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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고전읽기(5.7.) 자료입니다.
L.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역, 갈무리 1995.
제3장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
1. 이행기 체제
소련 당국의 주장에 의하면 사회주의 체제는 소련에서 이미 실현되었다. 정말 사회주의 체제가 지구상에서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그 동안 달성된 경제적⋅정치적 성과에 의해서 세계정세와는 무관하게 소련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실현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이라도 최소한 마련되었는가?(배반78)
맑스주의는 기술의 발전을 진보의 기본적인 도약대로 간주하고 있으며 생산력의 동학에 기초하여 공산주의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우주의 어떤 재앙이 다가와서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지구가 파괴된다고 가정하면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당연히 공산주의적 전망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한다면 기술, 생산력, 문화의 발전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맑스주의는 인류 사회의 진보에 대한 낙관으로 그 내용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종교와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다.(배반78)
공산주의는 생산적 노동이 인간에서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으며 어떠한 자극이 없어도 생산적 노동이 인간 본성에 의해 수행될 정도로 높은 인간의 경제력 발전수준을 물질적 전제조건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는 계속해서 풍요하게 존재하게 되어 지금의 부유한 가정이나 “그런대로 괜찮은” 하숙집의 경우와 같이 어떠한 통제도 없이 인간의 욕구가 충족될 것이다. 교육, 습관, 사회적 여론에 대한 문제는 물론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배반78-79)
자본주의는 발전된 과학기술과 노동자계급을 창조함으로써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조건과 동력을 준비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가 곧바로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문화적 유산만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공산주의로 가는 첫걸음인 노동자국가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즉 각자가 일할 수 있고 일하기 원하는 정도에 따라 노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일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충족시킬 수도 없다. 생산력 수준을 높이는 것을 통해 공산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임금이라는 관습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즉 개개인의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질과 양에 비례하여 재화를 분배해야 한다.(배반79)
맑스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이 첫 단계를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단계를 결핍이라는 마지막 유령과 함께 물질적인 불평등이 사라지는 가장 높은 공산주의 단계와 대비시켰다. 소련당국은 공식적으로 지금 다음과 같이 공언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완벽한 공산주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는 이미 달성되었다.” 그리고 이 선언을 증명하기 위해 공업의 국가적 관리, 농업의 집단화, 상업부문의 국영기업 그리고 협동조합 기업을 예로서 제시한다. 언뜻 보면 이러한 주장은 선험적인 따라서 가설적인 맑스의 이론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배반79)
그러나 이미 달성된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소유형태만 가지고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맑스주의자들의 견해이다. 맑스에게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란 어쨌든 맨 처음부터 경제발전의 측면에 있어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보다도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회를 의미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이러한 논리에는 허점이 없다. 왜냐하면 최초의 낮은 단계에서도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발전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프랑스인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고 독일인들이 이것을 계속 발전시키고 영국인들이 이것을 완성할 것이라고 맑스는 예견했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인들은 혁명 대열의 한참 뒤에서 따라오는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인 순서는 실제 사실에 의해서 뒤집어졌다. 그의 역사적 보편원리를 특정 발전단계를 경과하고 있는 소련에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은 모두 가망 없는 모순에 곧 빠지게 될 것이다.(배반79-80)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이기는커녕 가장 약한 고리였다. 현재 소련은 세계의 경제수준을 능가하고 있기는커녕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당대에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사회화한 기반에서 형성될 사회를 맑스가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 즉 사회주의라고 불렀다면 이것은 명백히 소련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련은 오늘날에도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기술, 문화, 재화의 측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소련 체제가 보이고 있는 모든 모순적인 요소들을 인정할 경우 이 체제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형태인 예비적 체제라고 부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배반80)
결국 모든 사회체제의 힘과 안정성은 이들 체제가 생산하는 상대적 노동생산성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보다 뛰어난 기술수준을 보유하고 있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자신의 사회주의적 발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것이다. 즉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련의 경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이다.(배반80)
소련의 현상태를 속물적으로 옹호하는 자들 대부분은 대개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현재 소련이 사회주의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현재의 기반 하에서 생산력이 더 발전하면 조만간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오직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배반80-81)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 논할 때는 시간이란 결코 부차적인 요인이 될 수 없다. 정치에 있어서 현재시제와 미래시제를 혼동하는 것은 문법에서 이것들을 혼동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시드 웹과 같은 속류 진화론자들에게는 진화란 현재의 상태에서 꾸준한 축적과 계속적인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진화는 양질전화, 위기, 도약, 후퇴로 점철되어 있다.(배반81)
소련이 생산과 분배의 안정을 확보한 사회주의의 첫 단계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는 중요한 사실 때문에 소련의 발전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기보다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일 수밖에 없다. 경제적 모순은 사회갈등을 유발하고 이것은 다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생산력 증대를 기다려 주지 않은 채 자기의 길을 간다. 이것은 쿨락의 경우를 통해 진실로 밝혀졌다. 쿨락은 진화적으로 사회주의를 “기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관료집단과 그 이론가들을 놀라게 하면서 새로운 보완적 혁명을 요구했던 것이다.(배반81)
그렇다고 권력과 부를 한꺼번에 쥐고 있으면서 득의만면한 관료집단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하기를 원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많은 의구심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관료집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은 경솔한 행위가 될 것이다. 다음 3년, 5년 또는 10년간 소련 사회의 경제적 모순과 사회적 갈등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지금 최종적으로 그리고 철회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는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회 세력들 간의 투쟁에 달려 있다.(배반81)
