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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로
광복로에는 초량 왜관 시절, 사쿠라카와(櫻川)라는 조그마한 도랑이 있었다. 앵천은 오늘날 대청동 근대역사관 옆에서 흘러내려 대각사 앞, 광복로를 거쳐 영도대교 부근으로 흘러가는 조그마한 하천이었다. 개항 후 인구가 늘어 하천 주변으로 주택이 밀집하면서부터 오염이 심해지고 또 거리도 혼잡해져 1895년 무렵 도랑을 복개했다. 복개된 도랑은 도로로 편입됐다.
일제강점기 장수통長手通이라 불린 이곳은 해방 이후 ‘광복로光復路’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엔 일본인 상가 중심지로 요리점‧극장‧백화점 등과 같은 새로운 문화의 전시장이었다. 1904년에 개설된 야점夜店은 밤에 서는 장으로 여기서 밝히는 가스등불이 이 거리의 큰 볼거리였다. 1917년에는 동래 온천장을 왕래하던 전차가 이곳을 거쳐 구덕운동장으로 연결됐다. 광복로는 해방 후 귀환 동포들과 한국전쟁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이 재활 의지를 불태우던 공간이었다. 특히 많은 문화인들은 광복로 주변의 술집이나 찻집에서 전쟁의 아픔을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60~70년대 광복로는 부산항 발전의 상징이었다. 최근 관공서의 이전과 상권의 변화로 주춤거렸던 광복로는 역사·문화거리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초량 왜관
초량 왜관은 오늘날 남포동‧광복동‧동광동‧신창동‧대청동 지역에 있었던 한·일 간 외교‧무역의 특구였다. 조선 시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발생하는 국제 업무를 담당한 곳이 왜관이다. 수정동에 있던 두모포 왜관이 좁고 무역하기에 불편해 167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17~19세기 초량 왜관은 조선 정부의 비용으로 용두산 일대에 서관 삼대청과 동관 삼대청이 지어졌다. 서관 삼대청은 단기 파견된 외교와 무역의 체류자 숙소, 동관 삼대청은 장기 체류자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서관 삼대청은 왜관 본래의 목적인 객관 건물로서 남쪽 해변(자갈치)에서 가까운 순으로 서대청(일특송옥‧현 부산은행), 중대청(참판옥‧현 대각사), 동대청(부특송옥‧현 용두산아파트)을 서향으로 배치했다. 이 서관 삼대청은 대마도에서 온 외교사절의 숙관으로 사용되었고, 삼대청 앞에는 각각 두 채씩 6동의 긴 건물이 나란히 있었는데 이를 6행랑(현 국제시장 의류 골목)이라 하고 외교사절 수행원의 숙소로 사용했다.
왜관 공간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0만 평 규모에 달했다. 일본 성인 남자 500여 명이 왜관에 거주하면서 외교‧무역에 종사했고, 다양한 기능의 건물이 빽빽이 들어섰다. 국제무역시장이 서는 장날이나 특별한 공무가 없는 날에는 조선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 국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은 잦은 접촉을 하게 되면서 왜관은 일본 문화와 조선 문화가 교류하는 공간이 되었다. 일본인은 조선의 유교 문화‧의학‧동식물 등에 관심이 높아 왜관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했다.
조선인 역시 낯선 일본 문화에 관심이 높아 상류 사회에서는 일본 문방구와 일본 음식 등을 접했다고 전해진다. 왜관 밖에는 오늘날 부산시장 격인 동래부사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던 장소인 연향대청宴享大廳이 있었다. 연향대청은 오늘날 광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대청동이란 이름은 연향대청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중구의 해안 매축
광복로 주변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원래 바다였다. 개항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였던 용두산 주변으로 일본인 이주가 증가하면서 거주 공간이 부족해졌고 부산과 초량 사이는 산으로 막혀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경부선과 관부연락선의 개통으로 교통 편의를 위해서도 북항 매축은 필요했다. 수산 기지로서 부산의 역할이 증대하면서 어선 정박 기지의 용지난을 해결하기 위해 남항 매축도 진행됐다.
