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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감사합니다. 이렇게라도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은 우리가 흔히 달란트 비유라고 부르는 본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달란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달란트는 화폐의 단위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로 무게 단위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화폐 단위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달란트가 화폐의 단위라면 1 달란트가 얼마의 가치인지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달란트는 계산법에 따라서 아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일용직 근로자의 임금으로 계산하느냐 그리고 금값으로 계산하느냐 그리고 무게로 계산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최소 최소 1 달란트는 9억 원 전후 되는 아주 큰 금액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계산법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최소 9억 원 정도는 되는 아주 큰 금액이 달란트라는 화폐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달란트에 대한 이 화폐 가치를 크게 못 느껴요. 그것은 교회가 좀 잘못을 했어요. 주일학교에서 달란트 시장을 하잖아요. 달란트를 막 3개월 6개월 이렇게 모아서 가도 별로 살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달란트가 도대체 얼마나 큰 곳인지 잘 몰라요. 만약에 주일 학교에서 이 달란트 시장을 정말 크게 늘었다면 달란트의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이 산 교구를 가르쳤다면 성도들이 달란트가 이렇게 큰 화폐 단위구나라고 알았을 텐데 어려서부터 달란트는 별로 살 것이 없는 별로 크지 않은 화폐구나 이렇게 실물 교육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 달란트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습니다. 한 달란트는 얼마든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그리고 그것도 사업을 크게 시작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달란트를 단순히 화폐 단위의 의미로만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달란트를 재능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준비하면서 달란트 비유가 생각이 났어요. 이런 겁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을 내가 얼마나 잘 활용했을까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1년을 살았을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각종 은사들 재능들을 내가 남겨야 한다면서 1년을 부지런히 살았을까 아니면 그냥 허비하고 낭비하면서 살았을까 또 한편 하나님은 원래 나에게 어떤 것을 주셨고 나는 그것을 남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란트 비유가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오늘 본문에서 종은 우리들이고 주인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달란트 비유가 여러분과 저에게도 주는 메시지가 참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달란트, 즉 재능을 주셨다는 겁니다. 주인은 모든 종들에게 달란트를 다 주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든 성도들에게 재능을 그리고 달란트를 다 주셨다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이 관점이 참 잘못됐어요. 난 부모로부터도 받은 것이 없고, 나는 나라로부터도 받은 것이 없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
이게 우리의 생각인 거죠. 나는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 사람과 대화 나눠보면 받은 게 어마어마해요. 부모로부터도 받은 것이 많고, 나라로부터 혜택 본 것도 많고, 교회로부터 받은 것도 많고,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 많은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항상 나는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걸 먼저 고쳐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가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도 보여지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은 항상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준 것도 없고, 부모가 준 것도 없고, 교회가 준 것도 없고, 나는 혜택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항상 내가 뭔가를 받았을 때 그 받은 것들이 화려하고 돋보이고 나를 드러내게 하는 것들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예요.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화려한 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부모로부터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평생을 자랐잖아요. 제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어요. 부모님이 이 땅에 계신 날 동안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살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이 화려하지 않으니까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모의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니까 돈으로 교환할 수 없으니까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쩌면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에게 좋은 것, 화려한 것, 크고 놀라운 것, 전국에서 1등하는 재능 한꺼번에 내가 글을 쓰거나 작품을 하면 막 수십억이 들어오는 그런 재능만 되느리라 생각하고 그것만 가치 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이런 생각들을 좀 깨는 그런 구절이 있어요. 15절 말씀을 보면 주희는 달란트를 나눠줄 때 재능에 따라 나눠줬다는 거예요. 재능 여기서 재능은 능력입니다. 좀 다른 말로 하면 그릇이에요. 그렇죠.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많은 달란트를 준 거예요. 그릇이 큰 사람에게는 많은 달란트를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적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종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능력을 키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분명히 주인은 능력을 따라준 거예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재능을 줄 때 능력을 보고 주시는 거예요. 그 능력을 키운 사람 하나님은 재능을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공평하게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공평은 공산주의적 공평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공평은 능력을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평을 자꾸 공산주의적 공평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 사람이 수고해서 누리는 것들을 자기가 못 얻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고 분노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분명히 능력을 따라서, 재능을 따라서 그리고 실력을 따라서 그에게 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을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를 주신 것이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관리할 재능이 있기 때문에 두 달란트를 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어요. 그러나 주시되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이 큰 사람에게는 많이 주고 적은 사람에게는 적게 줘요. 분명히 성경은 재능을 따라 달란트를 줬다 그랬어요. 주인이 임의대로 마음대로 다섯 달란트를 준 게 아니라 재능을 따라 능력을 따라 실력을 따라 달란트를 줬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면 종이라는 출발점은 같아요. 이 세 명 다 종이에요. 신분이 종이에요. 그러면 출발점이 같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고, 한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고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을까?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키운 거죠.
