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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다람살라와 부처님 6대 성지 순례 11일
然海慈 李慈玉
- 다람살라의 남걀사원, 아그라성, 타즈마할,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 사위성, 쿠시나가르의 다비장, 대반열반사, 바이샬리의 사리탑, 대림정사, 나란다대학, 영축산 죽림정사, 보드가야의 대각사 보리수, 대탑, 사르나트의 녹야원,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 순례 -
기간 : 2022. 12. 10(토) ~ 12. 20(화)< 9박 11일>
[언저리 이야기]
하늘길 열린 후 두 번째 여행이다. 엄격히 말하면 인도 성지 순례의 길을 떠나는 거다.
나는 떠난다, 분명 가고 있다. 살아있는 자들은 아픔을 딛고 움직인다. 어딘가로 부단히 떠난다.
17년 전 뜻밖에 찾아온 여행의 기회가 인도로 향한 첫걸음이었다. 기대가 컸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팀이 주관한 행사로 교수와 그 가족이 구성원인데, 결원의 자리에 교수님 마나님의 지인인 우리 두 명의 중등교사가 합류했다. 그건 행운이었고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한국인 못지않게 말을 잘하고 잘생긴 키 큰 시크교도 ‘로만 씽’이 우리의 가이드였다. 유창한 한국어로 어찌나 안내를 잘하던지 가는 곳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어느새 우리와 합류하여 그의 설명을 경청하곤 했다. 그렇게 잘해도 그가 안내를 마칠 때마다 박물관 학예사가 부연설명하며 우리를 고양시켰다. 참 행운의 여행조였다.
어언 세월이 흐르고 세상도 많이 바뀌어갔다. 대학 시절 일찍이 박목월님의 3차 추천 완료로 시인이 된 나의 벗, 중등교장으로 은퇴한 나의 벗이 10년 세월 투병하다가 몇 달 전 이승을 하직하고, 천생연분인 그 부군 교수님까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시를 사랑하고 시를 노래하던 지인을, 지음을 잃은 데다가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던 부군까지 뒤이어 떠남이 믿기지 않아서 나는 망연자실, 현실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천직으로 살아온 교단을 정년으로 마무리하면서 출간했던 나의 문집에 써준 그녀의 머리말(권두시)을 보며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친구’라고 칭송했던 그녀가 떠난 세상은 너무나 황량했다.
그럴 때에 인도여행이란 제안이 들어왔고 머뭇거림 없이 떠남을 결정했다. 17년 전 그녀와 함께했던 그 길을 더듬어 가보는 것, 어쩌면 시절 인연이 도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길거리의 ‘거지도 성자’라는 인도로 가는 길에 다시 서보고 싶어졌다. 나의 근원적 물음에 답을 얻어올지는 모르겠지만……
[1일차 12월 10일 토요일] 다시 인도로 떠남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주최하는 인도성지 순례, 30여 명의 9박 11일 일정에 동참하게 되었다. 인천공항 집합장소에서 만나게 된 개발원의 김회장님, 김교수님, 원법우님 등 아는 얼굴들이 무척 반갑다.
달라이라마 존자님 친견과 불교성지 6곳을 찾아가는 뜻깊은 여정에 일행의 기대가 크다. 좀 늦게 도착한 부산팀 4명 중에 우리를 이끌고 지도해주실 80이 넘으신 혜총스님이 계시다. 아담한 체구에 검고 큰 비닐 뭉치를 두 개나 들고 오셨다. 2인 1조로 미역귀 봉지를 하나씩 안긴다. 여행 중 차멀미 방지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거라며 부산에서부터 공수해오신 열성이 놀랍다.
경주귀빈여행사 양사장님도 녹색 천 주머니를 하나씩 안겨준다. 장도에 잘 다녀오라며 과자 선물을 준 것이다. 그리고 업무상 동행 못하는 여성개발원 조국장님도 이른 아침 공항에 나와 기념사진을 찍고 우릴 배웅해 주었다. 모두 고마운 인연들이다.
11시 40분 이륙, 창가좌석이어서 반갑다. 게다가 대학 시절 불교 활동을 함께한, 이번 여행 주최기관의 원장인 선옥법우님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런데 차창으로 내다뵈는 하늘이 감청색이어서 초장부터 어두운 하늘을 날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눈부심을 막기 위해 전처럼 덧창문을 내리는 대신 요즘은 창문을 색조로 처리해 놓았다. 13시 40분 제공되는 점심식사 후 화장실 앞에 모인 일행 몇 명은 모처럼 간단한 운동으로 다리를 풀었다.
자리로 돌아와도 마땅히 영화도 볼 수 없고 비행 노선 보는 게 고작이었다. 얼마 후 밖을 내다보니 네팔 카투만두 설산이 하늘을 가르며 가로로 펼쳐져 있는 원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점심 다섯 시간 후 간식으로 샌드위치를 받아든다.
19시 45분(현지시간 16시 15분, 시차 -3시간 반) 뉴델리 인디라간디 국제공항에 착륙한다. 인산인해를 이룬다. 길고 긴 입국 수속의 줄, 지문인식이 잘 안 되어 오래 걸리는데 휴대품이나 몸수색은 더욱 더디다. 한 시간이 더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보딩, 탑승하여 이륙한 시간은 21시 25분, 암리차르에 착륙한 시간은 22시 10분경이다. 장장 12시간의 비행이었다. 국내선인데도 한 시간에 걸친 수속 후 호텔로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현지가이드의 간단한 안내 후, 이번 순례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혜총스님의 예불이 곧바로 이어진다. 인도 땅을 밟은 첫 순간부터 시작된 혜총스님의 기도는 이 순례 기간 동안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단소장님의 안내 말씀이 있었고 30여 분 후 호텔에 도착한다. 늦은 밤, 아니 이른 새벽에 HOLIDAY INN HOTEL에 첫 여장을 푼다.
[2일차 12월 11일 일요일] 시크교의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거쳐 다람살라로
7시 반쯤 호텔에서 내다보니 어슴프레한 건물들 위로 인도의 첫 태양이 떠오른다. 호텔 조식 후 밖으로 나가보니 빛바랜 가로등이 켜져 있고, 공원인지 울창한 숲 위로 하얀 반달이 걸려 있다.
8시, 오늘의 첫 여정인 시크교의 황금사원으로 가기 위해 릭샤에 분승한다.
< 시크교의 성지 암리차르 황금사원 >
☞ 암리차르는 인도 펀자브주의 도시로, 인구는 1,194,740명, 높이는 해발 218m이다. 찬디가르에서 북서쪽으로 217km,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동쪽으로 3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시크교의 4대 구루(Guru, 지도자)인 람 다스(Ram Das)가 1577년에 건설했으며, 1604년 시크교 사원인 황금사원이 들어서면서 시크교의 성지로 여겨졌다.
시크교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여성차별 철폐,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만 취하려는 진보적인 종교운동으로, 전 세계의 신흥종교가 늘 그랬듯 시크교는 무굴 제국 치하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1947년에 종교로 갈라질 때 파키스탄 땅에 살던 수천만 명의 시크교도가 인도 쪽으로 넘어와 이 도시에 정착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919년 이곳에서 벌어진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인 암리차르 학살이 벌어졌으며, 유혈극으로 인해 황금사원의 탑이 총상을 입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유감을 표한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영국에서 받은 기사 작위를 반납하기도 했다. 사원으로 가는 진입로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백색의 구조물이 서 있다. 주요 산업은 관광업과 농업, 방직업이라 한다.
고층건물이며 상가 등 지나는 가도가 꽤 복잡하다. 릭샤에서 내려 걸어가는 과정에도 3~4층의 주상 복합건물이 많이 보이고, 층층의 난간엔 비둘기들이 터를 잡고 있다. 많은 상점, 빼곡이 쌓아놓은 상품들, 행인들이 뒤섞여 정신이 없다. 전통샤리를 걸친 여인들과 터번을 쓴 사나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터번의 빛깔이 주황색, 청색, 보라색 등 곱고 다양하다는 점이다.
좌우 차선도 중앙선도 없이 행인의 물결 따라 흘러가야 한다. 그런 와중에도 양쪽의 펼쳐진 상점들을 스캔하며 걸어야 하니 서로 부딪치기가 일수다.
길가 큰 건물들 중에는 시크교 사원이 많다고 한다. 화려하게 꾸며진 기도처도 있다.
황금사원은 2층 정도의 하얀 건물이 가로로 길게 늘어져 있고, 중앙의 시계탑 머리부분의 돔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그 앞 너른 광장엔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 찍느라 분주하다. 우리 일행도 예외일 수는 없다. 게다가 현지인?들과 찍어대느라 많은 시간이 지체된다. 이 여행을 이끌어가는 로얄오딧세이투어 단소장님의 마음이 바쁜 듯하다. 여행지마다 사진 찍느라 많은 시간이 지체되고, 한편에선 기다려야 하고 늘상 벌어지는 일이다. 이번 여행자들, 아니 순례자들은 얼마나 많이 찍어댈는지 모르겠다.
황금사원 견학을 마치고 시내를 벗어난 대형버스는 National highway(인도에선 국도)에 진입, 200여㎞ 떨어진 다람살라를 향해 달린다.
‘성지 순례자의 자세’에 대한 단소장님의 한 말씀이 이어진다.
멀고 가까움을 말하지 말라. 2. 편함, 불편함을 말하지 말라. 3. 돈 얘기 하지 말라. 듣고 보니 시사하는 바가 커서 여기에 옮겨본다.
