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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1)
조영옥
캐나다로 끌고 온 여행용 가방은 세 개다. 둘이서 짐이 세 개가 되니 이 곳까지 가져오느라 힘 들었다. 짐을 간편히 하라는 남편의 잔소리는 못 들은 체 하였다. 딸이 우리 한식을 그리워할 것 같아서 식료품을 이 것 저 것 한 가방 가득 채운 탓이다. 그 중 식료품 가방을 부엌에서 열었다. 딸이 냉장고와 부엌 찬장에 챙겨 넣으며 말한다.
”엄마, 여기도 한국 식료품 있을 건 다 있는데 뭐하러 이렇게 무겁게 가져오셨어요. 야! 엄마 떡 볶기 양념도 가져왔네요.”
“그래, 매콤하게 맛나는 떡볶기 한 번 해 먹어보자구나, 여기서.”
내가 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딸이 우리를 위해 미리 사다놓은 김치, 삼겹살 등 한국 식품들이 바닥났다.
몬트리올 시내에 ‘장터’란 한국식료품 슈퍼가 있단다. 딸네 아파트에서 가까운 쉐브룩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베리우꽘 역에서 내려 환승한 후 여섯 번째 역에 내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위로 올라가면서, 지하 2층, 1층이 모두 상가이고, 지상으로 나오면 바로 올라온 그 위가 고층의 상가나 백화점등이다. '장터'는 대구 중앙로 너비의 도롯가의 고층건물 일층에 있었다. 우리 동네 근린 슈퍼 크기인데 한국에 있는 슈퍼와 다를 바 없었다. 김치, 라면, 대패 삼겹살 등을 샀다. 관문시장 가면 가끔 사 와서 먹던 돼지 족발까지 있다. 조리 않고 즉석에서 먹기에 좋아서 샀다.
“참, 엄마가 떡 볶기 양념 가져 오셨잖아요.“
딸이 떡볶기용 흰 가래떡도 잊지 않고 쇼핑카트에 실었다.
캐나다의 지하철에는 우리 나라에는 있는 출입구에서 승차장까지 엘리베이터 시설이 되어 있지 않다. 시내에서 무겁도록 쇼핑을 하면 집까지 힘들게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려야 한다. 딸이 자기 부모님이 온다고 이 곳 '장터'에서 무거운 쌀포대기와 큰 김치통을 사다 놓았었다. 산들바람에도 하늘하늘 할 것 같은 갸날픈 몸매의우리 딸이 그 무거운 쌀과 김치를 낑낑대며 운반했으리라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해 지고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이튿날, 아침은 딸이 양식으로 차렸다. 계란프라이, 치즈. 햄을 넣은 샌드위치에다 양상치 몇 잎과 얇게 썬 토마토 몇 조각을 곁들였다. 우유 한 컵과 블루베리 요거트도 있다. 디저트로 사과 두 조각과 체리도 차렸다. 오렌지 쥬스도 곁들인다.
”와, 훌륭한 양식이네!“
내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딸이 내린 커피로 입가심을 하면 서양식 식사가 끝난다.
설거지는 식기 세척기에 내가 앉혀 보았다. 요즘 아파트에는 왠만 하면 붙박이 식기 세척기가 있지만 나는 자주 쓰지 않는 식기들 수납장으로 활용 한다. 딸은 세척기를 일상 사용한다. 이 곳의 세척기에는 작동 버턴명이 불어로 씌어 있다. 이 곳 퀘벡주 몬트리얼은 프랑스계 이주민이 대다수여서 불어사용권이다. 쓰인 문자가 영어가 아니어서 생소하게 느껴지고 뜻도 잘 모르겠다. 기계조작 방식도 한국과 조금 다르다. 간단하지만 사용법을 딸에게 배워야 했다.
배운대로 설거지 시작 버턴을 누른 후, 딸과 손녀가 있는 방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낮에는 엄마가 떡볶이 해 주세요.“
”그래, 그렇지만 떡 볶기는 네가 더 맛있게 하지 않나 모르겠네? 접때 보니까, 네 언니도 애들에게 더러 해 먹이나 보더라.“
”그런데, 다인이는 매운 것 잘 먹는지 모르겠네? 어느 정도 맵게 해야할까?“
’내가 떡볶기 잘 만들 자신이 있다. 좀 있다가 맛있게 만들어 줄게.‘
라고 생각하며 남편과 내가 쓰는 방으로 와서 잠시 책을 읽을까하고 펼쳐 들었다.
