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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生실재인물설의 전개와 許生傳의 근대적 재인식
Ⅰ. 머리말
Ⅱ. 崔益翰의 許生의 實蹟과 許愈의 臥龍先生遺事
Ⅲ. 郭鍾錫의 증거확충과 실재인물설의 전개
Ⅳ. 허생전 의 재인식과 臥龍亭遺集의 간행
Ⅴ. 맺음말
Ⅰ. 머리말
燕巖朴趾源의 한문단편 許生의 마지막 대목은 北伐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실현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李浣을 痛罵한 허생이 다음날 종적을 감추는 것으로 끝난다. 허생 에서는 허생의 7년 독서에서부터 이 사건까지만 기록되고 그 이전도 사건 이후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허생 을 시작하기에 앞서 “허생은 끝내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라고만 하여두고 박지원도 굳이 허생의 뒷조사를 시도해보지 않았으니, 허생의 실재 여부는 애당초 아득한 미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허생 에 잇달아 부기해놓은 許生後識에서 처음 허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尹映을 다시 만나서 들은 “슬퍼할 만한 것은 허생의 처가 끝내 다시 굶주림에 처했음이지.”라는 말을 기술하여 긴 여운이 남도록 만든 박지원의 수법이, 허생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도발한다. 윤영의 말은 허생의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며, 허생이 실존인물이어서 이런저런 일화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던 양으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는 더러 전승자들의 희망 속에서 주인공에 대한 구체적 물증을 생산해내기도 할 터이다. 1830년에 완성된 漢京識略에는 “옛날 허생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나 독서를 좋아했으며 자못 특이한 사적이 있어서 박연암이 그의 전을 지었다.”고 했다. 허생 의 실재 모델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제 한경지략은 박지원이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만을 확인시켜줄 뿐 그 이상의 실체적인 물증은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러다가 20세기가 되어 변화된 분위기 속에서 허생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생산되었다. 崔永年은 1925년에 海東竹枝를 출간하는데, 조선의 풍속시집 성격의 이 책에서 허생의 무덤을 두고 지은 시가 있다. 이 시의 주석에서 “(허생의 무덤은) 남포에 있고, 이름은 自衡이고 그 후손이 당진에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 허자형이라는 인물이 허생이라는 것이다. 남포는 현재의 충남 보령이니 그 후손이 멀지 않은 당진에 사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남포에 무덤이 있다는 허자형이 허생이라는 설은 해동죽지 이외의 자료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어서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파급되지 못했었던 점을 짐작해볼 수는 있겠는데, 최영년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 따져볼 길은 없다.
그런데 臥龍亭許鎬(1654~1714)라는 인물을 허생으로 지목한 일련의 주장은 상당한 파급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金台俊이 臥龍先生遺事를 거론하며 이 분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소박한 전설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연암이 點鐵成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연암소설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李家源이 臥龍亭遺集의 자료를 더 검토하여 김태준의 견해를 확정한 이후, 우리 학계에서 허호의 이야기가 연암의 허생 과 관련된 것으로 언급한 연구는 적지 않다. 지금껏 검토되진 않았지만, 허호가 바로 허생 그 인물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崔益翰이며 그 주장을 신문 칼럼 許生의 實蹟으로 공표한 해는 1925년이다. 김태준의 주장은 최익한의 칼럼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1959년 허호의 문집 와룡정유집이 간행된 것도 종국적으로는 최익한의 주장에서 단초가 마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최익한이 주장의 근거로 삼은 와룡선생유사 는 19세기 말 허호의 후손 許愈(1833~1904)에 의해 작성된 것이고, 이와 관련하여 郭鍾錫․金昌淑․金榥 등에 의해 작성된 글이 와룡정유집에 수록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에 벌어졌던 이 일련의 과정에서 허생고사 의 유행 및 시대상황과 관련된 古典에 대한 해석과 재창조의 전개를 엿볼 수 있으니, 자못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하다. 본고는 최익한에 의해 와룡정 허호가 허생으로 지목된 사연을 검토해보고 그 전후맥락을 추적하여 이 일련의 과정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음미해보고자 한다.
Ⅱ. 崔益翰의 許生의 實蹟과 許愈의 臥龍先生遺事
1. 許鎬의 생애와 崔益翰의 발견
臥龍亭許鎬는 1654년에 출생하여 1714년에 서거하였다. 그의 문집 臥龍亭遺集은 사후 245년이 지난 195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다. 와룡정유집은 권1에 詩124수, 권2에 文10편으로 분량이 많지 않고, 권3에 附錄으로 다른 사람이 지어준 唱酬詩와 輓詞, 그리고 行狀, 遺事, 墓碣銘, 墓表가 있다. 묘갈명 에 의하면 傳이 있다고 되어 있고 목차에도 전 이 있는데, 정작 본문에는 전 이 없다. 이 전 이 혹 연암의 許生을 지칭하였던 것이다가 최종적으로 조판을 하는 과정에서 산삭한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문집 전체에 앞서 序가 있고, 문집 전체의 뒤에 후손들의 跋이 있다. 와룡정 허호 당대의 인사들에 의해 지어진 창수시와 만사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살펴보면, 序는 金昌淑(1879~1962)이 지었고, 行狀은 李天永(미상), 遺事는 許愈(1833~1904), 墓碣銘은 郭鍾錫(1846~1919), 墓表는 金榥(1896~1978)이 지었다. 다들 영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은 선비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만 행장 을 작성한 이천영의 경우 아직 행적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1832년 漆谷誌가 편찬될 때 그것을 纂한 인물로 동일인명이 발견된다. 許燉(1586~1632, 바로 와룡정 허호의 조부이다)의 문집 滄洲先生文集에 실린 허돈의 묘지명을 작성한 인물도 이천영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묘지명은 1819년 작성된 것이다. 칠곡이 영남에 있고, 후손의 기록인 발 에서 행장 이 유사 에 앞서 먼저 있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세 자료의 작성자가 동일인인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창주묘지명 과 와룡정행장 , 두 문건의 작성자가 동일인이라고만 해도 허씨집안과 가까운 사이의 19세기 초중반 인물이 된다. 이제 와룡정 허호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글들을 지은 시대에 따라 배열한다면, 행장 (19세기 초) 유사 (19세기 말) 묘갈명 (20세기 초) 묘표 (20세기 초중) 서 (20세기 중)로 순서를 잡아볼 수 있다. 해당 글을 다루면서 구체적으로 언급해보기로 한다.
