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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10) - 다대오 / 요 14:22-24
크리스천이라면 허드슨 테일러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중국의 내지 선교회를 만들어 35년간 사역하고 73세에 중국에서 세상을 떠난 전설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D. E. 호스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에 이어 30년이 넘도록 중국 내지선교회를 이끈 인물임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는 잊히도록 살았습니다.” 그 역시 명문가에서 태어나 국립사관학교를 다니던 촉망받는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던지고, 중국 내지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사역과 다른 사람의 이야기 말고는, 그래서 그의 전기를 쓰기에는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고 말입니다. “잊히기 위해 산 사람” 아니 “그리스도만 기억나게 하려고 산 사람” 감히 저 같은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생각하기도 힘든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신앙인들의 소망이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잊히기를 소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리 필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무명용사의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미국 뉴욕대 부속병원 재활센터 벽에 걸려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어느 무명용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함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제자는, 무명에 가까운 다대오입니다. 순서로는 열 번째 제자입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다대오는 세 번째 그룹 곧 C팀에 속해 있습니다. C팀의 팀장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봤듯이, 팀장이 조용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래선지 다대오도 조용히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어느 무명용사처럼 살다 갔습니다. 물론 다대오는 무명용사와는 달리,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 외에, 별다른 것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열두제자로서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 없이, 덩그러니 이름만 남기고 갔습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유명한 성경학자로, 성경을 처음 라틴어로 번역했던 제롬(Jerome, 히에로니무스)은, 다대오를 가리켜 ‘트리노미우스’라고 불렀습니다. ‘트리노미우스’란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세 개의 이름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름을 ‘다대오’입니다. 마 10:2-3절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다대오란 ‘사랑받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젖먹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젖먹이란 젖을 먹고 있는 어린아이를 가리킵니다. 짐작컨대, 집에서 막내였던 거 같고, 젖을 늦게까지 먹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 10:3절을 보면, 개역개정은 각주가 달리지 않았지만, 새번역에는 보면 있습니다. 각주 내용을 보면,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레배오’ 또는 ‘다대오라고 부르는 레배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배오는 ‘가슴’을 뜻하는 단어 ‘렛’에서 유래했습니다. 레배오는 ‘아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레배오’가 그의 별명이었다고 보면, 그는 가슴이 따뜻한 제자였을 것입니다. 다대오와 레배오를 종합해 보면, 그는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가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니는 열심당 시몬과 함께, 세 번째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처럼 강인한 사람도 쓰셨지만, 다대오 같은 부드러운 사람도 쓰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시몬과 마태는 또 어떤가요? 둘이 앙숙 같은 존재인데, 제자공동체에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둘 다를 품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만큼 예수님의 품이 컸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은 사실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끝까지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몬은 시몬으로 쓰임 받으면 되고, 다대오는 다대오로 쓰임 받으면 됩니다. 시몬이 시몬으로 쓰임 받아야 행복하고, 다대오가 다대오로 쓰임 받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에 감사하고 쓰심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름은 유다입니다. 눅 6:15-16절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유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발음이 같습니다. 유다란 이름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가 좋은 뜻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유다는 그의 본명이고, 다대오는 별명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유다라는 좋은 이름을 버려 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를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요 14:22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가룟 유다의 부정적 영향으로, 유다라는 이름을 쓰는 게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이야 상관없지만, 기독교 영향권 아래서는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위에서도 유다라는 이름을 본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나잇값뿐만 아니라, 이름값도 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이름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행 1:13절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아들’이란 단어에 각주가 달려 있는데, 성경 본문 밑에 보면 ‘또는 형제’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야고보의 아들일 수도 있지만, 야고보의 형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를 형제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사전 위키백과에 이렇게 나옵니다. “유다는 ‘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이며, 타대오는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입니다. 소(小)야고보와는 형제 관계이며,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다른 사람이다.”
정리해 보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형제가 아닌 거 같습니다. 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당해 보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 이어서, 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 형제까지, 열둘 중 절반이 형제 제자인 셈입니다. 또는 유다 다대오를 예수님의 동생 유다와 동일시하여, 그가 유다서의 기록자라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그건 너무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다대오를 이름과 관련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다대오도 지난 주일에 살펴봤던 작은 야고보나, 다음주일에 살펴볼 셀롯인 시몬과 더불어, 성경에서 말해주는 정보가 빈약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요한복음 14장에 그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하신 후, 제자들과 나눈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락방 강화’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중에, 다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3:2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 13: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앞의 제자는 가룟 유다를 가리키고, 뒤의 제자는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가룟 유다는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제자이고, 베드로는 수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데다, 두 명의 핵심제자들이 예수님을 팔고 부인할 거라는 말씀을 들었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근심했겠습니까? 그들의 근심이 역력한 눈빛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서둘러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으로 다락방 강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요 14:1-4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가 나서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할 때,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바로 그 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요 14:6-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러자 이번에는 빌립이 나서서, 그 아버지를 우리한테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이 나를 본 게 아버지를 본 건데 아버지를 따로 보여달라고 하냐고 하셨습니다. 요 14: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한참 말씀을 이어가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모처럼 유다 다대오가 나섰습니다. 요 14:22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2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의 질문에서, 그의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집니다. 거칠고 투박한 말투의 베드로와는 대조됩니다. 마 16:21-22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얼마나 주제넘은 소리입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이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한테 항변했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아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예수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처럼 거칠게 나무란 것입니다. 그에 반해, 다정다감한 심성의 소유자인 유다 다대오의 질문에는, 겸손함이 듬뿍 묻어납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듯이, 세상에도 나타내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거 같은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만나 너무 좋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영접하지 않습니다. 유다 생각에,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보여주신 것을, 세상에도 보여주신다면, 세상도 달라질 거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이 아쉬워서,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질문에서, 그에게 선교적 관심이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선교적 관심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상당수는,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걸로 변론했고, 심지어 그 문제로 다투기도 했습니다. 눅 9:46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문제는 타이밍입니다. 그런 변론을 할 때가 언제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 있은 후였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눅 22:24절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때는 언제냐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만찬 자리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거라는 말씀을 한 이후였습니다. 아니 이게 진짜 말이 되냐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친척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혀달라고 청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다 다대오의 관심이 남달라 보입니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선교적 관심 때문에, 자신들이 본 영광을 세상에도 나타내주기를 부탁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점점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선교적 관심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에 관심이 희미해져갑니다. 자기, 자기 가족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 다대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요 14:23-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기적이 일어나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을 하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우리가 교회당을 크고 웅장하게 지으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름 없이 살아도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리가 주목받지 못해도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영광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면, 하나님의 영광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말씀에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어디에 세우겠다고 하셨는지도 보세요. 마 16: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도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엡 2: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초를 말씀 위에 세우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 가지 치우친 신앙이 있습니다. 기적 중심의 신앙이 있습니다. 은사 위주의 신앙이 있습니다. 기적 필요하지만, 그 당시뿐입니다. 은사도 유익하지만, 신앙을 성숙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은 말씀뿐입니다. 사 40: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말씀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앙의 나침반입니다. 말씀이 뭐라고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느냐가 결정적입니다.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기준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불변한 말씀이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인생의 기준이고, 우리 신앙의 절대적 기준입니다.