2. 강령과 현실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계승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번째 두드러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약탈자를 약탈했으므로 이 혁명은 사회 위에 군림하는 관료기구 특히 경찰과 상비군을 쓸어 없애버릴 것이다. 그는 1917년 혁명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두 달 전에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계급은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주장은 모든 기회주의자들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오직 사멸해가는 국가, 즉 즉시 사멸하기 시작하고 즉시 사멸할 수밖에 없는 국가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덧붙이는 것을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잊어먹고 있다.”(「국가와 혁명」) 이 비판은 당시 러시아 멘셰비키, 영국의 페비안 사회주의자 등 개량주의자들에게 가해진 것이었다. 레닌의 이러한 비판은 지금 배가된 힘을 가지고 “사멸”할 의사가 조금도 없는 관료 국가를 숭배하면서 소련에 대해 아첨하는 자들에게 가해지고 있다.(배반82)
날카로운 사회적 갈등이 “순화되고”, “조정되고”, “통제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 봉착할 때마다 사회는 관료집단을 요구한다. 이 경우 항상 특권집단, 유산자 그리고 관료집단이 덕을 보게 된다. 따라서 모든 부르주아 혁명에서는 이 혁명이 아무리 민주적이라 할지라도 관료기구가 강화되고 완성되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료사회와 상비군은 부르주아 사회의 ‘기생충’이다. 이 기생충은 이 사회를 찢어발기고 있는 내부 모순에 의해서 탄생되지만 살아 있는 숨구멍을 막는 데만 소용이 있는 기생충일 뿐이다.”(배반82)
1917년 정치권력의 장악이 볼셰비키당에게 실제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부터 레닌은 이 “기생충”을 일소하는 방안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들을 「국가와 혁명」 전체에 걸쳐 설명하고 반복하고 있다. 착취계급이 타도된 후 노동자계급은 낡은 관료기구를 쓸어버리고 대신 고용인과 노동자로 구성된 기구를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구는 이들이 관료로 변하는 것을 막을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조치들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상세하게 분석되었다. (1) 선거와 피선출자의 소환이 언제나 가능해야 한다. (2) 관리들은 노동자의 임금보다 높지 않은 봉급을 받는다. (3) 사회 성원 모두가 사회통제와 감독 기능을 수행하여 모두가 잠시 ‘관료’가 되어서 어느 누구도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관료’가 되지 않을 체제로 즉시 이행해야 한다. 이 사항들이 10년 후에나 제기될 문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한 직후 바로 시작해야 하는” 첫 조치들이었다.(배반82-83)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국가에 대한 이와 같이 과감한 견해는 볼셰비키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1년 6개월 후에 완성된 표현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볼셰비키당의 강령에 명시되어 있는데 특히 군대에 대한 조항도 여기에 포함된다. 강력한 그러나 관료가 없는 국가, 무장력은 있으되 그러나 사무라이가 없는 군대체제! 군대와 국가 관료기구는 국방의 임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계급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이 계급구조가 국방 조직에 전이된 것에 불과하다. 군대는 사회관계의 못에 불과하다. 물론 외부의 위험에 대한 투쟁은 노동자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도 전문화된 군대기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국가에게는 특권을 가진 장교집단이 필요없다. 볼셰비키당 강령은 상비군을 민병대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배반83)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국가에서는 인민의 대다수를 억압하는 특별한 기구라는 국가의 전통적인 의미가 상실된다. 무기와 함께 물리력은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 조직으로 즉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이관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행되는 첫날부터 관료기구로서의 국가는 사멸을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볼셰비키당 강령의 진짜 목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 목소리는 거대한 무덤에 거하고 있는 망령의 목소리와 같이 아득한 옛날의 목소리처럼 느껴지고 있다.(배반83-84)
현재 소련의 국가 성격을 어떻게 보건 한 가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존재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그 국가는 사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멸”하지 않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례가 없는 끔찍한 강제기구로 변해 버렸다. 관료집단은 대중에게 자리를 양도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중을 지배하여 대중이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군대는 민병대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수들을 정점으로 한 특권 장교집단을 낳았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무장된 담지자”인 인민은 현재 비폭발성 무기를 소지하는 것도 금지당하고 있다.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하더라도 맑스, 엥겔스, 레닌에 의해서 구상된 노동자국가의 개념과 현재 스탈린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국가와의 차이점만큼 뚜렷한 차이점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배반84)
3. 노동자국가의 이중적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를 이어주는 교량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체제는 일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는 국가의 우발적이면서도 아주 핵심적인 임무는 자신의 해체를 준비하는 데에 있다. 이 ‘우발적인’ 임무를 실현하는 정도는 자신의 핵심적인 임무를 실현하는 성공의 척도라고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즉 계급이 없고 물질적 모순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임무의 내용이다. 관료화와 사회 평화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다.(배반84)
국가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계급지배와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져야 한다. 엥겔스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불가분의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전망을 갖게 되면 몇 십 년의 세월 정도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혁명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세대에게는 사태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생산의 자본주의적 무정부성이 개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진실이다. 그러나 곤란한 점이 있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자동적으로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배반85)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원하는 만큼의 재화를 즉시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재화를 생산하도록 독려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독려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국가가 맡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다시 자본주의에서 확립된 임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다양한 상황에 따라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맑스는 1875년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부르주아 법은…오랜 분만의 고통을 겪은 후 자본주의 사회라는 태내로부터 탄생하는 공산주의 체제의 초기단계에서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법은 경제체제 그리고 경제체제에 의해서 조건지워지는 사회의 문화적 발전을 결코 능가할 수는 없다.”(배반85)