1925년 1월 14일 崔益翰(1897~?)은 동아일보에 허생의 實蹟을 발표하며 허생전 주인공의 실제 행적을 발굴한 감격을 전하고 있다. 최익한은 우선 허생전 의 주인공 허생이 완벽한 인물이었음을 성찬하고 나서, 허생전을 읽으면서 늘 한탄스럽게 여긴 바는 허생처럼 훌륭한 인물이 소위 ‘亡是公’이나 ‘烏有先生’으로서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실재 인물이 아닌 것으로 여겨져서 사람들이 전혀 허생의 훌륭한 점을 본받으려 들지 않는 현실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최익한 자신도 허생전 을 흥미 있게 읽다가도 끝내는 그것이 ‘소설’에 불과하기에 힘없이 책을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던 최익한은 우연한 기회에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 놀라운 발견의 결과가 허생의 실적이라는 글이다.
언제인지는 的記할 수 없으나 대개 八九年前에 내가 慶尙道知禮郡 어느 漢學者의 집에서 過宿할 때에 그의 案上에 許后山文集이라 題目한 印行書物몇 冊이 놓여 있음으로 破寂삼아 閱覽하다가 그 冊中에 六代祖考臥龍亭遺事라는 一篇을 偶然히 읽게 되었다. 그런데 그 遺事의 事實이 나의 前부터 愛讀하던 許生傳의 것과 大意上合致된 點이 적지 아니하다.
后山(許愈)이 쓴 실제 인물 臥龍亭(許鎬)의 遺事가 허생전과 대의상 합치됨을 발견한 것이다. 최익한에게 허생전은 더이상 가공의 소설이 아니며 그 주인공 허생이 더이상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실제 인물이 되는 순간이다. 최익한의 논리로 따지면 이제 충분히 허생의 훌륭한 점들을 본받아도 되게 된 것이다. 그 발견의 순간은 이 글을 발표하는 1925년으로부터 8,9년 전이라고 하였으니 아마 1916~1917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적지 아니하다는 “대의상 합치된 점”은 이러하다고 하였다.
“海島中…… 終南山下…… 朝廷密議北伐搜訪人才…… 將臣某聞公之爲人異之…… 公設三策以詰之…… 將臣逡巡而退公亦明日拔宅去” 이 몇가지 事實이 傳文에 比較하면 대단 簡略하나 그 主人公의 名字와 生卒顚末은 遺事에 祥備하였다.
허생이 無人空島를 찾아 간 점과 와룡정이 해도중으로 피신한 점, 허생이 남산 묵적동에 살았던 점과 와룡정이 종남산에 거처한 적이 있었던 점, 허생이 이완대장을 만나 時事三難으로 질책한 점과 와룡정이 將臣을 만나 三策을 내세워 힐난한 점. 상세하고 간략함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 가지 면에서 허생의 실제 인물이 와룡정임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상 허유의 육대조고와룡정유사 (후산집에 게재된 이 글이 와룡정유집에 유사 라는 제목으로 전재됨)에는 허호가 남산에 살면서 북벌을 위해 찾아온 將臣에게 삼책을 들어 힐난했다는 점 외에는 허생전과 일치하는 문맥이 없다. 해도중으로 피신한 사연도 웬 못된 중을 때려죽이고 그 일당의 후환이 두려워 도망친 것이지, 박지원의 허생 처럼 群盜를 이끌고 적극적으로 무인공도를 찾아나가 신세계를 개척한 것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허생을 이루는 화소의 핵심인 변부자로부터 돈 1만냥을 빌려 買占賣惜으로 치부하는 것과 생계를 제공하여 변산군도를 해소하는 화소가 빠져 있다. 또한 연암의 허생에서 북벌삼책 대목은 “인재를 모시기 위해 왕이 三顧草廬하게 할 것, 명나라 망명자를 위해 왕실과 혼인시키고 살림을 차려줄 것, 귀족자제를 청나라로 보내 정탐시킬 것” 등으로 세 조목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상대 將臣으로 李浣이라는 구체적 실존인물을 제시하고 있으며, 장신에 대한 질책 과정에서 칼을 뽑고 신랄한 비난을 가하고 있어 자못 생생한 장면 묘사가 전개되고 있는 것에 반해, 유사의 이 대목은 그저 삼책을 제시했다가 장신이 난색을 표하자 꾸짖고 이사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있고 삼책의 내용 등은 전혀 생략되어 있다.15) 그래도 북벌을 위한 三策만이라도 일치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며, 적어도 이 北伐三策부분에서 연암의 허생 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귀착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최익한은 한 가지 의심을 해본다. 혹 허유라는 인물이 허생을 읽고 자기 조상 허호의 일이라고 의탁해서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許生이 곧 臥龍亭許鎬인 것이 너무도 나의 意外의 發見이기에 이 遺事가 或許生傳에 事實을 얼마쯤 假襲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 疑心이 도리어 생기었다. 그後얼마 아니되어 나의 老師이던 郭俛宇先生에게 許臥龍이 許生與否임을 質問하였다. 先生은 말씀하되 “許生이 許臥龍이던 것이 分明한 듯하다. 許臥龍이 본래 나의 鄕邑인 固城의 臥龍洞에서 生居하였던 故로 그 奇偉非常한 事蹟은 나의 幼少年부터 長老들에게 種種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朴燕巖의 許生傳은 時諱文字인 까닭에 오래동안 刊行치 못하였으니 嶺南人士로서 京中先輩인 燕巖의 許生傳有無도 알지 못하던 當時에 어찌 傳의 事實을 假襲할 수 있으랴. 이뿐 아니라 遺事著者인 許后山은 나의 故老友許愈氏니 遺事著者當時에 許生傳과는 아무 聯絡이 없었고 다만 家傳한 逸話와 斷簡中에서 撰出한 것이다.” 한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許生이 許鎬臥龍先生인 것을 疑心없이 認定하였다.