”엄마, 다인이랑 나가서 일 좀 보고 우리는 밖에서 점심 먹을께요.“
어느새 딸과 손녀가 외출 준비를 하고 현관으로 나가려고 한다.
심상찮은 표정과 말투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아니 왜? 엄마가 떡볶기 맛있게 해 주려는데...“
맛있게 해 주겠노라고 애원하다시피 힘주어 말했다. .
”아니에요, 떡 볶기 생각이 싹 없어졌어요. “
쌀쌀맞게 말하고는 둘이서 현관 밖으로 나간다.
”다인아, 가자.“
더 말려도 소용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래, 그러면 둘이서 맛있는 것 사 먹어라.“
풀죽어 힘없이 말했다. 영문 모를 억하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엄마 아빠랑 맛있게 해 드세요.“
찬바람을 일으키며 두 사람은 서늘한 뒷모습을 내게 보이며 사라진다. 황망한 심정으로 일단 배웅은 한다만, 너무나 어이없고 기가 찼다.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방에 있는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딸이 저러고 나갈 이유가 뭐냐고 강변했다. 이게 무슨 아닌 밤에 홍두깨인가. 며느리와는 달리 친구같이 편하다고들 하는 딸자식인테.
남편 앞에 넋두리를 해대다가,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심호흡을 하였다. 딸이 갑자기 저렇게 나가는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지사지, 내가 온전히 딸이 되어 생각해 보자. 무엇이 잘 못 되었나?
딸과 나눈 대화를 천천히 재생해 보았다.
”엄마, 낮에는 떡볶이 해 주세요.“
딸이 아주 명랑하게 말하였다. 나는 아주 흔쾌히 받아 들였다.
”그래, 그렇지만 떡 볶기는 네가 더 잘하지 싶은데...“
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하였다.
”접때 보니까, 네 언니도 성규 진규에게 더러 해 먹이나 보더라.“
언니는 잘도 해 먹이더라는 뜻이 전혀 아니었다. 아마 너도 언니처럼 잘 하리라는 뜻.
”다인이는 매운 것 잘 먹는지 모르겠네? 어느 정도 맵게 해야 할까?“
할미가 애써 만들었는데 손녀가 못 먹으면 큰 낭패가 아닌가? 또 한 번의 살가운 할미의 배려였다.
추호도 하기 싫다는 게 아니었는데. 언니는 잘 만들어 제 새끼들 잘도 먹이더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저번에 큰 딸에게 떡볶기를 맛있게 해주려고 잔뜩 별렀었는데, 큰 딸이 자기가 자신 있게 잘 만든다고 했던 일이 있어서 작은 딸도 그렇지 않을까 저어해서 한말이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럴진댄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언니는 맛있게 만들어 아이들에게 잘도 먹이던데, 너는 엄마한테 의뢰하느냐. 그까짓 떡 볶기 하나 못 만들고. 이런 식으로 딸이 받아 들였나? 의사 소통의 오작동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딸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큰 딸과 작은 딸은 어릴 때 유난히도 다투면서 자랐다. 자매간은 어느 집이나 모두가 시샘과 질투를 하며 크겠거니 했지만 그 정도가 매우 심하였다. 이제 출가하여 제 자식들도 생겼다. 서로 도와 가며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우리 부부는 이제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게 아닌가 보다. 그렇다 쳐도 이거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내가 여기 캐나다 올 때 해외 와서 고생하는 자식 먹여 보겠다고 23Kg 큰 가방에 무겁게 한국음식 챙겨왔다. 각종 마른 반찬용 건어물, 각종 한국 맛 내기용 가루들, 각종 잡곡, 각종 민간요법용 조약재료들을 애써 가져왔다. 도착후 긴 시간의 비행과 13시간의 시차적응에 엄청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비행기 타기 힘들다고 오지 않으려는 남편을 간신히 설득해서 같이 온 탓이다. 오자마자 몸 사리지 않고 마른 반찬 만들고, 찹쌀 풀 쑤어 무말랭이 김치 만들고, 미역, 북어 불려서 들깨가루 넣어 구수한 미역국도 끓였다.
