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北宗氏 7인의 泮村詩序(남북종씨 7인의 반촌시서)
남북에서 장흥 위씨를 대표하는 존재공(存齋公)과 만암공(萬庵公) 등 7인이 1778년(戊戌) 성균관 근처에서 우연히 만나 각자 시 한수씩을 읊었다.
주인공들은 존재공(1727~1798), 만암공(1747~1820), 상암공(觴巖公) 휘 백호(伯昊․1734~1810), 동산공(東山公) 휘 백신(伯紳․1736~1820), 해의재공(奚疑齋公) 휘 백훈(伯勛․1738~1815), 행헌공(杏軒公) 휘 영찬(榮纘․1737~1814), 서계공(書溪公) 휘 백순(伯純․1737~1815) 등이다.
당시의 연치는 존재공이 만 51세로 가장 많아 종장(宗丈)이었으며 만암공(1747~1820)은 고작 31세로 가장 젊었으며, 남측인사들은 40세를 넘었다. 남북 종인들이 과거를 보러 남쪽에서는 올라가고 북쪽에서 내려왔다. 그러다 여관에 투숙했는데 7인의 종인들이 극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과거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반촌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가 우연히 수인사를 하면서 종씨임을 확인한다. 너무도 뜻밖의 만남이라 진실로 반가웠을 것이다.
그대로 헤어질 수 없어 시 한수씩을 읊어 우연한 만남과 이별의 섭섭함을 잊지 않기 위한 기념시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존재공은 왜 동생들과 동행했을까? 과거를 보기 위한 여행일까. 당신은 38세 때인 1765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복시(覆試)에는 엽관(獵官)세태로 말미암아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신 까닭에 마지막 과거를 보기 위한 여행일 수 있다. 그러나 동생들을 안내하기 위한 거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장록 p. 1149)
「我魏大於東邦仟有餘歲於長興咸興最盛每恨涯角落落無以合席敍倫戊戌不佞以觀光到京師適會宗氏六人於東泮逆旅陳世德敍親誼甚繾綣款洽此誠吾宗盛事而況子華氏丈文章雅望平日之素所慕仰而邂逅承顔於千里他鄕則甚爲愜願如何哉臨別不可無識故謹以絶奉呈要和以二備他日莫遠之資云爾」 光肇書
〈해설〉위씨가 동방에서 크게 번성한지 천여 년이며 장흥과 함흥에서 가장 성하였다. 매양 여기저기 떨어져 사느라 함께 정을 나누지 못한 것을 한탄스러워했다. 그런데 戊戌年(1778) 내가 과거보러 서울에 왔다가 마침 종씨 6인을 동반의 여관에서 만나 세덕을 이야기하고 친의(親誼)를 나누웠다. 이는 진실로 우리 종씨의 성사이며 더구나 자화(子華․존재공의 字)씨 어른의 문장과 아망을 평소에 모앙(慕仰)하였는데 천리타향에서 뜻밖에 뵈오니 참으로 바라던 바를 이룬 것이다. 헤어지기 섭섭함을 달래기 위해 시 2절을 지어 봉정하고 화답을 받아 타일의 자료로 갖춘다. (광조서)
○ 光肇(광조) = 吾宗宗約貴親親洛水萍逢意更新情話燈前兼雅謔却忘身是客中人
系出冠山摠懿親秦城邂逅此遊新苟將孝思追先祖百世何殊一室人
〈해설〉우리 문중 종약은 친한 이를 친히 함을 귀하게 여기는데 서울에서 나그네로 만나니 뜻이 다시 새롭도다. 등불 앞에서 점잖게 정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하니 문득 나그네임을 잊었네. 관산에서 출계하였으니 모두가 의친이라 진성(秦城)에서 뜻밖에 만나니 새롭구나. 진실로 효사로 선조를 추모한다면 백세가 되더라도 어찌 1실인이 다르리오.
