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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광주의 진산 無等山
- 위 치 : 광주광역시 동구, 북구, 화순군 화순읍, 이서면, 담양군 남면
- 높 이 : 1,187m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4. 2. 27. 05:00
2. 장 소 : 무등산
3. 참석인원 : 39 명(새내기 3명)
4. 등산코스
▶ 1팀 : 원효사주차장 - 원효사 - 늦재삼거리 - 늦재 - 동화사터 - 용추삼거리 - 장불재 - 입석대 - 서석대 - 옛길.장불재.중봉갈림길 - 중봉 - 원효사터 - 전망대(옛길) - 늦재 - 원효사 - 버스대기장소
▶ 2팀 : 원효사주차장 - 원효사 - 늦재삼거리 - 늦재 - 동화사터 - 중봉 - 서석대 - 입석대 - 장불재 - 옛길.장불재.중봉갈림길 - 옛길(임도) - 전망대 - 늦재 - 원효사 - 버스대기장소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춘천KBS방송총국 - 원효사
▶ 거 리 : 399,1km
▶ 소요시간 : 4시간34분
- 빠른 길 정보 : 중앙고속 - 서울춘천고속 - 서울외곽순환고속 - 경부고속 -
천안논산고속 - 동광주IC - 두암교차 - 무등로 - 원효사
- 다녀온 길 : 중앙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부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 호남 고속도로 - 동광주IC - 두암교차 - 무등로 - 원효사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16 박 철 수
6. 날씨예보상황
- 지 역 : 광주일원 및 무등산 생활지수
- 기 준 : 2014. 2. 27. 03:00기준
- 개 황 : 오전 흐림, 오후 구름 많음
▶ 비 올 확 률 : 20%
▶ 기 온 : 6 ~ 16℃
<단체기념사진>
7. 활동상황
○ 05:00 --- 춘천KBS방송총국앞 출발(죽암. 백양사휴게소 경유)
○ 09:51 --- 원효사주차장 도착
○ 10:03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10:05 --- 들머리진입
○ 10:08 --- 원효사일주문
○ 10:14 --- 원효사경내
○ 10:28 --- 늦재삼거리
○ 10:32 --- 늦재
○ 11:00 --- 동화사터 하단
○ 11:13 --- 동화사터
○ 11:45 --- 동화사터 상단
○ 12:03 --- 용추봉
○ 12:25 --- 용추삼거리
○ 12:40 --- 장불재
○ 12:59 --- 입석대
○ 13:11 --- 승천암
○ 13:15 --- 1.2팀 합류
○ 13:24 --- 점심식사
○ 13:57 --- 서석대
○ 14:18 --- 원효분소. 장불재. 중봉갈림길
○ 14:30 --- 중봉
○ 14:45 --- 동화사터 원점회귀
○ 15:08 --- 전망대. 옛길 합류
○ 15:41 --- 일주문
○ 15:49 --- 버스대기장소 도착
○ 16:18 --- 버스디기장소 출발
○ 21:20 --- 남춘천역 도착
Ⅱ. 지역특성
<서석대 전경>
1. 지역유래
- 오늘 나들목이 소재한 북구 금곡동(金谷洞)은 본래 광주군 석저면의 지역으로서 쇠가 났다하여 서름 또는 금곡, 서림, 서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리, 신촌리, 이치리와 상대곡면의 화암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금곡리라 불렀다. 이곳은 ‘서림’이라 한다. 이곳 이름 ‘서림’은 ‘西’자를 빌리거나 또는 ‘書’자를 빌어 표기하고 있는데 ‘西林’으로 인해 ‘西村’이라 불리고, ‘書林’은 이곳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서당’이 있었던 곳은 대개 ‘서당골’이라 불리는 곳이 많고 ‘西洞’으로 불리는 곳은 극히 제한적인 실정이다. 또한 ‘西林’이라 하여 ‘林’자를 붙여서 불리는 지명은 ‘서’라는 소리의 ‘ㄹ’종성표기를 위하여 차용된 글자로 생각된다. 또한 이곳에는 ‘영발암터’와 ‘영발절터’가 있다. ‘영발’의 ‘永’은 훈이 ‘얼음’이니 ‘얼’이라는 소리를 빌려 표기한 지명어이다. 우리 지명에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의 이름에 合을 뜻하는 고대국어 ‘얼’이 쓰이는데 ‘永’은 이 ‘얼’을 표기하는 지명어이다. 금곡동의 금곡은 ‘쇠골’에서 나온 지명일 것인데 이곳에서 ‘쇠’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라 전한다. 조선 왜란때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이곳 출신이었기에 이곳에서 철을 많이 제련했거나 무기를 많이 제조하여 불린 이름이라 전한다. 그러나 이 금곡은 ‘설’과 말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서름’ 또는 ‘서림’이라는 이름과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생각한다. ‘설’은 지나간 해와 돌아오는 해의 갈림길에 서있는 날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땅에 금을 긋는 것은 이곳과 저곳을 구획하는 경계를 짓기 위하여 긋는 행위이다. 때문에 이 두 어사는 동일한 어원을 갖는 어사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지명은 이곳의 지리적 환경이 이곳에서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한다.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리(元村里), 신촌리(新村里), 이치리(梨峙里)와 상대곡면(上大谷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고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리(里)를 동(洞)으로 고치고 그해 12월 2일 충효동의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1998년 9월 21일자로 석곡동에 통폐합되었다. 한적한 산골이던 이곳은 1958년 산장로가 놓이고 이듬해 산장호텔이 지어지면서 광주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원효계곡을 찾는 시민들이 날로 늘어나자 시에서는 1972년 도립공원 지정과 함께 그 이듬해 포장을 하고 시내버스를 운행시켰다. 또한 충장사를 단장하고 배재마을에서 금곡을 거쳐 광주호에 이른 길까지 1984년 포장했다. 광주호는 1976년에 완공되어 지금은 광주 강태공들의 마당이 되었다. 금곡동 500m이상의 고지에는 1950년대에 조성된 목장이 있고 ‘푸랭이’라는 무등산 수박이 재배되고 있다. 최근 금곡동 산 214-2번지 일대 5천 여 평에 호남출신 2천 여 열사의 충절을 기릴 건물을 건립하기로 했다. 금곡마을은 500여 년 전 마을이 이루어졌는데 남평문씨(南平文氏) 일촌이었으나 현재는 타성도 들어와 살고 있다.