인도엔 연꽃이나 공작새, 수행나무(주황색), 반얀트리 등이 많다 한다. 파란 논이 무한정 펼쳐진 평야에 나무가 드물다. 논 가장자리로 더러더러 서 있을 뿐. 가도에 보이는 노란 꽃이 겨자라 한다. 구하바가 한창 수확중이고, 인도는 곡물을 수출한단다. 펀잡지방엔 시크교도가 많으며, 그들은 단칼에 죽인 것을 식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온갖 정성 다해 올리는 혜총스님의 열정적인 기도가 12시 40분에 끝난다.
삼귀의를 시작으로 오분향례, 천수경, 반야심경 독송, 청법가, 순례단 개개인을 위한 기도 발원 그리고 사홍서원, 산회가까지 버스 안에서의 긴 기도였다. 참으로 열성적인 기도, 국내 순례시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도였다.
국도를 벗어나 폴폴 먼지 나는 시골길로 들어선다. 13시가 훨씬 넘은 시간, 화장실도 가야하고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다. 길가 현지음식점을 살짝이 엿본다. 한쪽에선 난을 연신 구워대고, 한쪽에선 거뭇한 양철 배식판에 밥과 막 구워낸 난, 그리고 카레를 넘치듯 부어 손님상에 낸다.
휴식을 마치고 탑승한 우리는 14시 좀 넘어 샌드위치 도시락으로 차 안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동행한 현지조리사가 아침에 호텔에서 준비한 거라 한다.
암리차르에서 다람살라까지는 210㎞, 5~6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15시 반 파키스탄 접경지이며 고지의 도시 다람살라에 하차하기까지는 계속 설산과 시골 마을을 지난다. 허름한 시골 마을들 위로 푸른 산, 그 위로 하얀 설산이 파노라마를 이룬다. 히말라야산맥이다.
6시쯤 작은 봉고에 분승하여 산동네로 오르기 시작한다. 조교수님과 제자들 그룹이 탄 봉고는 노선을 달리한다. 굽이굽이 곡예하듯 산속으로 오르면서 공기가 신선해지고, 간간이 시야에 다가드는 산동네가 깨끗하고 예쁘다.
6시 반 PRIDE SURYA 호텔 도착, 좁은 도로 옆 이름답게 큰 규모에 호기심이 생겨 입구로 내려가 보니 비탈을 이용, 특이한 구조로 지어진 건물이다. 호텔 로비에서 내다뵈는 경치가 일품이다. 고도 높이 올라온 데다가 창가의 제라늄 꽃들 너머로 산동네 마을이 눈높이로 내다뵈며 신선함을 안겨준다. 일행은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다.
17시 좀 넘어서 ‘카닥’을 가져온 현지스님을 뵙고, 이어 방 배정을 받는다.
계획되었던 ‘여름궁전(노블링카)’-원래는 라싸에 있는 거지만- 순례를 못 하는 관계로 시간 여유가 생겨 호텔 아래 관광객을 위해 늘어선 가게들 구경을 나선다. 성남시에서 온 약사님 일행은 늦게 나온 나를 만나 ‘가지 않은 길’을 더 돌아보기로 한다. 그 길에서 싱잉볼(Singing Bowl)을 만났고, 너무도 반색을 하며 뜻있는 쇼핑 시간을 가졌다. 온 우주를 돌아 블랙홀로 빨려들 것만 같은 그 신비한 소리에 나는 짐짓 공치사를 해본다. 나를 만났기에 이 좋은 소리를 얻지 않았느냐고…… 그리고는 멋쩍게 웃었다.
호텔로 돌아온 일행 앞에 태산처럼 쌓인 도톰하고 칼라풀한 목도리, 혜총스님의 선물이라며 하나씩 고르란다. 빛깔이 고와서 우물쭈물하는 내게 고운 색을 하라고 젊은보살들이 골라준다. 베푸는 스님도, 골라주는 보살도 무지 고맙다.
내일 존자님 알현 시 사용할 하이얀 카타도 받아들었다.
현지인 조리사에 의한 한식을 곁들인 호텔식의 저녁식사, 반갑고 맛있다.
카톡 연결이 되어 서울에 모처럼 문자 안부를 전한다. 내일이면 그분을 뵙는다는 기대와 흥분으로 평소 안 하던 짓을 해봤다. 집을 떠나면 철저히 현지 적응, 집을 잊고 지내는 지침을 깨고 말이다.
< 다람살라(Dharamshala) >
☞ 인도의 북서부, 히마찰프라데시 주 서부에 있는 마을로, 1959년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거부하며 망명한 달라이라마가 세운 산악도시로 티베트 망명 정부가 들어서 있다. 히말라야 산맥 낮은 경사면인 캉그라 계곡에 있으며, 경치 좋은 보양지로 탄산수가 솟아나고, 가까운 곳에서는 석판이 채굴된다. 면적 29㎢, 인구 30,764(2020 추계)
< 다람살라와 맥레오드 간즈 >
☞ 맥레오드 간즈는 다람살라 북쪽에 있는 마을, 중국의 강제 합병으로 인해 나라를 잃은 티베트 망명 정부와 티베트 난민들의 삶의 터전인 애틋한 땅으로 히말라야의 작은 티베트로 불리며,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 14세의 거처가 있고, 아랫마을인 다람살라는 인도인들의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이다.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면 만날 수 있는 해발고도 1,750m의 산간 마을 맥레오드 간즈의 첫인상은 인도 그 어느 곳보다 평온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맥레오드 간즈는 군사 기지와 여름 휴가지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1905년 강도 7.8의 대지진으로 1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라마가 버려진 황무지에 티베트 임시 정부를 세움으로써 맥레오드 간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고향을 떠나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온 난민들이 정착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현재는 수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나라를 되찾을 그날을 위해 자국의 문화를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 달라이라마 존자 > 89세의 노구이며 본명이 텐진갸초인 달라이라마 14세는 티베트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살아있는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여겨지며, 티베트인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인류를 위해, 모든 존재를 위해 무한한 연민심, 안녕과 평화, 행복을 기원하며, 늘 보리심과 공성의 수행을 실천하시는 분이다.
‘달라이’는 ‘바다같은, 위대한’의 의미이고, ‘라마’는 ‘지혜, 스승’을 뜻한다.
[3일차 12월 12일 월요일] 달라이라마 존자님과의 꿈 같은 만남
역사에 남을 의미 깊은 날의 시작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5시 기상, 6시 이른 조식인데도 쌀밥에 미역국, 김, 장아찌 등 한국 음식이 보태어져 입맛을 돋운다. 게다가 달라이라마 존자님 만나러 간다는 설렘이 일행의 기분을 고조시키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상큼한 산동네를 비추는 여명을 보았다.
어제 조교수님과 팔람푸르 소재 동규갓찰링 비구니 사원에 갔던 일행들이 이른 아침 합류한다. 혜총스님을 모시고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친견하기 위해 존자님의 궁전사원인 남걀사원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들이 한결 가벼우면서도 진중해 보인다.
7시 출발, 오롯한 마음으로 묵언하듯 걸음을 내딛는다.
철저한 보안상태 유지에 따라 휴대했던 가방, 모자, 핸드폰 모든 걸 내려놓고 어제 주신 카닥만을 목에 걸고 한 발 한 발 존자님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은 성스러움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각처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로 줄이 길었는데, 오랜 기다림 끝에 존자님과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가슴이 벅차온다. 그러나 가장 귀한 시간을 오롯하게 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린다. 단체선물로 마련된 봉지 하나를 들고 있던 터라 측근의 스님에게 전달되는 동시에 자유로워진 손을 오롯이 하여 내미는 그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한없이 고개를 낮추었다. 나도 모르게 그냥 그리되었다. 화면으로만 뵙던 그 온후한 미소가 내 앞에 머물며, 영혼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분 특유의 눈맞춤에서 진중함이 묻어난다. 오래 머물 수 없는 순간을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며 벅찬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쪽으로 물러나 있다가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존자님 주변에 도열하여 앉았다. 그 환희로운 순간은 맑은 웃음으로 피어나 영원한 사진 화면으로 남았다.
나중에 보내온 개인 사진을 보니 눈가주름 자글자글한 미소로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영상으로 남아있어 나를 다시 설레게 했다.
존자님 친견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햇살 번진 다람살라 산속을 보니 양지바른 곳에 설산을 이고 있는 마을들이 마냥 평화로워 보였다.
어느 현지스님의 안내로 남걀사원 법당과 옆의 전각을 돌아보았다. 존자님 설법하는 자리는 황금색 천으로 씌워놓았다. 이어 마니차를 굴리며 동자승을 교육하는 학교로 향했다. 가는 길의 전망이 아름다웠다. 전나무를 닮은 침엽수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고산준령과 그 위 병풍처럼 둘러친 설경이 파노라마되어 이어진다. 손님을 맞아 자랑하듯 나무 사이를 자재로이 넘나들며 노는 원숭이 가족도 만나 가던 길을 멈춰 그들의 재롱을 감상하기도 했다.
교실마다 자색 승복 차림의 어린 사문들은 승려이기 전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묻어났다.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는 이 어린 학생들은 천방지축 순진해 보였다.
10시 반 호텔로 돌아와 이른 점심식사 후 출발, 파탄콧역(110㎞, 4시간 소요)으로 이동하기 위해 작은 봉고 세 대에 분승하여 다람살라로 내려간다. 산동네 집들이 역시 깔끔한 느낌이다. 푸른 산을 수놓으며 간간이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다람살라에 이르러 전용버스로 바꿔타고 여전히 설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산들을 보며 달린다.
14시 스님의 긴 기도가 끝나면서 주유소에 하차한다. 약간의 휴식시간에 주변 산책을 하고 요가를 따라 한다. 연일 이어지는 장거리 이동에 이렇게라도 몸을 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승차 후 스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길고 정성스런 기도가 시작된다.
