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영웅 특집
2019년 가을호
영웅 채명신 장군
- 이순신 이후 백전백승의 장수 채명신 이야기 -
박경석
맹호제1진 在求大隊長(예 육군준장)
전쟁문학협회 회장 (시인, 소설가)
3. 백골병단의 빛나는 위훈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대공세를 펴자 유엔군과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정보 당국에서조차 병력 규모를 알지 못하고 제각각 맞지 않는 정보를 흘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중공군의 병력 규모는 유엔군 측 판단보다 훨씬 대규모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장비는 보잘것 없었고 심지어 개인 병기 대신 수류탄만 가진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더구나 원시적인 전법을 구사하면서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다가오니 공포에 질린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후퇴를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채명신 대대 역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분산 남행하는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채명신은 군 경력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를 바로 이 적지 탈출과 남행 과정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채명신 소령이 적지 탈출에 성공한 후 대구 육군본부에 귀환보고를 하면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이 훗날 백골병단으로 이름 붙여진 국군 최초의 적지 유격대이다.
당시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적 후방에 병력을 침투 시켜 적을 교란할 수 있는 유격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엔군사령관은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가 "북한군은 게릴라를 우리 후방에 침투 시켜 곳곳에서 기습을 가하고 있는데 왜 우리 국군은 단 한 명 적의 후방에 침투시킬수 없는가" 라고 치근대자 군사 경력이 전혀 없는 영국 상선 선장 출신 신성모는 즉석에서 "우리도 침투시키겠다"고 확답해 버렸다. 그러나 유격대원 선발에서부터 어려움이 생겼다. 유격대를 지휘할 리더 지원자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해보겠다고 나선 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채명신 중령이었다.
채명신 중령은 유격대 편성에서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다. 채명신의 구상으로는 육군 병사 가운데 숙련된 정병으로 편성하려 했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이미 선발된 청년들로 고집했다. 그러자 채명신은 육군본부 지시를 거역할 수 없었다. 채명신은 할수 없이 현역병이 아닌 스스로 지원한 혈기 왕성한 청년들로 편성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고도의 훈련을 포기하고 총 쏘는 것부터 기초 훈련을 시킨 후 애국심과 반공정신 그리고 청년의 체력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훈련 중에도 유엔군사령부에서는 계속 유격대의 적지 투입을 독촉했다.
훈련이 끝날 무렵 유격대의 명칭을 '결사11연대'로 정하고 노획 인민군의 병기에 인민군 복장으로 갖추니 외견상 한국군 최초의 인민군 부대가 탄생했다. 한편 조폐공사에서는 인민은행 위조지폐가 분배되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성공하고 돌아오면 신분을 보장하고 인민군 계급을 국군 계급으로 특진 시키겠다" 고 약속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적지 투입을 앞두고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직접 유격대원으로부터 출동신고를 받고 그자리에서 훈시를 통해 "국군 최초의 유격대원 여러분의 장도를 축하한다"고 전제한 뒤 "성공해 귀환하면 지금의 인민군 계급에다 2계급 특진 계급으로 승진시킬 것을 약속한다" 고 신성모 국방장관 보다 한술 더 떴다. 그러나 훗날 성공해서 살아 돌아온 유격대원에게 이 약속은 지켜지진 않았다.
1951년 1월 하순 '결사11연대'로 이름 붙여진 국군 최초의 유격부대는 가림막으로 가려진 10여 대의 트럭에 나누어 타고 영월 동북방 침투 시발지점으로 향했다. 침투 출발지점에는 놀랍게도 이한림 장군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출정이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알게 하는 장면에서 채명신은 책임의 중대함을 느꼈다.
'결사11연대'는 이렇게 하여 영월 동북방 태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물밀듯 남진을 계속했지만 일단 38선 가까이에서 진격이 주춤해졌다. 공산군의 병참선이 멀어지고 미 공군기에 의한 일방적인 폭격으로 많은 희생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인민군은 국군과 유엔군에 쫓기면서 많은 타격을 받았기에 재정비가 안된 상태에서 남진을 하다보니 지칠 때로 지쳐 있었다. 따라서 인민군 관할 후방지역에 대한 치안은 거의 방임 상태에 있었으므로 채명신의 '결사11연대' 의 적지 활동은 순조로웠다. 부분적으로 길목을 장악하면서 인민군의 이동에 타격을 가해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에 고무된 육군본부는 채명신에게 계속 유격대원을 증원해 규모가 커지자 '백골병단'으로 호칭을 바꿔 부르게 되었다. 지역에 제한은 있었으나 때로는 일정 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를 떨쳤다. 이에 백골병단의 사기는 충천돼 있었고 차근차근 타격 목표를 상향 조종하기에 이르렀다.
3월 중순 어느 날 잠복중인 대원이 인민군 연락병을 생포해 본부로 데려왔다. 그를 신문한 내용에서 '인제군 기린면 기림리 군량발이라는 마을에 인민군 왕별이 묵고 있는데 경계가 심하다' 는 진술을 확보했다. 채명신은 왕별이라면 장군이고 중요직위 거물임을 추정하고 정예 대원 3명에게 임무를 주어 확인해 오도록 했다. 며칠이 지난 후 3명의 정찰 대원이 무장 자위대원 한 명을 생포해 왔다. 그로부터 얻은 정보는 채명신도 놀라는 대어급 특보였다. 바로 그 왕별은 조선공산당 제2비서 겸 인민군 현역 중장이며 대남 유격대총사령관 길원팔(吉元八)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행은 10여 명 뿐이라 했다. 채명신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하늘이 도운 목표라고 마음 먹고 즉각 체포 작전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면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생포작전의 상세 내용은 여기 지면 관계상 밝힐 수 없지만 이 작전을 채명신 자신의 직접 지휘하에 포위 기습을 감행, 길원팔을 위시한 일행 모두를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채명신은 길원팔을 귀순 시켜 데려가려고 시도했지만 끝까지 불응 죽기로 작정하므로 본인이 원하는대로 권총 자결케 하고 매장후 그 지역에서 철수했다. 길원팔 일행으로부터 압류한 서류 일체를 수습한 뒤 귀환길로 향했다. 인민군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귀환길에서 인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을 입었지만 결국 탈출에 성공 대구 육군본부에 도착 정일권 총장에게 귀환 보고를 하면서 길원팔 일행으로부터 노획한 중요서류 일체를 제출 유엔군과 국군의 작전에 큰 기여를 했다. 채명신의 백골병단 유격작전은 세계 유격작전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승첩으로 기록되었다.
백골병단 총 병력수는 647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364명이 적지에서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 전적비
백골병단 전적비와 역사전시관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 3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지나는 분들은 백골병단 전적비를 찾아 묵념하고 역사전사관을 들러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생전 모습도 만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창군 이후, 적지에서의 유일한 대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