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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47. [역경의 열매] 조동순 (1-10) 팔순 내 인생, 파란곡절의 한 곡 춤사위였다
진주고 합격에도 등록금 없어 발동동… 교장 "너 잃으면 학교가 손실 아닌가?"
사진: 6번의 고등고시 실패로 낙담에 빠져 좌충우돌하고 있을 때 이화여대 출신 천사 박옥연이 찾아왔다. 1964년 존경하는 강정용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인생은 한 곡(曲)의 춤과 같다고 했던가. 팔순을 넘기면서 지나온 세월의 파란곡절을 더듬자니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엎드려 오열하고, 다시 일어나 용기백배 날아오르다 어지러이 돌아가는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나는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심부름을 잘하고 똘똘해 마을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진주중학교에 다닐 때는 장래 큰 지도자가 돼 고향 사람들에게 보답하려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운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배구부장, 웅변부장, 부운영위원장을 맡는 등 바쁜 학창시절을 보냈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 진학할 수 없게 됐다. 며칠을 두문불출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 진주고 교장실을 찾았다.
"이번에 입학시험을 본 조동순입니다. 합격은 했는데…돈이 없어서 우야면 좋겠습니까."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시던 교장 선생님은 수험번호와 이름을 적어 놓고 다음날 다시 오라고 하셨다. 아마도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조동순이라…. 자네 같은 학생이 돈이 없어 입학할 수 없다는게 말이 되나? 우리 학교의 손실 아이가."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집에 가서 되는 대로 돈을 구해 오라고 하셨다.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집에 돈이 될 것이라곤 돼지 한 마리밖에 없었다. 재산 목록 1호인 돼지를 팔고 이웃 어른들이 보내 준 계란을 모두 팔았지만 등록금의 반이 채 못 됐다. 그 돈을 가지고 교장실에 갔다.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시더니 서무과장을 불렀다.
"이놈한테 책걸상을 내주소." 그 후 나는 고등학교 3년간 등록금 한 푼 안 내고 졸업할 수 있었다. 그분은 내 인생길에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멘토가 되셨다. 바로 강정용 교장 선생님이다. 강 선생님은 진주중·고와 보성고 교장을 지냈다. 강 선생님의 장남은 에디슨과 노벨 등이 이름을 올린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2009년 2월에 헌액된 고(故) 강대원 박사다. 강 선생님은 서울 보성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 아들과 딸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놓고 명륜동 작은 집에서 외롭게 지내고 계셨다.
주말이면 빠짐없이 찾아가 내외분을 모시고 서울근교로 바람을 쐬어 드리고 약주도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미국에 유학 중인 아들과 딸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부랴부랴 직원들과 같이 묘소도 구하고 무사히 장례를 치렀다. 강 선생님의 장남 강 박사와 가족들은 장례식 후 도착해 나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지만 난 되레 죄인 아닌 죄인이 된 것 같아 고개를 바로들 수 없었다. 잘 모시지 못한 자책감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남을 도울 수도 있고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도움을 받은 이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란 거의 없다. 다행히 나는 일평생 동안 가장 큰 은혜를 입었던 스승님의 마지막 길을 지켜드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린다.
나는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해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좋아한다. 그는 서른이 채 안 된 나이지만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줬다. 바로 '전력투구'다. 공 한 개에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기특하다. 나는 오늘도 그의 건승을 기도한다. 지난 81년의 세월을 글로 쓰기 시작하니 그저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날아갈 듯 예쁘게 차려입고 무대에 오른 발레리나의 삶을 상상해본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수십 번 발톱이 빠졌고 발바닥은 굳은 살가죽으로 변했다. 내가 살아온 팔십 여정도 이와 같다. 인생은 한 곡의 춤과 같구나 하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동순 (1) 팔순 내 인생, 파란곡절의 한 곡 춤사위였다
* [역경의 열매] 조동순 (2) 믿음의 일가 이룬 외할머니의 애잔한 기도 소리
* [역경의 열매] 조동순 (3) 남대문시장 천막 가게에서 제일후직 대표이사로
* [역경의 열매] 조동순 (4) 회사 부도로 교도소… 눈만 뜨면 성경·영어공부
* [역경의 열매] 조동순 (5) 가난·궁핍의 나이지리아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 [역경의 열매] 조동순 (6) 아웅산 테러서도 살아남았던 믿음의 친구 홍순영
* [역경의 열매] 조동순 (7) "아프리카 54개국을 코리아 제품으로 도배하자!"