2. 무등산 살펴보기
- 1972. 05. 22 무등산 도립공원지정
- 2013. 03. 04 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동부사무소 개소
-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및 한국의 산하 선정 인기명산100 중 41위
- 무등산은 지도상 동경 126˚56′~ 127˚03′, 북위 35˚05′~ 35˚10′에 자리한다. 행정 구역으로는 정상 일대와 북서부 산록의 광주광역시와 백마능선으로 이어지는 남부의 화순군, 북봉의 동북부느 담양군 등 1개 시 2개 군에 걸쳐있는데 평면 면적은 30.23㎢(도립공원 관할면적 광주 27.0㎢, 화순 2.4㎢, 담양 0.8㎢)이다. 무등산의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187m)을 정점으로 북쪽에 지왕봉(地王峰)과 남쪽에 인왕봉(人王峰), 그리고 서쪽에 중봉(中峰)과 동쪽에 규봉(圭峰)이 있는 산으로 산에는 주상단애(柱狀斷崖)의 입석대(立石臺)와 수정병풍 같은 서석대(瑞石臺), 그리고 중머리재와 장불재, 백마능선의 광활한 갈대밭이 있다.
- 무등산은 남도인의 정신이 담긴 산으로 광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봄철이면 만개하는 연분홍 철쭉과 진달래, 가을철의 단풍과 산등성이의 억새, 겨울산의 설화는 무등산의 운치를 더해준다. 1972년 5월 22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3월 4일 국립공원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등산국립공원은 전체면적 75.425㎢로 광주광역시(북구, 동구)와 전라남도(담양·화순군)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1,187m의 무등산 최고봉인 천왕봉 일대는 서석대, 입석대, 규봉 등 수직 절리상의 암석이 석책을 두른 듯 치솟아 장관을 이룬다. 또 마치 옥새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새인봉은 장불재에서 서쪽 능선상에 병풍같은 바위절벽으로 이뤄져 있으며 입석대, 서석대 등 주상절리대를 포함하여 산봉, 기암, 괴석 등 경관자원 61개소가 분포되어 있다. 또한 수달, 구렁이, 삵 등 멸종위기종 8종을 포함하여 총 2,296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보물 2점 등 지정문화재 17점이 보유되어 있다.
- 국립공원 무등산에 형성된 주상절리대(柱狀節理帶)가 여의도 면적(8.4㎢)보다 훨씬 널리 분포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주상절리대 가로 폭이 최대 9m에 달해 세계 최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남대 한국공룡연구센터의 “무등산 주상절리대 일대 학술조사 및 세계자연유산 등재 추진방안 연구”라는 제목의 용역 보고서에서 "주상절리대는 북산(신선대)~북봉(누에봉)~천왕봉~지왕봉~인왕봉~서석대~입석대~중봉~동화사터~낙타봉~촛대봉~안양산 정상부근까지 분포돼 있다"며 "최소 면적이 11㎢에 달하며, 이보다 규모가 클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힌바 있다.
- 무등산(광주)의 전설하나를 소개한다. 무등산은 천년을 하루 같이 오늘도 빛고을 광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무등산이란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은 아직 없다. 몇 가지 추정만 할 뿐이다. 애초 사용했던 이름 무당산이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에서 한자가‘당’에서‘등’으로 바뀌어 무등산이 되었다는 설이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다. 또 다른 설은 불교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불교 용어로‘無等等(무등등)’은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 견줄 이가 없다는 뜻으로 무등산이라 불렸다는 해석이 있다.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등산에는 사찰이 많고 고승의 발자취가 잦았다.‘빛고을’광주(光州)라는 지명은 정상에 있는 서석대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석대는‘수정병풍‘으로 불리며 상서로운 바위로 반짝이는 빛을 발한다고 해서 광주를 빛고을로 부르게 됐다.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삼신산을 찾아 삼신산신을 불러 초청연을 베풀려 했으나 무등산만이 이를 거절해 등급이 없는 무등산이라 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백대에 이르도록 왕업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혁명을 일으켜 죽인 고려 말 명신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기도하려 이곳에 들렀다는 얘기다.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조에 무등산 일대에는 360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산에서 백팔나한이 살았고 부처가 설법을 다니던 사자좌가 있어 인근 모든 산신들이 이곳에 공양하기 위해 드나들었다. 이 같은 명산이라 이성계도 이 산에 와 3일 기도를 했다. 태조대왕은 온갖 정성을 다해 기도했지만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태조는 그의 정성이 부족한 때문이거나 이 산신령의 가호를 받지 못할 몸임을 알고 다시 3일 기도를 더하기로 작정했다. 마음의 작정을 하고 어슴프레 잠이든 태조대왕의 꿈에 그가 죽인 정몽주 등 고려조의 명신들이 칼을 들고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이런 악몽에 시달리던 태조는 얼마 후 입석대를 향해 걷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서기가 감도는 서석대에 이르니 한 선인이 그를 맞으며 "그 동안 대왕께서 3일 기도중인 것을 알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법회가 열리고 있던 중이라 찾아뵙지 못하고 있던 차에 석가부처께서 대왕의 악몽을 아시고 즉시 자신을 보내 정몽주 등 고려 충신들을 질책하시고 대왕을 맞도록 한 것이요." 라고 말했다. 태조는 석가 앞에 이르러 여러 치정의 도를 배우고 석가가 가르키는 것을 바라보니 사람인자 형국을 한 산이 우뚝 서 있는데 석가는 이 산 한쪽의 붓바위를 가리키며 석가는 저 붓바위가 대왕의 취적을 하늘에 기록할 것이라 말했다. [출처] 무등산의 전설/작성자 화백거석
Ⅲ. 산길여정
<무등산 등산지도>
- 무등산 이름에 얽힌 얘기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무등산은 없을 無, 등급 等자를 쓴다. 한마디로 무등산이란 등급이 없는 산이란 뜻이다. 사전에서는 더할 나위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월간 산”에서 무등산의 유래에 대하여 게재한 내용을 소개한다. 무등산이 육산(肉山·흙산)일까? 악산(嶽山·바위산)일까? 정상 부근에 있는 주상절리, 즉 입석대와 서석대만으로 볼 때는 전형적인 악산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철쭉과 억새가 군락을 이룬 육산의 모습을 띠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무등산을 ‘광주의 진산이며, 포근하고 후덕한 어머니의 산’이라고 부른다. 도심 배후에서 도시를 감싸 안고 있으며, 동서남북 어디에서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모나지 않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또한 도심 10㎞ 이내에서 해발 1,000m 이상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산이라고 자랑 한다. 