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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6절-2편 6절.
1편 1편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2편 1절-6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1편 6절: 하나님께서 악인의 길은 인정을 안 해 주고 의인의 길은 왜 인정을 해 주실까?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과를 먹고 먹으니 그 살이 오르고, 그 정신이 오르고, 그 인격이 형성이 되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모든 지식이 하나님과 똑같이 내려진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주실 수밖에 없는 거다. 이 의인은 모든 삶을 그렇게 살아왔다. 다른 사람을 그렇게 지도 인도하고, 또 그렇게 인인관계를 가졌으니 이게 또 의인의 삶이고, 의인의 길이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거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과 연관관계를 안 지을 수가 없는데, 장사꾼들은 장사를 할 목적으로 관계성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사를 한다면 그 장사는 하나의 매개물이요, 이 매개물로 통해서 다른 사람을 의인화 시켜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와 접촉이 되면서 그 사람이 나로 인해서 자꾸 뭔가가 배우고 깨달아져서 사람이 만들어져 가는 그 면으로 연관성을 지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하나의 상업적으로 관계성을 짓고 간다면 나중에 후회거리가 생긴다.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선행과 의행을 부르짖기도 하고, 또 그렇게 했으면 잘 한 사람에게 표창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세상이요, 그리고 이면으로 보면 그 영은 죽어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의 의와 선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일반적인 의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어떤 사건 환경을 만나도, 그 어떤 일을 만나도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목적으로 한다면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의인이다.
일반적인 의행을 한 그 행동 자체가 바쁘다는 말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행은 하나님의 의사성과 목적과 대립적이요, 땅에 속한 소원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이 없는 의행이라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일반적인 의행은 해야 한다. 안 하면 말쟁이밖에 안 된다. 그리고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일반적인 의행을 할 때 사람들이 그걸 보고 의행이라고 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행이다. 나타나도 의행이고, 안 나타났더라도 의행이다. 안 나타났다고 해서 의의 사람이 아니냐? 아니다. 하나님의 의를 목적으로 했다면 그건 의행이다. 의의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행은 특수한 의행이다. 하나님만이 알아주는 거다. 인간이 알아주던 말건 상관이 없이 하나님만 알아주면 되는 거다. 하나님이 인정을 해 주셔야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건 그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은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격과 성품이 닮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온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령한 성품을 지닌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이 일이 잘 되라고 그 일에 동참하고 협조하고 참여하고 수종드는 것 전부는 의행이라 선행이라 한다. 또한 이런 목적으로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 하고, 또 이런 교훈의 길을 가는 것을 의인의 길이라고 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이 일 중에 최고의 일이요, 의행 중에 최고의 의행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은 이 일을 못한다. 세상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할지언정, 돈을 많이 벌게 할지언정 사람이 만들어지게 하는 일은 못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이 일은 사람마다 재간도 있고, 생활을 위한 업이 있으니 이런 생계적인 업을 매개물로 해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다 할 수가 있는 거다. 문제는 실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지 되느니만큼 있느니만큼 할 수 있는 거다.