* [역경의 열매] 조동순 (8) "한국도 할 수 있다" 초대형 천막지붕 사업 도전
* [역경의 열매] 조동순 (9) 성경 속 성막에서 힌트 얻은 최첨단 천막 개발
* [역경의 열매] 조동순 (10·끝) 타이가의 미션 "하나님 장막으로 열방을 덮자"
◇약력=1933년 경남 의령 출생. 5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67년 남대문 천막가게 취업. 68년 제일후직 대표이사. 70년 제일중직 대표이사. 78년 ㈜타이가 설립. 98년 주한 카메룬 명예영사. 현 타이가 회장. 분당 예수소망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조동순 (2) 믿음의 일가 이룬 외할머니의 애잔한 기도 소리
외조부는 시인으로 유고집 '하정시집' 외할머니 덕에 우리 집안 모두 신앙을…
사진: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경남 '의령 상정리 조씨고가' 사랑채 앞에서 필자(맨 왼쪽)와 삼영화학을 창업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종환 이사장(가운데)이 고택을 둘러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의령 상정리 조씨고가(宜寧 上井里 曺氏古家)'. 경남 의령군 화정면 화정로3길 13(상정리 471의 2).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난 지 60년 만인 1993년 12월 27일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됐다.
이 집은 창녕 조씨의 종가(宗家)이지만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건물의 배치는 전체적으로 조선시대의 부유한 농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데 안채를 중심으로 구성된 'ㅁ'자 형태이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화려한 팔작지붕을 연출함으로써 집주인의 부유했던 경제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몰락한 빈농에 불과했다. 건물의 구조는 왼쪽부터 부엌 큰방 대청 건넛방 누마루가 배치돼 있다. 부엌 앞쪽에 방을 마련하여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밖에도 사랑채, 행랑채, 곳간 및 디딜방앗간, 가묘(家廟), 별채, 마구간, 대문간 등을 갖추고 있다. 우리 집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17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여러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 따라서 이 집의 건물들은 구조와 세부 양식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기별로 건축의 양식이나 특징을 연구하고 비교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나는 집만 덩그러니 큰 우리 집보다 고성 학동 외갓집이 더 좋았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시인으로 78세에 돌아가셨다. 손자 최재호 박사도 시인으로 진주 삼현여중고를 창립했다. 최 박사는 할아버지의 한시를 번역해서 '하정시집(夏亭詩集)'을 세상에 펴내 외손과 친손들이 다 읽고 감동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에 갔다. 학동까지는 아침 일찍 떠나도 해거름에야 도착한다. 의령에서 진주까지 70리(약 28㎞) 길을 버스를 탄 뒤 다시 고성 가는 버스를 타고 하일면 소재지에서 내려 동산이재라는 높은 재를 넘는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꿈결 같은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난생 처음 보는 바다는 어린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산 아래 기와집이 소복이 모여 있는 제법 큰 동네에 외갓집이 있었다.
어머니의 꿈 많던 유년시절과 소녀시절의 추억이 배어 있는 고즈넉한 동네다. 동백꽃이 발갛게 피어있고 어디선가 유자향기가 풍겼다. 구순 문턱에 들어선 외할머니는 빨갛고 두꺼운 책을 돋보기를 쓰고 읽고 계셨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만나자 '어무이∼' 하면서 우셨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부터 흘렸을까. 그런 막내딸을 보고 외할머니도 울고 또 우셨다. 나와 여동생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다. 유교 집안이자 양반 댁이라고 이름난 집에서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였을까. 이상한 전염병이 돌았다. 하루에 19세, 23세 남매를 잃은 외할머니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서 실성하셨단다. 외할아버지는 남부끄럽다고 산속에 별장을 지어 공부하셨던 '서재골'로 들어가셨다. 그때 한 전도사가 외할머니를 전도해서 믿음을 가졌다고 하셨다. 노년에 친정 손녀가 어머니가 사시는 서울 개포동 집에 와서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시는 날 며느리들에게 밖에 천사가 금수레를 타고 데리러 왔다고 하시면서 편안한 모습으로 천국에 가셨다고 했다.
"숙현아! 그라모 나도 천국 가모 어무이 만나보것네!" "하모요, 징조 할무이가 천국에 꼭 계실 낍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열심히 교회 나가시고 저녁식사 후 기도가 시작되면 끝날 줄 몰랐다. 그렇게 완고하셨던 아버지도 목사님께 자기 장례식을 부탁할 만큼 믿음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셨는지 우리 오남매에게도 씨가 돼 모두 신앙생활을 잘하게 해주셨다. 외할머니는 우리집안 믿음의 조상이다.
***[역경의 열매] 조동순 (3) 남대문시장 천막 가게에서 제일후직 대표이사로
6년 고시공부 실패로 사촌 가게 취업 주님 은혜에 직원 1000명 회사로 성장
사진: 1999년 고려대 교우회 신년 하례식에서 김정배 고려대 총장(가운데),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을 수사 지휘했던 김일두 변호사(지난해 별세)와 기념촬영하고 있는 조동순 회장(왼쪽).