유다 다대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 14:23-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위해 기도의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면 나도 좋고, 예수님이 싫어하면 나도 싫습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니까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예수님은 좋아하는데 나는 싫고, 예수님은 싫어하는데 나는 좋고, 그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면 나도 관심이 가고, 예수님이 관심 없어 하면 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니까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예수님이 관심 있는 것에 나는 없고, 예수님이 관심 없는 것에 나는 있고, 그게 말이 됩니까? 신앙이 예수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 중심이 나한테 맞춰져 있습니다. 나 중심의 신앙은, 성경과 무관한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적이냐를 따져야지, 나한테 맞느냐를 따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면, 예수님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게 됩니다. 더 수고하지 못해서 죄송스럽고, 더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 덕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다대오는 전승에 의하면, 유대 땅을 떠나 시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유프라테스 강 근처인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뎃사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에뎃사는 지금의 튀르키에(터키)입니다. 더 나아가 이란, 이라크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말년에는 아르메니아 지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에뎃사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의 왕이었던 아부가르의 병을 고쳐주었고, 그걸 계기로 부족 전체가 주님 앞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아르메니아에까지 전해졌고, 그가 아르메니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 이미 복음화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시리아로 다시 돌아와 전도하다가, 시리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숨지면서도,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실 ‘다대오’에게는 별다른 특기가 없었던 제자입니다.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성경에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을 이끌고 리드할 만한 지도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주의를 끌만한 캐릭터나 개성 있는 사람도 못됐습니다. 그래서 ‘다대오’는 리더의 역할보다는 조력자의 역할을 잘 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리더만 중요하고 조력자는 덜 중요합니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다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면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교회는 우리 몸과 같습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 머리가 되고자 하면, 손의 일은 누가 하고, 발의 역할은 누가 합니까? 심장의 역할은 누가 하고, 눈코의 역할은 누가 합니까? 이 모든 지체가 다 필요하고, 다 소중한 것입니다. 머리는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지체는 수백 개가 필요합니다. 우리교회도 담임목사의 역할은 한사람이면 되지만, 많은 지체들이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지체가 된 여러분 한분, 한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 문화를 가리켜서 ‘졸병이 없는 문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린 아이에게 “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보면, 거의 전부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지요? 아니 다 대통령이 되면 백성은 누가 합니까? 다 장군이 되면 졸병은 누가 합니까? 졸병도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했던 ‘다대오’는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미국교회의 경우, 평생 부목사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평생 부목을 해도 그냥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대개가 부목사의 직분을, 담임목사가 되기 전의 실습과정으로 여깁니다. 부목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나는 머리가 될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지도자를 돕는 것이 나의 소명입니다. 여러 가지로 내 천성이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생각할 때, 나는 이 자리를 지키면서 사역하는 것이,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더 많은 베드로보다, 더 많은 ‘다대오 유다’일지도 모릅니다. 드러나게 표면에서 일할 사람은 하고, 숨어서 일할 사람은 숨어서 일해야 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복음이 전파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다대오’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 이런 고백을 합시다. “주님, 나는 베드로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루에 3,000명을 회개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대오’는 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록 유명한 사람은 안 되어도, 내 이름값을 다하는 사람은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겸손하고 성실하게,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다대오의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교회에도 이런 다대오가 필요합니다. 다대오 같은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다대오’는 예수님의 조력자로서,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것처럼, 우리도 ‘다대오’처럼 21세기의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서,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그 이름 값을 하지 못하였으나, 유다 다대오는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답게 그 이름 값을 하고 간 사람입니다. 우리도 다대오처럼 이름값을 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긴 제자로서 그렇게 이름을 날린 유명한 제자는 아니었으나 꼭 필요했던 제자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도 다대오처럼 이름을 날리는 자는 아닐지라도 꼭 필요한 곳에서 자리매김을 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유다 다대오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던 자이면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뒤에서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였던 제자로 전해집니다. 우리도 다대오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잘 담당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