실력이 없으면 구체적인 교훈은 못 해 줄망정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같이 예수 믿읍시다’ 이 말은 할 수 있는 거다. 각자가 일을 하는 처소는 달라도 다 사람과 관계성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건 이 일은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려면 자기가 상대를 성품적으로 정복을 해야 한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과 악인의 사상은 정반대의 사상이다. 그런고로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은 뚜렷이 다르다. 악인은 하늘나라 천국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또 자기를 만든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다 무시한다. 하나님 무시는 한 마디로 자기 무시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무슨 일을 만날지도 모르면서 불타질 세상, 빼앗길 세상, 심판 받을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고 영원히 살 것처럼 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가 태어나자마자 자기를 인간으로 만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는 것인데, 세상을 붙잡은 사람도 그렇고 세상을 붙잡지 않은 사람도 그렇고 이것을 무시하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정력낭비, 시간낭비, 물질낭비를 하며 자기 일생을 사는 것이 악인이다. 또 세상 것을 이루기 위해 사단 마귀 귀신이나 악령류들에게 등용이 되고, 거짓 종과 거짓 것들에게 등용이 되면 이것도 악인이다. 또 세상 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구원을 다 놓치고 다른 사람이 구원 얻을 기회도 놓치도록 했다면 이것이 또 악인이다. 그러니까 ‘행동이 좋다. 나쁘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타를 구원 얻을 기회를 놓치게 하는 삶의 길이 전부가 악한 길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던 모르는 사람을 만나던 할 수 있는 대로 예수님과 접촉을 시켜라.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 선을 뿌리고 갈 우리들이라. 뿌려만 놓는다면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시고, 또 그 사람을 신령천국에서 만날 수가 있으니 기쁜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이렇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졌다면 이것은 이룰구원이 많을 거고, 소유구원도 많을 거고, 건설구원도 많을 거고, 투자구원 등등 구원이 안 붙는 게 없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했다면 이룰구원 면에서 쫄딱 망하고 악한 자가 돼버린다.
악인의 길은 항상 선악과를 따먹는 길이다. 그 사고방식이 늘 그렇게 돼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늘 선악과를 따먹는 쪽으로 일반통행으로 나간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 쪽으로 갔다가 진리신앙으로 들어왔다가, 또 선악과를 먹은 쪽으로 나가고, 하루에서 여러 번 그렇게 한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슬픈 일을 만나면 하루 온 종일 마음이 슬퍼서 하나님 쪽에 붙어서 ‘기도합네’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기도 하고, 또 뭔가 기쁜 일이 생기면 마음이 밖으로 나가서 막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어린애들이 노는 것과 똑같다. 밖에서 실컷 친구들과 놀다가 해가 지면 배가 고프니까 방안으로 슬슬 들어오는 어린애들과 똑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들은 일반 사회적 윤리 도적적인 그 악인만 알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악도 알아야 하고, 신앙적인 면의 악도 알아야 한다.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일반 종교인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이 살짝살짝 나와서 자기를 세상 쪽으로 끌어가는 장면이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신앙 질적인 면에서의 악인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서 이탈이 된 것이면 다 악한 것이다.
우리가 악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하고 아무리 학벌이 좋아도 무식한 사람보다도 더 악한 짓을 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영웅호걸 미인이라도 악한 짓을 하는 자가 많다.
신문에 위안부 얘기가 나오던데, 위안부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악한 짓이다. 세상은 그런 걸 ‘하라. 마라’ 하겠지만 그 할머니들은 그러잖아도 마음이 상해있는데 거기에다 송곳으로 찌르듯이 그 할머니들을 소재로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다. 그게 일반적으로 ‘선인지, 악인지’ 하는 것을 자기 집안에서 되는 일로 생각을 해봐라. 그러면 금방 알 수가 있는 거다. 자기의 어머니의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느냐?
교회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은 자들 중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가 많다. 성령 비슷한 악령도 있듯이 그런 악한 자들도 많은 거다.
우리가 ‘길’이라고 할 때는 신앙노선을 말하는 건데, 인간의 노선은 질적인 면에서 두 가지밖에 없다. 원래는 하나뿐인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길이 또 하나 생겼다. 두 가지 노선밖에 없는 건데 그러나 어떻게 보면 세 가지 노선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는 생명과를 먹는 진리신앙 노선이 있고, 또 하나는 선악과를 먹는 세상노선이 있고, 그러니까 하나는 생명의 노선이고 하나는 사망의 노선이다. 그런데 교회가 진리신앙 노선으로 가지를 않고 성경을 가지고 선악과를 먹는 노선이 또 하나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 노선은 세상적인 교회를 말한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을 모른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적인 노선으로 나간다면 이는 진리가 아니고 비진리다. 비진리의 정신 사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적인 종교적 신앙노선으로 나가면 넓은 길, 세상 길, 사망 길, 멸망의 길이기 때문에 이룰구원 면에서 망하는 것뿐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원히 망하는 거다. 이것은 일을 해놓고도 뺨을 맞는 격이다. 집을 지을 바에야 정확하게 지어야 되겠는데 어설프게 지어서 다 헐어버리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서도 그런 게 있다.