195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일자리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쌀독은 늘 허기진 상태였고 이화여대 '학과 퀸' 출신의 아내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합격만 하면…." 마냥 '응시효과'(고등고시)만으로 버틸 순 없었다. 6년 동안 고등고시에 매달렸지만 허송세월만 하고 말았다. 정치판에도 눈을 돌렸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돌아섰다. 마침내 손때 묻은 수십 권의 책과 노트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어렵사리 사업 자금을 마련해 경험도 없는 규석광산 사업과 '갈포벽지' 사업에 손을 댔다.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고 빚만 잔뜩 짊어졌다.
연탄 50∼60장만 있으면 겨울을 날 수 있었지만 그마저 형편이 안 됐다. 단칸방 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자 주인은 당장 방을 빼라고 윽박질렀다. 어쩔 수 없이 집세가 더 싼 서울 구로구 천왕동 논 한가운데에 있는 전셋집으로 밀려났다. 이때까지 별 말이 없던 아내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여보, 제가 나가서 일을 해야겠어요. 교사자격증은 둬서 뭣하겠어요."
아내는 내 눈치를 봐가며 은밀한 제안을 했다. 다행히 남대문중학교에 시간강사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듣고 바로 지원했는데 당장 출근해도 좋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아내는 왕복 4시간 걸리는 출퇴근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갔다. 아내가 출근하면 집안일과 3남매를 돌보는 것은 내 차지였다.
가장이 변변치 못해 얘들 엄마까지 등 떠민 것 같아서 맘이 편지 않았다. 새벽녘에 하도 가슴이 답답해 밖으로 나오니 언덕 위에 있는 교회에서 종지기가 새벽종을 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아프게 가슴을 때렸던지…. 종소리가 그칠 무렵 나는 정신을 차리고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제발 나에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출근하는 아내의 그림자를 밟고 무작정 남대문시장으로 갔다. 먼 친척 동생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천막 가게였다. "고시공부 하던 고매한 분이 이 험악한 일을 어째…." 친척 동생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악착같이 천막과 씨름했다. 나를 위해 청춘을 포기한 아내와 철부지 3남매를 굶길 순 없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급자족 정책'으로 모든 군수품을 수입하지 않고 국내 생산 공장이 조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몰라보게 덩치가 커진 가게는 어느새 큰 회사가 됐다. 군수물자 납품 업체로 지정된 회사는 매년 300% 이상 성장률을 보였다.
67년 마침내 나는 제일후직㈜ 대표이사가 됐다. 부산 공단에 직원이 1000명 정도 일하는 큰 회사로 변했다. 1년 후에는 제일중직㈜ 대표이사까지 맡고 경기도 용인 포곡면에 직원 1000명 규모의 공장도 신설했다.
갑자기 회사가 커지니까 사돈의 팔촌 등 알고 지내는 사람 대부분이 취직을 부탁했다. 나는 이들의 손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 받아들였다. '너무나 일을 하고 싶었던 나의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직원이 엄청나게 늘어남에 따라 인건비도 많이 들어갔다. 전문 경영인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회사는 나날이 발전했다.
그러다가 결국 대박이 터졌다. 1000만 달러(100억원)짜리 신용장을 받은 것이었다. 생산 라인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무조건 밀어붙였다. 당좌수표 5억원을 발행하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아내에게 자랑하면서 이제 교사직을 그만둬도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사업이 잘된다고 자만하시면 안 돼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아요."
***[역경의 열매] 조동순 (4) 회사 부도로 교도소… 눈만 뜨면 성경·영어공부
횡령·배임 무혐의로 7개월 만에 출옥… 회사 '타이가' 설립한 후 나이지리아로
사진: 조동순 회장이 1983년 아프리카 아이보리코스트에 설립한 타이가 사진 현상소에 현지인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4千萬원 不渡혐의 第一重織 代表 拘束(속보=삼성물산 관리업체인 제일중직 및 제일후직에 대한 수사를 해온 서울지검은 7일 두 회사 사장을 겸하고 있는 조동순(曺?純)씨가 4천4백여만원의 부도수표를 낸 혐의를 잡고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날벼락이었다. 1977년 2월 7일 꽁꽁 얼어붙은 이른 새벽. 나는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조간신문 사회면(7면) 오른쪽 하단에 집게손가락 크기(세로 7㎝ 정도)로 장식된 기사를 보고 난 뒤에야 죄인이 됐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전날 삼성물산 사장실에서 이 모 사장님을 기다리던 중 난데없는 형사 2명에게 붙잡혀 난생 처음 수갑을 차고 교도소로 끌려갔다. 검찰에 잡혀가 조사 받는 과정에서 내가 발행한 1000만 달러(100억짜리 당좌수표)가 부도났다는 것을 알았다. 뒤늦게 나는 아내가 말했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교만과 탐심으로 자족하지 못하면 여지없이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울 땐 기도의 배를 타세요."
