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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소리 / 민 11:1-9, 엡 3:14-21
여러분들은 원망을 하면서 살아가나? 원망이란 환경이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되어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감정의 표현이다. 성서는 원망을 가장 무서운 범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많은 그리고 자주 범하는 범죄이다. 그래서 성서는 이 원망의 범죄를 대단히 심각하게 다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제일 많이 범한 죄가 바로 원망의 범죄였다. 본문 1절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10절에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 원망했던 역사적 사례를 들어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본래 원망이란 불신자의 삶의 영역에서 일이어나는 불신자의 범죄이다. 불행한 사실은 성도가 세상에서 이 악습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 4절상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이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누구인지는 출 12:38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섞여서 같이 가나안 땅을 향해서 오는 행진에 끼어들었던 하나님의 백성이 아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원망이 먼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 불만과 불평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이제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열에 가담한다.
원망의 원인이 무엇인가? 한 성서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 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기억의 학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인간에게 완전한 의미에서의 망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주머니가 둘이 있다. 기억을 관리하는 주머니이다. 하나는 의식이라는 주머니이고, 또 하나는 무의식이라는 주머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의식의 주머니 속에 넣는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래서 잊을 것은 잊어야 하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리가 잘못되면, 기억해야 할 것은 망각하고 망각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는 혼란이 일어난다. 이 혼란의 결과가 원망이다. 본문은 기억해야 할 것을 망각한 혼란의 사례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원망의 범죄가 생긴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만찬을 기념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우리가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게 한 이유,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를 위해서 피흘려 주신 그 사실, 단번에 자신의 몸을 구속의 재물로 드린 이 사실을 앚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잊지 말아라, 잊지 말아라, 십자가를...’ 그런데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요한 몇가지의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원망의 범죄를 자행하게 된다. 그들은 세가지를 망각했다. 첫째는 과거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고, 둘째는 현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했고, 셋째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망각했기에 이 원망의 범죄가 생긴 것이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애굽 땅에서 노에생활을 하던 그 비참한 광경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그 노예생활의 부자유 속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셔서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이 기억했었더라면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였겠나? 그들이 홍해의 죽음 앞에 섰을 때 생명 보호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했었더라면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겠나? 광야생활에서 그들이 굶주림의 위기 앞에 처했을 때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던 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었더라면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겠나?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시 103:2-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항상 과거를 미화시키려는 본능이 있다. 과거를 우상화시키려는 그런 본능이다. 과거의 시시했던 일을 미화시키면서 오늘 이 순간 받은 엄청난 감격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먹엇던 생선, 오이, 수박, 부추, 파, 마늘 등, 그것들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본문을 보라. 이들의 불평 소리를 들어보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 과거의 시시한 영광을 미화하면서, 그러나 그때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였는가 하는 보다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의 노에생활은 얼마나 비참했나? 학대를 받았을 때 그들은 얼마나 비참했나? 내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자존심은 애굽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예배의 감격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이 끔찍한 비참에서부터 끌어내시고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시고 구속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말앗다. 지나가버린 삶에서 시시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그러면서 오늘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내게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는 감격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나, 그 시시했던 과거는 오히려 내 앞에 찬란하게 등장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나? 그래서 불평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현재의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했다.
우리가 받는 축복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흔히 그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다음 순서로 우리는 감격을 상실한다. 그리고 감사를 망각한다. 이제 남은 것은 불평과 원망밖에는 없다. 그것이 만나의 사건이다. 그들이 맨 처음 하나님께서 친히 제조하신 만나를 주셨을 때, 배고픔의 위기에서 처음 만나를 맛보았을 때, 그 만나를 맛보던 처음 감격은 얼마나 대단했겠나? 그래서 출 16장을 보면 ‘꿀맛’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만나를 먹고, 또 먹고, 또 먹기 시작하니까 본문 8절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맛을 ‘기름섞은 과자맛’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꿀맛이 기름맛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계속 읽어보면 민 21:5절에 와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푸념한다. ‘하나님, 우리가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합니다. 밤낮 이것만 주실 것입니까? 메뉴가 왜 달라지지 않습니까?’ 옛날에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 나무껍질 등을 벗겨 죽끓여 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생활형편들이 조금 나아졌지만 주조장에서 나오는 술지꺼기를 먹고 산 적도 있었다. 지금 그 당시 그대로 먹으라면 먹을 사람이 없다. (고교때 선생님의 시래기국 이야기)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기적과 감동의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를 아는가? 그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갖고도 감사하지 못하며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면, 이런 사흘을 주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나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먼 채로 살도록 하고, 또 하루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로 살고, 또 하루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처람 살게 한다면 사람들은 감사의 의미를 알 것이다.
헬렌 겔러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한번만 저 무지개를 볼 수가 있다면,
내가 단 한번만 저 떨어지는 낙엽의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다면,
단 한번만 이 산 속에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나에게 이 아름다운 가르침과 자상한 친절을 베푸시는 설리반 선생님을
단 한번 그 아름다운 미소를 내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내가 단 한번만 아름다운 음을 발하는 저 오케스트라와
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나에게 이 귀한 설교의 감동을 주었던
필립 부룩스 목사님의 얼굴을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이렇게 내 삶을 바꾸었던 감동스러웠던 이 성서말씀을
내가 단 한번만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지는 해 저 석양을 단 한번만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또한 이런 기도시를 신혼 초에 쓰신 분이 있다.
‘하나님, 서툰 아마추어처럼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처음보는 하늘이듯 그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감격으로 주님을 보게 하소서.
