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을에 - 권석창
가을에 잔조로운 햇빛 아래
잊었던 사람의 이름 가만히 불러본다.
입술만 나무 잎처럼 잠시 떨리고
소리는 밖으로 나지 않는다.
이 가을,
바람 소소한 가로수 길을 걸으며
추억으로는 아무래도 갈 수 없어
먼 하늘 보다가 고개 숙이면
포도에 떨어지는 마른 낙엽.
내 그대를 사랑함은
이 마을 저 마을 헤맨 바람이
그대 집 문풍지 흔듦이여.
내 그대를 사랑함은
굴뚝새 낮게 날아
그대 집 처마에 깃듦이여.
지푸라기 더미를 스치는
어지러운 바람이여.
2. 가을 - 김지하
어지럼증을 앓는
어머니 앞에
그저 막막하더니
집을 나서는데
다 시든 낙엽을 밟으니
발바닥이 도리어
살갑구나.
3. 가을날 - 김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4. 가을의 시 - 김초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5.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6. 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곳에 있는지를
7. 가을 - 오탁번
감나무에서 감잎 뚝뚝 떨어지는 소리
아버지의 두루마기 소매자락에 이는
기러기 날아오는 가을하늘 더 푸르다
텅빈 들녘 송장메뚜기 한 마리
간고등어 한 손 든 아버지의 흰고무신코
살진 잡짐승 여물 먹는 소리가 정겹다
버들치 헤엄치는 여울목에 빠진 가을달
반짇고리에 놓여있는 은반지의 흰 입술
쥐오줌 자국 난 벽에서 잠자는 씨옥수수
어머니의 가을 옷섶 따스한 저녁연기
호랑나비인 양 가벼운 굴뚝새 한 마리
감잎 뚝뚝 떨어지는 가을이 마냥 깊다
8. 가을시 - 유재영
지상의 벌레소리
씨앗처럼 여무는 밤
다 못 쓴 나의 시
비워둔 행간 속을
금 긋고 가는 별똥별
이 가을의 저 은입사
9. 가을사랑 - 이하
소슬한 가을이기에는
바람 한 점 없었네.
들국화 꽃 무리 겹잎을 흔들며
보랏빛 가을 산길에
술렁이기 전에는
솔가지 섬세한 손끝으로도 알지 못했네.
까치발로 나가는 바람,
이별만 하는 바람
두는 향기 그리웠을까
조금만 조금만 머물다가
갈잎마저 알아버렸네
바람이 없던 날 들국화 가늘게
떨리기 전에는 몰랐었네.
가을이 바람을 흔들고 있음을.
10. 가을 - 정호승
하늘다람쥐 한 마리
가을 산길 위에 죽어있다
도토리나무 열매 하나
햇살에 몸을 뒤척이며 누워있고
가랑잎나비 한 마리
가랑잎 위에 앉아 울고 있다
11. 가을 - 정태현
가을은 꽃보다도 진한 향기로 젖어온다
끝없이 깊은 하늘은
천상이라도 보여 줄듯 마음을 홀리고
서늘한 대기는 스산한 기운으로
뼈 속 마디마디 파고들어
왠지 모를 사무침에
젊은 가슴도 단풍같이 멍이 들고
떨어진 낙엽은 영혼 위에 겹겹이 쌓여
가을은 까닭 없이 넋을 낚는다
12. 가을 연가 - 정태현
누군가 보고픈 사람도 없는데
그 누구의 숨결인가?
갈바람 산들산들
은은한 여인의 향취가 배여있네
누군가 기다리는 사연도 없는데
그 누구의 편지인가?
갈잎은 울긋불긋
절절한 사랑의 사연이 쓰여있네
누군가 그리운 음성도 없는데
그 누구의 고백인가?
벌레소리 소곤소곤
정겨운 밀어에 갈 밤이 깊어가네
13.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나태주
14. 편지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보리수가 깊은 신음소리를 내고
달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내 방을 엿본다
나를 버린
그리운 사람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달빛이 종이 위로 흐른다
글귀를 흐르는
고요한 달빛에
나는 슬픔에 젖어
잠도, 달도, 밤 기도도 모두 잊는다
헤르만 헤세
15. 가을의 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 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김초혜
16.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17. 비로소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고은
18.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뒤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19. 사랑의 노래
나는 사슴이고 당신은 노루,
당신은 작은 새, 나는 수목,
당신은 태양이고 나는 눈,
당신은 대낮이며 나는 꿈,
한밤에 잠든 나의 입에서
황금새가 당신에게 날아갑니다.
티 없이 맑은 소리, 아름다운 깃
새는 당신에게 노래합니다
사랑의 노래를, 나의 노래를
헤르만 헤세
20.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21. 힘이 들 때
더 힘내면
더 힘들어
하상욱
자존심만 세울 줄 알았었네
관계가 무너지는 줄 모르고
하상욱
22. 꽃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어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꾸 하라 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안도현
카페 게시글
수업자료실
짧은시 모음
최샘
추천 0
조회 810
23.09.19 22:31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