만시지탄이었다. 회사와 2000여명의 직원, 그 가족들에게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날부터 교도소 내 비치용 성경책과 함께 '잉글리시900'(영어회화 교재)에 푹 빠져 살았다. 눈만 뜨면 성경과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복역한 지 6∼7개월 됐을까. 반가운 친구 둘이 면회를 왔다. 유엔 대사를 지낸 박수길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홍순영이었다. 고려대 법대를 나온 박수길은 해인사에서 고등고시 공부할 때 한 방을 썼던 친구다. 고등고시 시험 보러 올라와서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 출신의 홍순영을 소개시켜줬다. 홍순영은 자신이 정리해 놓은 '족보노트'를 기꺼이 빌려줬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노트를 빌려준 이는 2등을 하고 정작 박수길이 1등으로 합격한 것이었다. 둘은 이후 외무부를 좌지우지했다. 박수길이 매번 한발 앞서 나갔고 홍순영은 그의 그림자를 따랐다. 수길은 탁월한 외교관 기질이 있는 친구였다. 나는 6년 동안 머리카락이 빠지도록 공부해도 패스하지 못한 고등고시를 박수길은 6개월 공부해서 1등으로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비범했다. 홍순영은 나중에 외무부 장관을 먼저 지냈고 박수길은 유엔 대사를 역임했다.
"니, 여기서 뭐하노? 밥 한번 거나하게 산다고 안했나?" 두 친구는 죄수복을 입은 나에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오지 않겠느냐면서 몸 건강히 잘 지내기를 기도했다. 그러면서 홍순영은 풀려나면 자기와 함께 나이지리아에 가자고 했다. 두 친구가 면회를 다녀간 지 오래지 않아 배임과 횡령 등이 무혐의로 판명돼 7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출옥하자마자 나는 회사를 차렸다. 아프리카 정서에 맞는 이름으로 '호랑이'(타이가)만한 것이 없었다. 고려대의 상징이기도 한 타이가(他利加)는 '타인의 삶을 이롭게 한다'는 이웃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는 아주 특별한 이름이었다.
회사는 차렸지만 국내에선 왠지 사업하기가 싫었다. 7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 생활에 염증이 나기도 했지만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78년 나는 홍순영의 인도대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땅을 처음 밟았다. 한인교회는 낯설고 물 선 타국 생활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주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홍순영이 소개해준 나이지리아 한인교회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됐다. 30∼40명 교인들이 똘똘 뭉쳐 날마다 기적을 이루는 코리아 환상곡을 만들어갔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사진 촬영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면 무려 한 달 이상이나 걸렸다. 그래서 한국인이 하는 빠른 사진현상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역경의 열매] 조동순 (5) 가난·궁핍의 나이지리아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회사 부도가 아프리카 진출의 서막 친구 홍순영 전 장관 든든한 후원자돼
사진: 1983년 12윌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시 중심가에 개장한 당시 카메룬 최대 규모의 백화점 타이가 아케이드.
1958년 내가 대학 문을 나설 때도 취업문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았다. 당시 내 목표는 취직이었고 나중에 사업가로 성공해 '취직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진출은 꿈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1977년 대형 부도가 나지 않았더라면 아프리카 프로젝트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게 다 사전에 잘 짜놓은 시나리오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착착 진행되는 것 같았다. 고등고시 불합격도 그렇고 동네 천막 가게 종업원에서 2000여명 직원을 거느린 대표이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부도가 난 사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 쉰이 넘어서도 나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섰다. 1년의 3분의 2 이상을 현지에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나이지리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에조'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나이지리아 군장구류의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자 에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금을 대고 내가 기술을 제공해 섬유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군장비는 수요가 1년에 한두 번에 그쳐 한계가 분명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반면 현상인화 기술이 낮아 주로 유럽 쪽 기술을 통해 몇 주 만에 사진을 찾는다는 사실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 길로 나는 한국과 일본에서 기자재를 사고 한국인 기술자를 고용해 사진현상소를 차리게 됐다. 이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나는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카메룬 자이르 등에도 현상소를 설립해 서부 아프리카의 현상소, 타이가상사의 명성을 얻게 됐다.
아프리카의 시장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석유 다이아몬드 보크사이트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곳이었다. 여기에 우리나라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나라 곳곳에 묻혀있는 엄청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갔다. 83년 12월,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시 중심가에 타이가 아케이드라는 이름의 카메룬 최대 백화점을 세웠다. 여기에는 국내 16개 업체에서 일부를 임대해 주방기구, 화장용품, 스포츠용품, 조명기구, 가구, 완구, 액세서리 등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다.
