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4
문재인 前 대통령 SNS에서 스리랑카를 생각한다
7월 9일 유튜브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큰 저택 수영장에 사람들이 뛰어들어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핏 보면 특별한 게 없는 영상이다. 문제의 저택이 스리랑카 대통령의 관저라는 것, 그리고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가 ‘초대 받지 않은 손님들’이라는 점만 빼면 그랬다.
모든 것이 스마트폰으로 생중계되는 21세기, 우리는 어떤 민주국가의 대통령궁이 시위대에 점령당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은 결국 7월 13일 몰디브를 거쳐 싱가포르로 피신하더니, 7월 15일 e메일로 사의를 표명했다.
▲ 7월 13일(현지시간) 스리랑카 최대 도시 콜롬보의 대통령궁을 반정부 시위대가 활보하고 있다. / 콜롬보=AP 뉴시스
같은 날, 문재인 전 대통령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게시물을 올렸다. “현 정부 인사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라며 ‘지정학의 힘’(김동기 저, 아카넷)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지정학은 강대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정학적 위치는 우리에게 숙명”이라면서, 문재인은 “우리는 한반도의 지정학을 더 이상 덫이 아니라 힘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안을 연이어 언급한 이유가 있다. 사실,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시위대에 의한 대통령궁 무혈 점거와 대통령 사임이라는 돌발 사태가 벌어진 것은 ‘지정학의 힘’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스리랑카를 보면 알 수 있다. 문재인이 SNS에 올린 말마따나 “지정학적 상상력과 전략적 사고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지구적 ‘고통의 축제’
▲ 마힌다 라자팍사 전 스리랑카 대통령 겸 총리(왼쪽)가 2019년 8월 동생 고타바야가 대선에서 승리하자 동생과 함께 지지자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재선 대통령을 지낸 후 동생 밑에서 5월 9일까지 총리를 지낸 그는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남부 함반토타 일대의 개발을 위해 중국의 ‘일대일로’에 무리하게 참여해 국가 부도를 촉발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 콜롬보=AP 뉴시스
스리랑카는 어디에 있을까. 상당수 한국인은 세계 지도에서 스리랑카를 곧장 찾지 못할 것이다. 아주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특별히 친숙한 나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물방울처럼 생긴 섬, 그것이 스리랑카다.
수도는 콜롬보, 인구 2200만 명,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3815달러다. 극빈국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라고 보기도 어렵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홍차에 붙는 이름인 ‘실론티’가 아닐까 싶다.
스리랑카가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한 건 5월 무렵 국가 부도 사태를 겪으면서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경험한 일과 흡사하다. 과거의 한국은 신속히 IMF(국제통화기금)와 협상을 통해 경제 회복의 길을 찾았다. 이와 달리 현재의 스리랑카는 끝나지 않는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경제적 이유부터 살펴보자. 스리랑카는 그리 크지 않은 섬에 2200만 명이 사는 나라로,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유국도 아니기에 석유를 비롯한 연료 역시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의약품 역시 국내에서 생산하지 못한다. 외화벌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스리랑카 제조업이 그러한 외화 수요를 충당할 만큼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는 외화 수입의 적지 않은 부분을 관광업에 의존하는 취약한 산업 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스리랑카는 2020년 3월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이 사실상 사라진 세계 속에서,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2022년부터 서서히 여행객이 찾아오면서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2월 24일 러시아가 대대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더 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을 그들도 겪게 됐기 때문이다. 식량과 연료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안 그래도 외화를 소진하던 스리랑카로서는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스리랑카 중앙은행은 3월 스리랑카 루피화의 페그(연동)를 중단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미국 달러 대비 스리랑카 루피화의 가치는 45% 폭락했고, 외환보유고는 곧 바닥이 나고 말았다. 5월의 국가 부도 사태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연료가 없어 자동차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거리를 시위대가 채웠고, 결국 대통령궁이 점령당하는 사태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스리랑카만 겪는 일이 아니다. 엘살바도르, 가나, 이집트, 튀니지, 파키스탄 등도 유사한 이유로 큰 고통에 시달리는 중이다. 식량과 연료를 수입해야 하지만 돈이 없다. 국내 경제가 휘청거리는 탓에 안 그래도 달러 값이 비싸지는 지금 더욱 곤궁한 처지에 몰려 있다. 라오스는 당장 디폴트를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2년간의 코로나 터널을 지난 후 값싼 달러의 시대가 끝나면서 벌어지는 지구적 ‘고통의 축제’인 셈이다.
