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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정변증법 읽고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현기증 일으키는 것
더 이상 동일성에 ‘붙잡혀’ 있지 않은 변증법은, 설혹 파시즘적 결과물(88)들에서 엿볼 수 있는, 토대가 없다는 비난은 아니더라도, 현기증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유발한다. 보들레르 이래 현대의 위대한 문학에서는 그러한 감정이 중심적이다. 그런데 철학은 시대착오적으로, 그러한 것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를 받는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칼 크라우스*는, 자신의 명제들 하나하나가 그 점을 정확히 천명하면 할수록 바로 그러한 정확성 때문에 사물화된 의식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풍차가 빙빙 돈다고 외쳐댄다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불평의 의미는 지배적 견해의 한 가지 관습에서 파악된다. 지배적 견해는 즐겨 양자택일을 제시하여 그중 하나를 고르고 다른 하나에는 가위표를 치도록 한다. 예를 들면 어떤 행정적 결정들은 빈번히 제시된 계획들에 대한 ‘예 아니면 아니오’로 환원된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행정적 사유가, 아직 자유롭다고 하는 사유에도 바라 마지않는 본보기로 되었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의 경우에는, 그 본질적 상황들에서, 그러한 일에 협력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제시된 양자택일은 이미 타율의 일부다. 양자택일적 요구들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의식을 통해 비로소 판단해야 할 것이지만, 이 의식은 미리부터 그와 같은 결정을 하도록 도덕주의적으로 요구받는다. 어느 한 관점을 신봉하도록 고집하는 것은 이론 속으로 연장된 양심의 압박이다. 이론이 조야해지는 현상은 이 압박에 부응한다.
‘파시즘적 결과물들’: 동일성에 ‘붙잡혀’ 있는 사고의 극단적 결과로 비동일자, 이질적인 존재, 이방인, 이주민, 외국인 등에 대한 혐오와 박해로 치달은 파시즘을 떠올릴 수 있다. 특히 나치가 강조한 ‘피와 땅(Blut und Boden)’의 이데올로기에서 땅(Boden)은 토착민들과 대조해 이주민들을 열등한 존재로 깎아내리기 위한 주요 근거가 되었다. 아도르노는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근원(Ursprung)이라는 말에서도 그러한 저의를 감지한다.
‘그렇게 제시된 양자택일은 이미 타율의 일부’: 모든 양자택일이 타율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지배적 견해에 따르는 행정적 결정들에 맞서 제3의 대안을 적시에 찾기는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양자택일적 요구들의 정당성’ 혹은 적절성에 대해 판단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는 문제에 대한 다차원적 인식, 예컨대 ‘큰 그림’이라는 명분으로 제기되는 지배적 압력을 도덕적⋅정치적⋅기능적 차원에서 허물 수 있는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인식도 필요하다. 또 새로운 대안을 관철하는 데에는 사회적 역학관계상의 우위가 전제된다. 그러나 이때의 대안을 지배적 양자택일과 대조하면 새로운 양자택일로 환원된다. 양자택일은 선택이라는 주체의 의식적 활동의 기본구조로 남는다. 그 양자택일이 어떻게 제시되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느냐, 또 그것을 벗어나는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타율 극복의 관건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단순화된 양자택일 속에서 즉각 선택하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1) “변증법적 사유가 직면하고 있는 난관들 가운데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로써 나는 아마 관리적 사유를 통해 가장 확연하게 규정된 것으로 보이는 현재 의식의 계기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즉 노골적인 양자택일을 하는 사유, 말하자면 설문 형식에 따르는 사유, 혹은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에게 아리아인이냐 비-아리아인이냐, 프롤레타리아냐 비-프롤레타리아냐, 올바른 입장을 가진 자냐 삐딱한 자냐 혹은 그와 유사한 형태로 신분증을 요구하는 사유가 그것입니다.”(입문310)
2)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폐쇄성이 존재했다면, 사민주의 그룹에서는 언제나 어떤 막연하고 유동적인 것이 발산되었다. 하지만 다른 경우에 정확성을 요구하던 호단은 공개적인 논증과 이 지속적인 탐색을 완결된 판단보다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도 오랜 논쟁들 끝에 자신의 입장에 도달했으며, 그 다음 그것을 공동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사민주의자들이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런 식의 스펙트럼분석을 통해서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산당에서 멀어졌다. 거기서는 의심이 벌써 공격으로 해석되었고, 다른 평가는 당장 법정 논쟁으로 귀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저항3,249~250)
주요 정리들에서 부수적인 것을 제거하고 나면 이론이 그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는 예컨대 사람들이 역동적 계급이론과 이의 첨예화된 경제적 표현을 좀더 단순한 빈부 대립으로 희석시키는 데에 반대했다.[42] 본질적인 것을 개관하면 본질이 위조된다. 헤겔이 이미 조소한 수준으로 스스로를 깍아내리는 철학, 즉 사상을 놓고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설명하는 가운데 호의적인 독자들에게 순응하는 철학은 밀려드는 퇴행에 편입되면서도 이에 보조를 맞추지도 못한다. 도대체 철학을 어디서 붙잡아야 하느냐 하는 걱정 뒤에는, 학파들이 서로 물어뜯었듯이 대개 공격적 입장, 철학을 붙잡아두려는 욕심만이 도사리고 있다. 죄와 벌의 등가관계가 사상들의 연속에 전이된 것이다. 바로 이처럼 정신이 지배적 원칙에 동화되는 문제를 철학적 반성은 꿰뚫어보아야 한다.