그 문제를 곽면우에게 상의했다고 하였다. 곽면우는 俛宇郭鍾錫(1846~1919)이다. 최익한은 어려서 곽종석을 찾아가 글을 배웠고, 최익한이 신학문을 하게 된 것도 곽종석의 권유였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곽종석의 말씀에 대해 최익한이 갖고 있을 신뢰는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곽종석은 최익한의 의심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반박하고 허생이 와룡정임을 단언하고 있다. 곽종석의 단정 근거는 첫째 자신의 고향에서 와룡정의 사실을 익히 들어왔다는 것, 둘째 박연암의 문자는 영남인사가 구경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 셋째 허후산은 자신의 老友로서 가전의 일화에서 유사를 찬출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제시하자 최익한도 허생이 와룡정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이다. 더구나 곽종석은 와룡정과 허후산을 익히 알 수 있었던 처지라서 더욱 깊은 신뢰감을 산출했을 것이다. 이제 최익한에게 있어 허생은 곧 와룡정인 것이 되었다. 기사의 말미에 허유의 와룡정공유사 를 전재하였다. 이 유사 의 경개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① 許鎬는 영특하였으나 과거를 볼 생각을 하지는 않고,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했고, 臥龍이라 自號하였는데 朱子의 臥龍菴고사에서 취한 것이다.
② (傳言에) 젊어서 한때 호서의 어느 절에 갔는데 중이 완악하게 굴기에 쳐죽였다. 그 무리의 복수가 두려워 海島로 피신했다.
③ 돌아와 終南山아래 살면서 中庸을 읽었다. 당시 將臣이 북벌의 계책을 물으러 왔다가 허호가 제시하는 三策에 난색을 표하다 꾸중만 듣고 물러난다. 공도 집을 비우고 사라진다.
④ 산중에 집을 지어놓고 撫劍歌를 부르며 효성을 다해 부모를 모시다가 61세에 죽는다.
⑤ 공이 죽었을 때에 누군가 와서 “공명이 갔구나.” 하며 통곡하고 사라졌다.
⑥ 자손들은 아무개 아무개가 있다.
유사 에서 주목되는 점은 “전해들은 말(傳言)” 부분에서 호서의 완악한 중을 撲殺하는 부분과 將臣에게 北伐三策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마치 한문 단편의 한 작품에서 볼 수 있을 듯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와룡정 허호의 생애에 대한 기록 중 이 유사 보다 앞서 있었던 李天永의 행장에서는 이러한 행적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먼저 지어진 행장 의 경개는 이러하다.
① 許氏의 유래와 許鎬의 조상 소개.
② 갑오년(1654) 7월 14일 태어난 許鎬의 자는 京遠, 제갈량의 고사에서 臥龍處士라고 自號함.
③ 어려서 영특했고 약관에 수차 鄕試에 합격했지만 會試에서 탈락하여 武藝에 종사함.
④ 매일 밤 칼을 쓰다듬으며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을 것을 다짐하고 가산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노비를 훈련시킴.
⑤ 선비가 호방하기만 하고 몸 단속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문득 탄식하고는 출가하여 독서에 전심함.
⑥ 부친 道巖公이 죽자 예를 다하고 정성껏 3년시묘를 행함.
⑦ 모친을 정성으로 섬기며 친척들의 구휼에도 진심을 다함.
⑧ 경진년(1700) 葛菴李玄逸에게 배움을 청함.
⑨ 임진년(1712) 모친상을 치르고 갑오년(1714) 서거함.
⑩ 공은 玉雪같은 용모에 음성이 청량하고 의론이 확고했으며, 평소 아침저녁으로 한 되의 밥과 세 병의 술을 마셨고, 힘써 성인의 뜻을 따랐었다.
⑪ 李密菴栽․權蒼雪斗經․鄭喘喘翁重元․金檢討汝鍵등이 공과 교유하였고, 만시를 남김.
⑫ 자손 소개.
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겠다는 큰 뜻을 품고도 쓰임을 얻지 못하여 한탄스럽다는 공의 삶에 대한 평가.
⑭ 이천영 자신이 행장을 쓰게 된 경위.
행장 에 언급된 許鎬의 삶을 보면,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가산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노비를 훈련시킨 구체적인 준비가 우선 눈에 띈다. 허호 자신이 아침 저녁 끼니마다 밥 한 되와 술 세 병을 해치울 정도라고 했으니 기골이 장대하고 건강한 대장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19세기 전반 무렵으로 추정되는 이 행장 의 기록으로는 중을 박살하는 대목과 북벌삼책 대목이 전혀 없다. 연암의 허생 이 연상되는 대목은 이보다 뒤에 지어진 遺事에 가서야 등장한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이천영이 행장을 지을 때는 몰랐던 ‘완악승 박살’과 ‘북벌삼책’ 이야기가 후손 허유가 유사를 작성할 때는 알게 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 이야기가 남들에게 알려지지는 않고 집안에서만 전해져오다가 허유에게 전승되었다는 상황을 상정해야 납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와룡정유집을 간행할 때 후손들은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설명하기를, 이전의 輓詞祭文行狀등의 기록이 모두 일상적인 일만 기록해두었고 감춰진 이야기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아 許愈가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사 를 작성했다고 하였다. 허유가 혹 연암의 허생 을 읽고 자기 조상의 허호의 일로 가탁하여 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郭鍾錫의 반론이 있었고, 유사에서 傳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를 허유가 직접 가공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경로로 완악승 박살과 北伐三策이 許鎬의 삶에 관계하게 된 것일까?
2. 許生故事의 유행
허유가 지은 유사 에서 처음으로 와룡정 허호의 생애와 관련을 맺게 되는 ‘완악승 박살’과 ‘북벌삼책’화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완악승 박살’의 이야기는 구전설화에서 두루 발견되는 화소인데, 완악한 중이 儒者앞에서 제멋대로 굴다가 그 유자에게 혼쭐나거나 죽음에 이른다는 식의 이야기가 사찰 패망 설화에 많이 발견되며, 그 유자는 주로 나약해보이다가 단번에 완악한 중을 물리치는 비범한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북벌삼책’ 역시 허생고사 이본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화소이다.
지금까지 허생고사와 연관되어 있는 작품으로 언급된 것들은 靑邱野談의 安貧窮十年讀易(讀易; 破睡篇, 東俚奇聞), 청구야담의 識寶器許生取銅鑪( 許生別傳; 海東野書, 我東奇聞, 靑野談藪, 溪西野談), 東野彙集의 贏萬金夫妻致富(呂生), 此山筆談의 試榷慴將 등이 있고, 최근에 仙遊洞記가 발굴되어 소개된 바 있다. 연암의 시대에는 허생고사 가 민간의 이야깃거리로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승되었다.