무등산 이름의 변천은 무돌·무당산→ 무진악 → 서석산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무등산은 백제 이전까지는 무돌이나 무당산이라고 불렸다.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을 지닌 순우리말의 조어라고 한다. 무돌이 백제시대에 와서 무돌의 ‘무‘는 한자음의 ‘武’로 표기하고, 돌은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을 따와 보배 ‘진(珍)’으로 표기하면서 무진이란 이름이 등장했다. 그래서 광주를 무진주라 하고 무등산은 무진악으로 표기했다. 통일신라 때에도 무돌을 한자에서 음과 뜻을 빌려 ‘무진악’ 또는 ‘무악’으로 표기하다가 고려시대부터 서석산(瑞石山)이라는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고 불렀던 것도 무돌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말을 한자로 옮기면 서석산이 된다. <삼국사기>에 무진악이란 표기가 공식 기록으로 처음 나온다. 무등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에 쓴 <고려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有無等山 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이라고 돼 있다. 무등산을 무진악이라 부르기도 하고, 서석산이라고도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조선 초 이전에 이미 무등산이란 이름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무등산이란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은 아직 없다. 몇 가지 추정만 할 뿐이다. 애초 사용했던 이름 무당산이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에서 한자가 ‘당’에서 ‘등’으로 바뀌어 무등산이 되었다는 설이 그 중 설득력이 있다. 또 다른 설은 불교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불교 용어로 ‘無等等(무등등)’은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 견줄 이가 없다는 뜻으로 무등산이라 불렸다는 해석이 있다. 때문인지 무등산에는 사찰이 많고 고승의 발자취가 잦았다. ‘빛고을’ 광주(光州)라는 지명은 정상에 있는 서석대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석대는 ‘수정병풍‘으로 불리며 상서로운 바위로 반짝이는 빛을 발한다고 해서 광주를 빛고을로 부르게 됐다고 소개하였다. <월간「산」2009.11월호 중에서>
- 무등산 이름의 유래에 대한 속설(俗說) 하나를 소개한다. 무등산의 전 이름은 서석(瑞石)산이었다고 한다. 이름이 무등 으로 바뀐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 개국 초에, 태조 임금의 王師(왕사-임금의 스승)이었던 무학스님께서 전국의 산신령(산을 지키는 귀신)들을 모아놓고, 국토수호(國土守護)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힘쓸 것을 훈시(訓示)하셨다. 그리고 그중의 4대 명산을 지정하여 각 방면의 대장(大將)으로 삼아 한층 더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그중, 북쪽의 묘향산은 산세가 웅대(雄大)하고 장엄(莊嚴) 하려니와 수려(秀麗)하기도 하니 1등으로 하고, 동쪽의 금강산은 아름답기로 천하제일 이라고는 하나 산세가 묘향산만은 못하니 2등으로 하라. 남쪽의 지리산은 비록 수려함은 없으나 웅장함에 있어 그중에 제일이니 3등으로 하고, 서쪽의 구월산은 수려하고 장대함이 타에 못 미치니 4등으로 하라. 이렇게 결정하고 있을 즈음에, 남쪽 다도해의 여러 섬들을 순시하고 뒤늦게 돌아온 서석(瑞石)산 신령이 위의 결정 사실을 듣고서 크게 노(怒)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번복(飜覆)하고 새로 정하라고 대들자, 난처해진 무학스님께서 이미 결정이 된 일을 번복할 수는 없고 서석산을 서남 방향의 대장으로 정하고 그 등위를 5등으로 하자고 절충안을 내셨다. 이에 더욱더 노(怒)한 서석산 신령은, "국토의 서남지방은, 나라의 온 백성을 먹여 살리는 곡창지역이며 또한 외적의 침입(侵入)으로부터 가장 취약(脆弱)한 곳이니 그 곳의 방비가 국가 안전(보존)의 첫째 시책(施策)일진대, 그 곳의 수호를 맡은 서석산이 마땅히 1등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5등이라는 결정은 부당하다. 차라리 그 등수에 들지 않고 無等으로 하겠다."라고 선언했다. 그 후, 서석(瑞石)산의 이름은 무등산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 무등산국립공원 내에는 새인봉-입석대, 늦재-옛길, 당산나무, 토끼등-시무지기폭포, 수레바위산-옛길, 안양산-북산, 도원마을-규봉, 수레바위산-만연산코스 등 8개의 탐방코스가 지정되어 관리된다. 이중 가장 일반적인 코스 중 한 곳인 늦재-옛길코스를 기본으로 하여 입석대와 서석대를 비롯한 천왕봉 조망코스를 연계하여 준비하였다. 오늘은 무등산국립공원에서 안내하는 등산지도를 바탕으로 오늘일정상 주요지점과 진행방향 정도만 표기하는 선에서 편집을 마무리하여 그대로 사용하였다.
- 무등산은 2009. 5. 14. 무등산도립공원 당시 다녀온바 있다. 그 때는 관리사무소-꼬막재-규봉암-장불재-중봉-동화사터-토끼봉-문빈정사로 하산하는 코스가 기본코스로 일정이 잡혀있었는데 4년여 세월이 훌쩍 흘러버린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고 생소할 뿐이었다. 증심사방향으로 진로를 잡아 장불재 - 중봉 - 동화사터 - 토끼봉 - 샘터를 거쳐 하산하면서 지루했던 기억만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차제에 2013. 3. 4. 우리나라에서 21번 째 국립공원 승격과 때를 같이하여 2013. 9. 26 무등산 탐방기회를 마련하여 처녀산행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하였지만 이 또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정이 순연되는 바람에 해를 넘겨 오늘에 와서야 또 다시 탐방기회를 갖게 되었다.
- 원거리, 장거리 산행에 대한 심적 부담을 무릅쓰고 재차 무등산 정기산행 일정을 잡아 놓았지만 연이어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곤혹스러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 첫 번째 : 2014. 2. 7일자로 무등산국립공원 탐방로 출입통제공고가 되었던 것이다. 무등산 광주지역 6구간과 무등산동부지역(화순,담양) 9구간의 통제탐방로 세부구간 명을 등산지도상에서 확인해 보아도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무등산국립공원동부사무소 (061-371-1187)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 후에야 답을 구할 수 있었다. 기본탐방로에서 이어지는 샛길이 통제되었다는 전갈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 탐방로가 통제될 리가 있겠어! 라고 뇌까리면서 부랴부랴 카페에 동 사실을 공지하기에 이르렀다.
► 두 번째 : 산행에서 뭐니 뭐니 해도 당일 날씨가 산행환경을 좌우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일 오전 비가 온 후 오후 흐리겠다는 일기예보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목요산행신청방 참가신청 상황이 제자리걸음을 한 채 꼼짝하지 않고 애를 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전날 비가 온 후 당일은 오전 흐림, 오후 구름 많음으로 상황이 호전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 역시 그럼 그렇지 우리 모두가 가시는데 비가 내릴 리 있겠어! 로 갈무리되었다.