백화점 종업원은 우리나라 사람이 40명, 현지인이 60명인데 현지인 모집에는 1600여명이 응모했고 그중에는 장관이나 군 장성 등 사회지배계층이 줄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지만 마음속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몸은 나이지리아에 있지만 마음은 늘 서울에 있었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지난 45년이라는 세월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린 것에 대한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경영하던 회사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잊을 만하면 다시 살아나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굶주리고 배고픈 나이지리아 청년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리더가 되세요." 아프리카에서도 나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매주 월요일 아침에 열리는 직원 예배에서 CEO가 되기를 꿈꾸는 현지인들에게 큰 비전을 제시했다.
80년 주(駐)나이지리아 공사로 온 홍순영이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나보다 세 살 정도 어렸지만 생각하는 수준이나 마음 씀씀이는 되레 형 같은 존재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는 제일 먼저 홍 공사와 상의했다.
그때마다 홍 공사는 "나에겐 묻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시게.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지만 그분의 말씀은 차원이 다르다네. 서울에 가거든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을 한번 찾아가봐. 그분은 자네가 평생 동안 기대고 의지해도 좋을 분이지…."
***[역경의 열매] 조동순 (6) 아웅산 테러서도 살아남았던 믿음의 친구 홍순영
호텔에 남아서 자료 챙기다 구사일생… 최근 작고 전까지 애국가·찬송가 불러
아웅산 테러서도 살아남았던 믿음의 친구 홍순영
사진: 지난 주말 박수길 전 유엔대사(오른쪽)를 만나 과거를 회상하며 남은 삶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조동순 회장.
1983년 10월 9일 한글날.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왔다. 버마(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이 아웅산 묘소에서 강력한 폭발 사건이 발생해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아니야, 그럴 리가….” 사실이었다. 대통령 정무제1비서관을 맡고 있던 친구가 날벼락을 맞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망자 중에는 불행 중 다행으로 친구는 없었다. 후에 그에게 전해들은 사연은 이랬다. “호텔에 남아서 인도와 관련된 자료 좀 챙기시오. 비행기 안에서 볼 수 있도록 말이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홍순영 비서관에게 수행하지 말고 호텔에 남아 있으라고 했단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테러 때도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이 이렇게 먼저 가다니 기가 막혔다. 이번에도 아니기를 빌고 빌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4월 30일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영결식은 지난 5월 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외교부장(葬)으로 치러졌다.
그는 대한민국 외교사에 길이 빛날 별이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추모사에서 “고 홍순영 장관은 정직과 원칙을 소신으로 삼아 평생을 굳힘 없이 실천한 진정한 외교관”이라며 “협상의 현장에서는 누구도 내기 어려운 용기를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하며 국익을 지키는 데 진력하시던 모습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한다”고 밝혔다.
그는 40여년 외교 행정관으로 권력의 속성에 물들지 않았다. 원칙에 벗어난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김대중정부 때 외교통상부와 통일부 장관 등을 지낸 홍 전 장관은 대사 시절 한국의 대(對)공산권 수교에 첨병 역할을 했다. 그는 도미노가 하나하나 넘어지듯이 수십년간 잠겨 있던 동구권 국가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우리 외교사의 새로운 장을 써내려가는 등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2001년 9월 통일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북한의 떼쓰기 행패를 바로 잡으려고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는 상호협상 원칙을 양보하지 않아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리고는 임명 4개월 만에 경질됐다. 그는 40여년간 한눈팔지 않고 외길을 걸었다. 2000년 당시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차관으로 발탁해 유엔 사무총장이 될 발판을 마련하게 해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 전 장관은 최근 지병이 악화되자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친구의 얼굴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나에게 평생 동안 갚지 못할 신앙의 유산을 남기고 갔다. 세상에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떠난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그의 마지막 흔적을 조금이라도 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결례를 무릅쓰고 장황하게 얘기했다.
홍 전 장관은 최근 기억력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애국가’ 가사만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찬송가 438장을 자주 불렀다. 오늘은 홍 전 장관이 떠난 지 정확히 두 달이 되는 날이자 호국보훈의 달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한국교회를 걱정하며 기도했다. 천국의 문턱에서도 뒤를 돌아보며 남은 자들을 걱정하며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간 친구가 보고 싶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그립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주에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할렐루야 찬양하세/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그 어디나 하늘나라.”
***[역경의 열매] 조동순 (7) “아프리카 54개국을 코리아 제품으로 도배하자!”
현지 방문한 전두환 전대통령도 놀라
사진: 1982년 부인 박옥연 권사와 타이가 컬러현상소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조동순 회장.
1980년대 초 나이지리아는 네온사인이 드물었다. 당시 밤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거리의 풍경을 연출한 ‘타이가 컬러현상소’는 명물이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 중 하나가 사진 현상소이다. 사진현상소 중 70%는 한국인들이 운영하고 있다. 아마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내 이름 석자는 몰라도 ‘타이가’라는 브랜드는 기억할 것이다.