맑스의 위와 같은 주목할 만한 견해를 설명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소비재를 분배하는 것과 관련해서 존재하는 부르주아^ 법은 당연히 부르주아 국가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법은 규범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기구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당분간 부르주아 법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없는 부르주아 국가도 존재한다!” 현재 소련의 공식 이론가들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이 매우 의미 있는 결론은 소련의 국가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배반85-86)
사회주의 건설의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하여 불평등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면 즉 소수의 물질적 특권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면 이 국가는 부르주아지가 없는 “부르주아” 국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주장에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다만 사물의 성격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주는 것뿐이다.(배반86)
부르주아 분배 규범은 물질적 능력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시작부터 곧바로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형태를 옹호하는 한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적 국가이다. 그러나 생필품의 분배가 자본주의적 가치척도에 따라 이루어지고 이것의 시행으로 나타나는 모든 결과들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한에서는 부르주아 국가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러한 모순적인 성격규정은 교조주의자들과 현학자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다.(배반86)
노동자국가의 최종 성격은 노동자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부르주아적 경향과 사회주의적 경향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후자의 승리는 사실상 경찰기구의 최종적 일소를 의미할 것이다. 즉 구가가 자치적 사회 안으로 해소될 것이다. 소련의 관료집단이 그 자체로서 그리고 하나의 징후로서 제기하는 문제가 얼마나 한없이 의미있는지는 이러한 측면을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배반86)
“부르주아지가 없는 부르주아 국가”는 진정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국가의 이중적 기능은 국가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은 이론이 명확하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을 밝혀 주었다. 부르주아 반혁명으로부터 사회적 소유형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무장한 노동자의 국가”가 아주 유효하였다. 그러나 소비의 영역에서 불평등을 규제하는 일은 이와 성격이 아주 다른 문제였다. 재산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재산을 창조하고 방어할 생각이 없게 마련이다. 다수는 소수의 특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부르주아 법”을 옹호하기 위해서 노동자국가는 “부르주아적” 유형의 기구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제복의 색깔은 다르지만 예나 다름없는 경찰기구가 필요했다.(배반87)
이제 우리는 볼셰비키당의 강령과 소련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모순을 이해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국가가 사멸하기는커녕 권력을 집중하여 전제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노동자계급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들이 관료화되고, 관료집단이 새로운 사회 위에 군림한다면 이것은 과거의 심리적 유물과 같은 이차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소수 특권층을 낳고 옹호해야 하는 거부할 수 없는 필요가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배반87)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을 교살하는 관료화의 경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완수된 후에도 모든 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혁명을 통해 등장한 사회가 빈곤하면 할수록, 이 “법”의 표현은 더 엄격하고 노골적일 것이며 관료화에 의해 등장하는 통치 형태는 더욱 조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사회의 사회주의적 발전에 더욱 위험한 장애물로 등장할 것이다. 소련 국가는 사멸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기생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이것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경^찰관이 노골적으로 선언하듯이 구지배계급의 “유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유물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물질적 결핍, 문화적 후진성 그리고 이런 요인들에 의해서 존재하는 “부르주아 법”의 지배 등과 같이 한없이 강력한 요인들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요인들은 개인의 생존 보장이라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날카롭게 모든 인간을 강제하는 필요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배반87-88)
4. “일반화된 결핍”과 경찰기구
「공산주의 선언」을 작성하기 2년 전에 청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생산력의 발전은 공산주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제적 전제조건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이는 결핍이 일반화될 것이며 결핍과 함께 생활필수품에 대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과거의 모든 넌센스가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사상을 맑스는 직접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후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닌 역시 이 사상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도 역시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소련이 그렇게 오랫동안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서 고립될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배반88)
공산주의 체제 성립에 대한 이 전제조건은 맑스에게 있어서는 공산주의 체제 성립의 전제조건을 역으로 추론하면서 구성된 추상적 사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상은 현재 소련 체제의 구체적 난관과 질병 증세를 전체적으로 조명해주는 불가결한 이론적 열쇠이다.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과 내전에 의해서 생산력이 파괴된 상황에서 소련은 절대적 궁핍에 시달렸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은 부르주아지가 타도된 다음날에 당장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몇 년 동안 그 정도가 완화되지도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때때로 유례없는 잔악성을 나타내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배반88-89)
지금에야 겨우 차르시대의 러시아와 당시 서방 사이의 생산력 격차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내부의 혼란과 외부로부터의 재앙이 없는 가장 좋은 상황을 상정하더라도 소련은 자본주의를 처음 시작한 서방 선진국이 수세기 동안 누렸던 경제적 문화적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5개년 계획을 여러 번 완수해야 할 것이다. 전(前)사회주의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적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것이 현재 소련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문화적 과업의 핵심이다.(배반89)
현재 소련은 맑스 당대의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생산력이 확실히 앞서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진영의 경쟁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상대적 수준이다. 현재 소련 경제는 히틀러, 볼드윈, 루즈벨트의 자본주의와 경쟁하고 있지 비스마르크, 파머스톤, 에이브러햄 링컨 당시의 자본주의와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세계적 차원의 기술수준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욕구 수준이 차원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고 있다. 맑스 당대의 사람들은 자동차, 라디오, 영화, 비행기 등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재화들의 자유로운 향유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란 생각할 수도 없다.(배반89)