16시 동행 조리사가 호텔에서 싸 온 김밥을 배식받는다. 동글동글 자잘한 김밥이 보기보다 맛있다. 배고플 때도 되긴 했지만……
달리다 보니 막다른 길에 이른다. 현지 교통경찰의 도움으로 경적을 울리며 시장길을 달려 20분 후 파탄콧 기차역에 당도한다. 가방은 도우미들에게 맡겨지고 일행은 맨몸으로 탑승한다. 이 침대열차는 객실 한 칸이 1, 2층 4인실, 객실 밖은 복도, 좁은 복도 옆으로 즉 기차 한 측면으론 1, 2층 침대를 하나씩 배치한 구조다. 러시아 횡단열차나 몽골-바이칼 열차보다 더 옹색하고 불편하다. 17시쯤 출발한다. 운신도 어려운 좁은 공간에서 물 끓이랴 라면, 커피 대령하랴 애쓰신 분들이 고맙기만 하다.
갑갑한 자리지만 반상회 하듯 이웃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고, 차를 마시니 그런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좁은 차량의 복도를 누비며 파는 짜이도 사서 마신다. 하루의 피로가 밀려오고 내일을 도모해야 하므로 각기 1, 2층 제자리를 찾아 눕는다.
야간열차에 대해 가졌던 꿈은 꿈속에서나 누려볼까나?
2층에 오른 나는 내다볼 창도 없어 포기하고 웅숭그린 채 잠을 청해본다.
[4일차 12월 13일 화요일] 다시 만난 아그라 성, 타즈마할
자다깨다 하는 사이 밖이 좀 소란스럽다. 6시 반쯤 되었는데 내려와 보니 제법 큰 역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델리역이다. 짜이를 마시던 스님이 한 모금 남겨주신다. 사양하다가 정으로 받아마신다.
한 시간 후 한식 도시락의 아침식사가 배달된다. 흐린 창으로 일출을 보았다.
차창 밖 풍경이 흐릿하게 펼쳐진다. 노오란 유채밭과 이름 모를 꽃들, 바람결 따라 눕는 길가의 억새 풀, 푸른 들, 간간이 나타나는 마을과 들녘 소들의 평화로움
일행과의 대화에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
그렇게 얼마를 더 달렸을까. 주변이 소란스럽다 했더니 하차준비를 시킨다. 가방들은 문쪽으로 몰아놓고 몸만 내리란다.
10시 툰드라역에 도착, 서둘러 하차한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빨간 옷의 사나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내달린다. 이 무슨 진풍경인가? 놀라 쳐다보는 일행들 앞에 놓인 가방쪽으로 집합하더니 하나둘씩 머리에 이고 운반하기 시작한다. 역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대형버스로 걸어간 우리는 각자의 캐리어를 확인하고 탑승한다.
하차 50분 후 타게 된 벤츠버스로 아그라로 이동하는 데는 한 40분쯤 걸린단다.
도시 외곽으로 나오며 거리풍경, 시장, 길가의 작은 가게, 서민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고속도로에 오르니 중앙분리대의 정원에 부겐벨리아가 가득하다.
중도에 합류한 일행을 소개한다. 여행사 관계자들 도움이 있었다지만 이 낯선 인도땅에 홀로 찾아오다니…… 대단한 열성과 용기가 놀랍기만 하다.
11시 스님의 정성 어린 기도가 오늘도 이어진다.
얼마 후 호텔 도착, 점심식사, 음식이 짜지 않고 담백하여 내겐 안성맞춤이다.
중식 후 ‘천국의 정원’이라 불리는 아그라의 ‘붉은성‘ 아그라성으로 간다. 르네상스 황금시대를 연 무굴제국의 위대한 걸작, 아그라성과 타즈마할 견학이 오후 일정의 하이라이트다.
< 아그라성 >
☞ 아그라 요새는 인도 아그라에 위치한 요새로 타즈마할과는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마주보고 있다. 붉은 사암의 성채와 내부의 하얀 대리석 건물이 어우러져 웅장함과 정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다.
16세기말 무굴제국의 3대왕인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해서 그의 손자인 샤 자한이 타즈마할을 건축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 한다.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샤 자한은 야무나 강 너머의 타즈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둔다.
< 타즈마할 >
☞ 잔잔한 야무나 강을 따라 은은한 빛을 발하는 하얀 대리석 무덤의 주인은 ‘황궁의 보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뭄타즈 마할이다. 샤 자한 왕의 외사촌 동생이자 세 번째 부인으로 15번째 아이 를 낳으려다 세상을 떠난 그녀를 추모하여 22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무덤이다.
입구까지는 버스로 가서 전기 뱃터리차로 갈아타고 타즈마할 앞으로 간다.
입구가 적사암으로 만들어져 온통 붉은색을 띤 성 앞엔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높다란 아치형의 문 앞으로 다가갈수록 웅혼한 느낌이 든다. 붉은 고성의 푸른 잔디밭을 배경으로 전통샤리를 걸친 여인들 모습이 우아함을 더한다. 너른 잔디밭 건너 연꽃잎 문양이 모티브가 되었을 접견실, 그 아름다움에 취한 일행은 폼을 잡거나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다람쥐도 피하지 않고 한몫 거든다.
건물 내부의 정교한 문양과 섬세한 조각도 아름답지만, 아치형 기둥 사이로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타즈마할의 정경이 눈물겹다. 유폐된 채 사랑하는 아내가 잠들어있는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샤 자한의 심경이 전이돼 오는 느낌이다.
이어 타즈마할로 이동한다. 이곳 역시 인산인해를 이룬다. 문을 들어서니 긴 수로의 끝에 그림자 드리우며 단아하게 서 있는 ‘타즈마할’ 전경이 가슴 설레게 한다. 얼마만인가. 다시 만나는 이 반가움! 그러나 뒤이어오는 아픔의 자락,
수로를 따라 솔직히 인파를 따라 걸었다. 다가갈수록 높아지고 빛나는 웅혼함! 사방의 높은 첨탑과 건물 위 돔 주변으로 새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가까이 갈수록 석양에 물든 대리석의 빛깔, 아치형 문과 벽의 섬세한 무늬가 살아난다. 건물 뒤편으론 여린 석양에 젖은 저녁 강이 흐르고…… 매임 없이 거닐어보는 이 자유시간의 여유가 고맙다.
타즈마할! 이를 보지 않고 인도를 떠난 사람은 반드시 되돌아오게 된다는 설이 있듯이 타즈마할은 인도 여행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 같은 존재다. 그러나 죽은 왕비를 위한 화려한 무덤 조성을 위해 22년간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와 희생은 어찌하며, 이보다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까 염려해 공사 참여자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하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어리석음을 대변하는 거 같아 돌아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느 날 흘러내린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맑고
투명하게 빛나리라
그것이 타즈마할이라네
오 황제여, 그대는 타즈마할의 아름다움으로
타즈마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8시 40분 호텔로 돌아와 그간 보드가야에 가져다 주려고 계속 캐리어에 끌고 다니던 수건 등 물품을 제출하니 가방이 넓어지고 마음도 홀가분하다. 일행은 참새 방앗간 찾듯 오늘도 호텔 안 상점을 답사한다.
[5일차 12월 14일 수요일] 럭나우를 거쳐 금강경 무대인 쉬라바스티로
7시에 출발한다. 넓은 농지가 펼쳐진 들녘 저 너머로 붉은 태양이 떠올라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한다. 오늘도 530㎞, 갈 길이 멀다. 오전 럭나우로 이동하는 데는 4시간이 걸린다. 20년 전부터 부처님 성지 가는 길에 고속도로 또는 고속철을 계획하고 있다 한다.
유채인지 겨자인지 모를 온통 노오란 들녘이 넓게 펼쳐진다. 물가 바람에 흐느끼는 억새풀이 정겹고, 무한정 펼쳐진 평평한 들 가운데 다문다문 서 있는 정자나무 같이 원형을 그리고 있는 살진 나무들이 정겹고 반갑다. 간간이 마을 집들이 나타나고, 굴뚝 높이 솟은 벽돌공장도 푸른 들녘 사이에서 홀로 붉다.
고속도로를 타고 4시간 후 럭나우에 도착한다. 점심식사 후 4차선 국도, 다시 2차선 국도를 타고, 4시간 걸려 쉬라바스티로 이동한다.
쉬라바스티(Sravasti)는 부처님의 중생교화의 중심이며 금강경의 무대다. 45년 설법 기간 중 25년을 머무신 곳이다. 기원정사를 보시한 수닷다 장자의 집터, 손가락 목걸이로 유명한 앙굴리마라가 만년에 은거했던 토굴터, 이교도들과 기적 대결을 벌였던 이야기 등 숱한 설화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가 기원 전 5000년의 역사를 지녔듯 인도도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지닌다. 작은 나라 다수로 이루어진 마가다 16국 시대가 있었으며, 이때 자유사상가들이 많이 태동했다. 신정(제사장) 제도, 신분 차이를 인정하던 시기에 부처님은 신분 사회 대개혁을 주창했다. 당시로선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풍요로운 갠지즈와 인더스강을 끼고 정착한 인도는 문화적으로 성숙, 거대한 왕국이 된다. 마가다 16국 시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이 이어진 후, 챤드라 굽타에 의해 기원전 4세기경, 마우리아 왕조가 개창된다. 마우리아의 3대 황제인 아쇼카 대왕은 전륜성왕으로도 불린다. 문란하고 이설 요설이 횡횡하던 아쇼카 대왕 시절, 아쇼카 대왕은 황도 파탈리푸트라 아육원사에서 기존의 경장(니까야), 율장(비나야) 외에 논장(아비달마)를 결집하여 비로소 3장 체계를 갖추었으며, 3결집을 완성했다. 성문제자가 사라지고 “~~카더라”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률론 3장을 정리했으며, 마우리아 왕조가 망하고 아프카니스탄(당시명 박트리아)에서 출발한 쿠샨왕조가 이어진다.
