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 =민족 말살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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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8.19. 04:37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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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 =민족 말살 통치
1. 교과서 속 주개념
민족 말살 통치
일제는 만주 사변(1931), 중·일 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하였다. 또한 세계는 경제 공황 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이 증폭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대외 침략 전쟁을 주장하는 군부의 쿠데타로 군국주의 체제가 등장하였다.
민족 말살 통치의 목적은 침략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주요 내용으로는 황국 신민화를 구호로 내세웠고 중·일 전쟁(1930년대 후반)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선 일체, 일선 동조론 등이 있는데 이것은 황국 신민화를 표방하여 우리 민족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신사 참배 강요, 황국 신민의 서사 암송, 궁성 요배 등을 강요하였으며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학술·언론 단체를 해산시켰다. 심지어 친일 언론으로 변질된 조선, 동아 일보마저 폐간시켰다. 또한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고 개명하지 않을 경우 그 자제의 상급 학교 진학을 거부했으며 공직에 채용하지 않았다. 또한 우선 징용 대상이 되었고 식량 배급 제외 등 불이익을 주었다.
2. 확장 개념
일제의 민족(의식)말살정책 실시 이유
1920년대 말 발생한 세계 공황으로 위기에 처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경제로 대처하여 경제 공황의 위기를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이 나라들은 그만큼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튼튼했으며,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약하고 보유 식민지가 많지 않았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경제 공황의 여파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일본은 본토와 한반도를 경제 블록화 시키는 정책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는 대외 침략 정책으로 식민지를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고, 침략 정책을 주도하는 극우세력이 이를 반대하는 민주주의 세력을 탄압하면서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전체주의 세력이 출현하였고 유럽에서 독일이 확장 정책을 펼 때,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만주를 침략하는 대륙 침략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선이 확대되면서 일본 본토에서만 군수물자와 인력(노동자와 군인)을 확보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일제는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편성하고 한국인을 노동자로 징용하거나 일본 군인으로 징병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정신을 마비시키고 항일 투쟁을 약화시키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민족 말살 정치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3. 관련 지식
1) 황국신민 서사(誓詞)(1937. 10. 2.)
〈초등학교 아동용〉
• 저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 저희들은 마음을 합쳐 천왕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 저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과 일반용〉
•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자.
•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양성하여 황도(皇道)를 선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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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황국 신민의 서사는 "조선인이 일본인이다."라는 구호를 계속 외치고 서약하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가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문제인 것은 이 「황국신민의 서사」를 생각해 낸 사람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안한 사람은 김대우라는 친일파 관료였다. 그는 경성공업 전문학교 광산학과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해서 7개월간 옥살이도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친일 관료의 길을 걸어 승진을 거듭해 1936년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총독부 학무국 사회 교육 과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때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여서 총독부 학무국은 이른바 교학 쇄신과 국민정신 함양을 명목으로 황국 신민화 교육을 집행하는 최고 부서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김대우가 사회 교육 과장으로 있으면서 「황국 신민의 서사」를 제정하는 계획을 입안했던 것이다.
2) 총동원령(1938)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 상 필요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
제7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 상 필요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물자의 생산, 수리, 배급, 양도, 기태의 처분, 사용, 소비, 소지 및 이동에 관하여 필요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3) 만주사변
일본 군부와 우익은 일찍부터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등이 앞장서 만주침략 계획을 모의했다. 이들은 류탸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 소행으로 몰아, 만철 연선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세계공황으로 열강의 간섭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장쉐량[張學良]이 베이징[北京]에, 또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長城線) 이남에 집결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 1931년 9월 18일 이후 만주 점령작전을 시작했다.
관동군은 5일 만에 랴오둥[遼東]·지린[吉林] 성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의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이어 11월에는 소·만 국경을 이루는 동북3성 전역을 장악했고, 1932년 1월 장쉐량의 반만항일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하고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러허 성[熱河省]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 침략으로 세력을 강화한 일본 군부와 우익은 정국을 장악하고 일본을 파시즘 체제로 전환시키는 한편 1937년에는 중일 전쟁, 1941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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