”역시 엄마가 만든 반찬은 맛있어요.“
”이 무말랭이김치 맛은 환상적입니다.“
” 미역국도 너무너무 맛있네요.“
하며 딸은연신 좋아 했다. 딸과 손녀를 위해 정성을 들였더니 내가 먹어봐도 맛이 괜찮았다.
”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해준 음식에 입맛이 길 들여 져서 그렇지, 이젠 엄마도 나이 들어서 손맛이 많이 줄어 들었다.“고 했다. 딸은 맛있다고 잘 먹어 주었다. 딸과 손녀는 여기서 한국 음식 거의 안 먹고 빵을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냐 말이다. 내가 왜 만들어 주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는가?
몸져눕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내색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억장이 무너졌다. 딸과 나 사이에 엄청난 블랙홀이 있다. 내 말이 왜곡되어 딸의 귀에 전달된다. 이해할 수 없는 4차원의 세계에 빠진 것같다. 이상야릇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정신이 몽롱하다. 심란함을 남편에게 호소했다. 남편은 이런 나를 이해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요즈음, 자식들은 모두가 부모 마음을 모른다고들 하더라고 나를 위로한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몸져 눕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을 굶기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 꼴 보려고 여기 왔냐고 남편까지 트집이라도 잡으면 사태는 더 걷잡을 수 없다. 냉장고에 있는 빵으로 점심을 둘이서 떼웠다. 남편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먹기도 싫었지만 나도 먹었다 억지로. 이러다 여기서 쓰러지면 큰 일이다 싶으니까.
이 난황을 어떻게 풀어갈까. 화나는 정도가 아니고 분기탱천한다. 하지만 ‘참자, 참자. 참자‘ 참은 끝은 있다고 하니까.
갑자기 ’맛있는 떡볶이를 만들어서 이 사태를 수습해 보자.‘ 하는 생각이 번쩍 든다.
가져온북어머리, 다시마, 다시 멸치, 마른 새우, 마른 표고와 양파, 대파 등을 넣고 끓여 육수를 만들었다. 양배추를 씻어 알맞게 썰었다. 냉동실에서 보아둔 납작 어묵도 꺼내 썰었다. 계란도 삶아서 찬 물에 식혀 놓았다. 재료들을 가지런히 보기좋게 배열해 놓았다
저녁 무렵, 딸과 손녀가 돌아 왔다. 시무룩하니 아직 화난 여운을 풍기고 있다. 이윽고 부엌에 정정껏 준비해 둔 재료들을 보더니,
“와우, 떡 볶기 준비해 두셨네요! 엄마, 지금 해 먹어요.”
환성을 지른다. 까칠 공주님의 심기가 급반전이다. 순간! 이때껏 들끓었던 나의 억하심정이 가솔린처럼 휙하고 날아가버린다..
’잘 참았네, 참 잘 참았어.‘
속으로 연신 나 자신을 칭찬한다. 전기렌지에 불을 켜고 둘이서 오랜 절친한 친구처럼 요리를 시작한다. 우려 둔 육수를 먼저 데우고 한국서 보물처럼 챙겨온 양념을 푼다. 아직 끓지도 않는데 딸이 양배추와 대파 썬 것을 넣는다.
’어, 야채는 국물 끓으면 넣어야 하는데...‘
내 속으로만 생각한다. 잔소리로 들릴까 봐 조심스런 나의 배려다.
“엄마, 포장집에서 아줌마들 하는 것 보니까 야채를 미리부터 넣던데요” 누구의 딸인가? 딸도 맛있는 요리를 위해서 어디서든 예사로이 보는 법이 없나 보다.
”그래?, 너도 그러려무나.“
매콤달짝하게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끓는 것 보고 가래떡과 어묵을 넣고 양념이 베이도록 젓는다.