우리 목사님들의 세계가 그런 일이 많다. 죽도록 배웠는데 알고 보니 세상 길이라. 그러니까 그만큼 멀리 간 것을 알았다면 빨리 되돌아 와야 하겠는데 되돌아오기가 쉬운가?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갈 수도 없는 거고. 어찌되었건 잘못 됐으면 뒤로 확 돌아서서 뛰어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이 앞으로 나가다가 ‘이 길이 아니구나’ 하면 뒤로 돌아서서 뛰어오는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런 게 없다. 자기가 뒤돌아서서 옳은 것으로 오지는 않고 오히려 옳은 것이 자기가 가는 잘못된 길로 따라오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 이게 뭐가 되겠느냐? 그러니 악인의 길은 망하는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을 안 듣고 선지자를 죽였으니 악한 거다. 예수님 당시 때에 유대 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안 듣고 고치지를 못했으니 악한 거다. 말세의 교인들에게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말세의 교인들이 악하다는 말이다. 이 악인의 길은 망하는 것밖에 없다. 봐준다거나 그런 게 없다. 그냥 망하는 거다. ‘사업이 망한다’ 이런 걸로 알아듣지 말고 사람이 망한다 그 말이다. 인격적 차원에서 사람이 망한다. 사정없이 망하는 거다. 이 망하는 것을 구별하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악인의 길은 망한다’ 할 때 망한다는 이것이 첫째,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거나 그 나라의 법을 어겨서 그 사람이 감옥 속에 갇혀서 죽었다면 망한 거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사업을 했는데 하는 것마다 다 망했고 살림도 다 털어먹고 병이 들어 죽었다면 그 사람은 망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 이룰구원을 이루지 못해도 하는 사업마다 다 잘되고 아들딸들도 다 세상 성공 출세를 했다. 그렇게 되었어도 그 사람은 망했다. 세 사람 다 이룰구원은 망한 거다.
이룰구원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부지런히 이뤄야 한다. 살아있으면서 이룰구원을 못 이루면 그 사람은 망한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 죽는 거나 감옥에 들어가는 그런 망한 것만 보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아도 사람이 망한 것을 볼 줄 알아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서 이 땅에 살게 하신 목적은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입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같이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출생해서 이생을 다 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하나도 못 입었다면 이건 망한 거다. 이 망함은 임시적으로 망한 게 아니라 영원히 망한 거다. 벌을 받아서 죽고 사업이 망하고 이런 것은 선악과 따먹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망한 것이고, 우리 기독자들은 그 이면의 영적인 망함을 볼 줄 알아야 한다.
2편 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열방이 뭐냐? 각 나라들. 지상의 각 나라들은 각자 자기들이 정복하여 세운 나라들이다. 이 각 나라에는 백성이 있고, 정복한 땅이 있고, 그들 세계 나름으로 세운 법이 있어서 자기들의 능력대로 통치를 하고 다스린다.
이 다스림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다스리는 거다. 그래서 열방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통치 말씀통치를 떠난 자들이요, 세상을 소원 목적하여 사는 자들이다. 진리를 거역하는 종교인들까지 모두 싸잡아서 열방들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모든 열방들은 자기가 관할하는 땅에서 자기의 생활, 자기의 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 반경은 다 자기 나라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열방이 분노한다? 왜 열방들이 떠들고 분노를 하느냐? 지금 우리나라 안에서도 막 떠들고 분노를 한다. 분노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건드리니까 분노를 하는 거다. 자기가 관할하는 땅을 건드리거나, 자기의 법을 거역하거나, 자기의 주장에 대립을 하면 분노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과 세상 것을 더 가지려고 모두 떠들며 산다. ‘내가 제일 많이 가졌다.’ 또 한 쪽에서는 ‘나 좀 다고. 너만 먹느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된다’ 하며 떠든다. 그런데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악인은 심판을 당하고 멸망을 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한다.
