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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그 사람들이 보고싶다 송진자(나주시 남평읍) 지금쯤 그들도 40대 초반이나 중반쯤 되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잘 지내는지? 이름도 모르고(그때 가르쳐 주었지만 잊어버렸음) 만나 보아야 얼굴도 기억이 잘 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꼭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그날 5월 27일 새벽에 시민군으로 싸우다 계엄군에 쫓겨 Y다실 뒷문 처마 밑에서 숨어 있다가 나에게 발견돼 우리 식당 주방 지하실에서 며칠을 고생하고 간 두 사람. 계엄군들에게 들킬까봐 마음 조렸던, 그래도 두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흐믓한 마음으로 그때 일들이 새삼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1980년 그해 3월에 전재산을 다 팔고 그도 모자라서 빚까지 몽땅 얻어 충장로 1가 광주에서도 유명한 도청 앞 진내과 골목에 '초원숯불갈비집'이라는 식당을 개업했다. 주위에 관공서들이 많이 있고 음식점들이 많이 모여 있어 목이 좋다는 말에 애기 아빠와 나는 큰 모험을 한 것이다. 그 전 해 10월에 박 대통령이 저격을 당한 후 사회 돌아가는 꼴이 어째 심상치 않더니 5월이 되면서부터 학생들 시위 횟수가 많아졌다. 더군다나 TV에서 김대중 씨가 다시 수감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광주사람들은 크게 분노했다.
우체국과 도청 앞 금남로 길은 시위대와 경찰이 항상 대치해 있었고 매일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은 몹시 따가웠고 얼굴은 쓰라렸다. 최루탄 가스를 없애려고 식당 곳곳에 촛불을 켜놓고 찬 물수건을 항상 준비해 놓고 있어야 했다. 물론 장사도 엉망이었다. 시위대들이 경찰에 쫓겨 갑자기 식당 안으로 우루루 몰려와서 숨어 있기도 했다. 우리집은 1층부터 3층까지 꽤 큰 식당이어서 숨을 곳이 많았다. 4층 옥상에서 보면 YMCA 건물 너머로 금남로 길이 훤히 보였고 도청 앞 광장도 다 보였다.
5월 17일,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였고 갑자기 계엄군들이 몰려왔다. 경찰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철모 쓴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시위대는 물론이고 모여있는 사람들까지도 방망이로 마구 때리고 좀 젊다 싶으면 무조건 끌고 갔다. 시민들 보기를 완전히 공산당 빨갱이 적군처럼 대하였다. 다음날 누가 먼저 들고 나왔는지 사람들이 연탄집게며 몽둥이, 빨래방망이 등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금까지 억눌려 왔던 광주사람들의 한이 폭발한 것이었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학교는 월요일에 휴교를 하지 않아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중앙초등학교) 보냈었다.
온 시내가 난리가 났다. 군인들과 시위대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최루탄과 화염병에 휩싸여 차가 불타고, 군인들이 이제는 시위대뿐만 아니고, 아무나 잡히는 대로 끌고 가 트럭에 실어갔다.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서 학교에 가보려고 거리에 나왔는데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고 군인들만 있었으며, 군인들이 통행을 못하게 저지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골목길로 피해서 학교까지 갔으나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중앙로 구 법원 마당에 20명~30명쯤 되는 남자들이 팬티 차림으로 손을 뒤로 묶인 채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으며 옆에는 계엄군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금남로 길에는 주인 잃은 신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동아극장 골목 충장동사무소 앞에는 주워다 놓은 신발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어느 샌가 시위대들의 막대기가 총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연일 TV뉴스에서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때려죽이는 것은 하나도 방영되지 않았다. 어쩌다 계엄군이 시민들한테 맞는 장면만 방영되었다. 진실을 방영해야 할 방송사나 신문사들한테 분노와 혐오감까지 들었다. 계엄군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시민들의 항의도 거세어져 가는 것 같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트럭에 버스에 모두모두 타고 어떤 이는 머리에 건을 쓰고 얼굴은 헝겊으로 가리우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부르며 지나갔다. 나는 금남로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식당 옥상에서 보고 있었다. 도청문과 상무관 앞에는 계엄군들이 줄지어 있었고 맞은편 금남로 길에는 많은 군중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허겁지겁 도망을 갔고 계엄군들은 시위 차량과 사람들한테 마구 총을 쏘아댔다. 오후에는 도청 쪽에서 계속 헬기들이 뜨고 내리는 소리가 들려 왔으며, 이따금 총소리도 들렸다. 밖의 상황이 궁금하여 문을 열고 내다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식당 건너편 또식당에서 일하시던 아저씨가 골목 끝 진내과 앞에 서 있었는데 '탕'하는 총소리가 나더니 그 아저씨가 앞으로 폭 고꾸라 지는 것이 아닌가. 달려가서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어디서 또 총을 쏠지 몰라 나갈 수가 없었다. 좀 있으려니까 급하게 식당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보니 40세쯤 되어보이는 한 남자가 총에 맞아서 쪼그리고 있었다. 얼른 안으로 들여다 놓았으나 밖에서는 사람만 보였다 하면 총으로 쏘아대니 병원에 데려 갈 수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다 옆집 여관까지 겨우 데려다 줬는데 그 뒤 살아 계시는지 궁금하다.