”냉동실에 만두도 있어요.“
”잘 됐네, 만두를 굽도록 하자.“
군만두의 등장! 완벽한 떡볶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냉동만두를 구울 때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후 만두를 가지런히 깐다. 다음 물을 한 소큼 부어서 뚜껑을 덮고 서서히 익히면 된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 것쯤은 요리의 기본이라는 말투다.
‘이쿠, 또 내가 잔소리성 발언을 하고 말았나?’
까탈스런 딸의 심기를 또 살핀다. 군만두 한 접시, 삶아서 이등분한 계란들 한 접시를 가운데 차렸다. 대망의 오늘 메인 요리를 예쁜 보시기에 각자 몫을 담았다. 네 사람이 이젠 즐거운 국면을 맞이하여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
”야!, 이건 완전히 고품격 궁중 떡복이 잖아요. 엄마“
”그래?,엄마가 여기 몬트리올에다 궁중떡볶기 가게 하나 열까보다“
”열면 대박나겠어요.“
”어, 이거 먹을 만하네.“ 남편의 말씀.
”할머니, 떡볶기 색깔이 너무 연하잖아요.“ 까도녀 손녀의 말.
손녀에게 좋은 점수 받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결과는 백 점이 못되네.
뭔가 잘 못 되어 엄청 불편하였던 하루였다. 천신만고 참고 노력한 보람으로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래, 참아야 돼. 참는 수밖에 없어. 좋은 결과를 바란다면...’
소통(2)
작은 여행용 가방에 나와 남편의 몇 가지 옷과 생필품을 챙겨 넣었다. 서울 딸네 집에 가면 그 곳 식생활이 어린 손자들과 젊은이의 취향에 맞춰 있다.. 한 열흘 있으려면 내 입에 맞는 반찬을 좀 챙겨 가는 게 좋다. 김치, 마른 반찬거리랑, 냉장고 있는 먹던 과일 ,채소들을 주섬 주섬 보냉 팩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그냥 두면 상해서 버리게 되니까. 동네 재래시장 떡집에 가서 팥 시루떡을 좀 샀다. 큰 사위가 좋아 하기 때문이다. 흰 가래떡도 두 팩 샀다. 손자와 딸에게 떡볶기를 만들어 줄 생각이다.
큰 사위가 회사 일로 이번에는 캐나다로 열흘간 출장을 간단다. 사위가 없는 동안 우리가 딸네 집에 좀 와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딸이 큰 손자 학교의 학부모 면담, 간담회 등에 참석해야 되고, 작은 손자를 어린이집 통학버스에 시간 맞춰 태워 주고 데려와야 하는데 시간이 학부모 간담회랑 중첩되니 엄마가 와서 좀 있어 주면 좋겠단다. 아이들 신학기라 손자들도 큰 딸도 마음이 조금 불안정한데 사위가 해외 출장가야하니 부모님의 도움이 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대구에 살고 딸네는 서울에 있다. 독립한 딸네와 우리 부부가 숙식을 앞으로 한 열흘 같이 해야 하는데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 대구서 가져 온 가래떡으로 떡볶이 해 줄까?”
얼마전에 TV 맛자랑 프로에서 리포터가 떡볶기집 순례를 하면서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나도 갑자기 먹고 싶어 졌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우리 동네 분식집에서 일 인분 사다가 먹어 보았다. 맛이 별로였다. 인터넷 레시피를 보고 내가 직접 만들었더니 맛이그런대로 괜찮았다.남편과 먹어 보니 꼭 밥만 고집할게 아니라 떡볶기로 한 끼 식사를 대신 해도 되겠구나싶었다. 우리 6070세대는 중고 학창 시절에 용돈이 조금 생기면 라면, 왕만두 이런 걸 친구들과 서로 사주고 사먹곤 했다. 그런데,우리 딸들 세대에는 학교 부근 분식집에서 빨간 떡볶기를 호호 불면서 맛있게 먹었나 보다. 오댕(어묵).순대, 납작 만두와 함께. 이젠 시집간 딸들이 명절에 대구에 내려오면 저들의 추억이 서린 떡볶기와 납작 만두집을 찾아가서 사 먹고는 즐거워 하는 것을 보았다. 집에서 나도 몇 번 해 먹어 보고 요리법을 나름 연구한 터라 맛있게 해 먹일 요량이었다.