“퇴행에 편입되면서도 이에 보조를 맞추지도 못한다”: 시장논리에 이론이 순응하는 것은 오늘날 예외가 아니다. 이론이 현실의 근본문제들을 앞질러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현상들을 어찌할 수 없는 근거로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체념을 정당화하고 일반화하는 추상적 담론으로 다시 문제를 고착시키는 악순환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아도르노의 이론에서도 이런 절망의 악순환이 수시로 드러난다. 이는 그의 현실관 전체와 연관된 본질적인 문제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로부터 배울 만한 이론적 무기들을 챙겨서는 안 될 이유도 없다. 예컨대 ‘정신이 지배적 원칙에 동화되는 문제를 철학적 반성은 꿰뚫어보아야 한다’는 생각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각을 실행하는 것이다.
3) “변증법에는 모든 것이 거기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하는 어떤 제일원리가 없습니다. 이로써 변증법에는 어떤 환원의 파토스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파토스에 대해서 나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즉 그러한 파토스에 대해 진리는 단순한 차이규정, 말하자면 인식과정의 전체 원가를 빼내고 난 뒤 남는 것일 뿐입니다. 그럴 경우 이 진부한 견해에 따르면 인식의 순이익으로서 −나는 이를 의도적으로 그처럼 아주 진부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한 주관적 사고작업과 사고의 조작으로부터 정제된 절대적 제일원리가 남^게 됩니다.”(입문177-178)
4)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현실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마르크스나 나나 그 이상을 주장한 적이 없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이를 왜곡시켜 경제적 요인이 유일하게 결정적인 요인이라 한다면 그는 그 주장을 무의미하고 추상적이며 어리석은 문구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경제적 상황이 그 토대이지만 상부구조―성공적인 전투 이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하는 정체와 같은, 계급투쟁과 그 결과의 정치적 형태, 법률 형태, 그리고 특히 이 모든 실제적 투쟁이 그 참가자의 두뇌 속에 이루어지는 반영, 정치적, 법적, 철학적 이론, 종교관과 체계적인 교리로의 그 발전―의 다양한 요소 역시 역사적 투쟁의 과정에 그 영향을 미치고 여러 경우에서 특정한 그 형태를 결정한다. 이 모든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 끝없는 일련의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연관이 너무 멀거나, 입증할 수 없어 우리가 그것을 비현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태와 사건들) 한가운데서 경제적 운동은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MEW37, 463)
5) “저는 일반적으로 신문 지상에서의 활동에서 누릴 수 있는 다음의 두 가지 호조건을 완벽하게 누렸는데, 저는 일생 동안 이러한 조건을 갖춘 신문에 기고할 수 있는 명예와 기쁨을 두 번이나 얻었습니다. 첫째 무제한적인 언론의 자유, 둘째 기고자가 원하는 바로 그 독자들이 기사를 읽는다는 확신. 첫 번째는 1848~1849년에 [신라인신문]에서였습니다. 그때는 혁명기였습니다. 또 그때에는 일간지에서 일하는 것은 어쨌든 즐거움이었습니다. 일간지에서 일을 하게 되면 한마디 한마디의 효과를 눈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사가 마치 수류탄처럼 어떻게 문자 그대로 명중하는지 그리고 장전된 폭약이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민주주의자]에서였습니다.”(선집6,319)
전통적 사유와 그것이 철학적으로 쇠퇴하며 남긴 상식은 일종의 관련체계 혹은 관련프레임을 요구하는데, 이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제 위치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로써 어떤 생각이든 위치를 정해 줄 수 있게 되고 보장되지 않은 사상을 멀리할 뿐이라면, 이 관련체계의 투명성에는 결코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독단적 공리들에 집어넣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인식은 성과를 거두려면 헌신적으로(à fond perdu) 대상들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한다. 이로써 생겨나는 현기증은 진리의 지표(index veri)다. 열려 있는 것의 충격은 보장된 것이나 늘 동일한 것에는 필연적으로 부정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단지 거짓된 것에 대해서만 허위로 보이는 것이다.