서기 전후 쿠샨왕조에서 굽타왕조로 바뀌면서 불교가 어려워져 대중에서 멀어진다.
해가 차면 기울고 달도 차면 사라지듯, 인도불교의 쇠퇴라는 내부적 문제와 회교도의 침입으로 기존 문화가 파괴되었으며, 그리하여 수백년간 축적된 학문적 결과물들(경전 및 논문, 여행기-왕오천축국전 등-)을 들고 일부는 스리랑카로, 또 일부는 히말라야 의 깊은 골짜기 수도원으로, 그리고 일부는 중국 서역의 돈황으로까지 사방 흩어진다.
힌두와 회교는 10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영국의 지배 몇백 년 후 인도는 독립했으며, 2000년의 역사가 공존하는 인도의 변화된 모습을 본다.
광고 중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걷는, 전통샤리 차림 여인의 광주리에 IBM기기가 들어있다. 인도의 발전을 시사한다.
[혜총스님 말씀] 우리가 가는 길은 관광이 아니고 여행이 아니고 수행 정진의 길이다. ‘正見’이 죽을 자리다. 일행이 존자님에게서 받은 붉은 실은 기도와 주력의 힘이 들어간 것, 약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광명은 오색이다. 기복이 기원이다. 낮은 데로의 보시는 높은 데로 간다. 무한대로 주는 것(보시)은 높은 데로 간다. 무한대로 주는 보시는 땅이다. 지수화풍,
불교는 청정이다,
“이상하다.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지녔는데, 망상으로 집착하기에 증득하지 못하는구나.”
[혜총스님, 태국 파타야의 제비 일화 소개]
“나는 기를 쓰고 비행기 타고 왔지만 너는 먹이 먹고 날아왔구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몇 번이고 출구 찾아 유리창을 헤매다가 낙하하는 작은 파리를 보며 스님의 말씀을 새겨본다.
유마거사가 사는 곳, 바이샬리를 가장 사랑한 부처님, 떠나면서 자꾸 뒤돌아보셨다 한다. 두 번 다시 올 수 없음을 알고.
귀소본능일까? 고향을 찾아가시다가 결국 쿠시나가라에 머물러 열반에 드신다.
푸른 들녘과 유채밭 노란 물결의 조화로움, 부지런한 농부와 따라 나온 소와 개들,
바람결에 샤리를 날리며 간간이 달려가는 자전거들, 평화로운 전원풍경이다.
가도가도 주유소나 휴게소는 보이지 않고 9시 20분쯤 노상방뇨?의 시간이 주어진다. 망고나무가 있는 곳, 그러나 산이 없다. 끝없는 평원, 푸른 경작지, 밭에 앉아 무언가 거두고 있는 농부와 아낙들
인도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이며, 한국 제품을 많이 사용한단다. 인도로부터 영향받은 문화도 많다고 한다.
10시쯤 휴식시간. 스님께서 신심 깊다 칭찬해 주시니 그렇지 아니함에도 감격한다.
고속 통행료가 비싸서 화물차는 일반도로를 이용한단다.
인도는 9×9단 말고 10×9단을 외운다고 한다.
14억 인구에 550명이 국회의원(상하원)이란다. 정치수준은 마피아 상상 초월?
7년 전 화폐개혁을 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11시 반 럭나우 시에 도착, 이어 식당행, 다양한 음식과 숭늉이 반갑다.
점심 공양 후 금강경의 무대인 쉬라바스티로 이동한다.
못 사는 동네인 비하르주에 부처님이 가장 오래 주석하셨다 한다. 설법시기를 방등시, 녹원시, 반야시(대승경전 왕성한 때), 열반시로 천태 지의대사가 구분했다.
‘쉬라바스티’는 서울이라는 뜻→ 스라바리→ ‘서라벌’로 변음되지 않았나 추측한다.
부처님 당시 동안거는 왕사성 죽림정사에서, 하안거는 쉬라바스티 기원정사에서 했는데, 워낙 동안거 하안거 장소의 거리가 멀어 그 중간쯤인 바이샬리 대림정사에서 중간 안거를 하셨다.
시가지를 벗어나니 들이 전개된다. 푸름이 아니라 가을걷이 끝난 듯 황량한 들이다. 길가 큰 가로수들은 뽀얗게 마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래도 간간이 부겐벨리아 꽃이 햇살 아래 곱다.
이슬람 복색의 여인들이 더러 보인다. 짐을 많이 실어 날랐는지 등뼈가 굴곡진 늙고 마른 소들이 한가롭다.
15시 가까이 휴게소에 내려 초벌구이 전통방식의 잔에 짜이를 마신다. 경직된 몸을 푸는 가벼운 운동을 한다. 장거리 이동을 많이 하는 이번 여정에서 나는 종종 운동을 하자고 제안한다.
시골 읍내를 지나며 만나는 풍경들, 물가 허름한 원시가옥과 가게들, 많은 가축들, 목공의 작업소리도 들려오는데, 목재는 인도에서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인 망고나무인 것 같다.
이슬람 교도들의 장례행렬이 지나간다. 어깨 위로 멘 들것 같은 곳에 관을 사용하지 않은 시신을 놓고 천으로 덮은 채 조용히 흐르듯 가고 있다.
바나나 농장과 체육공원 풍경이 흐르고 복잡, 화려한 색조의 바자르 풍경이 전개된다.
사탕수수 단물 빼낸 후 바짝 말려서 세워놓은 길가, 가게 늘어선 시골마을을 종종 지난다.
17시 스산해진 저녁 어스름에 앙굴리마라 토굴터 도착, 이어 급고독(給孤獨)장자 집터에 당도한다. 어둠 속에서도 일행은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한 시간 후 호텔에 당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접는다. 석식 후 자연스레 노래자랑? 시간이 이루어진다.
[6일차 12월 15일 목요일] 기원정사, 사위성 순례, 이어 쿠시나가르로
< 기원정사(祇園精舍) 및 사위성 >
☞ 석가모니가 생존하였을 때 자주 머물면서 설법한 곳으로 초기 불교의 정사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마가다 국 왕사성의 죽림정사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 가람이라 한다.
원래는 코살라 국의 기타((祇多) 태자의 소유였던 동산을 사위성의 수닷다 장자가 매입하여 정사를 지었다. 수닷다(Sudatta) 장자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그는 동산을 뒤덮을 만큼의 금을 주고서 이 동산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그의 신심에 감동한 기타 태자가 동산의 일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함께 정사를 건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타 태자의 동산을 의미하는 기수(祇樹)와 수닷다 장자를 의미하는 급고독을 합해서 이 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한다.
새벽 6시, 사위성을 향해 길을 나선다. 기왕이면 부처님 설법하던 장소에서 일찍이 새벽예불을 모시기 위해서다. 얼마간 걸어 들어가 숲을 만나는데 17년 전 처음 걸었던 옛 모습이 아니다. 아니 기억을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크고 우람한 아난다 보리수를 돌며 예배를 올린다. 부처님 재세시 묘목을 심어주고는 정사를 비우실 때 아난다에게 잘 지킬 것을 당부하셨다고 한다.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마야부인을 비롯한 천상계 분들에게 설법하려고 떠나려 하자, 아난다는 부처님께 “어디에 의지하오리까”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신통으로 보드가야의 보리수 묘목을 이곳에 심어, 부처님을 대신하여 보리수에 의지하라고 이르신다. 이리하여 생긴 보리수가 일명 아난다 보리수다.)
이어 새벽의 신선함으로 촉촉이 젖어있는 기원정사터로 향한다. 가는 길에 단소장님의 라훌라존자 불탑 소개도 있었다. 스님을 따라 주춧돌만 남아있는 정사터를 돌며 가장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시던 자리에 법석을 마련한다. 오늘 우리는 혜총스님의 정성된 기도와 법문을 들으며 2500년 전으로 거슬러가는 체험을 해본다. 신선함과 성스러움이 흐른다.
긴 기도가 끝나고 돌아보니 금색, 주황색 법의를 걸친 많은 현지 스님들이 주춧돌 위에 도열한 듯 앉아 독경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죄송스런 마음에 서둘러 내려와 윗자리를 내드렸다.
호텔로 돌아와 조식을 마치고 간 곳은 소위 ‘부처님 공항(붓다 에어포트)’이란 곳이다. 무우수(無憂樹) 아래 부처님 우협 탄생한 일주일 후 타계한 마야부인은 도리천 내원궁에 계셨다. 그런 어머니를 제도하고자 부처님이 도리천에 오를 때 거쳐간 동산이라며 재미있게 이름 붙인 것이다.
11시 반 휴게소에 내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단소장님의 간략한 부처님 일대기 강의를 들었다.
이어 김밥 간식타임, 동행하는 현지요리사 솜씨란다. 단무지, 우엉, 오이, 당근, 계란을 넣어 만든 김밥이 제법 맛있다. 비교적 간도 맞고. 베풀어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2차선 국도를 한참 지나 왕복 4차선 도로로 잘도 달린다. 인도 도로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처에서 ‘삑삑’ 경적만 덜 누르면 좋겠다. 4차선 도로에 접어든 후 60㎞ 정도 달려왔을까.
12시 40분 쿠시나가르 호텔에 당도한다. 늦은 점심식사 후 다비장과 열반당을 참배하기로 한다. 호텔 입구에서 스님께서 마련하신 분홍빛 꽃 곱게 피운 수련 한 송이씩 들고 다비장(천관사터) 앞에 하차한다. 정성스레 꽃을 들고 줄지어 다비장을 두어 바퀴 돈 다음 긴 예경과 기도를 올린다. 시간이 바쁜 중에도 사진 찍는 일만큼은 잊지 않는다. 단체로 찍을 준비를 하는데 한 무리의 외국인 가족이 끼어든다. 뒤늦게 달려온 가장이 우리 앞에 벌렁 눕더니 아니다 싶은지 일어나 앉아 자세를 고친다.