정말 6․25때도 사람 죽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고 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들을 눈앞에 실제로 보니 기가 막혔다. 외부 침략도 아니고, 한 나라 안에서 정부가 시민을 무차별하게 죽이고 적군 취급을 하니 참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오후 내내 헬기들이 들락거리고 밖에 사람들을 얼씬도 못하게 총을 쏘아대더니 해가 질 무렵에야 조용해졌다. 우리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도청이 시민군들에게 함락되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 소리도 웅성웅성 들렸다. 밖으로 나와보니 그렇게 많던 계엄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총을 든 민간인들이 도청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전일빌딩 셔터는 구덩이 마냥 안으로 움푹 쪼그라 들어갔으며 제일은행 동지점 셔터는 벌집처럼 수 없이 총알 구멍이 나 있었으며 카도에 있는 약국 앞길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핏물자국이 빗물처럼 흘러서 말라 있었다. 금남로에는 여기저기 돌멩이와 다 타버린 차들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 매일 우리 식당에 들락거리던 많은 사진기자들과 외신 기자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덩그렇게 시위대와 힘 없는 민간인들만 남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우리는 물론 영업을 못했으며 다른 가게들도 모두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생필품도 살 수가 없었다. 쌀이 없어서 밥을 굶은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거리에는 차들도 다니지 않아 사람들은 걸어서 다녔으며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나 하고 먼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도청 앞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낮에는 밖에 나와서 이야기도 하고 길 청소도 하며 그나마 우리를 지켜주는 시민군들에게 밥도 해다 주고 음료수도 갖다주며 격려를 해주었다. 겉으로는 억눌렸던 마음이 해방을 만난 것처럼 자유스럽고 활기찼다. 그러나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하면 모두들 집에 들어가 불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지냈으며 변두리 친척집으로 피난 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 당시 날마다 오늘밤에는 전일빌딩이 폭파된다, 관광호텔이 폭파된다하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밤에는 광주시가 번화가이었던가 싶게 길에는 사람도 없었고 적막했다. 캄캄하여 무서웠다. 불도 켜지 못하고 두꺼운 이불로 문을 꼭꼭 가리고 화장실에도 못갔으며 아침이 되어 이웃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리면 그때서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식당 주방장과 보조원 김군은 언제부터인가 시민군으로 합세하여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식당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청년도 머리에 띠를 두르고 총을 메고 다녔다.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 청년은 죽었다고 했다. 세상이 정말로 바뀌어져 있었다. 무슨 범죄가 일어나도 누구 하나 막아 줄 사람이 없었다.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하루 아침에 우리들을 버리고 가버린 경찰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공무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전화도 끊겨서 외부와 연락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고립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에 갇혀서 굶어 죽어가는 영화장면을 생각했다. 정부가 광주사람들은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고 북쪽 오랑캐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아무일 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은행강도 사건도 없었고 폭파도 없었고 사람들은 더욱 단결된 것 같았다. 동네 거리도 깨끗하게 치워졌다.
며칠째 영업을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고 앞일이 막막하였다. 매일 도청 앞에 나가 크게 나붙은 대자보를 읽고 붙여놓은 사진도 들여다 보고 광고지를 주워 읽으면서 불안스럽게 지냈다. 우리나라 군대가 일개 시민군에게 힘 없이 져서 어떻게 도청을 버리고 그렇게 쉽게 도망가 버렸나 하는 의문도 생겼다. 스피커에서는 매일 여자와 남자가 번갈아 가면서 큰소리로 군부를 비방하고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이름 전두환이를 욕하고 신현락이를 물러가라고 했다. 우리 광주시민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이 못된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미국도 나쁘다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이북 간첩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선동한다고도 하였다. 광주시 외곽에서는 군인과 시민군들이 싸워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곧 군인들이 도심으로 밀고 들어 온다고 하였다. 이 모두 어수선한 속에서 하루 빨리 일이 좋게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런 생활이 일주일 가량 지나갔을까? 잠결에 총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총소리였다.