► 세 번째 : 연 4일째 전국을 강타한 중국발 미세먼지 세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산행도 좋지만 미세먼지를 마셔가면서 정기산행일정을 강행해야하는가? 에 대해서는 답을 구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언론매체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는 수다에는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 역시 우리 모두 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세먼지 나쁨에서 미세먼지 차츰 소멸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이런 악재 상황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 모두님들에게 축복을 주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면서 가슴 짜릿한 희열을 맛보았다.
- 오랜만의 새벽 출발이었다. 먼동 트기 전 KBS앞 출발은 남의나라 남의 일로만 여겨졌었는데 05:00출발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그제야 실감하기에 이르렀다. 어제저녁 취침 전에 배낭을 꾸려 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눈망울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쉽사리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학창시절 소풍 전야의 그 느낌 그대로이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본인 혼자만의 상황은 아닐지 싶었다. kBS앞을 05:00정각에 출발하면서 40명 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웠었지만 그 희망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신청하신 분 중 한 분께서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버스 내비게이션에다 광주시 북구 금곡동 소재 원효사를 검색지로 입력하면서 찾아가는 길이 바뀌었다. 빠른 길 찾기 안내정보와 버스 내비게이션 안내정보가 서로 상이하였던 것이다. 버스 내비게이션 정보로 진로를 선택하였다. 언제나 빠른 길 찾기 안내정보는 참고사항일 뿐 버스 내비게이션 정보가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 광주광역시 관할 행정구역 내에 접근하면서까지 연무가 오락가락하면서 해가 보일 듯 말 듯 애를 태웠는데 무등로에 접근하면서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햇살이 들면서 연무가 거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무등산국립공원 내 무등로를 넘으면서 이어지는 S코스의 반복에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염려스런 분위기를 감지하신 총무님께서 스마트폰으로 목적지를 다시 검색해 보았지만 내비게이션 안내정보와 동일한 상황이었다. 무등로를 지루하게 넘으면서 원효사 안내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원효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09:50을 넘기고 있었다. 춘천에서 4시간50여분 걸린 셈이다. 10:00경 도착예정이었는데 10여분 상당을 단축하면서 일정운영에 일조하였다.
- 원효사주차장에 버스가 도착하면서 국립공원 안내직원이 접근하면서 이 주차장은 대형차량 주차가 안 된다는 사실을 거침없이 일성으로 통보하였다. 주차장은 텅텅 비었는데도 불구하고 접근 사절이었다. 혹시 공휴일이라면 몰라도 평일이기 때문에 주차장 주차사정이 원활할 것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융통성 없는 운영체계에 불만의 원성이 목젖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겉으로 툭 튀어나온 답변은 네! 알겠습니다. 잠시 머문 후 차를 빼겠습니다. 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어? 내 까짓것이 뭐 별 수 있어 현장의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도리지 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원효계곡>
- 오늘 나들목이 소재한 원효계곡을 먼저 살펴보고 넘어간다. 원효계곡 무등산 정상 일대의 물이 삼밭실에 고여 산의 북동쪽으로 약 9km나 흘러 충효동에 이르는 긴 골짜기가 원효계곡이다. 계곡이 흘러 풍암정이 있는 곳에 이르러 풍암제가 되어 관개용수로 쓰여지고 충효동으로 빠져서 광주호의 상류가 된다. 골짜기마다 물이 고여 천연의 풀(pool)이 되어 무등산 피서지로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곳이다. 원효계곡의 물은 의상봉 중턱에서 높이 6m 정도의 암벽을 만나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데 원효사의 주지가 인공으로 만든 폭포로 일명 세심(洗心)폭포 라고도 한다. 무등산 인근 주민들은 이 폭포수를 맞으면 약효가 있다고 하여 5월 단오와 7월 칠석 그리고 삼복의 더위에는 먼 곳에서도 여기까지 찾아오곤 한다.
- 원효사지구 원효8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오니 오늘 일상을 더듬어 보면서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무등명월(無等明月) : 원효사에서 무등산 정상에 솟아오른 달을 바라보는 운치
▶원효모종(元曉暮鐘) : 저녁 어스름 사이로 들려오는 원효사의 종소리
▶의상모우(義湘暮雨) : 해저물녘 의상봉에 내리는 비의 너울
▶서석귀운(瑞石歸雲) : 서석대에 감겨드는 뭉게구름
▶안양노불(安養老佛) : 안양사의 부처님
▶삼밭열적(蔘田烈蹟) : 삼밭실에 서려있는 충장공의 전설들
▶만치초적(晩峙草笛) : 늦재에서 들려오는 나무꾼들의 풀피리 소리
▶원효폭포(元曉瀑布) : 장쾌하게 쏟아지는 원효폭포의 물줄기
<늦재삼거리 이정표>
- 10.28 늦재삼거리 경유
- 일행 분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국립공원 안내직원이 근무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들목 기점과 옛길 등.하산로에 대한 궁금 사항 등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확인해 두기 위해서이었다. 현장에서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확보해 놓은 다음 무등산국립공원안내도를 찾기 위해 눈방울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날정도로 사방을 휘둘러보았지만 허사였다. 당연히 있어야 할 국립공원안내도와 나들목 안내 시스템이 전무하였던 것이다. 아하! 지난해 3. 4일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으니까 아직까지 1년이 채 안 되었으므로 그러려니 하면서도 아쉬움을 남겼다. 무등산은 증심사와 원효사 탐방로가 가장 일반적인 탐방로로 알고 왔었기 때문에 그만큼 실망이 컸을지 싶다.
- 오늘은 운영시간을 6시간으로 잡고 16:00하산을 예고하고 들머리에 들었다. 원효사일주문을 지나 포장길을 따라 원효사 경내에 이르도록 탐방로 안내시스템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진로선도에 애로를 겪었다. 원효사대웅전으로 진입하면서 부속건물보수공사 관계인을 찾아가 탐방로 진로를 안내 받은 후에야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이어지는 탐방로는 늦재 방향 포장길이었다.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서도 이 길이 과연 맞기는 맞는 것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물음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늦재삼거리와 늦재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하산 중인 산객 한 분을 만나 자문을 구한 후에서 후하고 한숨을 삼킬 수 있었다. 잠시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늦재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늦재삼거리가 나왔다. 늦재삼거리에서도 장불재와 서석대를 올라갈 수 있었지만 오늘 일정은 늦재를 경유하도록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늦재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다. 늦재삼거리에서 서석대 5,8km, 장불재 4,9km, 중머리재 3,4km, 토끼등 1,7km 원효분소 1,5km이고 해발고도는 516m이다.