타이가의 명성은 당시 아프리카 순방 중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오찬 회동 때 찍은 사진이 그날 만찬장에 앨범으로 만들어져 전달됐기 때문이다. 전 전대통령은 이후 아프리카에 진출한 사진현상소의 활약상을 곳곳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에서의 사업은 1983년 군부 쿠데타로 세후 샤가리 정부가 붕괴되면서 분수령을 맞았다. 나는 인근 코트디부아르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수도 아비장에 컬러 현상소를 차렸다. 이후 85년 세네갈, 86년 카메룬 두알라, 88년 콩코(자이레)에도 현상소 법인을 만들었다. 또 다른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프리카 54개국을 메이드인 코리아 제품으로 도배하자.”
다음 목표는 아프리카에서 ‘백화점왕’이 되는 것이었다. 안팎의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MBC문화방송이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지구촌 한국인’에 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졸지에 유명인사가 됐다. 수출입은행에서 필요한 자금을 다 줄 테니 무슨 사업이라도 시작만하라고 할 정도로 회사의 신용이 좋았다. 과욕이 문제였다. 사진 현상소 장소를 물색하다가 이전에 영화관을 하던 건물이 탐이 났다. 사업 자금상태도 확인하지 않고 덥석 계약부터 했다.
은행에서 아프리카 어디든지 깃발만 꽂으면 돈을 다 대주겠다는 말만 믿은 게 잘못이었다. 사업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결국 48시간 내에 수십 만 달러를 서울로 송금하지 않으면 모든 사업이 다 부도가 날 위기에 처했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생각지 못한 도움의 손길이 날아들었다. 카메룬 현지 은행에서 30만 달러가 입금됐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간신히 부도 위기를 넘긴 이튿날 그 은행 관계자가 다시 나타나 “시티은행에서 잘못 입금된 돈”이라며 당장 다시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서울로 송금을 했기 때문에 갚을 수 없다”고 버티자 은행 관계자는 연 13% 이자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분할 상환할 것을 제안했다.
마침내 87년 12월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서 이 나라 최대 규모 백화점 ‘타이가 아케이드’를 세웠다. 건물을 임대해 2층짜리 백화점으로 개조했다. 500평(1652.8㎡)의 매장을 마련하고 직물, 도자기, 화장품, 조명기구, 완구, 목재가구, 액세서리 등 국산제품을 다 팔았다. ‘아프리카에 국산품을 취급하는 백화점을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88서울올림픽 때는 카메룬 선수단을 김포 공항에서부터 안내하고 선수복과 신발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이에 카메룬 정부는 감사의 선물로 어업라이센스를 주고 카메룬 명예영사로 위촉해주었다.
하지만 과욕이 부른 부와 명성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값싼 중국 상품이 재래시장에 밀려들면서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콩고 내전이 격화되는 등 주변국 환경이 날로 악화돼 백화점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백화점 경영난으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아내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애초부터 백화점 사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처음으로 돌아가세요. 서울로 돌아가면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겠어요.”
아내의 충고대로 즉시 백화점을 정리했다. 사진 현상소도 현지인들에게 넘겨주고 미련 없이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역경의 열매] 조동순 (8) “한국도 할 수 있다” 초대형 천막지붕 사업 도전
“국내 기술론 안된다” 주위 만류에도 2000년 서울월드컵경기장 수주 성공
사진: 타이가가 지난 2월에 완공한 인도네시아 포스코 제철소 저탄장 모습. 폭 100m, 길이 700m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막막했다.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1991년 아프리카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무턱대고 아무 일이나 벌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를 찾아갔다.
“새로운 사업도 좋지만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해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조 사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곽선희 목사님의 말씀대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기도했다. 며칠 후 일본중포신문사(일본의 천막전문신문사)의 수토 사장한테 연락이 왔다. 그와는 67년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역시 천막이었다. 이 일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용천막은 이미 여러 회사들이 일하고 있었고 그들과 경쟁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토 사장은 나에게 현대 건축기술이 접목된 첨단 천막을 새로운 사업아이템으로 만들라고 권했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보았던 미국의 조지아돔, 일본의 도쿄돔 등의 대형 천막건물들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까지 한국에 없던 천막을 만들자! 미싱으로 봉재를 해서 만들던 천막이 아닌 새로운 시설과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천막….”