맑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는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가 달성한 생산력 수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곧 실행에 옮겨질 소련의 새로운 5개년 계획의 표어는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자”이다. 소련의 광대한 영토에 자동차 도로와 아스팔트 고속도로 망을 건설하는 일은 단순히 미국에서 자동차 공장을 이식해 오거나 미국의 기술을 획득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자원을 필요로 할 것이다. 모든 소련 시민들이 도중에 휘발유 탱크를 채우는 데 있어서 하등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모든 방향으로 자동차를 타고 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년이 더 필요할까? 미개사회에서는 말을 탄 계급과 맨땅에서 걷는 계급이 양분되어 있었다. 자동차는 말안장만큼이나 사회계층을 구분시킨다. 아주 평범한 “포드 승용차”조차 소수의 특권으로 남아 있는 한 부르주아 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관계들과 관습은 그대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관계들과 관습은 불평등을 수호하는 국가와 함께 계속 존속할 것이다.(배반89-90)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 전적으로 기초하여 레닌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국가와 혁명」이라는 주요한 저술을 완성하였고 볼셰비키당의 강령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그는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과 고립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국가의 성격과 관련하여 모든 필요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당 강령은 관료주의의 부활을 대중의 행정과업에 대한 익숙치 못함과 전쟁으로 인한 난관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관료주의적 왜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치적인 조치들만을 처방으로 제시했을 뿐이었다. 즉 전권을 가진 모든 공직자의 선거와 소환이 언제나 가능해야 하며, 이들의 물질적 특권이 철폐되어야 하며, 대중이 국가기구를 적극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등이 이러한 정치적 조치들의 내용이었다. 이렇게 하다 보면 관료는 높으신 양반으로부터 단순하면서도 일시적인 기술자로 전락할 것이며 국가는 서서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현실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배반90)
그런데 당의 강령이 이렇듯이 임박한 난관을 명백하게 과소평가한 이유는 강령이 온전히 국제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시켰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이것이 당 강령 서문의 일부이다. 물론 당 강령 작성자들은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할 목표를 설정하지는 않았다. 이 사고는 당시 스탈린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의 머리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 강령 작성자들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미 오래 전에 해결한 경제적⋅문화적 문제들을 20년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고립된 상태에서 해결하도록 강요당할 경우 소련 국가가 어^떤 성격을 띨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다.(배반90-91)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조성되었던 유럽의 혁명적 위기는 유럽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를 구출하였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에게 “숨 쉴 틈”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던 (혁명 고립의) 기간이 한 역사적 시대의 길이까지 연장되었다. 소련의 모순적 사회구조와 국가의 초관료주의적 성격은 이러한 특이하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혁명 휴지기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자본주의체제는 파시즘 또는 전(前)파시즘의 반동기로 빠져들었다.(배반91)
국가기구를 관료주의의 해악으로부터 구출하고자 하는 첫 시도는 대중의 자치 경험의 부족, 사회주의에 헌신하는 능력 있는 노동자들의 부족 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이러한 초기의 난관이 지난 후 좀 더 근본적이고 심대한 관관이 닥쳤다. 강제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면서 “회계와 통제”의 역할만을 담당할 정도로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당 강령은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최소한 인민이 일반적으로 물질적 만족을 누린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필요조건이 결여된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배반91)
서방으로부터 소련 노동자국가를 구원하는 손길이 뻗치지 않았다. 국방, 공업, 기술, 과학 등을 담당하는 특권집단을 유지하는 임무에 온 힘을 쏟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민주적인 소비에트의 권한은 제한되고 심지어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0명으로부터 재화를 빼앗아서 한 사람에게 주는 결코 “사회주의적”이지 못한 국가행정이 수행되는 동안 분배를 담당한 전문가들의 강력한 집단이 생성되고 발전하였다.(배반91)
5.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
최근 몇 년 동안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련 정부의 성명서가 여러 번 나왔다. 특히 “쿨락이라는 계급의 일소”와 관련하여 사회주의가 완성되었다는 단언적인 성명이 있었다. 1931년 1월 30일 「프라우다」는 스탈린이 행한 연설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우리 경제에 존재하는 마지막 자본주의적 잔재들이 일소된 것이다.”(배반92)
이 전망에 기초한다면 국가는 같은 기간 동안 결정적으로 소멸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잔재들”이 없어진 상황에서 국가가 할 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볼셰비키당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따라서 모든 국가권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소비에트 권력은 모든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일부 조심성 없는 모스크바의 이론가들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잔재”가 일소된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로부터 국가의 사멸을 추론하자 관료집단은 즉시 이러한 이론이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했다.(배반92)
그렇다면 관료집단의 이론적 오류는 기본적 전제에 있는가 아니면 결론부에 있는가? 양쪽 모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처음으로 선언되었을 때, 좌익반대파는 다음과 같이 응수하였다. 당신은 생산제력의 수준이라는 근본적 기준으로부터 곧장 추상되는 것으로서의 사회법률적 관계들의 형태에 자신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그 형태들은 미숙하고 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농업에서는 아직도 매우 불안정하다. 법률적 형태들 자체는 기술수준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법은 경제적 구조와 이것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문화적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맑스) 가장 발전한 미국의 기술적 성과가 모든 경제생활 분야에 이식되고 이것에 기초한 소비에트 소유형태가 존재한다면−이것은 진정으로 사회주의의 첫 단계가 될 것이다. 낮^은 노동생산성에 기초한 소비에트 소유형태는 그 운명이 아직도 역사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이행기 체제를 낳을 뿐이다.(배반92-93)
1932년 3월 우리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끔찍하지 않은가? 이 나라는 재화의 기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단계에서 생필품이 공급되지 않고 있다. 어린이들은 우유를 마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성명은 다음과 같이 발표되고 있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 시기로 진입하였다!’ 이보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더 지독하게 훼손하는 것이 가능할까?”(배반93)
사회주의는 인간의 욕구를 가장 잘 만족시키는 목표로 하여 계획생산을 도모하는 체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주의라는 이름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암소가 사회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소의 수가 너무 적거나 암소의 유방이 너무 왜소할 경우는 불충분한 우유 공급으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난다. 즉 도시의 농촌 사이의 분쟁, 집단농장과 농민 사이의 분쟁, 노동자계급 내 다양한 계층 사이의 분쟁, 근로인민 전체와 관료집단 사이의 분쟁 등이 이것이다. 농민들이 암소를 대량으로 살육하도록 만든 것도 바로 암소의 사회화 조치였다. 궁핍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회 내부의 분쟁은 다시 “과거의 모든 넌센스”를 부활시킨다. 이것이 소련 지도부의 성명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었다.(배반93)