여전히 수련 한 송이씩 들고 서둘러 열반당으로 향한다. 붉은 주춧돌들로 남아있는 대반 열반사터가 그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한편 열반당으로 가는 입구에 서있는 사라쌍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일행이다. 스님을 필두로 하여 한바탕씩 아름으로 나무를 끌어안는다.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 열반당에 들어서니 마지막 열반의 자세로 누워계신 금빛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일행은 “석가모니불” 염불을 하며 들고 온 연꽃을 부처님 머리맡에 올리고, 준비해온 금빛 가사의 한 자락씩 잡고 부처님의 발부터 어깨까지 덮어드린다. 주위를 돌면서 드러내신 어깨를 한 번씩 만져보고는 한쪽으로 모여 혜총스님의 지도 아래 예불, 독경 등의 의식을 행한다. 감격 어린 성스러운 의식에 모두는 하나같이 숙연해진다. 좁은 공간의 한쪽엔 역시 금색 가사의 현지스님의 기도가 행해지고 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열반당 경내를 벗어나 정성스레 꾸며진 불단이 있는 호텔로 돌아와 짜장면으로 준비된 석식을 한다.
[7일차 12월 16일 금요일] 부처님이 사랑했던 바이샬리 거쳐 라즈기르로
< 바이샬리 >
☞ 바이샬리(힌디어), 베살리(Vesali, 팔리어) 또는 비사리(毗舍離)는 인도 비하르 주에 있는 고대 도시로, 비하르 주 북서부의 파트나 북쪽으로 간다크 강을 끼고 있다. 고대 십육대국 시기 리차비족과 밧지 동맹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여러 도로를 통해 남쪽의 라자그리하, 북쪽의 카필라바스투·쉬라바스티와 연결되어 있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가 바이샬리에서 태어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붓다도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다. 고타마 붓다의 시대에 베살리는 매우 크고 부유하고 번영한 도시였다. 첫 스승을 만났고, 대가섭을 제자로 맞이했으며, 성도 후 많은 법을 설했고, 열반의 길에 마지막 안거를 이곳에서 보내셨다. 붓다가 사망한 후(BC 483경) 불교도들의 2차 결집회의가 열려 수도자의 행위규범을 규정한 곳이고, 대표적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무대이기도 하다. 5세기에는 중국의 승려 법현이 순례해 바이샬리의 주요 승원과 사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얼굴을 닦으면 하루를, 마음을 닦으면 평생을 간다”는 누군가의 어록을 들으며 하루를 연다.
5시 50분 출발, 부처님이 가장 사랑했던 도시 바이샬리로 간다. 순례자의 이름은 물론 가족까지 거론하며 축원하시는 스님의 정성스럽고 열정적인 기도가 시작된다.
출발 한 시간 후, 4차선 도로 위 짙은 안개 속으로 떠오르는 태양이 붉고 크다.
하늘엔 검은 새(까마귀)가 날고 있다. 다시 한 시간쯤 후엔 회백색 강을 만난다.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이라 한다.
바나나 숲도 만나게 되는데 1년 된 바나나 나무는 잘라버리고 새로 키운다고 한다.
2차선 도로로 들어선다. 가장 못 사는 동네 비하르주다.(‘비하르’는 사원이란 뜻)
그런데 “와! 포장도로다!” 옛 생각이 난다. 비포장 길에 차선이랄 것도 없고, 패인 곳이 많아 울퉁불퉁 곡예를 하는 버스 안에서 엉덩방아를 찧거나 이마에 혹이 나는 일이 다반사였던 그때의 기억, 지금은 조용히 흐르는 느낌이다,
차창 밖 풍경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좀 특이한 건 가축 등에 옷을 입힌 점이다.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나 말, 혹은 염소나 개 등에 천이 덮여 있다.
8시 좀 지나 BUDDHIST STUPA, KESARIYA(캐사리아 스투파)에 이른다. 이 사바세계와의 인연이 다했음을 인지한 부처님은 더 이상의 공양을 거부하고 마지막 발우를 이곳에 엎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바이샬리 주와 나뉘는 지점에 강이 있었는데, 부처님을 사랑한 바이샬리족의 따라옴을 견지하던 강이라 한다.
50분 가까이 머물며, 크고 높다란 복발탑을 각자 돌아보고, 함께 기도를 올린다.
바이샬리는 곡창지대로서 마가다 16국 시대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코살라국 사위성과 왕사성의 마가다국과 더불어 3대 강국이었다고 한다. 비구니를 받아들였고, 대중부가 만들어진 곳이며, 논쟁과 다수결에 의해 정치를 하는 민주국가, 공화제가 시작된 곳이다. 유마거사 유마경의 무대(‘승만경’의 무대는 아요디아)이며, 싯다르타 태자 시절 첫 스승을 찾아 무소유처, 선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망고나무 아래서 주워다 기른 아이’라는 뜻을 지닌 기생 ‘암라팔리’와의 인연도 있었으며, 나중에 그녀는 재산을 부처님께 바친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서 대각을 이뤘으며, 중생을 위해 법을 설했고, 그 인간의 몸을 돌려줄 때를 인지한 부처님, 마지막 발우를 엎고 열반의 자리로 떠나시던 그때의 정황을 깊이 헤아리긴 어려우나 가슴 저리는 아픔이 밀려온다.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겨 시골길로 들어선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 흙빛 닮은 마른 바나나이파리들이 구겨진 채 흩어져 있는 길가 마당에 얼룩이 소는 배가 부른지 구유 앞에 널부러져 앉아 있고, 한쪽 옆엔 짚과 소똥을 섞어 긴 삼각형 꼴로 빚어 지그재그 쌓아놓은 풍경이 그간 많이 보아온 터라 낯설지 않다. 이불이며 옷가지들이 널려있는 담장 밖 의자엔 노인과 아이가 나앉아 있고, 까만 염소 세 마리 사립문 밖에 질펀하게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양미간에 그림(빈디)을 그리고 코걸이를 한, 머리부터 샤리를 곱게 걸친 여인들은 무언가 일하는 중에도 스쳐가는 차량들을 쳐다본다.
다음으로 일행이 찾아가는 곳은 제3의 정사인 대림정사다.
바이샬리는 나중에 네팔로 쫓겨갔던 리차비족이 살던 땅이다. 부처님 성도 후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가뭄과 기근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자, 리차비왕은 부처님께 사신을 보냈고, 왕사성에 머무시던 부처님은 강을 건너 바이샬리 어귀에 도착, 주문(보경)을 외워 기근과 질병을 해결했다고 한다. 고맙게 여긴 리차비왕이 부처님을 위해 지은 불교 세 번째의 정사가 바로 대림정사다.
도착해보니 정사는 흔적만 남아있고, 아난다 사리탑과 원왕의 연못, 사자 한 마리를 이고 있는 아쇼카 돌기둥만이 높이 솟아있다.
보수 흔적이 남아있는 아쇼카 석주에 적힌 글들은 선명하진 않지만 그 정복지역의 언어문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1시까지 대림정사터와 아난다 스투파, 아쇼카 석주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양옆으로 불상 조각들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스투파는 ‘흙을 쌓아올리다’의 뜻이다.
길가 진열대 위 누렇게 잘 익은 큼지막한 오렌지가 눈길을 끈다.
2㎞쯤 떨어진 곳의 부처님 재사리를 봉안한 사리탑만 보고, 당대 재가불자의 거두 유마거사의 집터를 찾는 일은 생략한다. 당대의 명기 암라팔리의 집터도, 부처님 입멸 후 재가불자를 위한 2차 결집(대중부를 위한 계율의 현실화, 이는 기존 출가자 즉 상좌부 불교와 최초로 분리됨을 의미한다)이 이루어진 곳도 이 지역이라고 한다.
12시 가까이 호텔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수제비, 자몽, 아이스크림 등 색다른 메뉴를 접한다. 여행 중 먹는 즐거움도 한몫 한다는 걸 실감한다.
오후 일정에 접어든다. 바나나 농장이 많이 눈에 띄고, 사리를 두른 여인들이 긴 장대로 바나나를 따고 있는 풍경이 자주 포착된다.
파란 모자를 일제히 쓴 남자들 그리고 사리 차림의 여자들로 이뤄진 시위대의 행렬이 한바탕 지나간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여 이 길에 나서는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 아쉬움, 절제, 자유……
복잡한 시장이 나타난다. 크고 작은 상점들엔 가재도구 등 많은 상품들이 쌓여있고, 가도엔 과일전과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리어카 등으로 장사진을 이룬다. 그런 사이사이로 곡예를 하며 지나가는 릭샤와 오토바이가 신기하기만 하다.
휴식 시간인지 양철지붕을 한 허름하고 작은 시골학교 아이들이 마당에 나와 있다.
대교(마하트마 간디대교)를 통해 갠지스 강의 본류를 지난다.
버스가 잠시 정차한 사이, 사들인 작은 바나나 배급을 받는다. 작고 귀엽다. 맛보다는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마우리아 왕조 3대 아쇼카대왕의 도시 ‘파트나’(당시 이름은 파탈리푸트라)를 지나간다. 비하르주의 수도다.
14시 반 휴게소에 내려 휴식시간을 갖는다.
잠시 ‘단소장님 어록’을 소개하자면
망국의 징조 1. 매관매직 2. 사제들의 타락 3. 빈익빈 부익부
여기에 +1은 철학의 변화, 요게 맘에 든다.