자기는 종이었지만 더 많은 걸 관리할 능력을 키운 거예요. 주인이 그가 그의 능력을 키운 것을 보고 노력한 것을 보고 그에게 달란트를 준 것이지, 공산주의처럼 그렇게 임의대로 주인 마음대로 쥔 게 아니에요.
능력을 따라서 재능을 따라서 그에게 달란트를 줬다고 분명히 기록해 놨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받고 그에게서 그에게 다스렸다는 뜻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인이 능력을 따라서 달란트를 줬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는 게 오늘 본문에 또 있어요. 뭐냐 하면 달란트를 남긴 결과를 보면 진짜 능력에 따라 줬어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단어를 남겼어요. 그만큼 남겼어요. 그러니까 능력에 따라 준 게 맞아요.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어요. 능력에 따라 준 거예요. 맞아요. 주인이 임의대로 아무 생각 없이 이뻐하는 사람에게 더 주고 미운 사람에게 덜 준 게 아니에요.
주인은 평상시에 이 종들을 보고 있다가 종들이 출발점은 같았어요. 종이라는 출발점은 같았지만 자기의 능력을 키웠기 때문에 그 능력에 맞는 달란트를 그에게 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시는 분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달란트를, 달란트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달란트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게 달란트의 전제예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 주셨어요. 다섯 둘 하나 다 준 거잖아요. 한 명도 안 준 건 없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달란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달란트는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사람에게 더 많이 부어진다는 거예요. 능력을 키운 사람 달란트를 받았을 때 잘 관리할 능력을 키운 사람에게 더 많은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지난 날들에 대한 후회가 좀 따라오더라고요. 이런 겁니다. 왜 나는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을 키우지 못했을까? 내가 만일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을 키웠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10달란트, 20 달란트, 30 달란트 100달란트를 주셨을 텐데, 나는 왜 하나님이 달란트를 주시지 않냐고 원망만 하고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을 왜 안 키웠을까 이런 후회가 막 다가오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그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을 키우는 교회를 그리고 키우는 성도들을 키우는 가정을 찾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남이 받은 달란트를 부러워할 게 아니에요. 내가 그 달란트를 관리할 능력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자꾸 하나님이 자기에게 달란트를 안 주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는 안 좋은 달란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틀렸어요. 왜 틀렸냐? 하나님은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재능에 따라 그러면 당연히 달란트 관리할 능력을 내가 키워야 되는 거예요. 키운 교회에게는 많은 달란트를 주고요. 안 키운 교회는 달란트를 적게 주는 거예요. 키운 성도들에겐 달란트를 많이 주고 안 키운 성도들에겐 달란트를 적게 줘요.
가끔 보면 교회도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이 가끔씩은 있어요. 재능도 정말 많고 돈도 많고 좋은 학교도 나오고 다 가진 것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막연하게 부럽기도 하고 저 사람 어떻게 저렇게 많은 복을 받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 말씀에 비추어 보면 여전히 지난날의 내 모습이 조금 후회가 돼요.
나는 왜 이 능력을 못 키웠을까
하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없는 것에 대해서 비난은 했지만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에게 너무 몰빵을 해주셨다고 내 마음에 원망을 쌓았지 내가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 본 것 같아요.