中 일대일로 사업 탓 부채 폭증
▲ 7월 9일 스리랑카 최대 도시 콜롬보의 대통령 관저에 진입한 반정부 시위대가 수영장에 들어가 있다. / 콜롬보=AP 뉴시스
그러나 스리랑카의 상황은 특별하다. 앞서 인용한 문재인의 말처럼, ‘지정학적 상상력’과 ‘전략적 사고’를 거쳐야 그 진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으로 인한 국가 부채 폭증, 그로 인한 스리랑카 내 반중 감정의 고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정치적 지배 구조 등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인도의 오른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지정학적 가치는 어떨까? 한국, 일본, 중국이라는 동아시아 3국의 처지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인구가 많은 제조업 국가다. 한국과 일본은 산유국이 아니며, 중국 국내의 석유 생산량은 자국 내 수요에도 미치지 못한다. 세 나라 모두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중동의 석유는 페르시아만에서 유조선에 실려,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을 거쳐, 주로 싱가포르가 있는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 마카오와 홍콩의 앞바다인 남중국해를 지나 한국에 도착한다.
미국이 전 세계 바다의 패권을 쥐고 있던 20세기까지 스리랑카는 특별한 지정학적 가치를 갖지 못했다. 스리랑카에 싱가포르처럼 거대한 항구가 들어서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말라카 해협의 가장 핵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로 언제나 큰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싱가포르와 달리, 여차하면 멀리 돌아서 가더라도 항로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 위치다.
일대일로 사업으로 인해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은 미국이 말라카 해협을 봉쇄해 석유 공급로를 차단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에 의해 차단되지 않는 바닷길을 확보해야 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중국은 파키스탄,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 인도양 주변 국가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면서 대규모 항만 건설을 추진해 나갔다.
인도양 한복판에 있는 스리랑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스리랑카는 지리상 인도와 교역이 가장 크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은 스리랑카의 동남부 지역인 함반토타를 주목했다. 함반토타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인도양의 한복판을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이 첫 번째요, 스리랑카 정계를 20년 넘게 지배해온 고타바야 가문의 근거지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최근 사임한 라자팍사의 전임자인 마힌다 전 대통령은 라자팍사의 친형이다. 한 가문에서 돌려가며 권력을 독점한 것이다. 라자팍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라닐 위크레메싱헤 총리는 고타바야 가문의 영향권 내의 인물로 분류되고 있으니, 그들의 정치적 힘은 여전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대일로는 중국교통건설(CCCC)에서 주도하고 있다. 그 자회사인 중국항만엔지니어링(CHEC)이 함반토타항 개발 사업의 주체다. 인구 60만 명에 지나지 않는 함반토타에 거대한 항구를 짓겠다며 나랏돈으로 큰 공사판을 벌였다. 중국은 돈을 빌려주고는 그 빚을 갚지 못하자 2017년부터 함반토타항에 99년의 사용권을 설정했다.
애초에 스리랑카 처지에서는 필요하지도 않았던 항구를 짓고, 그 항구 건설비용을 스리랑카에 빚으로 떠안긴 후, 빚을 갚지 못한다며 항구를 중국이 99년간 쓰겠다고 하는 상황. 그 항구가 지어진 곳은 올해 7월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 그리고 그의 형인 전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대통령궁에 불을 지르는 대신 수영을 하고 파티를 벌인 것은, 이런 맥락을 놓고 보면 차라리 ‘평화 시위’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文이 말한 ‘지정학적 상상력’
2017년 12월 15일, 중국을 방문 중이던 한국 대통령 문재인은 베이징대에서 현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그는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에 비유하며, “중국몽이 중국만의 꿈이 아니라 아시아 모두, 나아가서는 전 인류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란다”면서 “한국도 작은 나라이지만 책임 있는 중견국가로서 그 꿈에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몽은 우리의 꿈이 아니었다. 스리랑카라는 극단적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중국의 대외 확장 정책은 미국과의 군사적 대립을 전제로, 오직 중국에 필요한 것만을, 중국의 이익을 철저히 보호하는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스리랑카는 자국에 필요하지도 않은 거대 인프라 사업을 벌이다가 빚더미에 앉았다. 그런 어리석은 정책을 추진한 정치 집단이, 중국의 후원을 받아 막강한 자금력을 통해 형제끼리 대통령 자리를 돌려가며 누렸다. 스리랑카의 정부 전복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문재인이 말한 ‘지정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자.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때로는 지나치리만치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의 통념을 깨는 새로운 상상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처럼, 한번쯤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것처럼, 일종의 편향성을 지니고 바라본다는 소리다.
문재인이 추천한 ‘지정학의 힘’의 결론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중국이 G2의 위치를 확고히 하지는 못했으나, 미국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 남북 간 평화 체제를 갖추어 주한미군의 주둔 이유를 없애고 다극화된 국제 질서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상은 자유다. 하지만 성인이라면 장밋빛 몽상이나 공상과는 다른, 냉철한 현실을 기반으로 해 나쁜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그런 ‘무서운 상상’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중국몽은 그리 좋은 꿈이 아니었다. 엄청난 빚더미에 나라가 깔리고 새로 지은 항구를 99년씩 중국에 사실상 빼앗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악몽에 더 가깝다. 국제 정치와 경제는 잔인한 분야다. 스리랑카 사태를 보며 우리는 ‘지정학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노정태 /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신동아 2022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