.”
이 논리는 중대한 것 하나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다시 태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자녀가 병들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사들은 어머니들에게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해줍니다. 아이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주어야 할 권고와 경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아기가 잘 먹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셨습니까?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16)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더는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한 후 사단에게 순종할 때, 그는 이제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고 사단에게 속하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한일서 3:7,8.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서 떠나는 일에 대하여 특별한 경고를 거듭해서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은, 일단 한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이 계속되며, 아무도 그 구원을 번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을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신자들의 모임에서 뒤로 물러가도록 유혹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히 뒷걸음질에 대한 경고 중의 하나입니다. 이 편지서의 저자(나는 그가 바울이라 생각합니다만)는 이 경고의 대상에 자기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히브리서 10:26-29.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고의적으로 배도에 빠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확신을 버리고 멸망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왜 이러한 분명한 경고를 남겼겠습니까?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두려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중생을 경험했으나 후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성령을 버린 자들에 대해 이보다 더 잘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성경절이 경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 자기 자신을 두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이해하며 끝을 맺도록 합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따라가며 놓지 않는 이상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확정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이상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놓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