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 송덕희
지난주에 부산에서 관리자 연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서너 시간을 오가는 동안, 대학 동기 ㅅㅈ와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눴다. 스스럼없이 말하는 친구 곁에서 들어주고 간간이 묻기도 했는데, 나와 참 다르게 살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과였는데, 친구들은 샌님처럼 조용하지만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몰려 있어서 그렇다고들 했다. ㅅㅈ는 실과였고, 성격이 화끈한데다 서로 어울려 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이들이 뭉쳐 있었다. 우리더러 실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부해야 잘 살지 글만 읽고 뭐할 거냐고 놀리기도 했다. 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교정을 휩쓸고 다녔는데 그중에 ㅅㅈ가 가장 기억난다. 흰색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땋아 빨간 댕기를 묶고 다녔으니까. 축제일이 다가오면 꽹과리나 장구를 치며 사물놀이패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고 노래했다.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특했다. 나랑은 개인적으로 친해질 기회는 없었다. 30여 년이 흐르고, ㅅㅈ도 관리자가 된 후에 모임에서 가끔 만났다. 여전히 개량 한복을 즐겨 입었다. 옷은 색이 화려하고 디자인이 세련되었지만, 외모나 성격은 그대로였다.
ㅅㅈ의 손끝은 뭉툭하고 거칠었다. 손톱에 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어제 퇴근해서 고춧잎 한 포대 따온 걸 새벽부터 손질하느라 그렇단다. 출장 준비하랴, 식사 챙기랴, 바빴을 텐데 그걸 다 하고 왔다니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단하다!”였다.
친정 엄마가 나이 일흔에 중풍으로 쓰러져 한쪽이 마비되었단다. 지금 아흔 살, 계속 병원에 들락거린다. 7년을 직접 모시기도 했다. 마침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형부가 좋아하는 멸치고추조림 만들어 놨으니 가져가 먹으란다. 또 엄마가 집에 오고 싶어 성화라고 하자 ㅅㅈ는 “걱정하지 말고, 퇴원시켜야겠네. 갑갑하다니 어쩌겠소? 하는 데까지 내가 모셔 볼게.” 한다. 요양보호사에게 세 시간 도움받고 나머지만 챙기면 충분하다며 웃었다. 기저귀도 차고 있는 분을 직장에 다니면서 보살피는 게 가능하다니 이해가 안 됐다. 여동생과 언니, 오빠도 있지만, 건강과 형편이 제일 좋은 자기가 줄곧 해왔단다. 당연히 할 일이라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다며 껄껄 웃는다.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한 번씩 뵙는 일도 힘들어하는 나와 달리, 집에서 모시며 수발들겠다는 ㅅㅈ는 대단한 효녀다.
ㅅㅈ는 농사를 짓고 있다. 생활에 필요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큰소리친 사람답다. 논 2,000평에 벼를 심어 수확해 온 지 10여 년이 됐단다. 올여름은 날이 유난히 더워서 병충해가 심해 힘들었다. 하지만 20kg으로 80포대 정도 얻을 거란다. 농약은 절대 하지 않고, 직접 무논에 들어가 피를 뽑는다. 모종을 사서 이양기로 심고 탈곡하는 데는 동네 이장이 많이 도와주니까 어렵지 않단다. 전문 농사꾼이 다 되었다.
400평 밭도 가꾸느라 몸이 모자라다. 채소는 하나도 사지 않고 제 손으로 가꾸어서 먹거리는 걱정하지 않는다. 2주 전에 배추 300포기를 심었단다. 그렇게 많은 걸 어떻게 김장하는지 물었다. 재료는 다 밭에서 나는 걸로 준비하고, 3일간 날을 잡아 배추를 간하여 물을 빼고 가족들과 버무린다. 친정과 시댁 식구 먹을 걸 서너 통씩 나눠 주는 게 가꾸는 보람이란다. 직장 생활한다는 핑계로 김치는 여기저기서 얻어 먹는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고추, 고구마, 호박 등을 수확하여 서로 나눈단다. 친인척뿐만 아니라 교회 사람들, 이웃에 사는 주민께 요리해서 주니까 늘 고마워한단다. 텃밭을 가꾸다 보면 양이 많아 저장하는 일도 어렵다. 유튜브를 보고 즉시 요리할 것과 저장해 둘 재료를 구분하여 뚝딱 처리한다. “덩치가 큰 맷돌 호박이 좋아. 노랗고 줄이 깊게 팬 거.” 그게 뭐냐니까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늙은 호박인데 둥글고 커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써 두 덩이를 땄는데 듣기에도 생소한 정과를 만들어 보겠단다. 한입 크기로 썰어서 찐다. 김을 한소끔 식힌 후에 설탕을 적당히 묻힌다. 건조기에 가지런히 넣어 꼬들꼬들하게 말린다. 잘 포장해 두었다가 입이 심심할 때 먹으면 달짝지근하고 쫀득거려 간식으로 좋겠다.