추수 끝난 들녘에 간간이 보이는 낟가리, 연 날리는 아이들, 우리의 농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어 정신없는 시장 풍경, 다리 건설 현장 등이 스쳐 지나간다.
16시 50분 해는 이미 지고, 17시 반쯤 라즈기르에 도착한다. ‘라자’는 왕, ‘기르’는 둘러싼 성의 뜻이다.
이어 RAJGIR RESIDENCY 호텔에 여장을 푼다.
석식에 나온 미역귀 튀김과 잡채가 일품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만나는 잡채!
감동 그 자체다. 노고를 아끼지 않은 분들에게 감사하며 맛있게 먹으련다.
호텔 경내에 마침 잔디밭이 있어 라인댄스를 배운다. 한 시간여 동안 몸을 풀었다.
오랜만의 운동이라고 다리가 좀 부은 듯하지만 괜찮다. 상쾌한 이국의 밤이다.
운동이라면 숨쉬기 운동밖에 하지 않는 나로서 여행 때마다 일행에게 배워서 하는 라인댄스가 그날의 피로를 풀기에 안성맞춤이다. 나의 오랜 여행의 한 과정이 되었는데 이번엔 기회가 적어 아쉽다. 그래도 휴게소(주로 주유소)에 내릴 때마다 옥경님 졸라서 잠시 하는 체조가 여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그때마다 함께하는 합창단 보살들이 고맙다.
[8일차 12월 17일 토요일] 부처님의 설법지 영축산의 새벽
< 라즈기르 왕사성 >
☞ 출가 후 두 번째 스승을 만난 곳, 라즈기르 또는 라자그리하라 불리며, 파트나 남동쪽 102㎞에 위치한 비하르 주의 도시로서, 성도 후 부처님께 귀의한 첫 번째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였으며, 기원전 5~6세기에 불교의 붓다, 자이나교의 마하비라가 가르침을 편 장소이다.
아울러 최초의 죽림정사가 세워진 곳, 영산회상, 염화미소의 무대, 부처님 입멸 후 첫 결집이 열렸던 칠엽굴, 관무량수경의 무대인 빔비사라왕의 감옥터, 당대의 명의 지바카의 병원터, 부처님 친견의 길인 빔비사라왕 길로 유명하다.
북방불교의 경전에 왕사성(王舍城)으로 표기된 이곳은 당시 북인도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로, 석존은 깨달음을 증득한 후 빔비사라왕과의 약속대로 이곳에 와 법을 펼치며 여러 차례의 하안거를 보내는 등 석존 열반 후까지 번성하였으나, 수도가 파트나로 옮겨가면서 활기를 잃고 오늘날처럼 밀림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다.
< 그리다쿠타(영축산, 靈鷲山) >
☞ 독수리 부리 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다 하여 영축산이라 부른 이곳은 법화경 설법이 행해진 곳이다. 석존을 위해 빔비사라왕이 닦았다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엔 작은 규모의 사리불 동굴, 아난존자 동굴 및 여래가 머무시던 정사의 터가 남아 있다.
새벽 6시, 법화경의 무대 영축산으로 오른다. 이곳에서 마지막 동안거를 하며 일승인 성문, 연각, 독각, 보살 등에 대해 하신 법문이 법화경(묘법연화경)이다.
성문은 직접 부처님 말씀을 들은 제자를 의미하고, 연각(독각)은 스스로 깨우침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는 소승 상좌부의 이론이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한 수레에 태워 깨달음의 길로 함께 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승부 혹은 대중부의 이론이다. 즉 소승, 대승, 네가 맞니 내가 맞니,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설한 것이다.
울창한 숲을 양옆에 두고 훠이휘이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석존을 위해 빔비사라왕이 닦았다는 언덕-지금은 잘 정돈된-으로 오르는 길엔 염주를 온몸에 잔뜩 휘감아 두른 상인들이 넘나들며 권하는 탓에 오르는 일이 순조롭지도 경건하지도 않다. 안타깝다.
빔비사라왕의 석존에 대한 지극한 공경의 뜻이 담겨있는 두 장소를 지난다. 왕이 수레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 곳과 시종마저 배제하고 홀로 석존께 향했던 곳이다. 또 오르는 길엔 작은 사리불 토굴, 아난다 토굴이 있으며, 아난과 여래가 머무시던 작은 정사 터(여래 향실)가 영취산(영축산) 정상의 주변에 남아있다. 정상 가까운 막바지에 다양한 색의 작은 깃발들이 떠오르는 햇살 받으며 팔랑이고 있다.
독수리바위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부처님 설법의 자리를 만난다. 혜총스님 지도 아래 성스런 의식이 거행되고, 일행은 이 역사적인 곳에서 새 역사의 한순간을 담는다. 소슬한 바람, 가사 자락 흩날리는데 낭낭하게 퍼지는 스님의 법문은 이 시대에 다시 듣는 부처님 음성이어라. 스님의 설법을 경건하고 다소곳이 듣고 있는 일행의 등 뒤로 붉은 태양이 웃음 지으며 지나간다. 부처님 손에 들려진 연꽃 한 송이, 조용히 미소 짓던 가섭, 이 영원한 과제를 품고 죽림정사를 향해 하산한다.
한때는 화려했을 도시를 뒤덮고 있는 잡목만이 우거진 밀림 사이를 걸어 내려오면서 길 양옆으로 손 벌리고 앉아있는 헐벗은 노인들, 아이들을 보며 착잡하기만 하다.
< 죽림정사(竹林精舍, 베누반 비하르) >
☞ 석존의 가르침에 따라 ‘위 없는 깨달음’을 증득하려는 사람들에게 고정적인 수행처로 만들어진 것이 베누만 비하르, 죽림정사이다. 석존은 이곳에서 여러 수행자들과 함께 머물며 하안거 기간을 보냈으며, 여기서 설한 설법도 경전으로 많이 남아 있다. 마가다 16국시대 최대강국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편히 머물 곳을 찾던 중 왕궁 가까운 곳에 온천과 대나무숲을 발견하고, 당시의 대부호 칼란다로부터 땅을 기부받아 만든 사원이 바로 불교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이다. 현재는 정사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대나무숲과 칼란다 장자의 연못만 남아있다.
잘 가꾸어진 꽃들과 분수까지 설치한 호수, 정원으로서의 아름다움은 갖추고 있지만 옛 죽림정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나무가 남아있다는 게 위안이랄까?
10시 호텔을 출발, 라즈기르에서 11키로 떨어진 나란다 대학으로 간다.
서기 2세기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을 비롯하여 중론, 중관학, 유식, 밀교 등 이곳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 나란다(Nalanda) 대학 >
☞ 대승불교 발전의 산실, 5C~11C 세계 최대의 대학, 공사상, 반야사상, 중론학, 중관학, 유식학 그리고 불교의 사생아로 불리는 밀교학까지 발전하게 된다.
비하르 주의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에 위치하며, 427년에서 1197년까지 팔라제국 아래에서 불교 학습의 중심이었고 세계사상 최초의 대학 중 하나였다.
굽타 제국의 제5대 마하라자디라자인 쿠마라굽타 1세(재위 414∼455?)가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날란다 사(寺)를 건립한 이후 역대 왕조에 의해 증축, 확대되었다. 굽타 왕조 후반기인 5세기경부터 12세기에 걸쳐 불교교학의 중심지로 국외에까지 알려져서 아시아 각지 출신의 학승(學僧)이 운집했다. 중국의 승려인 현장(玄奬)·의정(義淨), 신라의 고승 혜초 등 여러 나라의 승려들이 수학했던 곳으로 한 때는 5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많은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의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같은 대학 도시의 원형으로 승방과 강의동이 함께하는 구조를 띄며, 학년에 따라 방의 높낮이를 달리했다 한다. 주변에는 당시 10만여 명이 모여 사는 큰 대학도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인도를 침입한 회교왕조는 이교도의 우상 특히 많은 불교의 유적을 파괴하게 되고, 12세기 나란다까지 쳐들어온 회교도들에 의해 파괴된 이 대학의 운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일부 학생들은 스리랑카에서 찬란한 폴론나루와 불교시대를 열게 되고, 일부는 티벳불교의 근간을 완성하게 된다. 또 일부는 미얀마나 크메르에서 불교문화를 꽃피우고 많은 장서와 유물들은 심지어 중국의 돈황으로까지 옮겨지게 된다. 2016년부터 발굴작업이 진행중이다.
꽃이 만발하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울듯이 불교는 인도에서 자연사했다.- 자와하랄 네루의 말이다.
나란다 대학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니 교복 차림의 많은 학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문화유산인 대학의 명성에 걸맞게 각처에서 견학을 온 모양이다.
7개의 강의동과 숙소 등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잘 조성한 워낙 큰 규모의 대학인지라 단소장님의 브리핑을 듣고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채 붉은 벽들로 남아있는 기숙사, 승방 등 여기저기를 떼지어 답사한다. 어느 곳이나 붉은 교복의 여학생, 검정이나 청색, 흰색 교복의 남학생들로 넘쳐나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런 와중에도 폰 셔터를 바쁘게 눌러대는 학생들과 우리 일행을 본다.
11세기 무슬림 침공 이후 스님 살상 등 박해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한다.
나란다는 목련존자와 사리불존자가 태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교육원장이었던 사리불의 스투파 앞 너른 풀밭에서 혜총스님 지도에 따라 예경의식을 갖는다. 그 앞을 지나는 많은 사람, 행렬을 이어가던 학생들은 연신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12시쯤 모처럼 만나는 산, 산, 산이 이어진다. 아래는 녹색나무들, 중턱의 붉은 흙 위로 허연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특이한 지형이다.