그 이야깃거리가 크게 유행하였음은 유사 허생고사 가 이렇게 이미 대략 11종이나 발견됐다는 사실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유사 허생고사 들 속에서 바로 옥갑야화 소재 허생이 형성된 것이다. 유사 허생고사 들은 박지원 작품의 異本에 해당할 만큼 편차가 적은 것도 있지만, 다른 인물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다른 화소가 개입되기도 하고, 중요한 화소가 누락되기도 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박지원의 허생 을 중심에 놓고 비교해볼 때, 일단 주인공의 인명이 許生에서 李某라든가 呂生이라든가 하는 변형이 있고, 주인공에게 돈을 빌려주는 부자가 卞富者에서 金同知, 洪同志, 白富者등으로의 변형이 있다. 또 주요 화소인 10년 讀易과 致富방식, 群盜해소, 北伐三策 등이 대략 각 편마다 출입이 있는데, 박지원 허생고사 의 주요 화소 네 요소 중 적어도 둘 이상이 결합되어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화소의 변이와 관련한 이본의 대조는 선행연구에서 이미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하다. 이중 北伐三策화소가 등장하는 유사 허생고사 는 허생별전 계열과 선유동기 등 여섯 종이다.
이들 단편들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지다가 문자로 정착된 것인데, 임형택은 이 과정을 “근원사실 →(구연화)→ 이야기 →(기록화)→ 한문단편”이 되는 것으로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강담사의 역할을 특히 주목한 바 있다.21) 강담사의 존재는 박지원 허생고사 의 後識에 등장하는 尹暎을 통해서 확인했다. 그런데 박지원은 윤영에게서 ‘허생의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지 허생에 얽힌 근원사실은 직접 확인할 수 없거나 확인하지 않은 문제였다. 생각건대 한문단편으로 정착되는 최종 단계에서 근원사실 자체가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고, 구연화된 이야기만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와룡정 허호에 관한 이야기에 ‘완악승 박살’과 ‘북벌삼책’이라는 두 화소가 개입되어 허유의 유사 에 정착된 과정도 한문단편의 정착과정과 유사한 경로를 밟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허생고사는 박지원의 작품 이외에도 몇몇 이본이 있어 그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곽종석의 증언처럼 영남에서 박지원의 글을 꺼려서 직접 접해 읽어볼 기회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꾼을 통한다든지 다른 한문단편을 읽는다든지 하는 경로로 얼마든지 그 이야기를 접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중 특히 동일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許生으로 명명된 것을 접해본 누군가가 그 향읍의 선배인 臥龍亭許鎬를 연상했을 수 있다.
허호는 이미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고자 홀로 북벌을 준비할 정도로 강개한 면모를 보인 바가 있었고 아침저녁으로 한 말의 밥과 한 동이의 술을 마실 정도로 건장한 인물이어서, 허생고사 의 북벌삼책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연상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 착안해서 허생고사를 와룡정 허호와 관련지은 이야기가 형성되었으며, 또 널리 알려진 ‘완악승 박살’ 이야기를, 앞서 작성된 행장 에서 확인한바 와룡정 허호가 젊은 시절 공부에 전념하느라 집을 나온 기간에 적용시켜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내었을 수 있다. 여기서 강담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은 와룡정 허호에 관해 일정정도 강한 인상을 갖고, 완악한 중을 때려죽이는 선비나 將臣의 혼쭐을 빼는 허생의 기개에 오버랩하여 유사 와 같은 줄거리를 만들어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줄거리를 들은 허유는 이 이야기가 점잖은 것이 아니어서 행장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고, 와룡정 허호의 후손이 되는 입장에서 생각할 때 훌륭한 사적이라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 싶어서 관련 이야기를 유사 로 기록해 둔 것이다. ‘완악승 박살’과 ‘북벌삼책’ 화소를 담은 유사 가 최익한의 눈에 띄었는데, 연암의 허생 을 읽고 감명받은 바 있던 최익한이 특히 ‘북벌삼책’의 화소에 주목하여 허생의 실적 이란 칼럼을 작성한 것으로 대략의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Ⅲ. 郭鍾錫의 증거확충과 실재인물설의 전개
1. 곽종석의 증거확충
郭鍾錫은 와룡정 허호의 墓碣銘을 작성하였는데, 앞서 살펴본 최익한의 허생의 실적 에서 와룡정 허호와 연암의 허생 이 동일인물임을 확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때까지는 묘갈명 을 저술하지 않았었던 듯하다. 저술하였었다면 아마 제자 최익한의 의문이 풀리도록 그 문장을 제공하였을 것이며 최익한도 당연히 그 문장도 언급하였을 터인데, 곽종석의 묘갈명 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묘갈명 을 아직 짓기 전이어서 최익한에게 제공해주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허생고사와 흡사한 이야기를 어린시절부터 들어왔다는 등등의 사유로 유사 와 허생전을 관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사실은 허생의 실적 에서 인용된 증언이 묘갈명 에서의 내용 전개와 약간 충돌하고 있는 점이다. 최익한의 질문에 대한 곽종석의 답변에서는 와룡정 허호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왔다고 하였는바, 이제 곽종석의 묘갈명 내용전개와 비교해 본다.
내가 일찍이 연암 박공의 소위 허생전 을 읽고 이러한 하나의 사람이 있는데도 당시 세상에서 지우를 받지 못했음은 하늘이 中夏를 잊은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허후산선생이 지은 그 육대조 와룡처사유사라는 것을 얻어서 읽음에 미쳐서 악연히 크게 놀라 허생전 과 유사 가 결코 두 사람을 다룬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여기서는 이전에 ‘소위 허생전 ’을 읽으면서 이런 사람이 뜻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두고 탄식하다가, 나중에 유사 를 얻어 읽고 와룡처사가 바로 허생임을 알고 깜짝 크게 놀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사 를 얻어보기 전까지는 유사 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고, 다만 소위 허생전 만을 읽고 허생만을 알았던 것인데, 그러다가 유사 의 내용 중 남산에 살면서 將臣을 만나 三策을 제시하는 대목에 이르러 두 인물이 동일인물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유사 를 접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后山集이 1909년에 간행되고 이 후산집을 넘겨보던 최익한이 대략 1916,7년 경에 유사 를 발견하여 곽종석에게 질의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대략 이 시기 직후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거의 곽종석의 몰년에 가까운 시기이다. 어쨌든 이 문장을 읽어보면, 소위 허생전 의 허생 말고 최익한에게 증언한 바, 향읍의 장로들에게 어려서부터 종종 들었다는 허호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호의 이야기를 미리 들어두었다면, 허유의 유사를 읽고서 깜짝 대단히 놀라는 일은 있지 않았을 터이다.