왜 열방이 분노를 하는 거냐? 열방들의 입장에서 가만 들어보니까 의인들이 자기들을 보고 악하다고 하고 악인이라고 하니까 분이 나는 거다. 특히 무엇보다도 속화된 교회는 더 그렇다. 하나님의 진리이치를 가지고 옳은 소리를 하면 속화된 기독자들은 아주 열불을 낸다. 이단자들도 열불을 낸다. 거짓 종들도 열불을 낸다. 속화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이질성을 가지고 얼마나 떠들고 일어나는지 모른다. 이게 열방의 속성들이다. 열방의 사상과 똑같다.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민족은 각 나라의 족속들이다. 각 나라는 혈통이 다르고,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풍속 습관이 다르다. 다 자기 소원 목적들을 가지고 다 자기 방식대로 건설을 하면서 살아간다.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민족들이 무슨 허사를 경영한다는 말인가? 허사가 뭐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모든 수고와 피땀이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죽도록 해봐야 불에 타지고, 무너지는 일이고, 자기 계획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고, 일을 해놓고도 심판을 받을 일이 허사라.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이 다 각자 자기의 설계와 계획대로 성공을 바라보고 추진을 한다. 하지만 성공을 한들 그것을 몇 시간이나 가지고 누리겠느냐? 또 다 성공을 하겠느냐? 못 이루고 죽는 자도 있고, 이뤘다고 해도 이룬 것을 도둑을 맞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할 것이고, 세상 끝에는 불에 다 타질 것이다. 그러니 세상만사가 허사가 아닌 게 어디 있느냐?
전:에 ‘죄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했다. 소원 목적적인 면에서의 얘기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계유지를 위해서 활동을 하는 그 면의 의미가 아니라 ‘소원 목적적으로 어디에 두고 그 일을 하느냐’를 말하는 거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 돈을 벌고, 일터에 나가서 일을 한다. 또 일의 방편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가 있으니 그 때 믿음의 대화를 가지려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자기가 하느니만큼 거기도 교회다. 그러니 세상을 사는 재미가 있는 거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면 같은 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서 ‘한 날은 봉사적인 일을 하자’ 해서 모여서 봉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생의 여유를 갖고 재미를 느낀다. 사람이 지어지기를 남을 위해서 일을 하면 그게 즐거운 거다. 자기만을 위해서 일을 하면 거기에는 욕심이 붙어있기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면 그게 즐거운 법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놨다. 거기에서 이왕이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마음이 들어간다면 얼마나 더 기쁠까? ‘해 아래서 수고하고 애쓴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해 아래의 것을 목적하여 사는 자는 모든 만사가 허사다.
2절-6절: 우리가 얼른 듣기에는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에게 행한 사건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예언 속에 들어있는 사상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말세에나 늘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인간들의 정신 사상을 지적하고 있는 거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세상의 군왕들’이란 각자 자기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자들을 말한다. 관원은 그들의 밑에서 일을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서 어떤 묘안을 찾고 꾀를 내는가 하니 ‘여호와 하나님과 단절을 하고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을 하고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투로 보아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 같고, 메시아도 알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임이 분명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온 우주만물과 신령계와 영물들을 만드신 분이요,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이시요, 천국백성인 성도를 위해서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섭리하는 분이시요, 신령천국을 누림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 세상 마지막 날에 당신의 백성을 신령세계로 데리고 올라가실 분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을 하는 것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시인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여지니 실감이 나지 않고, 인격적으로 믿어지지를 않으니 하나님의 뜻은 안 받아들여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더 자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인간의 비위를 맞춰 돌아가는 것이 더 실감이 나고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적이 되는 거다.
뭔가가 믿는 구석이 있고, 자기가 기댈 구석이 있으면 그것이 배경이 돼서 대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대적을 하는 거다. 전혀 아무 것도 없다면 대적할 거리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이들의 단체가 상당히 큰 모양이다. 세력도 있고, 권력도 있고, 부귀영광도 있고. 그런 게 뒤에 배경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기름 받은 자를 대적을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