‘대상들을 향해 몸을 던져야’: 관련체계는 사유의 경제성에 유용할 수 있다. 문제는 특정 관련체계를 고정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 그에 대한 검증을 거부하는 사유방식이다. 개별 인식대상들을 관련체계 속에 배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사유방식을 아도르노는 관리되는 사유, 행정적 사유 혹은 위상학적 사유라고 비판한다. 그러한 사유방식은 대상을 폭력적으로 왜곡한다는 점에서 인식의 차원에서만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차원에서도 문제 있다. 그런데 조금 눈여겨보면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경우를 흔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그릇된 지배관계, 관리체계, 사물화 등의 결과물임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이를 받아들이기 쉽도록 만드는 사유의 경제성이라는 일반적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꾸는 일은 습관화된 행동방식, 감각방식, 욕구체계 등을 바꾸는 것과 유사하게 어려운 과제다. ‘대상을 향해 몸을 던지기’는 아도르노가 강조하는 ‘생산적 수동성’, ‘대상에 다가갈 자유’와 마찬가지로 관련체계⋅행정적 사유⋅위상학적 사유의 제약을 깨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개개인들이 누리는 혹은 그들을 사로잡는 사유의 경제성을 이러한 요구만으로, 혹은 맑스-레닌주의 고전 학습이나 감각의 재분할이라는 랑시에르의 처방 따위만으로 넘어서기기는 어렵다. 이해관계나 생존문제 등과 직결되는 외부충격, 이를 발전시키는 지속적인 조직적 실천 과정, 이 과정을 뒷받침하는 새로이 심화된 현실인식 등이 함께 작동함으로써 비로소 기존 관련체계의 허물고 새로운 관련체계의 생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6) “사실상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것은, 관료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또한 정신의^ 관료제에서 강요되지만 사태 자체에서는 실제로 정당화되지 않는, 일종의 지적 관리행위이며 일종의 처리도식입니다. 대체로 모든 유형의 당관료, 재단들에 호소하는 비망록 기록자, 그리고 돈을 좀 벌거나 어떤 직책을 얻기 위해 이른바 이념들을 가능한 한 영리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그와 유사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과 관련되는 개별 사물들을 그와 같은 관련프레임 아래 보관하고, 이로써 여기서 전체를 파악하고 전체를 목표로 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입문303-304)
7) “하지만 관련프레임이라는 생각은 그 이상으로 또 한 가지 매우 불길한 측면을 지닌다고 여겨집니다. 즉 (…) 그것은 아무리 공허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해도 일종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 됩니다. 예컨대 우리가 동료 사회학자들과 토론하는 가운데 ‘그러면 당신의 관련프레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부딪치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제 네가 도대체 어떤 이론적 사상들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라. 또 너는 혹시 경우에 따라 사회에 대한 네 견해들의 관련체계로서 이 사회 자체의 도식에 어울리지 않고 어쩌면 그것을 위태롭게 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는 점을 상당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입문304)
8) “모든 현상과 관련해 그것이 어디에 소속되는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위상학적 사유는 객체 경험과 차단된 편집광적 체계와 암암리에 친밀하다. 세계는 공허하게 작동하는 범주들을 통해 흑과 백으로 나뉘며 지배관계에 맞춰 정리된다.”(프리즘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