근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말 제 마음에 깊은 곳에서 좀 이렇게 울림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두 가지 사역에 대한 마음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확실하게 말해두지만 여러분 또 시험 들까 봐 마음에 감동만 있는 거예요.
제가 아직 결정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마음에 감동만 있는 겁니다. 하나는 매일 우유 사역이에요. 취약계층 독거인을 중심으로 한 우유 배달 서비스입니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은 돌아가신 후에 발견된 이 성도의 가족 때문이었어요. 돌아가신 후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이 된 거예요. 그 사실을 제가 장례식에 가게 되었고 알게 됐어요.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그래도 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아가셨으면 돌아가신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견됐으면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플 텐데 돌아가신 후에 한참 후에 발견된 성도분의 가족을 보고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래서 우유를 배달한다는 빌미로 일주일에 한 두 번 세 번 그 과정을 계속 주기적으로 방문을 하고 그리고 이 동사무소나 우리 시청에 해당 기관과 함께 협약을 맺어서 우리 교회도 좀 재정을 대고 또 국가의 도움도 받고 주변에 기업의 도움을 받아서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이미 고독사회의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심각하게 대두됐어요. 고독사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인 거예요. 근데 한국도 서서히 이 고독사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유제품 회사의 이름처럼 들리긴 하지만 어떻든 매일 우유 사역을 고민해 봤습니다.
두 번째로는 통영권을 섬기는 섬 선교사를 후원하는 겁니다. 우리가 협력하는 낙도 선교회 소속 이정환 선교사님의 사역을 보면서 통영권에도 그분은 완덕권이 있으니까 통영권에도 그런 선교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낙도 선교회 후원회를 만들어서 연합으로 여러 교회들이 연합으로 섬 선교사를 파송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한국의 섬들을 권역별로 나누면 통영권, 완도권, 신안권 그리고 진도권, 여수권, 좀 더 크게 보면 제주권으로 이렇게 나눌 수 있어요. 5개나 6개 권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권역에 이종원 선교사님 같은 분만 한 분만 파송해도 섬 선교가 정말 활발하게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생각만 한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저나 우리는 아직 이걸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달란트를 능력을 갖춘 교회에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거죠. 교회의 외연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이렇게 능력을 키우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하나님의 일들을 달란트로 받아서 이걸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들을 좀 더 집중해서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후회감들이 마음에 조금씩 들었습니다.
이런 거죠. 하나님이 달란트를 주실 만한 능력을 내가 갖추지 못했구나. 얼마나 비판적입니까? 정말 뼈를 때리는 그런 말씀으로 제가 들고 왔어요.
나는 항상 어떤 사역을 부러워했지 그 사역을 갖출 할 만한 능력을 갖출 생각을 못했구나.
하나님은 능력을 갖춘 교회에게 사역을 주시고 능력을 갖춘 성도들에게 사역을 주시는 분이시지 능력을 가지지 못한 교회에 일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정말 몇 번이나 반복해서 능력을 키우자. 하나님의 일을 할 능력을 키우자
우리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능력을 키우자. 능력을 키우자.
할렐루야 교회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하나님께 달란트를 주시고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능력이 작은 사람에게는 작은 달란트를 주셨고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많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또 다른 관점이 하나 등장합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정산할 때 남긴 종들을 칭찬하면서 21절 말씀처럼 칭찬했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에 내가 많은 것을 내게 맡기리니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종의 입장에서 보면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것으로 자신들을 구분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 받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그런데 주인은 주인은 이 모든 것을 동일하게 적은 일이라고 표현했다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구분은 우리에게만 있는 거죠. 구분은 하나님께는 하찮은 달란트도 없다는 의미죠. 근데 우리가 구분한 거죠. 우리가 구분해서 차이를 만들고 구분했던 거예요. 달란트의 크고 적음은 적음의 기준은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 같은 불량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적은 일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입장에서 또 다른 측면이라고 그랬어요. 분량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충성을 다해야 돼요. 분량 때문에 기죽지 말고 충성을 다하자. 아무리 우리 기준에 작게 보일지라도 귀죽지 말라는 거예요. 충성을 다하라는 거예요. 아무리 우리 기준에 인간의 기준에 하찮게 보여도 하나님은 똑같은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죽지 말고 작은 일일지라도 하찬 일일지라도 충성을 다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큰 일에는 충성을 다하고 작은 일에는 설렁설렁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일들에 대해서 달란트에 대해서 우리는 다 충성해야 된다는 거예요. 종류에 따라 충성의 강도가 달라지고 규모에 따라 충성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달란트를 받았을지라도 다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에 작게 보일지라도, 우리의 기준에 다른 사람과 비교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는 충성을 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 많은 달란트를 줬고, 능력이 적은 사람에게 적은 달란트를 줬다 할지라도 우리가 해야 될 건 충성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의 능력을 작게 여기고 나에게 작은 달을 줬다고 우리가 불의한 종이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온 모든 것은 다 충성을 다해야 될 가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들은 내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하나 가진 예배도 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고요. 교회를 와 청소하는 것도 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거예요. 영혼을 구하는 일들도 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들이에요.