북항 매축은 일본의 대표적인 상인이었던 오쿠라(大喜)가 세운 부산매축주식회사가 담당하고, 그의 회사였던 오쿠라쿠미(大倉組)가 시공했다. 매축은 1902~1905년, 1907~1908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매축 지역은 오늘날 중앙동 일대였다. 매축지에는 부산역‧세관‧부두‧우체국 등 공공 시설과 해운회사‧운송회사‧창고 등 항만 관련 시설이 등장했다. 부산은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교차점이 되었다. 이를 통해 부산은 제국주의 일본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았다. 북항 매축과 함께 영선산 착평鑿平(산이나 언덕을 평탄하게 깎는 것) 공사도 진행됐다. 이 공사로 부산과 초량 사이의 교통망이 확보됐고 경부선 연결도 가능해졌다. 남항 매축은 어항 시설의 필요로 1930~1932년, 1933~1936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이 공사로 송도해수욕장과 부산의 연결 도로가 확보됐다.
용두산 공원
용두산龍頭山이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 초량 왜관 시절부터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용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두산이라 불렀던 것 같다. 조선인은 초량소산草梁小山 혹은 곰솔이 풍부해 송현산松峴山이라 하고, 일본인들은 중산中山이라고도 했다. 용두산에는 콘삐라 신사와 벤사이텐 신사가 있었다. 콘삐라 신사는 해로海路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점차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신사로 변했다.
용두산 공원은 1916년 10월 오늘날의 기본 모습을 갖추었다. 이 공사는 공원이라기보다 신사 정비가 목적이었다. 용두산 신사는 1936년 신사로는 신궁 다음 가는 위치인 국폐소사國幣小社로 승격했다. 그리고 1934년에는 용미산龍尾山(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있던 용미산 신사를 옮겨와 용두산 신사 아래 배치했다. 부산을 지배하는 일본인들의 성역으로 조성된 용두산 공원은 해방과 동시에 신사가 헐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용두산에는 피난민들의 판잣집으로 가득 찼는데, 1954년 용두산 대화재로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이후 소나무도 심고 정비를 한 끝에 1957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공원’이라 불리던 것이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자 다시 용두산 공원으로 불리게 된다.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조선 시대 억새풀이 무성한 변두리였다. 1687년 초량 왜관이 옮겨오면서 왜관 내부로 편입된 이후에도 특별한 시설이 없는 벌판이었다. 1876년 개항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해 와 일본인 주거지 혹은 회사‧공장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정西町으로 불렸고 시장은 아니었다. 국제시장이 시장의 모습을 띄기 시작한 것은 해방의 영향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서둘러 귀국해야 했던 일본인들은 집안의 가정용품이나 공장 생산품을 한 푼이라도 더 많이 현금으로 바꾸려고 시장으로 가져나왔다. 당시 유명했던 부평동시장에 장사 행렬이 너무 길어 인접한 국제시장까지 이어졌다. 또 일본에서 귀국한 우리 귀환 동포들이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장으로 변모해 왔다.
해방 당시 국제시장은 ‘돗데기시장’ 혹은 ‘도떼기시장’으로 불렸다. 한때 자유주의 분위기를 반영해 ‘자유시장’이라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국제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기 상품들이 미군 부대나 일본에서 들여온 물건들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은 사람 빼고는 모두 외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1950~60년대 한국 물류 유통의 중심지였던 국제시장은 1970년대 이후 현대식 쇼핑센터의 등장과 공공기관의 이전, 교통문제 등의 이유로 변신을 강요받고 있다.
부산시청
부산롯데월드 공사가 한창인 이곳은 한때 부산시청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 후기부터 용미산이라 불리던 조그마한 산이 있었고, 초량 왜관 시절 용미산 신사가 있었다. 용미산은 부산 도시계획과 부산부청의 이전에 따라 1934~1935년 사이에 없어졌다. 용미산을 없앤 자리에는 부산부 청사를 신축 이전해 왔고, 용미산 신사는 용두산으로 이전했다.