1935년 8월 20일에 통과된 결의문을 통해 코민테른 제7차 대회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하였다. 공업 국유화의 성공, 농업집단화의 성과, 자본주의적 요소와 쿨락 계급의 일소 등을 통해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사회주의의 승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면적인 강화가 소련^에서 달성되었다.” 단정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선언은 전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원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회체제로서의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승리했다면 독재의 새로운 “강화”는 명백한 넌센스이다. 이와 반대로 체제의 실제적인 요구에 따라 독재의 강화가 제기되면 사회주의의 승리는 아직도 요원하다. 독재 즉 정부의 억압이 “강화”되어야 할 필요는 조화로운 무계급사회의 승리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성장을 증언한다. 이런 모든 허장성세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노동생산성의 낮은 수준으로 인한 생존수단의 부족에 있다.(배반93-94)
한때 레닌은 사회주의를 “소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기화”라고 특징지었다. 이 경구의 일면적인 측면은 당시의 선전 목적 때문에 부각되었는데 최소한 자본주의 수준의 전기화를 사회주의 건설의 최소 출발점으로 간주하였다. 현재 소련 시민의 일인당 전기 배당량은 자본주의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소비에트 정치체제가 대중들의 통제로부터 독립한 독자적 정치체제로 바뀌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민테른의 선언은 관료집단의 권력 더하기 자본주의 수준의 전기화의 3분의 1이 될 뿐이다.(배반94)
스탈린: 그는 소련을 “소비에트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국가형태이고 사회주의는 사회체제이다. 국가형태와 사회체제는 동일한 개념이 아닐뿐더러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적대적인 개념이다. 사회체제가 사회주의적이라면 소비에트라는 국가형태는 마치 건물을 다 세운 후 발판이 제거되듯이 사라져야 한다. 스탈린은 자신이 한 말을 이렇게 수정한다. 사회주의는 “아직도 온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퍼센트 정도 부족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75퍼센트 정도 부족하다는 것인가? 이 점을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것이 소유형태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기술수준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정의의 애매함은 바로 1931년에서 1935년까지 그들이 선언한 훨씬 단정적인 정식으로부터 후퇴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논리가 좀 더 철저하게 추구된다면 모든 사회체제의 “근본”은 생산력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소비에트 체제의 근본은 인간의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핵심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배반95)
제4장 노동생산성을 향한 투쟁
1. 화폐와 계획
국가와 화폐는 공통된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존재는 결국 핵심적 문제인 노동생산성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화폐의 강제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강제력도 계급사회의 유산이다. 계급사회는 교회나 세속사회에서 존재하는 물신의 형태를 통해서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다. 물신들을 수호하는 역할은 물신 중에서 가장 끔찍한 물신인 국가가 담당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화폐의 자취를 감출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의 점진적인 사멸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결국 국가가 반(半)국가로 변화하고 화폐가 마술과도 같은 힘을 잃기 시작하는 역사적 순간에만 사회주의의 실질적인 승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온갖 물신들로부터 해방되어서 인간들 사이에 좀 더 투명하고 자유로우며 가치 있는 관계들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배반96)
화폐의 “철폐”, 임금은 “철폐” 또는 국가와 가족의 “일소”와 같은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요구들은 기계적인 사고의 전형을 보여줄 뿐이다. 화폐는 우리 마음대로 “철폐”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국가와 오랜 관습인 가족도 우리 마음대로 “일소”할 수 없다. 이것들은 모두 역사적인 역할을 다하고 증발하거나해체되어야 한다.(배반96)
사회적 재화가 꾸준히 증가하면 일분일초의^ 초과노동에 대한 혐오감과 공급되는 생활필수품의 적은 크기에 대한 굴욕적인 두려움 등을 가질 필요가 없는 때가 도래한다. 이때 화폐라는 물신은 마지막 일격을 받고 쓰러질 것이다. 인간에게 행복이나 불행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후 화폐는 통계 종사자들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계획의 목적을 위해 단순한 장부 영수증에 불과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수증도 아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배반96-97)
생산수단과 신용제도의 국유화, 국내 상업의 협동조합과 또는 국영화, 외국무역의 독점, 농업의 집단화, 상속 재산에 대한 법률 등은 화폐의 개인적 축적에 엄격한 제한을 가한다. 그리고 화폐가 고리대금 자본, 상업자본, 공업자본 등으로 전환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화폐의 기능이 착취와 진정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에 일소되지는 않는다. 다만 수정된 형태로 보편적인 상인-채권자-실업가의 역할을 하는 국가로 이전될 뿐이다. 동시에 가치의 척도, 교환의 수단, 지불의 수단 등과 같은 화폐의 근본적인 기능들은 그대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때보다 더 널리 활동의 장을 확대한다.(배반97)
계획경제의 실행은 화폐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위력의 한계도 드러내었다. 러시아는 1억 7천만이란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도시와 농촌간의 모순이 심각한 후진국이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실시되는 선험적인 경제계획은 이미 효험이 입증된 복음이 아니다. 차라리 그 위력이 목표 달성 과정에서 확인되고 수정되어야 하는 대강의 실무적인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계획경제에 대한 규칙을 정할 수는 있다. 즉 행정적 과업이 더 “정확하게” 달성되면 될수록 경제적 지도력이 무능하다는 사실이 더 많이 입증된다는 규칙 말이다.(배반97)
계획을 통제하고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두 개의 지렛대가 필요하다. 우선 정치적인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생산에 대해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대중들 스스로가 지도력을 확립하는 과정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다. 또한 재정적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보편적 등가물의 도움을 받아 선험적인 계산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형태를 띤다. 그런데 이것은 안정적인 화폐가 없이는 생각도 할 수 없다.(배반97-98)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상업과 무역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크게 확대되어야 한다. 산업의 모든 부문은 변모하며 성장한다. 새로운 산업부문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모든 산업 부문들은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경제 그리고 이와 함께 존재하는 폐쇄된 가족생활 등이 일소된다는 것은 사회적 교환과정 즉 화폐의 실제 유통과정으로 모든 형태의 노동을 모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농민의 안마당에서 또는 개인주택 안에서 발휘되었던 노동력이 이제는 사회의 모든 교환과정에서 합류한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제품과 서비스가 교환과정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배반98)
한편 계획경제 내부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접적인 개인적 이해 즉 이들의 이기심이 수용되지 않으면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의 이기심은 신뢰감과 융통성을 갖춘 화폐라는 도구가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자유롭게 모든 산업에 침투할 수 있는 정확한 가치 척도 즉 안정적인 통화체제가 없이는 노동생산성과 제품의 품질은 향상될 수가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로 향하는 이행기 경제에 있어서도 금본위 화폐 즉 금 태환화폐만이 진정한 화폐가 될 수 있다. 이와 다른 형태의 화폐는 오직 대체화폐에 지나지 않는다.(배반98)