「따, 따, 따, 따, 땅…」
6․25 때 반공호 속에서 들어 봤던 그런 무서운 총소리였다. 스피커에서는 울음 섞인 여자의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들리지 않지만 청년들이 다 죽어가고 있으니 모두들 나와서 도와 달라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하소연하였다. 그렇지만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총알이 날아올까 봐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피커 소리가 멎었다. 탱크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날이 샌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3층에서 잠 자던 종업원이 황급히 와서 말했다. 3층 방이 총에 맞아서 난리가 났다고. 급히 3층으로 올라가 보니 방에 유리창이 깨어져 있었고 창 옆에 있던 스텐 양푼이 총에 맞아 구멍이 나 있었다. 외벽도 총에 맞아서 구멍이 몇 개 나 있었다. 밖의 사정이 어떻게 되었나 싶어 내다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Y다실 뒷문 처마 밑에서 시민군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서 기다란 총을 갖고 웅크리고 숨어 있지 않은가. 사방을 둘러보니 시민군들은 간데 없고 도청 앞에도 수협 지붕에도 전일빌딩 옥상에도 Y건물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서너명씩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얼핏 '저 사람들 잡혀가면 죽겠구나! 어쩌지?' 하고 있는데 그쪽에서도 우리를 보았는지 손으로 위를 가르키면서 군인들 있느냐고 물은 것 같았다. 많이 있다고 손짓으로 대답을 해주고 급해 내 화장품 그릇에서 크림을 파내고 거기에 글을 써 넣어서 던져 주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식당은 도청 앞 진내과 골목이라고 광주에서는 꽤 유명한 음식점 골목에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진내과가 있고 수협 도지부가 있고 도청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삼양백화점이 있었고 관광호텔이 있었고, 아래로 돌아서 우체국이 있고 식당 맞은편에 YMCA건물이 있다. Y다실 뒷문 쪽에는 조그만 공터가 있었고 우리 식당 앞으로 부로크 담이 낮게 쳐져 있었다. 담만 넘으면 바로 식당 문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편지에다 식당문을 열어 놓을 테니 신호를 하면 담을 넘어서 식당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첫 번째 사람은 아무 탈 없이 잘 왔는데 두 번째 사람이 넘어오려고 할 때는 총알이 날아왔다. 다행히 총을 맞지 않았지만 간이 콩알만해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었다. 주방에 있는 지하실에 이들을 숨기고 콩나물 통과 술 상자 등으로 문이 없는 것처럼 위장을 하였다. 그때는 셔터가 없었으므로 식당문도 쇠사슬로 칭칭 감아서 자물쇠로 잠그고 문 앞에 소주 상자며, 음료수 빈 상자 등 모든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았다. 조금 있으려니까 계엄군들 하고 경찰들 대 여섯 명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문 열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들고 있는 총에는 칼도 꽂혀 있었다. 또 6․25 때 생각이 났다. 총에 칼을 꽂은 국군들이 외가집 동네에 들어와서, 공산당 빨갱이한테 밤에 밥해줬다고 외삼촌을 끌고 갔었다. 내가 10살 때였다. 물론 외삼촌이 좋아서 밥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계엄군들은 위세가 시퍼렇게 당당해져서 더욱 문을 흔들어대며 후레시까지 안에다 비췄다. 하얗게 질려서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엉금거리며 물건 치우는 흉내를 내니까 답답했던지 '이 집에 데모한 사람 들어오지 않았소?' 하며 또 소리를 질러댔다. 절대 오지 않았다고, 이렇게 문이 잠겨 있는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느냐며 문이 잠겨서 우리 식구들도 나갈 수가 없다고 하니까 같이 온 경찰이 만일 데모한 사람 숨겨 줬다가는 징역 갈테니 그리 알고 곧바로 신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 뒤로도 며칠 동안 그들은 어두운 지하실에서 지내다 거리에 사람들 왕래가 많아지고 우리도 영업을 시작하면서 그들도 지하실에서 나왔다. 그때 한 사람은 집이 곡성 옥과라 했다. 조대공전을 다닌 학생이라고 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수생이었다. 두 학생 모두 집에 연락이 되었다. 시골에서 온 노모와 누나는 학생을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아들이 연락이 끊겨 죽은 줄 알고 시체란 시체는 모두 들여다 보고 다녔다면서 시체 얼굴들에 모두 빨간 페인트 칠을 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한 학생은 매형이 형사이시라고 했으며 매형한테 연락이 되어 하루 늦게 데려갔다. 그들은 나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셨다. 그 뒤 그렇게 광주 시민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알지 못했던(처음 들어봤던) 그 사람 전두환 씨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위에 군림했으며, 나는 그곳에서 88년도까지 영업하다 세상이 어수선하여 별로 돈도 벌지 못하고 식당을 그만 두었습니다. 1년 뒤 애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 바람에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 없는 세월을 보내고…. 그때 초등학교에 다녔던 4남매 아이들은 이제 모두 커서 시집 장가 다 가고, 저는 덕분에 다섯 손녀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생활에 쫓겨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23년이 흘러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그때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광주시민들이 참 용기 있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지금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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