근데 우리는 자꾸 구분해요. 설령 하나님께 능력에 따라 좋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취해야 될 태도는 충성이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었어요. 주인의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다 충성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다 동일하게 적은 일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우리가 굳이 구분해서 큰 달란트, 작은 달란트, 큰 그릇, 작은 그릇 구분했다 할지라도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에 따라서 달란트를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될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작은 교회라고 설렁설렁하면 섬기면 돼요. 안 돼요.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가끔 원래 설교는 너무 솔직하게 하면 서로가 불편해지는데 그래도 앞에 안 계시니까 여기 막 그래도 많이 앉아 있으니까 엄청 불편할 텐데 일단 앉아 계시지 않으니까 좀 덜 불편해요. 그래서 말씀드리면 저분들이 내가 이런 비교가 이상하기도 하지만 내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목사님이었으면 목사였으면 나 이거 어떻게 했을까 이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가끔 저분들 우리 교회가 한 만 명 2만 명 되고 그래서 그런 자리에서 막 집사 직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받았을까?
물론 큰 교회에서 집사직을 받을 때도 대충 받은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차이는 분명히 날 거예요. 만 명이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직사의 직분을 받기 위해서 임명장을 받으러 나오는 것과 성도 12명 있는 교회에서 임명장을 받고 하는 마음이 같을 수 있을까요?
근데 달란트 비유에서는 같아야 된다는 거예요.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충성의 강도는 같아야 되고 하나님이 많은 달라이트든 적은 달라이트든 충성은 같아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이 귀하든 내 기준에 귀하든 작은 귀하지 않든 일 간에 충성은 같아야 된다는 거예요. 설령 나는 너무 인간적이라서 그렇게 구분해 놨을지라도 내가 그 일에 쏟아야 될 충성의 가능성은 똑같다는 거예요.
이거 달란트 비유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자기들이 작게 여긴 일에 자기들이 스스로 가치 없게 여긴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살았는가를 하나님은 보십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장사는 경제 용어예요. 이상하게 충성과 남기는 것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충성을 다하면 남겨진다는 거예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충성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남긴 거예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남긴 거예요.
그러니까 충성과 남기는 것은 같은 의미예요. 충성했는데 못 남길 수 없어요. 그게 물질적인 거든 비물질적인 거든 충성을 다하면 남는 거예요. 성도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으면 성도의 영혼이 자라거나 성도의 영혼이 자라지 않으면 성도의 숫자가 늘거나 뭔가 남는 것이 달란트에 대하는 남기는 것이 달란트에 대한 바른 자세라는 거지, 그게 진정한 충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충성과 장사해서 이윤을 남기는 그 개념을 거의 같은 개념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 중에 가치 없게 대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의 충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충성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교회에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은 다 영광스러운 것이고 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한 달란트로 장사할 생각을 못했을까 이 한 달란트에 대해서 충성을 다할 생각을 못했을까
간단합니다. 주인을 오해했어요. 24절에 보면 주인에 대해서 굳은 사람으로 오해했어요. 굳은의 의미는 거친 혹독한 난폭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을 폭군으로 알았던 거예요. 우리가 주인을 잘못 알면 충성할 수 없습니다. 주인을 제대로 알아야 충성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한 건 아직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충성하게 돼 있어요. 여러분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도 제대로 알면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요. 내가 직장인으로서 우리 기업, 내가 다닌 직장에 대해 직장을 알기 시작하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사정을 알면 사장에게 충성하고, 남편을 알면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고, 아내를 알면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거예요. 알게 되면 알게 되면 충성을 다할 수 있어요.