<늦재 이정표>
-10:32 늦재 경유
- 늦재삼거리에서 포장길을 따라 0,2km/4분정도 걸렸다. 늦재 고개마루에 이르면서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토끼등 1,5km, 동화사터 0,8km, 중머리재 3,2km, 원효분소 1,7km, 해발496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그런데 늦재삼거리 해발고도가 516m인 점에 반해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늦재 해발고도가 496m인 점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서로 뒤바뀌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앞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도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차라리 이정표를 탐방로 입구에 세워놓던가 아니면 입구에 탐방로안내도 정도는 기본인 듯 싶었지만 안내시스템이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에 방심하면 도로를 따라 직진하기 십상이다. 다른 산에서의 체험에 의하면 들머리에 산악회리본이 즐비하였을 듯 싶었지만 그 흔하디흔한 리본 한 장 걸려있지 않았다. 오늘도 본인보다 앞서 가셨던 몇 몇 분들께서 직진했다가 되돌아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 구간에서 굳었던 다리근육이 풀리면서 몸의 기능이 현장의 상황에 익숙해 졌다.
<동화사터 갈림길 안내판>
- 늦재에서 탐방로로 접어들면서 정형적인 육산의 느낌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 무등산 생활지수 영상 6도 내지 16도인 점과 어제 내린 비의 영향으로 탐방로가 질퍽하여 착지가 편치 않았다. 등산화에 묻어나는 진흙이 바짓가랑이를 지저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좀 추운 것이 더 낮지 싶었다. 이마에 땀이 배기 시작할 무렵 동화사터하단 직전에서 양방향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은 능선길이고 오른쪽 길은 산중턱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그러나 현장에는 오른쪽 방향으로만 동화사터 1,2km, 늦재 0,3km 진행방향을 안내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양방향으로 동화사터 진행방향이 안내되어야 하는 지점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으로만 안내하고 있어 혼란을 초래하였다. 선발팀에서도 느낌상 능선상류로 올라가면서 분명히 합류할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오늘 일정대로 진행방향 오른쪽 동화사터로 진로를 잡고 앞서가던 몇 몇 분들에게 그 뜻을 알리고 진로를 바로잡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오른쪽 길은 동화사터 하단을 거쳐 동화사터로 곧바로 올라가는 길이고, 능선길은 전망대에서 옛길과 합류한 후 서석대, 중봉, 장불재갈림길로 올라가거나 아니면 진행방향 오른쪽 능선 탐방로로 진입하여 동화사터하단을 거쳐 동화사터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예견한 대로 두 길 모두 동화사터하단에서 합류하였다.
<동화사터하단 이정표>
- 11:00 동화사터하단 경유
- 동화사터하단 직전 갈림길에서 이산가족 되었던 선발팀 4명이 합류하였다. 1명은 능선길로, 3명은 산복 중턱길로 진로를 잡았는데 같은 시간대에 동화사터 하단에서 만난 것이다. 이지점에서 서석대 2,7km, 중봉 1,7km, 늦재 1.1km이고 해발고도는 624m이다. 동화사터하단이라면 동화사 경내였을 터이지만 전혀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동화사터 이정표>
- 11:13 동화사터 경유
- 동화사터는 지금까지 체험한 사찰에서 느꼈던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절터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산봉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화사터 이정표가 있는 봉우리 10여 미터 아래에 옛 동화사터가 있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이곳을 통칭 동화사터라고 한다. 토끼등이나 바람재, 늦재 등에서 아주 힘겹게 급경사 올라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중봉과 나란히 남과 북으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광주시내와 무등산의 계절별 변화를 가장 잘 느껴볼 수 있는 구간중의 하나이다. 이 지점 정상에는 자그마한 돌탑 1기와 쉼터로 기능하는 의자가 산재해 있고 장불재 2,3km, 서석대 2,3km, 토끼등 1,0km, 늦재 1,5km, 해발고도 824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 천왕봉 정상을 기점으로 서석대와 입석대로 이어지는 능선 주상절리군이 한 눈에 잡혔고 서석대 목적지 위치를 확보하였다는 안도감에 도취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간팀과 합류하여 20여분 이상 머물렀다. 후미팀까지 합류할 요량이었지만 진행속도 조절차원에서 선발팀 4명이 먼저 출발하였다.
- 동화사 샘터는 동화사터 이정표설치지점에서 토끼등 방향으로 하산하여 급사면길을 내려가 돌계단 끝에 있다. 샘터는 야생화 숲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 때문에 인기를 끌었던 곳이다. 2009. 5. 14 장불재 - 중봉 - 동화사터 - 토끼등으로 하산할 당시 샘물 없는 초라한 모습이 기억에 떠올랐지만 지금은 주변 환경이 새롭게 조성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고 한다.
<동화사터 상단>
- 11:45 동화사터상단 경유
- 동화사터상단을 기점으로 옛 동화사터 경내를 벗어난 셈이다. 그러나 동화사터 상단을 기점으로 오늘 일정이 뒤죽박죽되었다. 여기서 진행방향 오른쪽 장불재방향으로 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선발팀 4명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중봉방향으로 직진했던 것이다. 이 지점부터 목적지 서석대를 기점으로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두 팀으로 제대가 편성되는 바람에 혼란을 겪었다. 중봉에서 중간팀과 후미팀을 용추봉방향으로 진로 조정을 고려해 보았지만 오히려 운영시간 면에서 남는 것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GO를 외쳤다. 어차피 목적지는 서석대인 만큼 서석대에서 합류하여 점심식사를 함께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두 팀으로 운영한다 하더라도 통제권 내에 있었기 때문에 자유 투어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이지점에 동화사터 0,6km, 중봉 0,7km, 장불재 1,8km, 서석대 1,7km, 해발 894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거리면에서 장불재와 서석대가 유사하였기 때문에 입석대와 서석대 중간지점에서 합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용추봉>
- 12:3 용추봉 경유
- 용추봉은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봉우리이다. 지금까지 경유해 온 곳 중 경관 면에서 엄지로 꼽을만한 곳이다. 여기서부터 주상절리대의 시작인 셈이다. 이곳을 지나면 장불재를 거쳐 입석대 주상절리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기자기한 주상절리와 바위안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발길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이 지점에 중봉 0,3km, 동화사터 1,5km, 중머리재 0,7km, 장불재 1,0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 보따리를 풀고 정상주로 준비한 복분자주, 머루주 등 담근술을 시음하는 여유를 부렸다. 용추봉 주변 주상절리는 모산사진방에 올라있는 영상자료를 함께 보시기 바란다.