물론 소련 정부는 거대한 양의 상품을 소유하고 있으며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넣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행정적 차원에서 상품가격을 국가가 멋대로 조작한다고 하더라도 국내 상업이나 외국무역을 위해서는 안정된 통화가 있어야 한다. 소련의 화폐는 경제 당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금^본위 화폐가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들의 화폐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배반98-99)
소련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좀 더 용이하게 화폐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극복할 수 있는 이유 중의 일부는 국가가 외국무역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요한 이유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 폐쇄경제라는 족쇄 하에서도 소련 경제가 질식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배반99)
기술혁명과 대규모의 실험들을 연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역동적인 소련 경제는 안정된 가치척도를 수단으로 경제성과를 계속해서 계측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소련 경제가 금본위 루블화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5개년 계획의 결과가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나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불가능한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때에 따라 닥치는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을 수도 없다. 이런 경우 경제 영역에서 더 많은 오류와 손실이 발생할 뿐이다.(배반99)
2. “사회주의적” 인플레
소련 통화체제의 역사는 경제적 난관, 성공, 실패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또한 관료집단의 정책이 좌충우돌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신경제정책이 시행되면서 1922년에서 24년에 걸쳐 루블화는 다시 등장하였다. 이것은 소비재의 분배에 있어서 “부르주아적 권리의 규범”을 회복시키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쿨락을 강화시키는 정책^이 계속되는 동안 루블화는 정부 당국에 의해서 예의 주시되었다. 이와 반대로 5개년 계획의 초기에는 모든 인플레 요인들이 통제에서 해제되었다.(배반99-100)
경제적 모험주의에 한참 경도되고 있던 때에 스탈린은 신경제정책 즉 시장관계를 “악마에게나” 주어버리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치 1918년의 경우처럼 소련의 언론은 모두 상거래가 “사회주의적 직접 분배”로 최종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식량배급표가 발급되어 새로운 정책의 표상이 되었다. 동시에 인플레는 소련 체제와는 전혀 융합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완전히 배격되었다. 1933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에 의해 상품이 대규모로 통제되어 안정된 가격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소련의 화폐가치는 안정되고 있다.” 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공언은 이후 전혀 상세히 설명되거나 발전되지 않았다.(배반10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소련 화폐이론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발언을 통해 거부한 인플레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이후 루블화는 보편적 등가물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상품의 보편적 그림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루블화는 스스로를 짧게 하거나 길게 하는 권리를 보유하였다. 현실을 덮어 놓은 채 자기위안에만 탐닉하는 스탈린의 화폐이론이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련의 화폐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더 이상 가치척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안정된 가격”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정해진다. 체르보네츠 금화는 계획경제의 관습적인 이름에 불과한 허깨비이다. 다시 말하면 루블화는 보편적 배급표이다. 한마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사회주의는 “최종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승리했다.(배반100-101)
소련의 지배층은 계획경제가 시행되고 있으므로 인플레는 하등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완전히 푹 빠졌다. 나침반을 가지고 있으면 배에 물이 새더라도 아무 위험이 없다는 생각과 비슷한 논리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통화 인플레는 필연적으로 신용 인플레를 가져오면서 가상의 수치들이 현실의 수치들을 대체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결국 계획경제가 내부에서 삭아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배반101)
인플레는 근로인민에게 끔찍이 무거운 세금이라는 사실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플레의 도움으로 획득된 사회주의의 강점은 지극히 의심스럽다. 물론 산업은 계속해서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건설사업의 경제적 효율은 통계에만 나타날 뿐 실제 경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블화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관료집단은 특정 계층과 경제부문들에게 자기들 마음에 내키는 대로 다양한 정도의 구매력을 선사하였다. 이 결과 관료집단은 객관적으로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측정할 수 있^는 긴요한 도구를 스스로 박탈해 버렸다. “기존 루블화”와 합쳐져서 서류상에만 올라 있는 수치들로 인해 정확한 회계는 실종되었다. 이로 인해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저하되고 생산성이 낮아지고 제품의 품질은 더 낮아졌다.(배반101-102)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이 해악은 위협적인 수위까지 육박하였다. 1931년 7월 스탈린은 그의 유명한 “6개 조건”을 들고 나왔다. 이것의 최고 목표는 공업제품의 생산비용을 낮추는 것이었다. 노동생산성에 따른 임금지불, 생산비용에 대한 회계 도입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조건들은 새로운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부르주아적 권리 규범”은 신경제정책이 시작될 즈음에 이미 제출되었었고 1923년 초에 열린 제12차 당 대회에서 더욱 발전되었었다. 1931년이 되자 자본투자의 효율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긴급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때가 되어서야 스탈린은 과거에 이미 실천에 옮겨졌던 정책을 새로운 것인양 다시 천명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언론의 거의 모든 기사들은 이 “6개 조건”의 구원 능력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한편 인플레는 계속되었다.(배반102)
“비개성”과 “균등”은 익명의 “평균” 노동과 모든 사람들에게 비슷한 “평균” 임금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련 당국은 “비개성”과 “균등”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관료집단은 신경제정책을 “악마에게” 주어버렸다. 신경제정책은 노동력을 비롯한 모든 재화를 화폐를 기준으로 계산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이것을 폐기하는 것은 “비개성”과 “균등”에 대한 투쟁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관료집단의 혼란된 방향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거의 믿을 수 없는 정도로 기이하였다. 한손으로는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회복시키면서 다른 손으로는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도구를 폐기하고 있었던 것이다.(배반102)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 대신 국가의 자의적 계산과 행정조치에 따라 분배가 시행되었다. 가격체계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자 수행한 노동의 양과 이에 따라 지급되는 임금 사이의 조응관계가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관심과 동기유발이 함께 사라졌다.(배반102-103)
회계, 제품의 품질, 생산비용, 생산성 등에 대한 엄밀한 당국의 지시사항들도 이제 공중에 붕 뜬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데 소련의 지도자들은 모든 경제적 난관의 원인을 스탈린이 언명한 6개 조건을 악의적으로 시행에 옮기지 않았다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인플레에 대한 아주 조심스러운 언급도 체제에 대한 범죄라고 이들은 못박았다.(배반103)
당국이 시장관계를 “악마에게” 주어버리겠다고 허풍을 떤 것에 대해서 좌익반대파는 국가계획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표어를 걸어놓을 것을 권유하였다. “인플레는 계획경제의 매독이다.”(배반103)