최익한의 질의를 받으면서 이미 소위 허생전 을 읽은 바 있는 곽종석은 허호와 허생의 관련성을 확신하여 묘갈명 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한 듯하다. 게다가 곽종석의 묘갈명 은 허유의 유사 가 언급하지 않은 연암의 허생 대부분의 화소를 살려 허호의 삶을 구성하였다. 연암 허생 의 變奏가 되는 셈인데, 허유의 유사 는 조상 허호에 대한 일이라 집안에서의 절도를 강조해서 기록하고 ‘점잖지 못한 행적’들을 누락한 것이라 여기고 연암의 허생은 실제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여겨 그 대부분을 전재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허유의 유사 는 ‘북벌삼책’이라는 화소만 연암의 허생 과 닮은 지점이었는데, 그것을 다시 부연한 곽종석의 묘갈명 은 致富, 群盜解消, 北伐三策 등 연암의 허생 줄거리를 거의 고스란히 요약하고 있다. 연암의 허생과 관련된 부분 앞뒤로는 행장 과 유사 의 내용들을 배치하고 있다. 이렇게 구성해 놓은 것을 보면, 연암의 허생 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읽을 경우 와룡정 허호가 허생 그 사람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 연암이 주요 사건만을 부각하여 소설화한 것이고 곽종석은 실제 인물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고 전체의 삶을 개괄적으로 다룬 것이라고 간주하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와룡정 허호의 삶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이천영의 행장 에서는 연암의 허생 을 연상시킬 만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않고 다만 병자호란의 패배에 앙앙불락하는 건장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었는데, 허유의 유사 에서 비로소 북벌삼책의 화소가 개입되어 연암의 허생과 관련될 단초를 만들어 놓았고, 이후 곽종석의 묘갈명 은 연암의 허생에 깊은 영향을 받아 와룡정 허호를 허생 그 사람으로 확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사 와 묘갈명 이후에 작성된 것이 분명한 金榥의 墓表에서는 곽종석의 묘갈명 으로부터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고 이천영의 행장 과 허유의 유사 에 관련된 기록만 포함되어 있다. 김황은 곽종석의 문인으로 알려져있으니 곽종석의 판단을 쉽게 거스를 수는 없었겠는데, 별도의 확신이 있어서 허생과의 관련성을 무시했었는지 모르겠다. 臥龍亭遺集의 간행을 힘쓴 후손들이 적은 발문을 보면 유사 를 따르고 박지원의 허생전 을 참조하여 곽종석이 묘갈명 을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대략 상황파악에 참고될 듯하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요약하면, 허생고사 의 ‘북벌삼책’화소를 관련지은 허호의 유사 를 발견한 최익한이 박지원의 허생 을 떠올리며 허생과 와룡정 허호를 동일인물로 추정하고, 곽종석이 묘갈명 을 통해 와룡정 허호의 생애 속에 허생의 사건을 완벽하게 용해시키는 것으로 동일인물설을 확정하게 된 것이다.
2. 허생 실재인물설의 전개
金台俊의 朝鮮小說史는 1933년에 간행되었다. 여기서 “許后山遺事가 넘우도 燕巖集에 낱아난 說話와 넘우도 符合한즉 實在人物인 허후산의 南海經略에 관한 설화가 사실이 진기하기 때문에 각색으로 변하여 구비로 喧傳된다.” 하여 최익한의 주장과 같은 궤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김태준의 서술에는 약간의 착오가 있으니, 여기서 “허후산유사”라는 표현은 “許后山의 六代祖臥龍亭公遺事”라고 해야 하고, “허후산의 남해경략”도 “臥龍亭의 남해경략"이라고 해야 한다. 요컨대 后山許愈가 六代祖臥龍亭公遺事를 지은 사실을 착각하여, 와룡정 허호가 許生이 아니라 후산 허유가 허생 그 인물인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그런 오류는 있는 채로 어쨌든 후산집에 수록된 遺事의 주인공이 허생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이 유사 를 부분 인용하고 있다. 발췌해서 인용한 부분은 허생이 장신을 질책하고 다음날 집을 비우고 사라지는 대목까지이다. 이 인용 부분에 “(朴潤元씨에 의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김태준이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고 남의 손을 빌려 보충한 것이기에 위와 같은 착오가 있던 것도 용혹무괴인 듯하다. 조선소설사에서 허생전 을 다루면서 그 실재 모델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증빙자료를 후산집으로부터 인용한 데에는 앞서 최익한의 허생의 실적 이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조선소설사에서 “남해경략”이라고 표현된 부분은 유사 에서는 그저 도망친 것으로 되어 있어서 도저히 원문을 확인하고는 쓸 수 없는 표현인 듯한데, 허생의 실적 에서는 그 부분을 “海島中……”이라고 줄여 놓아서 얼핏 보면 바다의 섬 가운데 들어가 뭔가 經略에 해당할 만한 일을 한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착각을 일으킨 사람은 김태준이기보다는 傳言者박윤원일 확률이 높다. 최익한의 허생의 실적 을 박윤원이 메모해 두었다가 김태준이 조선소설사를 쓸 때 제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이후로 ‘ 허생 연구’ 과정에서 허생 의 근원설화로 허호의 와룡정공유사 를 지목하여 그 관련 여부를 언급한 예들이 적지않다. 그 언급의 대부분은 이가원의 연구에서 근거를 찾고 있다. 이가원은 1965년 연암소설연구에서 우선 김태준이 범한 오류 즉 허호와 허유를 혼동하고 있는 점과 허생전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안되는 이유 등에 대해 논한 후, 후산집의 유사와 臥龍亭遺集에서 郭鍾錫이 작성한 墓碣銘을 인용하여 臥龍亭許鎬에 관한 이야기가 허생전 의 근원설화임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 여기서 이가원은 허생과 許鎬가 결코 두 사람이 아님을 確言한 곽종석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조선소설사의 주장을 더욱 확신시키고 있다. 전체 과정은 허생의 실적이 조선소설사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연암소설연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 과정에서 허생고사의 허생과 와룡정 허호가 동일인물인 것으로 더욱 확고하게 되었고 우리 학계에 허생실재설이 하나의 학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Ⅳ. 허생전 의 재인식과 臥龍亭遺集의 간행
1. 허생전 의 대중화 과정과 영웅대망론
20세기 초반 박지원의 허생 은 許生傳의 명칭을 획득하고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30) 그런데 허생 이 박지원의 다른 작품들, 예를 들면 兩班傳이나 廣文者傳등보다 더욱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별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허생 이 주목을 받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 그 주목에 내재된 동력을 추적해 보겠다.