당시 국내에는 새로운 천막을 생산하는 시설이 없었다. 건축용어로는 ‘막구조물’ 이라고 불렀다. 천과 천을 붙이는 기계, 천을 자동으로 자르는 컴퓨터 재단기, 천막을 설계하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필요했다. 설계기술을 가지고 있는 외국설계엔지니어도 소개 받았고, 공장 제작기술도 도입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9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엑스포가 대전에서 열리게 됐고, 전시장으로 이런 첨단천막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건설사, 감독, 설계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막구조물은 국내기술로 가능하지 않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시설과 기술이 있으니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주요 전시장용 막구조물은 모두 외국인들에게 넘어갔다. 타이가에게 주어진 일은 은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작은 그늘막이 전부였다. 요즘에는 동네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그늘막이다. 이것도 우리의 기술을 믿지 못하는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겨우 따낸 터였다.
지금 타이가는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기술에 대한 의심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회사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아무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술개발과 홍보, 재료 개발 등 여러 일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진국에서는 오랜 세월이 걸려 개발한 기술들인데 우리는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첨단 천막에 대한 기술들을 확보하게 됐다. 마침내 96년에는 서울 여의도에 중소기업전시장을 우리 기술로 짓게 됐다. 국내 최초의 공기 막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70m, 110m에 달하는 초대형 천막이었다.
2000년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수주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때까지도 스타디움 지붕으로 쓰이는 천막공사는 모두가 일본, 미국, 독일 등의 외국회사의 차지였다. 그러나 지붕이 절반 정도 올라갈 때까지도 서울시는 우리의 기술을 믿어주지 않았고, 건설사에는 승인이 나지 않는 공사를 하고 있는 꼴이 되어 결국 서울시로부터 공사중단 지시가 떨어졌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런 국가적인 중요한 프로젝트를 실적도 없는 업체에 맡긴 것은 잘못이다”라는 것이 서울시 담당자의 입장이었다.
낙심에 젖어 있을 때 서울시에서 우리도 모르게 외국의 유명한 막구조전문가를 초빙해 현장에서 조사를 시켰다. 며칠동안 지붕 구석구석을 샅샅이 조사한 이 전문가는 공식회의 석상에서 설계, 제작, 설치가 모두 뛰어난 A급 막구조라고 평가했다. 모든 것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서울시 담당자는 처음으로 웃음을 머금고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역경의 열매] 조동순 (9) 성경 속 성막에서 힌트 얻은 최첨단 천막 개발
제주월드컵경기장 지붕막 훼손 등 주님, 위기 때마다 늘 지혜·도전 주셔
사진: 2010년 일본인 기술고문 유바씨(왼쪽)와 함께 진주종합운동장 지붕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조동순 회장.
“타이가의 기술이 최고다. 마침내 우리가 해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방패연 모양의 반투명 지붕이다. 이 지붕 구조물은 타이가의 작품이며 자존심이다.
37년간 한 우물을 파며 막구조 대표 기업으로 성장한 타이가는 군용천막과 오일펜스 등을 만드는 회사로 서울월드컵경기장, 고양종합운동장, 성남종합운동장, 안산스타디움, 수인선 월곶역사, 청도 소싸움경기장 등 수많은 경기장의 지붕을 덮었다. 현재는 서울 구로구 서울(고척)돔구장 지붕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프로야구 LG트윈스 훈련장을 짓는 등 체육시설의 쾌적한 환경을 만드는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뼈아픈 기억도 있다. 제주월드컵경기장 공사를 수주하게 됐다. 제주월드컵경기장은 서귀포 바다와 한라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지어진 아름다운 경기장이다. 그러나 이곳이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지역이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다. 매미의 엄청난 위력에 타이가의 자랑거리인 제주월드컵경기장의 지붕막이 훼손되고 만 것이다. 이 소식은 뉴스를 통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경기장의 구조설계를 담당한 외국구조설계 사무소에서 제주의 바람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교만에 대한 따끔한 사랑의 회초리였다. 경기장 지붕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비난과 손가락질이 쏟아졌다. 모든 영업과 공사가 중단됐다. 회사는 부도 위기에 서게 됐다. 몇 개월에 걸쳐 전문가들에 의해 사고원인 조사가 이어졌다. 조사결과 타이가의 잘못이 아니란 사실이 확인됐다.
결국 2차 보수공사 업체로 다시 타이가가 선정됐다. 물론 공사비는 모두 받았다. 공사기간도 충분히 주어졌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타이가는 부도 위기를 넘기며 오히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기술들을 개발하게 됐고, 이 기술들은 타이가를 1등 막구조 회사로 서게 하는 밑거름이 됐다.