농민에 대한 정책이 쿨락을 위주로 시행되고 있을 때는 농업의 사회주의화가 신경제정책의 기반 하에서 협동조합을 통해 수십 년에 걸쳐 완수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협동조합은 구매, 판매, 신용의 기관이 되어 장기적으로 농업생산을 사회주의적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이것은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이라고 명명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실제 과정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게 그리고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즉 국가의 폭력과 통합적 집단화를 통해 쿨락의 청산작업이 진행되었다.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물질적⋅문화적 조건을 준비해 나감과 동시에 농업의 각 부문을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하자는 예전의 정책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농업에서 공산주의가 즉각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집단화가 추진되었을 뿐이었다.(배반103-104)
강제적 농업집단화의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소련 전역에서 가축의 절반 이상이 도축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커다란 해악이 닥쳤다. 집단농장에 속한 농민들이 사회주의적 소유형태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노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완전한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그러자 당국은 서둘러서 기존 정책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농민에게 닭, 돼지, 양, 소 등을 제공해주면서 이것들을 개인재산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집단농장 옆에 농민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텃밭을 조성해 주었다. 집단화과정의 필름이 이제는 완전히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배반104)
현실에서는 이 후퇴가 심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집단농장의 귀족들을 제외한다면 일반 농민들의 일상적인 필요는 집단농장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텃밭의 소출을 통해 더 많이 충족되고 있다. 농민 개인 자기 농장에서 기술영농을 채용하고 과일농장, 가축종자농장을 경영할 경우 그의 수입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경우에 비해서 3배 정도나 많아지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소련 언론에도 보도되고 있다. 정책의 후퇴를 통해 영세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포함하여 수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노동력은 완전히 야만적으로 낭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농장의 노동생산성은 지극히 낮은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배반104)
대규모 집단농장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농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즉 시장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현물^세를 폐지하면서 상거래를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다시 말하면 너무 일찍 악마에게 주어버린 신경제정책을 다시 빼앗아 오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안정된 통화회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농업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이 되었다.(배반104-105)
3. 루블화의 복권
이미 언급했듯이 스탈린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내용의 “6개 조건”을 천명했었다. 이제 그의 의도를 고분고분한 교수님들이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시장가격에 대비되는 소비에트 가격이 계획적 또는 지시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전혀 새로운 이론이 탄생하였다. 즉 소비에트 가격은 경제 범주가 아니라 행정적 범주이며 사회주의의 이익을 위해 인민의 수입을 재분배하는 데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생산비용을 알지 못한 채 어떻게 가격을 “지도”할 수 있으며 모든 가격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이 아니라 관료집단의 의지를 표현한다면 어떻게 진짜 생산비용을 계산할 수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교수 양반들은 까먹어 버렸다.(배반105)
당국은 인민의 수입을 재분배하기 위해 필요한 세금, 국가예산, 신용제도 등 아주 강력한 지렛대들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다. (…) 인민의 소득을 계획적으로 분배하는 데 있어서 예산과 신용체제는 아주 유효하다.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실제 경제관계들을 상품가격이 정직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면 할수록 사회주의의 대의에 더 훌륭하게 봉사할 것이다.(배반105)
“지도” 가격은 학자들의 책 속에서나 그럴듯해 보이지 실제 생활에서는 별볼일이 없었다. 같은 상품에 전혀 다른 범주의 가격들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범주들 사이의 널찍한 간격을 통해 모든 종류의 투기, 특혜, 기생행위 등을 비롯한 해악들이 판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해악들은 예외가 아니라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동시에 체르보네츠 금화는 안정된 가격의 정직한 반영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배반106)
그런데 다시 정책을 급격하게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등장했다. 이제는 계획경제가 성과를 거두면서 난관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935년 벽두에 빵 배급표는 폐지되었다. 같은 해 10월 다른 식량품목들에 대한 배급표가 사라졌다. 1936년 1월이 되자 일반 소비재 공업생산품이 배급에서 해제되었다. 도시와 농촌이 국가와 맺는 경제관계가 화폐로 매개되기 시작했다. 이제 루블화가 대중이 경제계획에 대해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먼저 소비재의 질과 양을 통해서 이 영향이 행사된다. 이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소련 경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배반106)
1935년 12월 국가계획위원회의 의장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은행과 산업 사이에 지금 존재하는 상호관계는 수정되어야 하며 은행은 루블화를 통해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실현해야 한다.” 이로써 행정적 계획에 대한 미신과 행정적 가격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루블화가 배급표로 바뀌는 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면 1935년의 개혁은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고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관점은 어설픈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루블화가 배급표를 대체하는 것은 허구를 거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부활시키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 확보의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배반106)
1936년 1월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재무인민위원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소련의 루블화는 세계 어느 통화보다도 안정되어 있^다.” 이 발표를 순전한 허풍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루블화의 안정을 나타내는 요소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재무인민위원의 발표는 낙관적 분위기가 상당 정도 부풀려지면서 나왔다. 산업생산이 증가하면서 루블화의 가치가 크게 오르고 있다. 그러나 생산비용이 너무 높은 것이 여전히 치명적인 약점이다. 소련의 노동생산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져서 결과적으로 화폐가 필요 없을 때가 가까워질 때에만 루블화는 가장 안정된 통화가 될 것이다.(배반107)
소련이 금본위제로 회귀하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하다. 그러나 당국이 금 보유고를 늘리는 것을 통해 순수 이론적인 계산을 통해서마나 통화를 금으로 포괄하는 비율을 늘릴 수 있다. 이 결과 은행의 지폐 발행 규모가 관료집단의 의지가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제한된다면 최소한 루블화의 상대적인 안정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만 되더^라도 소련 경제는 크게 이익을 볼 것이다. 미래에도 인플레를 계속해서 강력하게 억제한다면 루블화는 금본위제의 이점은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지난 기간 동안 관료집단의 주관이 경제에 입힌 깊은 상처를 많은 부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배반107-108)