<용추삼거리>
- 12:25 용추삼거리 경유
- 용추삼거리는 오늘 일정상 잡혀있는 삼거리 중 한 곳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곳은 아니지만 동화사터에서 장불재에 이르는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진로를 안내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 중머리재 0,9km, 장불재 0,6km, 중봉 0,7km, 해발 786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장불재>
- 12:40 장불재 경유
- 장불재는 한마디로 무등산 교통요충지이다. 옛길과 더불어 사통팔달 아무 곳이나 이어지기 때문이다. 고개마루 넓은 안부에는 장불재표석, 대피소, 쉼터, 관리소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이 지점에 중머리재 1,5km, 만연산 0,4km, 안양산 3,1km, 규봉암 1,8km, 석불암 1,6km, 원효문 6,4km, 입석대 0,4km, 서석대 0,9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기둥하나에 이정을 알리는 날개가 주렁주령 매달려 있어 한 눈에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 장불재는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관할 용연동과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에서 남서쪽으로 서석대와 입석대를 거쳐 내려오거나 중봉 또는 용추봉에서 올라가면서 맞이하는 고개마루이다. 가을이면 이 일대 억새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고개 서쪽으로 샘골에서 광주천이 발원한다.『대동지지』에 '장불치(獐佛峙)'로 기록되어 있다. '긴골' 또는 '장골'을 한자로 장불치(長佛峙)로 표기했다. 말 잔등 같은 능선이라 '백마능선'이라고도 불린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장불동에서 철이 생산되었고,『유서석록』에 "장불천은 그 상류에서 쇠를 씻기 때문에 언제나 탁한 물이 흐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입석대>
- 12:59 입석대 경유
- 입석대는 5년여 만에 다시 접해보는 절경이다. 지금까지 제주, 경주, 울산, 울릉도, 한탄강, 금강산 등지에서 주상절리를 접해 보았지만 내룩 산상에서 접해 본 것은 무등산이 처음이다. 입석대 석축으로 된 단을 오르면 5~6각형 또는 7~8각형으로 된 돌기둥이 반달같이 둘러 서 있다. 이를 입석대라 부른다. 마치 조각 작품을 보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이런 절경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온 입석대는 석수장이가 먹줄을 퉁겨 깎아 세운 듯 하늘에 닿을세라 조심스럽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기만 하다.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옛날에는 이곳에 입석암이 있었고 주변에는 불사의사, 염불암등의 암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승천암>
- 13:11 승천암 경유
- 승천암도 산행안내준비과정에서 챙기지 못했던 보너스이다. 입석대와 서석대 사이에 자리한 바위로서 스님과 산양과 이무기의 승천에 관한 전설이 어려 있는 바위이다. 내용은 아래 사진으로 갈음한다.
- 승천암을 지나면서 서석대에서 하산 중인 일행 분들과 합류하였다. 동화사터상단에서 중봉을 거쳐 서석대에 올랐다가 하산한 팀과 용추봉 - 용추삼거리 - 장불재 - 입석대 - 승천암을 거쳐 올라가던 선발팀이 의도했던 대로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서석대 하단 안부에서 만나 반가움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밥자리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곳에서 옹기종기 두세 팀으로 나뉘어 점심식사시간을 갖았다. 점심식사 후 또 다시 이별을 고하였다. 선발팀 4명은 서석대로, 하산중인 분들은 입석대 방향으로 하산을 서둘렀다. 2차 상봉 장소는 장불재,중봉,옛길갈림길을 목표로 하였다.
<서석대에서 본 천왕봉>
- 13:57 서석대 도착
- 입석대는 5년여 전에 맛보기로 눈팅 한 경험이 있었지만 서석대는 처음이다. 주상절리는 입석대와 규모나 구조면에서 비교되었지만 천왕봉 정상을 곧바로 올려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정상에는 해발 1,100m를 안내하는 정상석, 나주지역, 승천보, 월드컵경기장, 어등산, 광주시청, 조선대학교, 아시아문화전당, 광주역, 영광방면 등의 조망을 돕는 무등산에서 바라본 광주 안내판, 중봉 1,2km, 전먕대 0,2km, 장불재 0,9km, 입석대 0,5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 빛고을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無等山)이란 명칭은 서석산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으로 풀이한다. 무등산은 전체적인 산세는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고 마치 커다란 둔덕과 같은 홑산이다. 무등산의 특징은 너덜지대인데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다. 무등산은 완만한 산세로 대부분이 흙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태만상의 암석들이 정상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널려 있어 그 웅장함으로 인하여 도민의 신앙대상이 되어온 신산으로 알려 졌다. 특히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암석미는 대단하다. 무등산의 삼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를 일컬어 무등산 삼대석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봄의 철쭉, 여름의 산목련,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 등 변화가 많은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3월 4일 국립공원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등산국립공원은 전체면적 75.425㎢로 광주광역시(북구, 동구)와 전라남도(담양·화순군)에 위치하고 있다. 무등산에는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규봉암 등의 사찰과 산의 북쪽 기슭인 충효동에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 누정 등의 유적이 있다.
<서석대 정상석>
- 지난해 12월 14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광주시 동구 용연동과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일대의 ‘무등산 주상절리대’가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됐다.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입석대와 서석대, 규봉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번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입석대와 서석대 이다. 문화재청은 중생대 백악기 화산 활동의 산물로 용암이 냉각 수축하면서 생성된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오랜 기간의 물리적 풍화로 인해 기둥 병풍 모양으로 형성돼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아 지정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돌기둥 하나의 크기가 지금까지 남한에서 보고된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입석대와 서석대의 주상절리는, 주변의 수목 및 무등산과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선보이고 있다.
- 무등산은 흙산의 외양과 돌산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그 이유는 화산폭발로 분출한 화산암(석영안산암)체가 수천만 년 동안 풍화와 침식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능선의 입석대와 서석대 등은 오랜 세월의 풍화와 침식을 이겨낸 석영안산암 덩어리이며, 너덜겅과 숲에 덮인 산비탈은 이 화산암이 부서진 바위와 흙이다. 또한 서석대와 입석대는 잘 다듬어 놓은 것 같은 돌기둥들이 웅장하게 전개되어 있다. 이러한 돌기둥들은 지질학적 현상을 주상절리라고 한다.
- 주상절리(柱狀節理)는 화산활동에 의해 유동성이 큰 현무암질 용암류가 급격히 냉각되면 큰 부피변화와 함께 수축하게 된다. 이때 용암이 식을 때 냉각, 수축이 진행되면서 최소한의 변의 길이와 최대의 넓이를 가지는 다각형의 규칙적인 균열이 생긴다. 이러한 균열들이 수직으로 발달하여 현무암층은 수천 개의 기둥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하여 주상절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변, 강변, 산 정상 등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무등산 이외에 주상절리가 있는 곳은 제주 중문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천연기념물 443호), 제주 색달해안 갯깍주상절리대, 경주 읍천 주상절리, 울산 강동 화암주상절리, 울산광역시 북구 산하동 주상절리(시도기념물 제42호),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천연기념물 415),포천 한탄강 비둘기낭폭포 주상절리, 한탄강 대교천 현무암 협곡 주상절리(천연기념물 제436호), 임진강 동이리 주상절리, 포천 아우라지 베개용암 주상절리, 울릉도 공암(코끼리바위)주상절리, 독도 주상절리, 금강산 총석정 등이 있다.