원래 부산부 청사는 용두산 공원 아래 초량 왜관 시절의 관수옥館守屋이 있던 자리에 위치했다. 관수옥은 초량 왜관의 책임자 관수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1873년 일본 외무성이 초량 왜관을 관리하면서 관수옥에 관리 관청을 두었고, 1880년 영사관을 두자 1885년 영사관 건물을 신축했다. 이 건물은 1906년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자 이사청 건물로 사용되었다. 1909년 화재로 소실되자 목조 2층 건물을 새로 만들었다. 1914년 행정 체계가 부산부로 개편되면서부터 이 건물은 부산부청으로 사용되었는데, 공간이 협소해지면서 이전이 논의됐다. 우여곡절 끝에 용미산을 착평하고 1936년 3월 31일 청사를 준공해 이전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부산시청으로 계속 사용되었으나, 부산시청이 1998년 연산동 청사로 이전하면서 롯데에 매각돼 헐렸다.
부산요
현재 로얄호텔 자리는 일제강점기 부산부립병원이었고, 그 이전 초량 왜관 시절에는 부산요釜山窯가 있던 곳이다. 부산요는 1639년부터 1717년까지 약 80년 간 주로 다기茶器를 제작하던 가마였다. 조선 다기를 최고로 여기던 일본인들은 쓰시마(對馬島)를 통해 조선 다기를 구하였으나 점차 수요가 많아지자 왜관 내에 부산요를 직접 만들어 조달했다. 조선은 원료인 백토와 도공, 연료인 목재를 지원해 조선 다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부산요의 도자기는 조선식과 일본식이 어우러진 이색적인 작품이었다. 일제강점기 부립병원은 1877년 부산에 설립된 일본제생병원이 그 출발이다. 종두법 시술로 유명한 지석영이 종두법을 배운 병원이 바로 여기다. 일본인을 위한 병원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었다. 제생병원은 원래 동광동에 위치하다가 1880년 이곳으로 이전했고, 1936년 서구 아미동 부산대학병원 자리로 다시 옮겼다.
원래 제생병원은 일본 군부가 운영하다가 1885년 공공병원으로 바뀌었고 이후 운영 주체에 따라 ‘부산민단립병원’ ‘부산부립병원釜山府立病院’ ‘부산시립병원’으로 명칭을 달리하다 1956년 들어 부산대학병원과 시립병원으로 분리·독립했다.
상품진열관
새부산타운 주변은 조선 후기 초량 왜관 서관西館이 있던 곳으로, 일본인 사신들이 주로 머물렀던 곳이다. 서관의 주요 건물로 삼대청과 육행랑이 있었다. 1876년 개항이 되면서 이곳은 일본인들이 사용했는데, 옛 유나백화점에 위치한 서대청에는 복전양조장福田康造場, 현 대각사가 위치한 중대청 자리에는 동본원사東本願寺라는 일본식 사찰이, 새부산타운이 있는 동대청에는 상품진열관이 세워졌다.
상품진열관은 일본 상인들이 일본에서 수입한 상품을 조선 시장에 홍보하기 위한 전시 공간이었다. 1902년 가설 상품진열관이 문을 열었다가, 1904년 12월 25일 건물을 준공한 뒤 1905년 4월 16일 정식 개관했다. 설계자는 와따나베(渡邊讓·1885~1930)로 전해진다. 이 건물은 벽돌로 된 3층의 서양식 건물로 둥근 원형추 형상의 지붕은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이 건물에서 1906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일한상품박람회’라는 박람회가 열렸다. 이후 각종 전시장으로 활용되다가 1927년부터 저금관리소로 활용됐다. 해방 이후에도 저금관리소로 이용되다가 1967년 개인에 매각돼 예식장으로 사용됐다. 1983년, 이 건물은 헐리고 새로운 예식장 건물이 세워졌다.