“엄마, 떡볶이는 제가 맛있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딸이 자기가 잘 만들겠단다. 엄마의 손맛 자랑 좀 하려는데 말이다.
“그러면 우리 딸 떡볶기 한번 얻어 먹어 볼까? 다시물 부터 우려야 겠지?”
내가 멸치, 새우, 다시마, 무 등을 냉장고에서 꺼내려 하자,
“엄마는 왜 그렇게 번거롭게 하려고 해요? 간편하게 해요. 내가 해 주면 우리 아이들 맛있게 다 잘 먹어요.”
육수 만들자는 나의 말에 강력한 제동을 건다. 인상까지 찌푸리면서. 인공감미료를 전혀 안 쓰는 나는 국물 요리의 기본은 육수 우려내기 부터다. 그렇게 해야 감칠 맛이 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딸은 육수 생략하고 그냥 고추장 풀고 설탕 간장으로 간 맞춰 쉽게 하자는 모양이다.
“얘야, 육수 내기가 어렵지 않다. 조금만 더 신경 쓰면 훨씬 맛 있을 텐데...”라고 하고 싶지만 꾹 참았다. 보아하니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태세다. 그랬다간 큰 소리 나고 떡 볶기는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전에는 딸네 집에 오면 부엌에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면 맛있고 좋단다고하면 귀담아 듣고 '네,네' 그랬다. 또 이런 음식은 어떻게 만들면 맛있냐고 묻곤 했다. 몇 년 새 딸이 가정주부 9단이 되었는지 엄마의요리 방식은 단호히 배제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 이제 딸도 온전히 홀로 서기를 하는구나 싶다. 대견해 해야하는데, 씁쓸하고 허허로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딸이 다 만들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내게도 한 사발 안긴다. 손자들도 제 애미가 해 준 것을 호호 불며 맛있게 먹는다.
“와, 맛있네, 정말 이렇게 맛있는 떡볶기는 처음이야.”
나는 이렇게 딸 비위를 맞추면서 먹는다. 먹을 만은 하지만 입에 착 감기는 느낌이 부족하다. 맛이 가볍다고나 할까. 20%, 아니 한 30%는 부족한 맛이다.
“얘야, 육수 우려서 하면 아이들이 훨씬 맛있다고 할 걸.”
이렇게 말해 주고 싶지만 참았다. 요즈음에 나의 딸들이 엄마는 선생님 아니었다고 할까봐 뭐든 가르치려고 든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이 교사 출신들 보고 티 난다고 안좋게 얘기들 한다지만 자녀들에게 조차 그런 말 듣다보니 충격적이었다. 직업병이라고 여겨진다. 자식조차 이러니까 정말 조심해야지 생각하고 있다. 직업상 평생 몸에 밴 습관과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사고방식을 어찌 단기간에 없앤단 말인가? 대화방식이 설명적이고 지시적이라는 것이다.
' 그래, 실패도 해보고 성공도 해보고 자신들이 깨우쳐 가거라. 이제 엄마는 이 것 저 것 얘기하지 않으마.'
아들만 둔 친구들이 딸은 며느리와는 달리 대화가 잘 되고 좋은 친구 같을 것이라고 무척 부러워하지만. 나는 딸들에게 살얼음판 딛듯이 조심조심 말해야하고, 시원스레 내 마음을 얘기할 수가 없다.이제 모두 출가하여 자주 만나지 않는 탓일까, 체험한 경험과 사고방식이 다른 신세대 자식과 나이들고 편견이 깊어진 부모간의 세대차이때문일까? 내 몸에서 난 자식이지만 엄연히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내 뜻대로는 안 된다.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인가, 너무 소심한 것인가 모르겠다.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한 것 같다.
부모가 자식을 애지중지하며 키워 출가 독립 시켰다고 자식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끝나겠는가. 자식이 늙어가는 부모를 향한 애틋한 연민의 정이 어찌 없을까마는, 천륜으로 맺어진 부모 자식간의 의사 소통도 이렇게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항상 관심과 사랑의 끈을 놓지않는 것만이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한다.