근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오해한 거예요. 그것도 폭군으로 말도 안 되죠.
어떻게 본문에 된장 이 주인이 폭군으로 연상이 될 수 있을까요? 항상 일 못하는 사람들은 상상이 자유로워요. 자기 마음대로인 거예요. 이렇게 오늘 본문의 주인을 폭군으로 누가 오해할 수 있냐고요.
근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오해했어요. 그래서 충성하지 못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교회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될 일은 오해는 충성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교회를 오해하잖아요. 충성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여러분이 저에게 충성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저도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해야 되고 여러분도 저에게 최선을 다해야 되는 관계는 맞잖아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오해를 하면 최선을 다 못해요.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 저도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 못하고 여러분도 저에게 오해를 하면 저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해 그래서 오해하지 않도록 늘 풀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2021년도가 하나님을 아는 해가 되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좀 자유로운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한 거예요. 교회를 알아야 교회를 충성을 다해요. 2021년은 성도들이 우리 목장 교회를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가족을 알아야 가족에 충성하는 것이 즐거워요. 여러분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게 즐겁지 않죠.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즐겁지 않잖아요. 아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게 즐겁지 않잖아요.
아닌 분도 있겠죠. 그 사람은 남편을 아는 사람인 거죠. 아내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아요. 2021년도 우리가 정말 달란트를 남기기 위해서는 알아야 충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야 많은 달란트를 남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2021년도는 여러분들이 교회 일꾼으로서 우리 목장교를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안다는 것은 충성할 마음이 생기도록 안는 걸 의미해요. 목장교회가 언제 설립되었고 남일출 목사가 7대 목사고 이걸 이게 뜻하는 게 아니라 그건 지식을 아는 거고 목장교회의 상황을 또 형편을 아픔을 연약함을 아는 것 이해하는 것 그래야 충성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이 목장 교회를 여기 세우셨고 지금까지 지키셨고 함께해 주셨으며 나를 떠나 보내지 않고 이거 있게 하신 이유를 아는 것 알면 충성할 수 있어요. 이 교회 보내져서 10년 20년을 견디게 한 이유를 알면 충성할 수 있어요. 결국 교회를 아는 사람이 교회에 대해서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을 아는 사람이 가족에 대해 충성을 다해요. 어머니의 아픔을 아는 사람이 부모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도 부모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그렇지만 항상 우리가 넉넉하지 않으니까 부족하지만 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마음이 좀 커지는 것 같아요. 아마 제 나이 또래가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부모님을 알면서부터인 거죠. 나이 든 걸 알아가고 어른이 되는 거 점점 알아가고 나니까 어머니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지는 거죠. 부부도 서로를 알아야 서로에 대해서 충성할 수 있어요. 성도도 서로를 알아야 충성하고 신실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야 남기는 장사를 할 수 있어요. 교회는 성도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교회도 잘 모르고 성도도 잘 모르고 잘 몰라요. 모르니까 충성이 안 되고 충성이 안 되니까 남겨지지 않아요. 그래서 1년의 사역이 공허하고 10년의 사역이 자꾸 공허해지는 거예요.