붉은 흙벽돌집 담벼락에 척척 붙여놓은 소똥반죽이 화덕의 난처럼 가지런하다. 마치 벽 장식 같아서 묘한 조화로움을 이룬다고나 할까. 집이라고 해야 흙벽 위에 지붕만 얹었을 뿐, 화덕을 위시한 주방시설과 가재도구가 온통 밖으로 나앉은 것 같다. 샤리에 팔찌를 찬 여인이 연신 소똥을 주무르고 있는 광경이 차창 밖으로 흐른다.
발 벗은 노옹은 담벼락 옆 야자수 그늘 아래 그린 듯이 앉아 있다. 그리고 지붕 위 마른 풀 위에 서 있는 아이들이 동화 속 주인공 같이 평화롭다.
머리에 자루를 이고 가는 길가 풍경이 우리와도 닮아있고, 트럭 위 잔뜩 실은 짐짝 위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인부들이 참으로 소박하다.
지붕 위 호박넝쿨 기어가는 듯한 푸르름이 싱그럽고, 작은 연못 위 분홍빛 수련이 귀엽다.
탈곡하는 마을 풍경이 더러 보이고, 추수 끝난 들녘에 우리네 벼낟가리 같은 가지런한 낟가리들이 반갑다. 일을 끝냈는지 소들은 널부러져 누워 있다.
아이와 아낙들은 질펀한 늪지에 엎드려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고, 한가로와진 소 등위에 작고 하얀 새 한 마치 그림처럼 앉아 있다. 바나나 농장 너른 들녘엔 수많은 소들이 널려 있고, 채마밭엔 여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길게 펼쳐지던 농촌 풍광이 끝나는가 싶더니, 학교와 가게들, 번화한 시가지가 나타난다.
14시 가야 지역에 들어선다. 니란자라 강 건너 상두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드가야의 유명산은 상두산과 프라그 보디기리(전정각산), 가섭존자가 입멸한 구루파(계족산)이다.
40분쯤 보드가야 수자타 공양터(스투파)에 당도한다. 부처님께 유미죽을 올린 곳이다. 네란자라 강가의 우루빌라 세나니 마을에는 수자타 집터에 세운 수자타 탑이 있고 우유죽을 받은 탑이 있다. 평평한 봉분 같은 조금 나지막한 스투파가 평온한 느낌을 준다. 그 앞에서 예경의 절차를 밟고 길을 서두른다.
15시 좀 넘어 호텔 도착, 들어서는 일행 모두에게 카따 같은 길고 하얀 천을 목에 걸어준다. 감격스럽다. 중식을 하고 16시 릭샤에 분승하여 보드가야 대각사로 출발한다. 가는 길에 먼저 한국의 절 ‘분황사’에 들러 참배하기로 한다. 좁고 울퉁불퉁한 도로 사정이 엉망이다. 다른 차와 충돌하거나 차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이런 염려까지 해야 할 정도다.
기가 막힌 인도, ‘No problem’에 동조할 수가 없다. 교육시설, 수행 공간 등 규모가 큰 절인데 이 열악한 곳에서 어찌 이리 큰 공사를 해낼 수 있는지, 관계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없어 법당 참배 겸 예경을 간단히 하고 대각사(마하보디 사원)로 향한다. 부처님의 성도지 보드가야로 향하는 발걸음은 녹녹하지 않다.
신발을 벗어놓고 긴 길을 걸어야 했고, 가방과 몸 검색대 출입구가 남녀가 다른데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들은 오지 않은 채 점점 어둠이 짙어가고 있다. 어슴프레해지는 대탑의 모습, 성스러운 대탑은 우리 중생에게 그 모습을 쉽게 보여주질 않는가 보다.
< 보드가야, 부다가야(Bodh Gaya, Buddha Gaya) >
☞ 인도 북동부 비하르(Bihar) 주 가야시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로, 갠지스 강의 지류인 팔구강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탄생지 룸비니,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는 기원전 3세기경에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마하보디 대탑(大塔)이 서 있다. 높이가 55m나 되는 이 탑은 방추형의 9층탑으로 3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는 웅대한 탑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신성한 곳의 하나로 대탑 서쪽에 있는 금강보좌(金剛寶座)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그 아래 정좌하여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신성한 보리수가 있다.
영국의 알렉산더 커닝엄은 19세기 후반에 이 사원을 복구했고, 미얀마의 불교도들이 1882년 마지막으로 복구작업을 끝냈다. 이곳 마하보디 사원은 2002년에 세계유산이 되었다.
늦은 입장으로 오히려 불빛 속의 아름다운 대탑을 보게 된다. 밤인데도 관광객, 아니 참배자는 끊이질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례객들로 기도처를 찾기도, 단체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렵다. 스님을 따라 서쪽 한편에 자리를 잡아 간단히 예경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염불을 하며 불빛 속에 빛나는 대탑을 돌고 또 돌았다. 성스러움으로 충만해갈 무렵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 대탑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직접 예경하는 기쁨을 누렸다. 감동의 순간이다. 다시 나와서 한 바퀴 더 돌다가 보리수 아래 빈 자리가 생겨 일행은 자리를 깔고 스님의 목탁에 맞춰 긴 기도를 올렸다.
고단한 중생의 삶의 갈피마다 오늘의 감격이 윤활유가 되어 기쁨 충만한 삶으로의 전환점이 되기를 합장하며 기원한다. 욕심을 내보자면 위없는 저 깨달음의 자리에 스스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벗어둔 신을 찾아 신고 어둠을 따라 걸어 나오는 길이 들어갈 때만큼 어둡지는 않다. 오늘은 ANAND INTERNATIONAL 호텔에 머문다.
[9일차 12월 18일 일요일] 부처님의 첫 설법지 녹야원을 향해
6시 45분 이른 출발은 220㎞, 버스라서 돌아가니까 270㎞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처님 성도 이후 첫 설법지인 다르메르지카, 사르나트 녹야원행이다.
5비구에게 맨 처음으로 4성제, 초전법륜을 굴리신 곳이다. 이후 출가자, 재가자를 위해 끊임없이 법륜을 굴리신 부처님의 삶의 역정을 만나보러 간다.
혜총스님 어록 - “태양은 모든 에너지의 근원, 부처님과 같다.”
스님은 복지의 필요성을 18세에 느끼셨다고 한다. 부처님은 마음의 복지, 몸의 복지, 물질의 복지를 펴신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내려다보면 복지의 마음이 생긴다. “왜? 왜?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왜 저렇게 불구로,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사는가? 베풀지 않은 삶의 과보다.”
부처님은 대각을 이룬 후 처음 만난 버마 상인, 장삿길이 바빠 그냥 가는 그에게 머리카락 하나 뽑아준 것이 인연이 되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죄를 많이 지은 이는 제도하기가 어렵다고 일깨워 주신다.
푸른 농지와 바나나 등 나무들이 펼쳐지고 하얀 새들이 논밭 가운데 수놓는다. 유채밭 노란 꽃들이 곱다. 소, 말, 개 등이 다 나온 듯 거리에 북적인다. 지나는 길에 힌두교인지 불교인지 모를 기도소가 간간이 눈에 띈다.
9시쯤 휴게소에 쉬기 전 갠지스강으로 흘러드는 손강을 보았다.
반 시간 후 산이 눈에 들어온다. 좌우 1,500㎞가 다 평원이다.
‘힌두’의 ‘힌’은 크다는 의미다. 인도인은 자칭 ‘힌두스탄’이라 하며, 두 강에서 발원한 힌두교를 믿는다.
순례의 막바지여서 소감 발표의 시간을 갖는다. 동참자들은 하나같이 이 의미 깊 은 순례의 길에 참여하게 됨을 감사하며, 감동적인 메시지들을 쏟아 놓는다.
13시 좀 지나 바라나시에 진입한다.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북동쪽 13㎞에 위치한 사르나트 녹야원(사슴 동산)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 사르나트(Sarnath, 녹야원(鹿野園) >
☞ 사르나트(힌디어:녹야원(鹿野園)는 인도의 지명이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붓다는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고행 정진했던 다섯 도반(道伴)을 만나 자신의 지혜를 나눠 주기 위해 강가(갠지스 강)에서 강변 13km 지점에 있는 숲 사르나트를 찾는다. 붓다는 이곳에서 다섯 도반에게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치며 최초의 설법(初轉法輪)을 전했고, 그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불교의 4대성지 중 하나이다.
이후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사르나트는 불교와 불교 예술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 불교로 귀의한 아쇼카왕은 사르나트에 칙령을 새긴 기둥과 사리탑, 수도원 등을 세웠으며, 640년 이곳을 방문한 현장 법사는 100m 높이의 사리탑과 웅장한 승원에 1,500여 명의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8세기 중반 힌두교의 번성과 함께 인도의 불교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12세기 이슬람 침입자들에 의해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사르나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후 발굴 결과 아소카왕(기원전 3세기 중엽) 경부터 12세기까지의 유적과 다수의 조각이 출토되고, 다르마라지카탑과 근본정사를 중심으로, 굽타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동방에 현존하는 다메크탑은 높이 약 42m, 기부의 직경 약 28m로 굽타 시대의 귀중한 유물이다. 출토품의 대부분은 유적의 남쪽에 있는 고고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입구 정면에 있는 아소카왕 석주의 사자상 주두는 같은 종류의 주두, 주각 중 가장 장려하며 보존상태도 좋다. 4마리가 등을 마주 댄 사자도, 원형의 정판 측면에 부조된 동물도 세련된 기법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9~10세기 화려함과 정갈함이 공존했던 굽타시대가 불교 만발 시대였다, 이후 불교 속에 힌두가 섞이면서 13세기 불교는 힌두의 스폰지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참고로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성모상도 관능적 그림이나 조각으로 출현, 그리스 로마의 인간과 신의 재발견이 이루어짐과 상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그간 보아온 시골 풍경과는 달리 병원 등 과히 높지 않은 큰 건물이 이어지고, 거리에 동상이나 현대식 구조물들이 눈에 띈다. 일제히 노란 지붕과 초록으로 장식한 릭샤의 등장도 여타의 지방과는 다른 모습이다. 더러 보이는 반얀트리 가지 드리운 아래로 가게들이 즐비하고, 학교가 가까운지 행진하듯 걷는 아이들 손에 솜사탕도 들려있다. 검정색 마스크 차림의 한 남학생이 인상적이다.