근대계몽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1907년 大韓自强會月報는 제8호부터 3회에 걸쳐 “小說”난을 두고 허생전 의 번역을 게재한다. 번역을 李鍾濬(제8호, 제9호)과 李晩茂(제10호)가 담당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許生이 居墨積洞直抵南山下니”하는 식으로 번역이 아니라 懸吐를 한 정도이다.
같은 시기 이 대한자강회월보에서는 박지원의 문장 중에 호질 도 게재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호질 은 洪弼周가 소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허생전과는 달리 “文苑”란에 게재하고 있으며 현토도 없고 띄어쓰기도 없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대한자강회월보는 왜 허생전을 소개하였을까? 계몽적 차원의 의도가 있었음은 짐작이 되는데 직접적 증거가 없으니, 다른 자료를 통해 짐작을 확충해 나가보도록 하겠다.
1917년 燕巖外集許生傳을 讀 이라는 東華生의 글이 半島時論에 게재되었다. 이 글도 허생전 을 全載하고 있는바, “許生이 居墨積洞니 直抵南山下井上에 有古杏樹라” 하는 식으로 현토체를 구사했으며 중간중간에 괄호를 넣어 자신의 평가를 노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허생이 이완을 꾸짖는 대목에서 “(快人快語)”라는 말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소개에 앞서 ‘소개의 변’ 정도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원문 생략)
즐겁게 감탄하고 기뻐서 좋아하는(欣然而嗟怡然而悅) 대상은 허생일 것이고, 성내며 탄식하는(忿然而嘆) 대상은 밝히고 있듯이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없던 당시 상황이다. 허생처럼 큰 재주와 뜻을 품고도 이름없이 사라지는 사람이 많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훌륭한 인물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悲感과 훌륭한 인물이 나타나길 바라는 熱望이 섞여 있는 것이다. 주제는 뒤에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허생전 을 읽고 옛날의 허생을 사모하게 하면, 이어서 지금 시대에 허생과 같은 이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다. 근대계몽기에 민족적 위기를 돌파할 영웅을 기대하며 영웅적 면모를 발휘한 역사인물을 소개하던 심리와 흡사한 사유로 여겨진다. 근대계몽기 역사전기류의 지향은 역사인물을 바로알자는 차원이 아니라 위대한 역사인물을 현대에 재현하여 난국을 타계하자는 지극히 계몽적 차원임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한 역사전기류와 같은 사유를 허생전 에 기대어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글에서 허생은 알아주는 사람만 있었다면 영웅과 같이 세상을 구제할지도 몰랐던 이상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1918년에는 신한민보에 허 이란 번역물이 2회에 걸쳐 게재된다. 동해수부라는 필명의 인물이 역술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洪焉으로 일제시기 미국에서 활동하였으며 1931년경 大韓人國民會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사람이다. 내용은 허생처의 구박에서부터 남해경략 후 돌아와 변부자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까지만 번역을 하고 이완과 담판을 나누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대신 아래와 같은 평어를 덧붙여 놓았다.
(원문 생략)
이 짧은 평어에는 번역자가 허생 이란 작품을 소개하는 취지를 밝히는 동시에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교훈이 녹아 있다. 허생은 經國濟世의 솜씨를 갖추고 큰 經綸을 품었으되 세상이 써주질 않으므로 종적을 감추었다는 말인데, 허생의 입장과 세상의 입장 두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구제할 큰 뜻과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세상의 입장에서는 그가 재능을 펼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개인과 그러한 세상이 만나서 훌륭한 업적이 완성되는 것인데, 허생은 그러한 세상을 만나지 못해 여러 가지 전설만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허생도 不遇이고 세상의 입장에서도 不幸이다. 앞서 반도시론에서 본 동화생의 비감을 동반한 열망과 흡사한 취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20세기 초반의 허생전 소개가 이렇듯 전개되었지만, 결정적으로 허생전을 널리 알린 것은 李光洙였다. 김태준도 “최근 李春園이 허생전 을 개작해서 더욱 허생전 이란 말을 일반인에게 널리 소개하였다.”고 하였다. 이전의 대중 매체들이 박지원의 허생전 을 소개하거나 번역하는 차원에서 계몽성을 약간 담아내는 것이었다면, 이광수는 본격적으로 허생을 근대적 열망을 실현할 영웅으로 재창조하는 소설 허생전으로 창작한 것이다.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은 동아일보에 1923년 12월 1일부터 1924년 3월 21일까지 111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본격 연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광수는 作者로부터 라는 소설 예고에서 자신의 주장을 미리 선언해놓는다.
許生은 奇人이다 그는 超人의 智略과 洞察力과 意志力을 가진 超人이다. 그의 눈에 朝鮮의 人民은 너무 無力하였고 朝鮮의 國土는 너무 狹隘하였다. 胸中의 汪洋한 經綸과 鬱勃한 不平을 펼 만한 天地가 없었다. 그가 하여 놓은 여러 가지 驚天動地할 偉業은 그에게는 食後의 一消遣에 不過하였다.
