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은퇴이민 1기 63. 사건(2)
햇볕이 쨍쨍한 오후 산타로사의 SM Mall에서 쇼핑을 하고 돌아왔다.
고속도로를 다 빠져나와서 깔람바 시내를 거의 지날 무렵 갑자기 우리 차가 스르르 멈추며 시동이 꺼지는 것이다.
계기 판에도 뭔가 빨간 표시등이 켜진다. 우리는 놀라 소스라친다.
다시 급하게 시동을 걸어보지만 아주 약하게 걸리고 그나마 곧 꺼질 듯하다. 급해진 상황이다.
우선 내가 운전대로 바꿔 앉고 남편은 내려서 차를 밀어 본다. 마침 가까운 곳에 개인 온천장으로 들어가는 공터가 보여서 그곳으로 차를 댄다.
한낮의 날씨는 찌는 듯이 뜨겁고 우리 차의 앞부분도 손을 델 것처럼 뜨겁다.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 세 명이 신기한 듯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옷차림이 남루하고 꼬딱지와 버짐으로 얼굴이 지저분하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나 생긴 것처럼 바싹 다가와서는 눈치없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기분 나쁘도록 빤히 올려다 본다. 외국인이라 신기한 모양이다. 제발 그 아이들 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가 주었으면 싶다.
"제발 저리가. 무슨 구경 났냐? " 내가 대놓고 손을 내저으며 한국말로 짜증을 부렸지만 전혀 떨어질 눈치가 아니다.
마음이 불편해도 그냥 구경거리가 되는 수밖에 없다.
본넷을 열어보니 아이구! 냉각수가 한 방울도 없지 않은가.
아침에 나올 때 확인을 하지 않았고 그 뜨거운 주차장에 장시간 서 있었으니 오죽했으랴?
남편이 아이들에게 어디서 물 좀 구해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아이들은 눈만 깜박일 뿐 아무 대꾸도 없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 같다. 너무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를 못 다니거나 영어를 못 배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손짓을 하며 water라는 단어만 되풀이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빙그레 웃는다.
알아들었을까?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릇도 없고 막막할 뿐, 그까짓 녀석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잠시 후 아이들이 다 가버렸다.
리또의 집이 깔람바의 어디쯤이라는 기억이 떠올라, 한가닥 희망으로 리또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아, 천만다행이다. 리또가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한다. 우리의 긴박한 사정을 듣더니 한 시간 쯤 걸리면 올 수 있다고 한다.
한 시간도 고맙다. 와주기만 한다면.
대책없이 한 줌 되는 그늘 밑에 앉아 있는데 그 아이들이 다시 보인다.
어디서 구했는지 주둥이가 깨진 양동이를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게 아닌가? 물을 철철 흘리면서. (2009. 10)
첫댓글 모두가 낯설고 않 좋게만 보이던 시계는
하나 둘 정상적인 시력에 세계로 돌아오고 있나봐요.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구먼여 …
고생 좀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