불교 오색기가 만장처럼 길게 도열해 있는 입구를 따라 들어간 붉고 아담한 사원, 스리랑카 절인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대각회)’라고 한다. 파스텔톤의 벽화와 샛노란 금불상이 인상적이다. 작은 법당 뒤편으로 돌아가보니 천으로 만든 진분홍 예쁜 연꽃 장식 안에 형형색색의 구슬들이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진신사리가 아닌가 싶다.
참배를 마치고 나와 경내를 돌아본다. 담장 같은 외벽을 따라 각 나라의 글자로 부처님을 찬탄한 글을 새긴 예경판들이 둘러쳐져 있다. 거의 끝부분에 다달았을 때 만난 믿기지 않는 감격! 한글판이 보인다. 와우! 일행의 함성이 터진다. 더군다나 그 명문을 읽어 내려간 끝에 “비구 혜총”이란 대목에 이르러서는 감격의 절정이었다. 스님께서 시주하신 것이다. 이 영광된 자리에 주인공 혜총스님을 모시고 조별로 쪼그려 앉아 기념촬영을 했다. 고마우신 스님께 할 말을 잃는다. 그냥 말로 하지 못한 그 감사와 감격을 안은 채 사르나트 초전법륜지 녹야원으로 향한다.
17시 반 우선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으로 들어가 대표적 전시물인 아쇼카왕의 석주 윗부분을 감상한다. 아쇼카의 상징인 서로 등을 맞댄 4마리 사자상이다. 이곳엔 사르나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불상과 힌두 신상이 많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인산인해 속에 불교관 맨 안쪽에서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불상인 초전법륜상을 우리 눈으로 직접 친견했다.
이어 녹야원을 견학한다. 너른 공간에 붉은 벽돌의 초석들로만 남아있어 황량하나, 옛날 번성했던 교육의 장소였음을 여실히 느낄 수가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가장 먼저 5비구에게 법을 설한 원형의 너른 장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많은 유적 그 흔적을 더듬어 걷다 보니 태양이 일행의 등 뒤로 작별을 고하려고 한다. 크고 작은 무수한 뿌리 거느리고 생을 다하는 나무 등걸 옆에서 넘어가는 태양 잠시 붙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높고 우람한 다메크탑 앞으로 모인 일행은 어쩌면 순례의 길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길고 장엄한 기도를 올렸다. 혜총스님의 힘찬 목탁과 염불소리는 저물어가는 녹야원의 하늘을 울리고, 저녁 하늘 분주히 나는 새들을 감화시키는 듯했다. 이 도량을 찾은 관광객들도 가던 길 멈추고 우리의 기도를 지켜본다.
[10일차 12월 19일 월요일] 바라나시의 새벽, 강가(갠지스강)의 풍경
< 바라나시 가트(Varanasi Ghat), 강가 풍경 >
☞ 바라나시(베나레스)는 힌두교도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7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갠지스 강의 왼쪽 둔덕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거주해온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갠지스 강 중류에 아리아인들이 처음 정착한 것이 시작이었다. BC 2000년경 아리아인들의 종교와 철학의 중심지이자 모슬린·견직물·향수·상아제품·조각품 등으로 유명한 상업 및 산업의 중심지였다.
가트는 물로 이어져 있는 경사 또는 계단을 뜻하는 말로 작은 호수는 물론 큰 강, 바다에서도 볼 수 있다. 의식을 거행하는 계단이다. 강가(갠지스 강)를 따라 늘어선 가트, 과거에는 가트 위로 사원과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게스트하우스나 식당 등의 영리적인 사업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도시 이름이 카시-베나레스-바라나시로 바뀌었다. ‘바라나시’는 갠지스로 합류하는 두 개의 지류 바로네이강과 아씨강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5시 40분 이른 새벽, 갠지스강으로 향한다. 강가(갠지스강) 서쪽 강둑에 자리한 바라나시의 구시가지는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뒤엉켜 있다. 그래서 버스로, 릭샤로, 나중엔 걸어서 간다. 계단을 내려가 작은 배를 탄다. 배에 오르는 일행에게 초를 가운데 두고 꽃으로 장식한 작은 종이접시를 건넨다.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배의 난간에 둘러앉는다. 연기 나는 화장터가 보이고 배는 갠지스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뿌우연 새벽 공기 속으로 얼마간 흐르다가 초에 불을 붙이고 염원 실어 강물에 띄운다. 누군가 뿌리기 시작한 과자를 보고 새들이 달려든다. 과자를 받아먹으려 벌떼처럼 달려드는 새떼, 진풍경이다. 일행은 그 광경을 사진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멀리 빛을 잃은 태양이 따라온다.
얼마간 흐르다가 하선하니 상인, 걸인들이 달려든다. 좁은 길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여전히 따라붙는다. 이곳의 풍광은 예나 이제나 다를 바가 없다. 성스러움이나 종교적 의미보다는 번민의 시간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조식을 마치고, 휴식 시간을 갖는다.
꽃과 X마스 장식 등 잘 꾸며진 호텔 라운지에서 스님과 한바탕 기념사진도 찍는다.
12시 15분 바라나시 공항을 이륙한 국내선은 13시쯤 델리공항에 착륙한다.
12억 인도의 수도, 1000년 고도이며 인도의 심장인 뉴델리로 향한다. 역동적인 삶의 현장, 모든 길은 뉴델리로 통한다. 일찍이 뉴델리를 개발하여 인디아 게이트와 각국 대사관이 들어섰다. 거리와 구역이 1, 2, 3번 라인으로 구획 지어진 게 특이하다.
인디아 게이트는 파리의 개선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는 전몰자를 위한 위령비라 한다. 1차대전 종전 후 영국 정부가 사망한 인도 병사들을 위해 이곳에 건설했다. 42m의 거대한 문 모양으로 조성된 이곳엔 희생된 8만 5천 명 인도 병사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시원스레 물결치는 긴 연못을 옆에 둔 게이트 광장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스님이 사 주시는 모처럼 맛보는 아이스크림 맛이 일품이다. 관광객과 상인으로 북적대는 거리가 약간의 더위도 몰고 오지만, 스님이 챙겨주는 것이라 더욱 시원하고 달다는 느낌이 배가 되는 것 같다. 번잡함에 익숙치 않은 나는 멀리 보이는 인디아 게이트와 물길만 한동안 감상하다가 일행이 사진삼매에 들었을 때 버스로 돌아왔다.
다음 순례지는 간디 화장(다비)터인 간디 추모공원, 라즈가트이다.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꺼지지 않는 횃불과 화환으로 장식된 이곳엔 많은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다. 먼저 올라간 언덕에서 바라본 광경도 잊을 수 없다. 저 아래론 이어지는 참배객의 행렬과 횃불, 위로는 비행기가 남기고 간 길고 긴 하얀 선이 점점 붉어오는 하늘을 수놓고 있는 저녁 어스름의 장면이다.
불빛에 점점 살아나는 인디아 게이트를 뒤고 하고 델리 시가지를 벗어나 공항으로 간다. 길고 먼 순례길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다. 본래랄 게 따로 없지만 습에 익숙한 중생이기에 떠남이 있으면 그 자리로 돌아가 안주할 때 평온함을 찾는다.
공항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가게와 식당에 이른다. 신설로라는 메뉴라 일행의 호기심을 자아내긴 하지만 내겐 그림의 떡이다. 여행 기간 내내 삼시 세 때를 열심히 먹어냈다. 현지조리사가 동행하며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을 대령하기도 했지만, 먹는 게 여행의 뒷심인지라 평소 안 하던 짓을 했더니 여행 막바지에 탈이 좀 났다. 좀 굶어 속을 비우면 될 듯하여 죽만 먹는 등 절식을 했다. 조식(調食)하듯 언제나 마음도 다스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배어 나온다.
21시 반에야 델리공항에 도착한다. 큰 공항이 인파로 넘친다. 올 때 보았던 공항의 넓은 벽면에 부조로 장식한 부처님의 수인을 다시 만나니 반갑고 떠남이 실감난다.
입국 때와 마찬가지로 까다롭고 긴 출국 절차를 마치고 이륙한 시각은 23시 55분이다.
[11일차 12월 20일 화요일] 순례의 길에 함께한 님들이여, 안녕!
파노라마 같이 지나가는 그간의 여정을 다시 되새겨볼 새도 없이 눈을 감다 뜨다 해보니 어느새 인천이다. 6시 10분, 한국시간 9시 40분에 착륙한다.
캐리어를 기다리는 시간, 늘 미묘한 감정이다. 약간의 초조한 기다림, 언제고 내 손에 돌아올 거지만 이런 기다림은 익숙하지가 않다. 가방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다. 만남 이후, 피할 수 없는 헤어짐에 대한 떨림일 게다. 아홉 밤을 같이 자고 열하루 일정을 함께했다. 성지 순례라는 명목으로 떠난 노정에 나는 얼마나 충실했는가? 되돌아보면 늘 아쉬움과 회한은 필수였다. 순례이면서 해결해야 할 생의 과제였다.
먼저 떠난 시인 친구와 그 부군에게 나는 어떤 말과 생각으로 여행 보고를 할 것인가? 17년 만의 해후를 어떻게 전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