그는 階級을 미워하고 階級制度를 基調로 하는 모든 社會組織을 미워하였다. 그의 눈에 王侯將相은 塵垢粃糠과 같았다. 아마 그는 莊子流의 哲學的思想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는 三百年前에 벌써 共産主義無政府主義的思想을 가지고 또 이를 實行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는 一場의 消遣거리였는지 모른다. 이러한 世界的奇人許生의 行蹟은 近代文豪朴燕巖의 奇警한 붓으로 許生傳이라는 大文字가 되어 그의 全集에 실렸다. 그러나 恨하건대 그것은 너무 簡單하였다.
이광수에게 ‘허생’의 인상은 기인이고 초인이며 장자이고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였다. 연암의 허생 이 이광수가 가진 ‘허생’의 상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므로, 그것이 한스러워 새로운 ‘허생’의 상을 창출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 은 나중에 스스로도 회상하듯이 이상적 인물을 그려내려 한 것이었다. 본디 연암의 허생 이 갖고 있던 기인적 면모를 재창조하여 이상적 인물로 만들어내기 위해, 이광수의 허생전 은 원작에 없는 사건과 인물들을 대거 도입하였고 그 결과 장편 분량의 소설이 되었다.
연암의 허생에 비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사건들은, 허생이 매점매석으로 떼돈을 번 안성장에서 도적들에게 돈을 일부 주며 남산골에 있는 처에게 전달해달라고 하여 도적들이 고스란히 수행하는 대목, 변산도적들을 만나기 전에 포악한 제주목사를 제거하여 3년동안 제주도를 평화로운 무정부상태로 만든 대목 등이 있다. 인물에서도 허생은 예의 그 꾀죄죄한 몰골이지만 우렁찬 목소리와 강단 있는 자세를 보여 도적떼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비범성과 심지어 완력까지도 갖추게 하였고, 허생이 부리는 하인으로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돌이가 등장하고, 허생의 비범성을 알아보는 전국 도적의 두목으로 현명한 홍총각이 등장하여 이완과 대결하는 등 복잡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광수가 갖고 있는 계몽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설정된 사건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무인도에서 3년간 群盜들을 지도하여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갖게 하여 평화로운 사람들로 만들어낸 대목과, 무인도로 항해해 가는 길에 잃어버렸던 일부 군도들이 허생의 지도력 없이 3년을 지내는 사이 포악한 두목이 이기심을 극악하게 발휘하여 지옥과 같은 아비규환을 벌이는 대목을 대비하는 구조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타심의 낙원과 이기심의 지옥을 대비하여 독자들을 이타적 인간으로 계몽시키려는 의도에 의한 대비인 것이다. 계몽적 의도에 의한 그런 變奏들까지 진행하느라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 은 분량이 대폭 늘어났다. 대폭 늘어난 분량에서 이광수가 의도한 기인, 초인, 장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아우르는 허생의 형상이 실제 완성되었는지는 더 따져볼 문제이지만, 이광수는 적어도 봉건정부를 부정하고 원시적 형태의 공동체적 생산을 지향하며 사적인 욕망이 철저히 배제된 채 감춰진 탁월한 능력으로 매사를 초인적으로 해결하는 영웅으로 허생을 만들어내었다.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 에서 허생이라는 영웅에 대비되는 반영웅이 등장하지도 않고 허생의 감춰진 능력에 비해 극복해야 할 위기는 너무 사소하여 실상 “消遣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연암의 허생 은 근대계몽기의 영웅대망론 속에서 허생전 으로 재발견되었다가, 이광수에 의해 낭만적 이상주의 소설 허생전 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광수는 영향력이 적지 않은 작가였으니 자신이 이상적으로 재창조한 허생의 인상을 대중에게 충분히 각인시켰을 터이지만, 1927년 동아일보에서는 허생전을 만화로 연재하기도 하여 대중에게 더욱 강한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이 만화는 4컷짜리 시사만화의 형태였다.40) 이러한 대중화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 허생전 을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까지 있었으며,41) 별건곤같은 잡지 등에서 莊子부터 공산주의자를 아우르는 이상적 인물로서 허생의 인상을 그려내고 있는데 심지어 죽어 지하국에 가서 黃金大王의 역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가 재창조한 ‘허생’의 인상이 대단히 강렬했는지, 후에 일제당국은 “공산주의적 혁명사상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禁書로 지정하였다. 또 한편 이광수의 허생전 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1934년에는 天下奇傑許生과 洪總角이라는 책이 일제당국에 출판허가를 신청했다가 불허된다. 불허 관련 기사를 보면 대략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 과 흡사한 것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특히 홍총각을 허생과 관련짓는 것은 이광수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이광수는 홍총각을 주요인물로서 묘사하기는 했지만 허생과 동등한 주인공의 역할까지 부여한 것은 아니었는데, 혹시 도적 괴수 홍총각의 역할을 확대하여 재창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을 해볼 수는 있지만, 아직까지 해당 서적을 확인해볼 길을 찾지 못했다.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침탈 앞에 효과적인 대응전략을 찾지 못한 채 절망적인 상황을 돌파할 초인적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는 영웅대망론이 허생전을 재인식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바, 그 재인식된 허생전 에 작가 자신의 이상적 인간상을 투영하여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 이 창작된 것이다.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을 계기로 시사만화며 영화를 산출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기도 하였고, 다양한 이야깃거리에 이용되기도 하였고 변종소설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등의 징후를 보면 상당히 대중화에 성공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대중화와 영웅화 과정에 근대적 민족 위기를 구해줄 만한 인물로 뚜렷이 부각된 것이며, 최익한의 허생의 실적 에 관련된 일련의 과정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 것이다.
2. 와룡정유집의 간행
최익한은 허생의 실적 에서 와룡정 허호에게서 허생의 실제 사실에 부합함이 있음을 발견하고 대단한 환호의 표현을 하였다.
새로운 大人物을 만나보는 듯이 기뻐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이 기뻐함은 許生 그 사람을 爲함이 아니라 우리 近代朝鮮이 이만큼 人格과 思想을 實際로 産出하였다는 것을 爲함이다.
