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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산성당, 순교자 구한선 묘 경남 함안군 대산면 대산 중앙로 183 모진 매질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젊은 순교자 순교복자 구한선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른이 된 후 소촌[文山] 교우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집에서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옥에서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간 뒤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온 지 7일 만에 장독으로 인해 선종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의 ‘신씨’들 묘소 한구석에 묻혔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고향 인근 하기리에서 순교자의 묘를 찾아 1976년 평림리 가등산 자락으로 이장했습니다. 대산 본당은 2002년 5월부터 마산교구의 대표적인 순교자 중 한 명인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9월 18일 묘지 축복식을 갖고 부대시설과 십자가의 길, 야외제대, 순교 현양비, 대형 십자가 등을 설치해 순례자들을 맞이 했습니다.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지 주변이 공장지대가 되고 소음 및 순례자들의 접근성이 떨어지자 2016년 10월 복자의 유해를 인근 대산 성당에 조성한 무덤 경당으로 이장하고 복자 구한선 타대오 순교성지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대산성당 지하에 있는 <무덤경당> 야외 무덤이 똑 같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미사가 시작됩니다. 강론하시는 신부님 미사후 성당을 나서는 신자들 성당 뒷편으로 야외 무덤이 보입니다. 당초 옮겨온 묘소인데,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성당 아래 경당으로 모셨다가 이곳에도 유해를 모셨다고 합니다. 지하 경당과 똑 같은 모양이지요? 무덤 뒤로 보이는 가시관 쓰신 예수님의 형상 2. 복자 신석복 마르코 파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247(진영 성당 공원묘지) 신앙의 후배들과 함께 누워 순교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나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낙동강을 건너는 명례 나루터에는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정착했고,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듯합니다. 제대 바로 옆 우측이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소였으나 최근 파묘하여 명례성지로 이장하여, 미정리된 상태로 묘터에는 꽃다발만 덩그마니 놓여 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사하러 갔다 오던 중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를 안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한 푼도 주지 말라.”며 대구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형을 받으면서도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습니다. 결국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왔지만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고, 1975년 12월 진영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회장님의 설명을 듣는 교우들 이곳은 천주교 교우들의 장지여서 묘소들이 나란히 형성되어 있습니다. 파묘된 복자의 묘소를 떠나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착찹해보입니다.
성역화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명례는 오래된 교우촌으로 1897년 현 마산교구 관내에 처음 설립된 본당입니다.
한국의 세 번째 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부임해서 사목하다가 1903년 명례에서 선종했습니다. 현 성당은 강성삼 신부가 1898년에 처음 지은 후 1928년 권영조 신부 때 기와로 다시 지어 축복식을 가진 성당이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된 후 1938년에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입니다. 명례 성지는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2010년 생가터와 성당 주변을 매입하여 돌제대를 설치했고, 그 해 12월 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등록되었습니다. 2011년 1월부터 성지 담당신부가 부임하여 신석복 순교자 생가 터의 축사를 이전 철거한 뒤 6월에 사제관과 생가터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이어서 2018년 5월 생가터에 신석복 마르코 성당을 건립해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3. 복자 박대식 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30(책골) 죽어서도 선산에 못 묻히고 남의 문중 산에 평장으로 누워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2년 현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입교한 후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8년 무진박해 때 대구와 김해에서 온 포졸들에게 잡혀 조카 박수연과 함께 김해 관아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고, 대구로 압송되어 감영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합니다. 결국 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가족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와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인근의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습니다 그 후 1956년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했습니다. 1966년 진영 본당 주임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고, 2001년 그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이 밝혀졌습니다. 진례 성당은 매년 후손들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박대식 빅토리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
첫댓글 처음 순례부터 우리들의 이야기 기록해주신
권헬레라 자매님 수고하셨습니다.
대단한 솜씨 열의에 찬 순례 기록
순교자들의 삶을 다시 한번 묵상 해보네요
이젠 2년 세월이 지나 단 두 곳 순례지만
남았네요.감사 감사 합니다.
한결같이 훌륭한 순례기록 올려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좁은산길이 있어서 회장님이 걱정하셨는데 날씨도 포근하고 모두 무탈히 다녀오면서 정말 축복받은 순례단이라는 맘이 들더라구요.
감사히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