-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중생대 백악기에 발생한 화산활동의 산물로서 용암이 냉각, 수축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오랜 세월 풍화에 의해 기둥모양 또는 병풍모양을 하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주상절리대는 입석대와 서석대 그리고 규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석대와 서석대의 돌기둥 하나의 크기가 지금까지 남한에서 보고된 것 중 최대의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특히 주변의 수목 및 무등산과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 서석대 장불재의 고산초원을 해치고 동북쪽으로 약 900m쯤 올라가면 마치 거대한 병풍을 둘러 쳐놓은 것 같은 장엄한 돌무더기가 펼쳐져 있다. 이것이 유명한 서석의 수정병풍(水晶屛風)이다. 서석대(1,100m)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 있어서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강한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서석의 수정병풍’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부른 것도 실은 이 서석대의 돌 경치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서석대의 병풍바위는 청명한 날이면 광주시가지에서도 그 수려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5월 하순쯤 이곳에 만개한 연분홍 철쭉꽃은 기암절벽과 어울려서 초여름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약 400m쯤 오르면 정상의 서쪽 해발 1,017m지점에 입석대(立石臺)가 있다. 석축으로 된 단에 올라서면 5~6모 또는 7~8모로 된 돌기둥이 반달같은 모양 으로 둘러서 있는데, 이렇게 기이하게 생긴 돌모양은 다른 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무등산만의 절경이다. 입석대의 이 바위기둥들은 대체로 화산폭발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무등산에서 화산활동이 일어난 시기는 정확히 측정된 바 없지만 중생대 백악기 후기(대략 9천만년 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중봉 정상석>
- 14:30 중봉 경유
- 서석대에서 내려와 원효분소, 중봉갈림길에 도착하면서 서석대에서 입석대방향으로 하산한 팀 중 선발대와 만났다. 시간대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옛길방향(원효분소)방향으로 진로를 안내한 다음 선발팀 4명은 중봉으로 향했다. 갈림길에서 0,3km 불과하기 때문에 중봉을 경유하여 옛길로 진입하여 합류할 요량이었다.
- 중봉에는 해발 915m를 안내하는 정상석이 있다. 여기서 0,3km 서쪽방향으로 내려가면 오전에 경유한 용추봉이 있다. 중봉에서는 서석대, 입석대, 장불재, 용추봉, 동화사터 등이 사방으로 한눈에 잡힌다. 여기서 여유 있게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상 인증 샷만 남기고 옛길로 하산하는 분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발길을 서둘렀다.
- 천왕봉에서 서석대 - 중봉 - 무등산송신소 - 동화사터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옛길과 합류할 수 있는 샛길이 조성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했었는데 판단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결국 헛다리짚었던 것이다. 샛길은커녕 토끼길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동화사터 - 동화사터하단 - 동화사터갈림길에 이르러 오전에 올라오면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능선길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옛길과 합류하였다. 합류지점에 광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옛길로 하산하는 팀 중 중간그룹과 합류하여 동행하였다. 여기서 진로는 옛길 방향을 접고 늦재 방향을 선택하였다. 여기서 원효사분소 3,1km, 늦재 1,8km 이었기 때문이다. 발품과 시간을 벌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였다.
- 15:24 동화사터갈림길, 15:29 늦재, 15:41 일주문을 경유하여 날머리에 도착하였다. 늦재에서 일주문까지는 포장길을 접고 샛길을 찾아 내려온 관계로 상당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동화사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10여분 상당을 내려온 후에야 대기 중인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동화사주차장은 텅텅 비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로변에 일렬로 줄서 주차해 있는 버스행렬이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가는 생각해봐야할 점으로 치부해 둔다.
- 어떻든 오늘도 지난주 함백산에 이어 원뻥 신세는 면한 날로 갈무리된 것에 감사한다. 대부분 하산예정시간 16:00 이전에 여유 있게 홈인하였고 일부 몇 몇 분께서 15분 상당 지체하였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넘길수 있기 때문에 성공한 일상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Ⅳ. 주요볼거리
<원효사 대웅전>
- 원효사는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1514-35(금곡동) 무등산 북쪽 기슭의 원효계곡에 위치해 있다. 무등산 산장으로 난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 가면 이런 곳에 어떻게 사찰을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나올 정도로 웅장한 산세 속에 숨어 있는 절이다. 원효사는 신라시대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해 오고 있지만 입증할 자료는 없다. 1980년에 실시한 발굴 조사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처음엔 작은 암자로 지어진 사찰로 보여 지고 있다. 고려 충숙왕 때에 이르러서 어느 정도 사찰의 모양이 갖추어지게 중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경내 개산조당에는 원효대사가 그림으로 모셔져 있다. 입증된 사실이 아니더라도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니면 정말 원효의 원력에서 발원된 사찰처럼 원효가 개산조임을 바라는 마음의 발원이라고 볼 수 있다. 원효사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 산천은 여러 난리에 전화를 입지 않은 곳이 없다. 원효사도 여러 차례 중수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 때 다시 사찰 전체가 불에 타버리는 수난을 당한다. 무등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원효팔경을 말한다. 그 중에는 원효사의 저녁 종소리는 팔경 중 으뜸이다.
- 원효사에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만수산 동종이 있다. 이 범종은 숙종 36년 담양 추월산 만수사에서 만든 것을 1954년 대웅전을 중건하고 옮겨왔다. 동종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주상삼전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대 부분에는 원효사 대웅전을 중수할 때의 시주자 명단이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명문의 내용으로 봐서는 만수사에서 왜, 누구에 의해 원효사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경내에서 맛 좋은 약수를 마시고 대웅전 맞은편 누각인 회암당에 오르면 다른 세상에 들어선 착각이 든다. 원효계곡을 건너 의상봉과 윤필봉 그리고 멀리는 천왕봉이 보인다. 누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천상에서 내다보는 풍경 그대로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빠짐없이 그대로 마음에 들어오고 발아래 봉우리가 밟히는 원효사의 누각은 온갖 시름을 바람에 날려 나조차 없어지는 곳이 된다. 누각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돌면 무등선원이 보인다. 무등선원에서 동쪽으로 약 150미터 떨어진 곳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제 제7호로 지정된 동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기단부나 옥개석의 조각으로 보아 조선중기의 것으로 추정하지만 특이한 점이 있다. 모양은 팔각 원당형이지만 부도에는 용, 다람쥐, 새, 쥐, 거북이 등의 동물이 새겨져 있다. 동물을 장식한 부도는 해남 미황사의 대웅전 주춧돌과 부도밭, 대둔사의 부도 밭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는 있다. 스님의 사리탑인 부도에서 우리와 친숙한 동물을 만나는 맛은 부도의 주인까지 친근하게 느껴지게 한다. 부도의 주인공인 큰 스님의 중생 교화의 법력이 사바세계의 인간계뿐만 아니라, 축생계인 짐승들, 해양 생물들에게까지 무한함을 생각하노라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예경심이 솟아난다. 원효사는 1980년 대웅전 신축을 위해 땅을 고르다가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국립광주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한 일이 있다. 거기서 나온 소조 불상들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때 청동불상 12점, 동경 2점과 흙으로 만든 수많은 불상편들도 함께 나왔다. 이들은 고려 말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천불 중의 일부로 짐작된다. 이것은 지금 흔적조차 없지만, 과거 원효사에 천불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다. 오래된 사찰에는 말할 수 없는 향이 있다. 세월의 무게를 다 이기고 넘어온 사찰만이 안고 있는 그런 향이 산사를 찾는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소가 되는 지도 모른다.