대각사
대각사大覺寺는 조선 말기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87년 11월, 일본 교토의 불교진종佛敎眞宗 대곡파大谷派의 승려 오쿠무라 엔신이 부산포로 들어와 당시 일본사절단의 숙소이던 참판옥(중대청)을 빌려 세운 동본원사東本願寺 부산별원釜山別院이 그 시초다.
1886년 부산항 개항 후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봉원사 스님 이동인이 이곳에 거처를 두고 김옥균 박영효 김홍집 등 개화파의 핵심들과 교류하며 조선의 개항과 근대화를 논의했고, 한편으로 일본을 왕래하면서 명치유신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근대 조선의 개화에 큰 흔적을 남겼다.
광복 후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경남불교종무원의 설립과 함께 ‘대각사’라는 사명으로 개칭됐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조계종총무원과 동국대학교 등 불교계 중심 단체들이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면서 근대 한국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고승으로는 동산‧성철‧향곡‧지월‧일타 스님 등이 대각사에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일으키기도 했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일본식 법당과 요사채는 전란 후 두 번의 화재로 모두 소실됐고, 1969년 현 대각사의 창건주인 경우鏡牛 스님이 현대식 건축양식을 대웅전을 조성해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은 중간 기둥이 없는 특수한 건축공법으로 조성된 국내 최대의 법당으로 둘레 300평, 수용 인원 1000명에 이르는 대단위 건축물이다. 법당 구조는 일곱 전각을 합쳐놓은 통법당 불단 양식이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 배치 등은 한국 불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현재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로부터 약사여래불‧미륵존불‧일월등명불, 우측으로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 일곱 분의 불보살을 봉안했다. 특히 가운데 아미타불은 조선 중기(약 16세기)에 조성된 목불木佛로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경내 오층탑은 가산 송림사에서 이운해온 사리탑으로,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회의 당시 태국 프라뿌디 종정이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5과가 봉안돼 있다.
현 대각사는 재단법인 대각문화원 소속의 시민공찰이자 도심포교 사찰로서 산하에는 신도회를 비롯해 청년회, 학생회 등 여러 신행단체를 두고 불법홍포와 대중포교 도량으로 시민들의 정신문화 창달에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부산 중구 신창동 대각사는 광복동의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기 전에, 그러니까 국제시장의 끝쯤에 위치해 있는 도심 사찰이다.
미화당백화점
미화당은 장한찬(전 미화당 창업주)이 1949년 12월 설립했다. ‘미화당’이란 명칭은 장한찬이 아름다운 꽃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미화당’ 꽃집을 경영했던 까닭으로 붙여졌다. 설립 당시 미화당은 목조 4층 건물이었는데, 1956년 콘크리트 별관을 준공했다. 당시로서는 부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용두산과 직접 연결돼 부산의 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백화점 뿐 아니라 영화관‧문화회관 등을 갖춘 복합건물이었다.1969년 본관 목조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 5층으로 신축·재개장했다. 1984년 건물을 새 단장하고, 엘리베이트와 에스컬레이트를 설치했다. 이 시설은 미화당 이용객 뿐만 아니라 용두산 공원 관광객도 자주 이용했다.
미화당은 바가지요금과 물건값 깎기가 성행하던 당시 상거래 관행에서 정찰제를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1974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슈퍼체인 본부를 지정받아 슈퍼 사업에도 진출해 이후 할인마트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미화당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모여든 예술인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만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미화당은 1990년대 들어 부산에 재벌 백화점, 대형 할인마트가 등장하고 시청 이전에 따른 상권의 이동, 교통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경쟁에서 밀려 사라졌다. 하지만 미화당은 부산백화점과 문화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
행좌幸座는 1903년께 부산부 남빈정南濱町에 새워진 부산 최초의 극장이다. 1915년 행관幸館으로 신축, 부산 영화 상영관의 효시가 됐다. 행좌의 위치는 현재 중구 남포이음1길 35 할매회국수 건물 부지다. 거기에 기념 비석을 세워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으로 아시아 영화 중심 도시로 우뚝 선 오늘의 부산을 있게 한 영화적 의의를 되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