정말 충성하려면 알아야 됩니다. 알아야 충성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2021년도가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신뢰할 만한 자료가 하나 있어요. 전에도 잠깐 말씀드렸는데 기독교 발응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의 저자가 로드니 스타크라는 교수예요. 이 교수님이 책에서 역병과 천연두가 대 위험한 후에 기독교의 상황들을 되게 긍정적으로 봐요. 이름 뭐죠? 역병이 유행하고 난 뒤에 기독교는 부응했다는 거예요. 이 사람의 역사 책에 기록된 내용들이에요. 그러니까 역병이 일어난 이후에 천연두가 생긴 이후에 기독교는 부흥했다. 신자의 수가 늘었다는 거예요. 교회가 바이러스만 이겼을 뿐만 아니라 큰 부흥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2021년도가 좀 기대는 돼요. 실제로 영국에 있는 선교사님이 올린 글에 보니까 영국은 우리나라보다 하루 확진자가 훨씬 더 많아 한 5만 명이 넘더라고요. 그런데도 예배는 좀 자유롭게 드려요. 참 다른 모습이죠. 거기는 오히려 더 인권이나 그런 문제를 더 강조하는 나라잖아요. 훨씬 더 동성애가 더 자유롭고 안틱 기독교들이 훨씬 더 많이 활동한 나라인데도 그게 예배는 자유로워요. 그래서 거리만 유지하면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대요. 그래서 예배하는 풍경이 아주 자유롭다고 올렸어요.
그런데 그분이 최근에 영국의 기독교가 증가하고 있다는 거예요. 교회를 떠났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오히려 코로나가 오면 교회를 안 와야 정상이잖아요. 근데 교회로 오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예배를 들여오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뜨문뜨문 떨어서 예배는 하지만 평상시보다 더 많은 인원이 교회에서 예배하는 사진을 찍어서 이렇게 올리셨더라고요.
그런데 좀 기대감이 있어요. 아 이 시련이 끝난 후에 하나님이 우리 목장 교회에 부흥을 주실 것 같다 주실 것이다. 이런 기대감이 약간의 이제 마음을 흥분시킵니다. 2021년도가 기대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춰야 될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지 말자는 거예요.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기본적으로 교만이 있어요.
교만은 제대로 못 보게 만들어요. 자기 받은 달란트가 얼마나 소중한지 못 보게 만든 거예요. 사람들은 겸손해서 그렇다는 겸손해 교만해서 그래요. 잘못 보는 건 교만해. 여러분 교만한 사람이 다 삐뚤게 봐요. 교회에서도 비둘기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이에요. 교만해서 삐뚤기 봐요. 진짜 겸손한 사람은 비둘기 못 봐요.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하더라고요. 교만해서 사람이 비둘기 받는 거예요.
2021년 한 해 동안 먼저는 우리가 사역에 대해서 겸손해야 되고요. 두 번째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되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달란트 앞에서 또 많은 일들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 중에 저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2021년도 우리의 좀 그릇을 키우는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더 많은 달란트를 맡길 수 있도록 교회가 그릇을 키우고 목회자 그릇을 키우고 그릇 키우면 능력을 키우면 더 많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는 거죠. 이게 달란트 비유의 핵심이에요. 니가 능력을 키우면 내가 더 많은 달란트를 주겠다는 거예요. 관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더 많은 은사들을 주고 더 많은 달란트를 주고 더 많은 재능들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한 해 동안 좀 그런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옆에 큰 교회를 부러워하지 말고 또 옆에서 성도를 부러워하지 말고 옆에 있는 교육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 한 해 동안 내가 능력을 키우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정말 1년 동안 열심히 하나님이 많은 걸 주실 수 있는 그릇을 키워가는 한 해가 되게 한다면 아마 내년 한 해의 결산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여러분 달란트는 반드시 하나님이 결산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산의 핵심은 남기는 거예요. 남겨야 돼요. 그리고 충성스러운 단어를 쓰는데 그 충성의 의미도 남긴다는 의미예요. 남길 때 충성스러운 거예요. 우리가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이제 한 해가 시작됐잖아요. 2021년 여러분과 제가 오늘 들은 말씀을 가지고 저는 한 해를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내가 좀 한 해 동안 하나님의 그릇 담을 수 있는 하나님의 비전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담을 수 있는 지금보다 더 큰 달란트를 담을 수 있는 내가 그릇을 받게 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고 내 삶이 그런 삶이 되고 우리 자녀들이 그런 자녀가 되게 해 주셔서 기도하고 우리 한 해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