태풍 매미는 잠시 겸손을 잃어버린 타이가를 다시 순한 양으로 만들었다. 결국 제주월드컵경기장 지붕 사고는 위기 때마다 살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또다시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
내 인생 80년은 이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고등고시 6번 실패로 나 자신을 알게 하셨고, 천막가게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기적을 주셨지만 교만하였을 때 여지없이 나를 치셨다. 그 가운데 길을 열어주셔서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던 아프리카 5개국을 개척하게 하셨고 많은 돈을 벌게 하셨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을 잊었을 때 백화점 사업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됐고, 회사를 살려주시기 위해 은행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사무착오로 30만 달러가 우리 회사 계좌로 입금돼 부도를 막는 기적도 보게 하셨다. 또 아프리카에서 맨손으로 돌아왔을 때 사업 아이템으로 ‘첨단천막’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내 입술이 자랑으로 가득할 때 제주월드컵경기장 지붕막으로 나를 단련시키셨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지혜를 선물로 주셨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셨던 성막과 비교할 수 있는 새로운 천막이다. 성막에 쓰인 소재와 타이가가 사용하는 소재를 비교해 보면 성막은 프레임으로는 청동을, 덮개로는 천과 해달가죽, 숫양가죽 등을 썼는데 그 당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였다. 타이가가 새로 개발한 텐트는 프레임으로 철이나 알루미늄 소재를, 지붕과 벽으로는 PVC 원단을 사용한다. PVC 원단과 철은 100% 재활용되는 소재이다. 성막은 안쪽, 두 번째, 세 번째, 바깥의 총 4개의 층으로 되어 있어서 방수와 단열이 우수했을 것이다. 타이가의 텐트도 성막과 같이 4개의 층으로 이뤄졌다.
***[역경의 열매] 조동순 (10·끝) 타이가의 미션 “하나님 장막으로 열방을 덮자”
최첨단 ‘뉴텐트’로 올초 교회 첫 시공… 통일 땐 北에 3000 천막교회 짓는게 꿈
사진: 지난 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원천교회 옥상에서 조동순 회장(오른쪽)과 조병욱 사장이 열방을 섬기는 타이가의 새 비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열방을 하나님의 장막으로 덮는 것이 타이가(他利加)의 미션이자 나의 마지막 꿈이다. 내가 이루지 못하면 다음 세대가 이어갈 것이다. 하나님은 4년 전 조병욱(원천교회 집사) 사장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장막으로 열방을 덮겠다’(We Cover The Earth)는 것이다.
타이가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개발에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첫 열매로 이중공기막(인도네시아 포스코제철소 저탄장)이라는 독창적인 구조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 하나는 뉴텐트(New Tent)라는 새로운 제품이다. 천막을 활용해 교회와 주택, 사무실 등을 짓는 사업이다. 그 동안 타이가는 천막으로 지붕만 있는 구조물을 지어왔는데 이제부터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천막건물까지 지을 수 있게 됐다. 뉴텐트로 불리는 이 천막건물은 서울월드컵경기장 지붕을 만들던 타이가의 첨단기술과 해외의 여러 선진 기술을 융합해서 만든 결과물이다. 장점은 일반건물에 비해서 비용이 싸고, 빠르게 지을 수 있으며, 설계에 따라 옮길 수도 있고, 튼튼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천막이라 하면 싸구려라는 이미지에 여름에는 덥고, 수명이 짧은 것이 단점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살기 어렵다. 그래서 타이가가 개발한 것이 보온 단열 소음차단 내구성 등이 획기적으로 좋아진 새로운 텐트이다.
뉴텐트의 이름은 ‘노마 하다쉬’로 며느리 유정민(원천교회) 권사가 지었다. ‘노마’는 텐트라는 뜻의 고대어이고 ‘하다쉬’는 ‘새로운’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며느리가 며칠 동안 기도해서 지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할렐루야’를 외쳤다. 기원전 1400년 이스라엘 땅에 세워졌던 성막을 2012년 한국에 새롭게 세우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사용했던 그 텐트를 이제 새롭게 현대적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려놓음’을 쓴 이용규 선교사님이 천국의 노마드(Heavenly Nomad)라는 얘기를 했는데, 노마드 하다쉬는 유목민처럼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순종의 삶을 의미한다.
올해 초에는 포항 할렐루야교회를 뉴텐트로 지었다. 첫 장막교회이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던 장막교회의 장점이 발견되어 정말 감사했다. 앞으로 이 새로운 텐트로 더 많은 교회를 짓고 어려운 이웃들도 섬기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 지구촌 곳곳에서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해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나라의 이웃들을 위해 학교, 교회 등을 빠르고 경제적으로 지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통일이 되면 북한 땅에 3000개의 교회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된다. 여기에도 타이가의 뉴텐트가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타이가는 지금까지 천막을 만들게 하시며 가르쳐주신 기술을 바탕으로 열방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타이가에서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 동역한 동생 조주순 회장, 그리고 일을 벌이는 데 선수인 나의 독단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해온 조병욱 사장과 임직원 여러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물론 아내 박옥연(서울 남포교회) 권사가 가장 큰 조력자요 하나님의 메신저였음을 고백한다.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은혜에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다. 천막으로 열방을 덮는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고 믿고 이제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마지막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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