허생 의 주인공 허생을 실제에서 발견한 일이 왜 이다지 기쁜 것이며, 그 인물이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산출되었던 인물임이 왜 이다지 중요한 일인가? 연암의 허생 에 형상화된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사실은, 허생의 인격과 사상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였다는 것이며, 우리 민족이 그런 인물을 실제 배출한 바 있다면 20세기 초반 현재에도 다시 그런 인물을 배출할 잠재력이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초반 민족주의 영웅대망론의 자장에 놓인 심리라고 여겨진다. 실상 근대 이후에 전개된 신문 잡지의 허생전 소개나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 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와룡정 허호에게 허생을 투영하여 일치시킨 최익한은 그 민족적 잠재력의 확인에 기뻐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익한이 연암의 허생에 묘사된 모든 일을 와룡정 허호가 실제 실행한 것으로 여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며 동일인물설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곽종석은 그 모든 일을 와룡정 허호가 실제 행한 것으로 여기고 묘갈명을 작성했다. 이제 곽종석의 동일인물설을 따르게 된다면 와룡정 허호는 박지원이 형상화한 허생 의 주인공이 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와룡정 허호의 문집 臥龍亭遺集이 1959년 간행된다. 이 와룡정유집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金昌淑의 서는 1957년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곽종석의 묘갈명 을 읽고 감탄하였으며 현대 조선의 위기와 병자호란의 위기를 관련하여 언급하면서 와룡정 허호의 기개를 일으켜 세울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역시 20세기 초반의 영웅대망론에서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닌데, 독립운동을 위해 風餐露宿을 감당했던 김창숙의 입장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사유라고 여긴다. 김창숙은 특히 북벌삼책의 대목에서는 와룡정 허유를 위해 한번 곡을 한다고 하고서, 곽종석의 묘갈명 의 내용을 대략 다시 요약한 다음, 와룡정 허유의 北伐三策은 “비록 孔明이라도 그것을 능가할 수 없으는 것인데, 저 나라를 망치며 허세를 부리는 자들이 끝내 써주지 않아, 公은 마침내 산에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곽종석의 묘갈명 등만을 읽어서는 그저 將臣에게 세 가지 계책을 들어 힐난한 장면이 있음만을 알 수 있고 북벌삼책의 내용을 알 수는 없는 것인데 그 세 가지 계책의 뛰어남을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창숙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연암의 허생 을 알고 있는 것이다. 또 곽종석의 묘갈명에서는 독서하다가 계집이 원망하는 말을 하여 탄식하고 나서는 장면을 김창숙은 “계집이 주리고 추워 싫은 소리를 하자, 공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길, ‘처음 내가 십년 글 읽기를 기약했는데 올해로 칠년이다.’ 하며 드디어 책을 덮고 문을 나섰다.”고 묘사하여 연암의 허생 에서의 묘사와 더 흡사하게 되었다. 김창숙도 곽종석 묘갈명 의 영향 속에서 와룡정 허호의 삶을 연암의 허생 과 관련지어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와룡정유집의 발 두 편은 후손 許鏞(8세손)과 許淑(9세손)이 지은 것인데, 우선 8세손 허용은 와룡정 허호의 삶을 알고 평가하는 선배들이 남아있지 않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후배들도 장차 사라지게 되면 와룡정 허호의 전할 만한 업적이 끝내 전해지지 못할 것이니 피할 수 없는 죄가 될 것이라 이 문집을 힘써 간행한다고 하고, 국가에 뜻을 두는 자는 마땅히 이 문집에 개연히 크게 탄식하리라 하였다. 와룡정 허호의 삶을 국가적 차원에서 해석해낸 것이다. 9세손 허숙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다.
국가 책임을 맡은 자가 혹 이 문집을 읽고, 선생의 경략을 쓰고 선생의 뜻을 밝힌다면, 천하 국가가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집의 간행은 참으로 천하의 공공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우리 한 집안의 사사를 위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발언은 문집 간행의 의도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와룡정 허호는 허생으로서 이미 한 가문의 조상으로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천하에서 위인으로 숭모하는 차원이 되었으므로, 문집을 힘써 간행하여 그 실상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조상 와룡정 허호가 천하의 위인이라는 자부심은 바로 20세기 초반 허생을 민족의 위기를 타개할 지략을 지닌 이상적 인물로 영웅시하였던 사회 분위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와룡정 허호와 허생을 관련지어 확정한 것은 최익한과 곽종석에게서 비롯하지만, 허생을 천하의 위인으로 재창조해낸 것은 20세기 초반의 조선 사회였다. 또 와룡정유고의 간행은 한 집안을 위하는 것에 그치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천하 국가를 위하는 공공의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公을 강조하긴 하였지만 한 집안을 위하는 것을 전혀 부정한 것은 아니다. 결국 와룡정유고의 간행은 당시 조선의 사회분위기와 허씨 집안의 위선사업이 맞물려 이루어진 성과라고 볼 수 있겠다.
Ⅴ. 맺음말
許生故事는 朴趾源이 작품화한 이외에도 이본의 성격을 갖는 작품 몇편이 있어, 유사한 이야기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박지원의 허생 만이 許生傳의 명칭을 얻으며 재인식되고 나머지 이본 성격의 작품들은 존재감을 상실한다. 허생전의 명칭은 燕巖集을 공간한 金澤榮에 의해 부여된 것이고, 이후 근대계몽기와 일제초기 신문 잡지를 통해 허생전이 대중적으로 소개되었으며, 주인공 허생을 근대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결정적으로 1923년 李光洙에 의해 소설 허생전이 신문연재소설로 재창작되고 그 작품이 다시 장편만화로 연재되면서 이광수에 의해 재창조된 ‘허생’이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또 근대적 영웅으로서의 허생을 희구하는 관련기사들이 각종 형태로 산출되게 할 만큼 허생의 영웅적 면모는 영향력을 갖추어 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허생이 실존했었음을 증언하는 기록도 발생했는데, 19세기 자료인 漢京識略에서 허생의 실존을 증언한 이래, 이 시기 崔永年과 崔益翰, 郭鍾錫등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그 증언과 관련되어 있어 흥미롭다. 최익한과 곽종석의 증언은 金台俊과 李家源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고, 또 당시 서부경남지역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미묘한 상승작용을 일으켜 1959년 허호를 허생으로 확신하는 金昌淑의 서문을 실은 허호의 문집이 간행되기까지 하였다. 허생으로 형상화된 허생의 실제 모습을 지금 밝혀볼 길은 없으나, 영웅으로서의 허생을 재창조해내고 그 허생의 실제 행적을 찾아보게 만든 20세기 초반의 영웅대망론의 일단을 이제 재음미해볼 수는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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