4. 스타하노프 운동
주요한 측면으로만 환원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노동시간 절약을 위한 투쟁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착취의 철폐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노동시간보다 더 짧은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진정한 사회주의는 실현된다. 이 조건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착취의 근절은 한편의 드라마에 불과할 뿐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배반108)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적용한 첫 번째 역사적 실험은 사회주의가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인류문화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원자재인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식을 소련은 결코 배우지 못했다. 선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수입한 기술은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는 주요한 도구인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만큼 많은 생산물을 소련 영토에서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문명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승리할 수 있고 승리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과시했을 뿐이다.(배반108)
올바르게 평가해서 몰로토프는 공식적으로 거짓 발언만을 일삼는 다^른 소련의 지도자들보다 좀 더 솔직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그는 1936년 1월에 개ㅚ된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의 평균 노동생산성 수준은…미국과 유럽에 비해 아직도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문화수준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것보다 여전히 낮다.” 이 발언에 다음의 말을 덧붙여야 한다. 평균 생활수준도 역시 낮다. 지나가면서 내뱉은 그의 말이 지닌 진실성은 수없이 많은 소련 정부기구의 자부에 찬 성명서와 소련의 외국 “친구들”의 사탕발린 찬사의 분출을 가차 없이 논박하고 있다!(배반109)
국방에 대한 우려와 함께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는 투쟁이 소련 정부의 근본정책이다. 소련이 발전하는 단계마다 이 투쟁은 다양한 성격을 지녀왔다. 제1차 5개년 기간 내내 그리고 제2차 기간의 초기에 주로 사용된 방식은 “돌격대” 방식이었다. 이것은 선동, 개인의 모범, 행정적 압력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집단 포상과 특권을 동원한 방식이었다. 1931년 스탈린이 6개의 조건을 교시한 이후 시도된 일종의 도급제는 루블화의 허깨비 같은 성격과 가격체계의 이질성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돌아갔다. 관료집단의 변덕에 따라 운용된다고 말할 수 있는 소위 “프리미엄 체계”를 지닌 융통성 있는 노동평가제를 대신해서 생산품을 국가가 직접 분배하는 체제가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자 엄청난 규모의 특권을 따내기 위해 돌격대의 대오에는 특별한 연줄을 가진 사기꾼들이 침투하여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체제는 원래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데 그쳤을 뿐이다.(배반109)
물가를 안정시키고 통일시키는 조치는 배급표 제도의 철폐를 통해서만 시작되었다. 이로써 도급제 시행의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기반 하에서 돌격대 방식은 소위 스타하노프 운동으로 바뀌었다. 이제 진짜 가치를 갖게 된 루블화를 손에 넣기 위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한 기계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노동시간도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크게 보자면 스타하노프 운동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시간의 연장을 의미했다. 소위 “비노동시간”에 스타노프 운동원들은 작업장의 의자와 도구를 정리하고 원자재를 분류하였다. 그리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면서 7시간 노동일은 말뿐이고 실제 노동시간은 현재 훨씬 길어졌다.(배반109-110)
소련의 노동자들은 도급제에 대해서 공감을 나타내기는커녕 적대감을 가지고 대했다. 이 반응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스타하노프 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특히 관리부문에 있어서 단순한 출세주의자나 사기꾼에 비해서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대부분은 새로운 임금체계를 봉급의 차원에서 평가한다. 그런데 새로운 임금체제로 인해 월급봉투가 점점 얇아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배반110)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사회주의의 승리” 후에 소련 정부가 도급제로 돌아선 현상은 언뜻 보면 자본주의 생산관계로의 후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루블화의 복권에 대해서 말한 것을 여기서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조야한 환상을 거부한 것에 불과하다. 변화된 임금 지불 형태는 소련의 현실에 적합하기 때문에 등장했을 뿐이다.(배반110)
루블화는 사회주의적 소유형태에 기반하여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불 원칙을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 루블화를 더 많이 손에 넣기 위해 노동할 경우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즉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신경과 근육의 상태에 맞추어 노동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 일하게 된다. 도급제 방식은 조건적으로 그리고 엄혹한 필요 상황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새롭고 높은 문화를 주창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자본주의라는 낯익은 오물에 냉소적으로 짓이기는 것과 같다.(배반111)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량과 소비량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반면 사회주의는 자본이라는 착취의 천재에 의해서 발명된 것보다 더 인간적인 통제 형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재 소련에서는 자본주의에서 빌려온 기술에 낙후된 인적 자원을 가혹하게 끼워 맞추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배반111)
유럽과 미국의 노동생산성을 성취하기 위해 도급제와 같은 고전적인 착취방식이 노골적이고도 조야한 형태로 도입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 노동조합조차 이러한 착취형태는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소련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한다는 말은 역사적인 전망 속에서 파악할 때에만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이 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노동자가 전제적인 관료집단의 통제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어쨌든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가 똥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생산력 중에서 가장 거대한 생산력인 인간을 소모시키는 가혹한 착취체제를 성스럽게 만들지도 못한다.(배반111-112)
생산과정들이 밀접하게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상황에서 계속적인 높은 생산량의 달성은 몇몇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서 실현될 수 없다. 개별 공장과 기업 사이의 관계에서 생산과정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평균 노동생산성은 높아질 수 없다.(…) 문제는 전체적 차원에서 노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새로운 생산과업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노동자들보다 소련의 관리자 집단이 일반적으로 훨씬 더 능력이 뒤지고 있다.(배반112-113)
스타하노프 운동의 초기에는 저항, 태업,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스타하노프 운동원에 대한 살해를 이유로 기술적 요원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 탄압의 가혹함은 저항의 정도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소위 “태업”을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저항은 대개의 경우 기술적⋅경제적⋅문화적 어려움에 근원을 두고 있다. 특히 관료집단 자체에 어려움의 원인이 대부분 존재한다.(배반113)
소련 경제에 존재하는 모든 동업조합을 제지하고 마비시키는 사회적 동업조합의 이름은 관료집단이다.(배반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