고추를 따고 잎은 버리는 사람이 많은데, ㅅㅈ는 알뜰하게 모아서 반찬을 만든단다. 어렵지 않다고 설명한다. 장아찌는 시중에서 파는 전용 간장을 사서 쓰면 좋다. 제품이 잘 나와 있어서 예전처럼 냄새 풍기며 집에서 끓이지 않아도 된다. 오징어채 고춧잎무침은 고춧잎을 데쳐서 말려 두었다가, 입맛 없는 여름에 고추장과 갖은양념을 넣고 고루 무쳐 먹으면 밥 한 공기 뚝딱 먹는단다. 요리법을 실감나게 말해서 내 입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그리고 엄지가 척 올라갔다. ㅅㅈ는 요리 솜씨도 좋은가 보다.
평일에는 퇴근하자마자 밭이나 논으로 달려가고, 토요일도 종일 일한단다. 일요일은 교회에 가야 하니 일주일이 늘 바쁘다. 어디 아픈 곳은 없냐니까 농사일을 해서 오히려 건강해졌단다. 팔은 통뼈가 되고 손아귀 힘도 엄청나게 세다. 내 손을 잡는데 무쇠 손이 따로 없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ㅅㅈ를 보면서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나는 퇴근하여 집에 들어가면 밖에 나가기 싫다. 게으르기도 하고 피곤해서 가만히 누워 있고 싶다. 글을 쓰면서부터 더욱 운동은 안 하게 됐다. 부족한 생각을 짜내느라 뇌에 과부하가 걸려 힘든 날이 많다. 냉장고에 별다른 먹거리도 없다. 음식을 만들어도 별로 먹지 않고 버린 게 많으니 언젠가부터 요리를 잘 안 한다. 직장에서 급식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비타민, 콜라젠, 오메가3 등으로 부족한 걸 채운다. 물론 농사 지을 땅이 없지만, 있다손 치더라도 퇴직 후에나 엄두를 내볼 일이다.
건강한 먹거리를 여러 사람과 나누니 즐겁고, 일하다 보면 더 건강해진다는 ㅅㅈ의 말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나이 들어 기분 좋게 친구들 만나러 갔다가, 재산이나 자식 얘기로 오히려 속상해서 돌아온다는데, 우리는 달랐다. 무엇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할지 되묻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첫댓글 친구 분처럼 사는 사람 별로 없어요. 사람 사는 방식이 다 다르다 생각하세요. 따라하다 병 납니다.
그러게요. 저는 하지도 못하지만, 나와 다른 친구의 삶을 들으며, 나를 반추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친구 분이 멋지시네요.
어떻게 친하게 지낼 방법이 없을까요? 하하!
저도 친하게 지내볼려고요.. 집도 가까우면 먹을 건 감당해 줄 것 같아요. 하하하.
모래알 중 한 명이라서 뜨끔하군요. 그 친구가 누군지 머리에 그려져요. 아름다운 사람이 분명하네요
누군지 알겠지요? 지금도 열정이 들끓고 있는 걸 보면 정말 대단했어요. 더불어 살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죠.
왓, 부산 다녀가셨군요. 괜스리 선생님이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사람 마음 참 재미있습니다.
그래요. 공통점 하나만 찾아도 금방 마음이 열리지요. 부산에 사시는 보리사님, 참 좋은 곳에 사시네요. 저녁에는 해운대 해변을 맨발로 걸었습니다. 가는 모래가 발바닥을 간지럽히더군요.
와, 읽는 내내 숨이...하하. 선생님은 지금처럼 좋은 글 쓰시면서 선생님의 속도로 사셨음 좋겠습니다.
부럽고 대단한 체력을 가진 친구에 비하면, 저는 늘 잠 자고 싶고,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이네요. 제가 따라갈 수가 없는 일을 하고 사는 친구지요.
친구분이 하신 말처럼 좋은 마음으로 일하다 보면 더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게으른 저는 이제 또래보다 근육도 힘도 없고 여기저기 아프고 큰일 났습니다.
송선생님도 마음 단단히 먹고 운동해야 할 나이가 되었군요. 하하하. 저도 체질이 움직이면 더 아픈데, 그래도 휴일에는 걷기라도 해보려고 용을 쓴답니다.
선생님과 제가 동갑인데 같은 나이인 친구분 이야기라 더 존경스럽습니다. 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단한 분들이 왜 이렇게 많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많은 일을 하고 사냐니까, 재밌어!!! 하는데,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 친구와 비교하면 안되겠지만,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존재 하는 사람인 거죠?
와, 말이 안 나옵니다.
얘기하다가, 턱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런데, 거뜬히 잘 산대요. 쓰지 않은 것도 많아요. 닭을 키워 청란을 매일 먹는다나? 부지런하고 건강한 친구가 부러울 따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