소통(3)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시골에서 살았었다. 아버지의 직업상 여기저기 이사를 다녔다. 그때 음력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평소에는 아끼던 흰쌀을 넉넉히 불려 가래떡을 뽑아서 설 쇨 준비를 하신다.
그런데 떡 방앗간이 개울을 건너야하는 먼 이웃 마을에 있었다. 몇몇 이웃 어머니들과 동무하여 먼 동네까지 떡가래 뽑으러 가셨다. 그때는 겨울옷이 지금처럼 따뜻하지 않았고 날씨도 매우 추웠던 것 같다. 오랜 차례를 기다려서 간신히 뽑은 가래떡이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개울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오다가 미끄러지셨다고한다. 떡은 내동댕이 쳐지고 입으신 치맛자락은 깨어진 얼음물에 흠뻑 젖어 버렸다고 한다. 집에까지 걸어오는 동안 치마가 얼어서 버적버적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그 때 어머니는 얼마나 춥고 고통이 심하셨을까? 상상하면 아찔하다.
가래떡이 아직 말랑말랑할 때 아우리들에게 조청에 찍어서 먹어보라고 주신다. 어머니가 얼음에 미끄러져가며 마련한 가래떡은 맛은 있었지만 먹으면서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생각일 뿐 “어무이 수고 하셨어요.”라고 말도 하지 못했다. 떡이 알맞게 굳으면 한석봉 어머니처럼 도마에다 놓고 떡을 썰어야 한다. 나와 동생들은 옆에서 구경하다가 타원형으로 납작하게 썬 하얀 떡을 이따금씩 집어 먹어 보는 것이 고작이다. 아직 어머니를 도와 드리지는 못한다. 칼질이 서툴기 때문이다. 수북한 떡가래를 다 쓸려면 어머니의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기도 한다.가끔 떡이 너무 굳으면 어머니의 고생은 더욱 심해진다. 요즈음은 기계가 다 썰어 주니까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래떡이 몇 가닥 남았을 때, 어머니가 이제까지 썰던 것과는 달리 한 오륙 센티씩 자른 후 골패짝 처럼 세로로 쪼개었다.
“이렇게 썰어서 나중에 떡볶기 만들어 주마.”고 하셨다. 떡볶기가 어떤 음식일까 상상하며 맛있게 해주시려니 하고 기다렸다.
“어머니, 떡볶기란 것 언제 해 주나요?”하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였다. 하지만 몇 날이 지나도 영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떡볶기가 어떤 모양과 맛을 가졌는지 기대가 컸었는데 어머니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 그 뒤로도 가끔씩 ’떡볶기‘에 대한 호기심과 서운함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떡을 썰 때는 자식들에게 맛난 것을 해 먹이려 했으나 그 재료가 여의치 않아 포기하셨나 보다. 아니면 내가 없을 때 그 음식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어릴 때 나는 어머니에게조차 내 생각과 감정을 얘기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엄마, 떡볶기 빨리 해 주세요.”
“떡볶기 언제 해 주나요?”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을 왜 못하고 궁금하게 가다리기만 했을까?
말을 잘 못하는 바보였을까? 착하고 말 잘 들어야한다는 맏이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너무 빨리 철들어서 그랬을까? 여하튼 어릴때의 나는 부모님께 하고싶은 말들을 속으로만 생각하는 아이여서 내 자신이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만도 많았던 것 같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그 때의 나를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 또래의 친구들은 어머니께 높힘말을 쓰지 않았다.
“엄마, 밥 줘.”
“엄마,학교 갔다 왔어.” 이런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무이예, 밥 어딨어예?”
“어무이예, 학교 갈 시간이라예.” 이런식으로 어머니께 항상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다른 동무들처럼 나도 “엄마”라고 무척이나 불러 보고 싶었고 친구들 과 말하듯이 얘기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그 것이 나에게는 죽는 것 만큼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자녀들이 부모님께 존댓말을 쓰도록 키워야 예의 바르게 자란다고 한다.하지만 나의 경우를 돌이켜 보면 엄마와의 살가운 대화는 어려워 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소통"이란 말을 하기는 쉽지만 실행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