<출처 : 광주관광이야기>
- 원효사 동부도는 72. 1. 29.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원효사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절에 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마련한 후, 탑신(塔身)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바닥돌과 기단의 일부를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 윗면에 연꽃조각을 두르고, 옆면의 네 모서리에 숫사자와 암사자를 교대로 배치하였다.가운데받침돌은 4면에 연꽃을 새기고, 네 모서리마다 사자와 용을 각각 암수로 나누어 조각하였으며, 윗받침돌은 옆면에 연꽃을 돌려 새겼는데 너무 얕아서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탑신의 몸돌은 너비보다 높이가 길며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지나치게 큰 지붕돌은 가득 새겨진 조각들로 인해 더욱 무거워 보인다. 윗면에는 기왓골과 여덟 모서리선이 뚜렷하고, 밑면에는 2중의 서까래를 조각하여 겹처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 귀퉁이에는 꽃조각 대신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 등의 동물들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양식이다. 통일신라의 8각양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부분 일부에서 4각을 보이고 있고, 지붕돌의 동물조각 등이 전형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원효사 출토유물>
- 85. 2. 25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 유물은 1980년 5월 6일 원효사 대웅전을 다시 짓기 위해 땅을 정리하던 중 발굴된 것으로, 불상류, 기와류, 자기류, 도기류, 거울류 등 수백 점에 달했는데, 그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32점이다.
- 금동과 청동불상 12점은 대부분 손상이 심하여 모두 머리 뒤의 빛나는 광배와 받침대가 없으며, 10㎝ 내외의 서 있는 불상들로 통일 신라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여러 시대 불상들이다. 이것으로 작은 불상들을 절 안에 놓았음을 알 수 있다.
- 소조 불두 18점 등 출토 유물의 대부분이 머리 부분만 있는 부처상들로 소조 불두라고 하는데 100여 점이 넘는다. 그 중 비교적 완전한 모습에 가까운 18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서로 비슷하다. 많은 양의 소조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원효사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부속 전각들이 주위에 배치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 거울 2점은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연꽃의 잎과 두 마리의 용이 새겨진 청동 거울과 무늬가 없는 백동 거울로 고려 시대 공예, 조각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만수사범종(원효사 소장)은 89. 3. 20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원효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종. 1710년(숙종 36) 제작.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 높이 86cm. 이 종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18세기 초반부터 많은 수의 범종을 제작한 사장(私匠) 김성원(金成元)이 옥천사종(玉泉寺鐘)보다 2년 뒤인 1710년에 만든 종이다. 명문에 따르면, 원래는 담양 추월산(秋月山)의 만수사종(萬壽寺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성원은 실상사종(實相寺鐘, 1694년)을 제작한 김상립(金尙立)의 아들로서 선암사종루종(仙巖寺鐘樓鐘, 1700년)까지는 형제들과 함께 제작에 참여하나 옥천사종부터 독립된 수장(首匠)으로 활동하게 된다. 종신 중앙부까지 내려온 네 방향의 유곽(乳廓)은 김성원 특유의 빗살형 유곽대와 그 내부에 마치 별처럼 도식화된 원형 연화좌(蓮花座) 위에 十자형 홈을 판 종유(鐘乳)가 얕게 돌기되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마다 원형 두광을 두른 합장형의 보살입상이 1구씩 부조되었는데, 옥천사종과 달리 구름 위에 표현되었다. 또한 한쪽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主上三殿下(주상삼전하)’라는 명문판을, 다시 종신의 하부면을 돌아가며 별도의 명문판을 두어 주조와 관계된 인명을 돋을새김하였다. 이 아fot부분에는 아무 문양이 없으나 1954년 원효사 대웅전을 중수할 당시의 시주자 이름이 추각(追刻)되었다. 선암사종에 표현된 화려한 유곽과 커다란 위패형(位牌形) 장식이 생략되고 옥천사종과 양식상 거의 비슷한 김성원 고유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옥천사종에 비하여 그 크기는 커진 반면, 범자문은 오히려 도식적으로 표현되는 등 아직까지 완숙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처: 광주광역시청>
Ⅴ. 특기사항
- 홍 옥 자(산처녀)님 백김치 협찬
- 서 정 오(양구쌤)님 양구행 21:20분 막차 승차 성공
► 현지에서 16:18분에 출발하였으므로 정상운행속도만 유지할 수 있다면 19:20분 출발 양구행 막차는 승차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휴게소경유시간을 감안하거나 수도권을 빠져나오면서 정체 현상을 보였다면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음성휴게소에서는 저녁식사시간 30여분 상당을 소진하였으므로 그 희망은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체념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을 눈치 채신 박 철 수 기사님께서는 노련한 운전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놓고 말았다. 그 바람에 단골 쉼터인 춘천휴게소 경유를 생략한 채 직행하였고, 롯데슈퍼하차 고객의 양해를 구한 다음 그냥 지나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20분 정각에 남춘천역에 도착하는 쾌거를 올렸다. 버스 출발시간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남춘천역에서 소양강처녀상 까지 총알택시를 숨 가쁘게 갈아타면서 막차 버스 승차에 성공하는 개가를 올렸다. 마치 007번개작전을 방불케 하는 숨 가쁜 상황이 연출되면서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쾌재를 불렀다. 그로 인하여 2박3일 여정을 1박2일로 단축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불편함을 감수해 주시고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Ⅵ. 산행을 마치고
- 입산통제, 미세먼지, 비 소식 등 악재가 겹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산행환경 속에서 무등산하를 마음껏 누빌 수 있도록 축복 주시고 영광 주심에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매끄럽지 못한 일상 운영으로 인하여 혼란을 초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확립해주시고, 일정운영에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면서 무등산하에서의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