○ 伯珪(백규) = 三百年前同室親旅窓團會語還新此後相傳仍百代莫敎忘若逢人
彛情百代便相親蘭臭旅牕契又新難耐每年秋後雁聲啼送意中人
〈해설〉3백 년 전 동실의 가까움이라 여관에서 단란하게 모여 이야기 하니 도리어 새롭구나. 이제부터 상전하여 백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잊지 않고 길 가던 사람 만나듯 하지 말세. 의정은 백대 되어도 서로 친하니 난초의 향기처럼 정 또한 새롭구나. 해마다 가을 지나면 기러기 우는 소리 견디기 어려우니 정다운 사람 울려 보내리.
○ 伯昊(백호) = 洛水秋風舊懿親兩逢情誼覺相新莫言契闊從今又同雲衢來去人
〈해설〉 낙수의 가을바람 옛날의 의친이라 양쪽에서 만난 정의 서로가 새로움을 느끼네. 이제 또한 다시 만남이 기약 없다 말하지 말라 다 같이 구름거리를 오가는 사람이리.
○ 伯紳(백신) = 千里逢迎百代親幾年契潤語還新莫言族世今相遠自是當年毘季人
〈해설〉천리에서 백대의 친함을 맞이함이 몇 년 만인가 하는 말이 새롭구나. 일가의 대수는 이제 서로 멀다고 말하지 말고 당년부터는 형제이거늘.
○ 伯勛(백훈) = 地北天南幾世親相逢此日誼愈新情話一宵旋告別客牕曉月兩鄕人
〈해설〉북쪽 땅 남쪽 하늘 몇 대의 친함인가. 오늘 서로 만난 정의가 더욱 새롭구나. 한밤의 정다운 이야기 얼마 지나 고별하니 객창의 새벽달 두 고을 사람이네.
○ 榮纘(영찬) = 洛水萍逢始覺親一門敦誼此宵新二千里外湖關客三百年前毗季人
〈해설〉낙수(洛水)에서 나그네로 만나니 비로소 친함을 깨닫네. 일문의 돈독한 정이 이 밤에 새롭구려. 이 천리 밖 호남과 관북의 나그네가 3백 년 전에는 형제였네.
○ 伯純(백순) = 親誼非關見後親相逢歡意倍相新旅窓話語無窮盡爲是原來一本人
幾代參商百代親漢陽萍水拭靑新燈前半夜悠悠話依舊當年一室人
〈해설〉친의는 만남 뒤에 친함과 관계없으니 상봉한 즐거움이 배나 더 새롭네. 여창의 이야기 다할 수 없으니 이는 원래 한 본이기 때문이네. 몇 대를 떨어져 살았어도 백대의 친함을 한양의 평수 씻고 보니 청신하네. 등불 앞 한밤의 정담 예대로 당년의 한 방 사람들이네.
(144-085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84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84일차에도 '선조님의 유작'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선조님의 유작]/ 무곡
각본에 따라 잘 짜여진 드라마 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명 장면들이 환상적으로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는 진하다'는 징표가 아닐런지요./ 무곡
시대적으로는 미국이 독립(1776년 7월)을 달성한지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요즘 시대라면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회포를 달랠텐데, 조선말기 지식인들의 만남이라 글로서 만남의 반가움과 헤어짐의 아쉬움를 표현했네요./ 벽천
예전의 행정고시(지금의 5급 공채) 응시 인원이 대략 2-3만명(7급은 3만 5천) 전후가 됩니다만,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과거에는 몇명이나 응시했을까요?/ 무곡
茂谷(무곡) 위상환 님
조선팔도에서 모여드는 선비가 꽤(?) 많았으리라고 사료됩니다./ 벽전
위윤기 님
조선시대 대과의 경우
최대 2천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답안지를 제출하는 인원은 경쟁률에 아주 많이 미달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과거 최대인원은
21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과거는 부정이 너무 심해
갑오개혁때인 1894년도에
폐지된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무곡
장흥과 함흥으로 2천리 떨어져 사는 종친끼리 과거시험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글을 남긴 장면이 저절로 그려지는 듯합니다.
종친님들 추석연휴 잘 보내시길 빌며 이곳에나마 글 한줄 남기고 갑니다./ 원곡
1778년 무술년은 정조 2년때 입니다. 이때 존재공께서 정조를 만났다면, '나라에 큰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