내가 처음 사랑했던 그 여인을 그렇게 바라보던
그 눈초리로 그렇게 내 아내를 보게 하소서.
처음 들어서는 예배당이듯 그 설레임으로 예배당 안에 앉게 하소서.
처음 내 마음 속에 그 구원의 말씀이 내 심장을 사로잡던 그 감격으로
처음 그 설교를 듣는 그 심정으로 설교를 듣게 하소서.
오 주님, 마지막 단두대에 올라 서 있는 사형수처럼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마지막 보는 하늘인 것처럼 그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마지막 보는 아내인 것처럼 그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소서.
마지막 보는 예배당인 것처럼 그 예배당을 바라보게 하소서.
마지막 듣는 설교인 것처럼 그 설교를 듣게 하소서.’
우리가 받는 축복에 익숙하면 우리는 그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감격을 상실한다. 감사를 망각한다. 불평하고 원망한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인도를 망각했다.
여러분, 지금 원망하는 이 순간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나? 가나안 땅을 향하고 있다. 젖과 꿀이, 환희와 기쁨이 뚝뚝 떨어지는 약속의 땅, 그 약속의 땅을 향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과정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청교도는 자기의 삶 속에 이런 좌우명을 가졌다. 그 좌우명의 내용은 이렇다. 그는 이 좌우명을 평생 기억하고 살았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여러분, 가나의 혼인잔치를 기억하는가? 나중에 잔치의 막바지에 가장 좋은 포도주 맛을 보았던 하객들의 고백을 기억하나? ‘사람들은 보통 처음에는 좋은 것으로 대접하다가 나중에는 저질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집의 잔치에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마지막에 준비하였군요.’ 이것이 하나님의 일처리 방법이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살림을 경영하신다.
자연을 바라보라. 검고 볼품없는 씨 하나가 땅 속에 떨어진다. 이 씨에서는 가장 못생긴 뿌리들이 먼저 나오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줄기와 가느다란 가지가 뻗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지막을 보라. 이 가지의 끝에 맺히는 꽃망울, 거기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꽃의 기쁨을 여러분들은 보는가? 흉측하고 징그런 벌레 한 마리, 이 벌레가 캄캄하고 어두운 꼬치 속에 들어간다. 그 다음에 이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다. 그러나 이 아픔 다음에 태어나는 아름다운 나비라는 생명의 감격을 보는가? 하나님은 나중에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것을 준비하신다. 그런데 비극은 이 가장 좋은 것에 대한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위대한 약속을 준비하셨다. 그런데 이 꿈을 향한 신뢰가 없다. 기대가 없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말하나? 어떤 사람은 인생을 이렇게 말한다. ‘울고 나와 울고 가는 사람, 요람에서 무덤까지’ 저는 이 말을 거부한다. 그렇지 않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울고 나와 울고 가는 것’ 거기까지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여러분, 무덤 건너편을 본 일이 있나? 저 무덤 건너편, 내 무덤 건너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준비하신 것을 여러분은 아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까지 와서 그들은 거의 포기했다. 돌아가자고 데모했다. 불평했다. 그런데 소수의 용기있는 사람들, 믿음이 있는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요단강 저 건너편의 가나안 땅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다. 그들이 깃발을 들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가 그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들을 통해서 가나안의 정복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제가 설교 때마다 가끔 말하는 소설이 있다. 말이 소설이지 분량은 단편 동화와 같다. 리챠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이다. 갈매기 조나단, 그는 고독한 선구자였다. 가만히 보니까 갈매기들이 해변가에서 조금 날면서 겨우 먹이를 찾고, 먹이를 찾은 다음에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다시 배고프면 가서 먹이를 찾곤 했다. 그것 밖에는 갈매기들이 더 이상 돌아다니는 데가 없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이 갈매기의 삶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중에 큰 꿈을 가진 조나단이라는 갈먀기가 도전을 시도했다. 자기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높이 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멀리 바라볼 수가 있다.’ 그리고 미지의 나라를 향해서 가자고 속삭인다. 그랬더니 이 갈매기에게 돌았다고 동료들이 쫓아낸다. 그래서 동료사회에서 추방된다. 이 추방단한 갈매기 조나단의 슬픔은 동료들의 세계에서 추방되었다는 슬픔이 아니다. 그보다 더 커다란 슬픔이 있었다. 높이 날 수 있는데, 멀리 갈 수 있는데... 동료들이 이 비상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 한계 이상을 보기를 거부하는 짧은 안목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것이 이 고독한 선구자 조나단의 슬픔이었다.
답답한 오늘이지만 그 다음 내일을 바라볼 수가 있다면, 이 폭풍우와 비바람 건너편에 있는 내일 새벽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안목만 있었더라면, 오늘의 질병과 답답함에서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더라면, 이 슬픔 저 건너편에 우리를 기다리는 기쁨을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이 고통스러운 환경 다음에 나를 만드시고 나를 붙드시며 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내일의 손길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더라면, 내가 죽은 슬픈 무덤 저 건너편에 구원받은 나를 영접하시고 천국에서 거룩한 면류관을 허락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의 유업을 상급으로 주시는 이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는 그 안목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벌떡 일어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망하기보다 이제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어떤 유대인 랍비의 이 기도를 좋아한다. ‘하나님, 하나님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더 주옵소서. 이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제게 주옵소서.’ 어떤가요? 여러분은 그래도 원망하며 살렵니까?
(1997-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