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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의 역사와 유적
남달우(박사. 인천사 연구소)
들어가는 말
2003년 6월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광명일보』역사면 전면에“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고려구는 중국역사의 일부이다”라는 글이 게재되었다. 이것이 바로“동북변강역사와현상계열공정”즉 동북공정의 실체이다. 이후 2006년 9월 현재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만이 아니라, 고조선과 고구려의 유민이 건국한 발해까지도 중국 역사의 범주에 포함시켜 한국인의 뿌리 자체를 흔들고 있다.
이전인 2000년에는 일본이“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여 한국역사를 왜곡하였다. 이러한 한국역사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역사침략은 총과 칼 등 눈에 보이는 침략보다 더 무서운 문화적 침략으로,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적 공황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의 역사침략에 대해 한국의 대응은 어떠한가. 한국에서는 대학에서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돌리는가 하면, 중․고등학교에서조차도 근대사 이후의 역사에 대한 수강은 학생들의 선택에 맡기고 있다. 전 세계 어떤 민족과 국가가 자기의 역사를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으로 교수(敎授)하는 지 의문이 든다. 즉 한국민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 주는 것은 더 이상 국가에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한국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통하여 자긍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구성하는 3대 요소를‘시대, 장소,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 중‘시대, 인물’에 관한 지식은 기록되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알 수 있으나‘장소’는 직접적으로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볼 수 있는 역사체험이 가장 손쉬운 곳이다.
그런데 부평의 계양산은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우리 역사를 아우르고 있는‘장소’이다. 삼국시대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계양산성을 비롯해, 고려후기 사찰터로 생각되는 만일사지와 명월사지, 조선시대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사직단, 이외에도 많은 고분 유적이 산재해 있다. 특히 고려후기 선종(참선 위주의 불교)사찰로 건립되었다고 보이는 만일사지와, 조선시대‘종묘와 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를 뜻하는 사직단의 터가 남아있다.
1. 계양산의 역사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89호(1994. 12. 20 공포)에 의거 인천직할시는 인천광역시로 명칭을 변경하고, 3월 1일 부터는 법률 제4802호(1994. 12. 20 공포)로 경기도 강화군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 그리고 김포군 검단면 전체를 인천광역시로 편입하였다. 이 때 인천광역시 북구는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하여 분구(分區)되었는데, 고속도로 남쪽은 부평구로하고 북쪽은 계양구로 하였다. 그런데 계양구라는 지명은 계양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계양’이라는 명칭은 언제 출현하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과거‘계양구’라 불리기 이전 북구, 즉 부평의 연혁을 먼저 고찰하여야 하겠다.
이병도는 부평은 삼한시대 마한지역의 부족연맹체인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기록상에 보이는 부평의 첫 지명은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郡)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장제(長堤)로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수주(樹州)라고 고쳤으며, 이후 의종 4년(1150)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다시 고쳤다.
그러면 안남이라는 명칭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안남(安南)은 고려시대 수도 개경의 남쪽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안남도호부는 본래 고려 태조가 백제의 항복을 받은 이후 전주(全州)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광종대에는 고부(高阜)로, 성종대에는 영암〔郎州〕으로 옮겼다가, 지방제도가 정비된 현종 9년에는 다시 전주로, 의종 4년에 부평에 설치된 것이 마지막이 된다. 이때부터 현재의‘계양산’은‘안남산’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안남산에는 계수나무와 회양나무가 자생하였기 때문에‘계’자와‘양’자를 따서 안남산을‘계양산’이라 칭하였다. 이 때문에 고종 2년(1215) 안남도호부는 다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변경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는 계양도호부를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 2년(1310)에는 길주목을 드디어 현재의 명칭인‘부평부’로 고쳤다. 조선에 와서 부평은 태종 13년(1413)에 부평도호부로 개칭된 이후, 세종 때의 온천파동과 연산군을 꾸짖은 내시 김순손의 고향이었다는 점, 그리고 숙종 때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능인 김포 장릉(章陵)을 방화한 죄인 최필성의 출생지라는 이유 때문에 ‘현(현령은 종5품, 현감은 종6품)’으로 강등된 경우도 있었으나, 조선말기까지‘도호부(종3품 관아)’의 읍호를 유지하였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장인 이경성(李慶成)은 계양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桂陽山은 高麗時代 安南山이라고 불리운 곳으로 標高 三百五十“메타” 西串 富平 富川郡에 걸처있는 名山이다 동국여지승람에「桂陽山 在府北二里 鎭山 一名安南山」이라記錄되여있다 山中에는 桂陽山古城 衆心城址 萬日寺址 明月寺址 奉日寺址 等 古蹟이많고 南麓은 旧富平府이다 山頂의 眺望은 至極히 廣濶通暢하야 東向하면 漢江의 巨流가 平野사이를 西流하고 北向하면 江華의 諸峯이 指乎之間에있고 西向하면 仁川湾에 點在하는 大小諸島가 西海에 쌓여서 一眸에 거두어지고 南向하면 文鶴山 蘇來山等이 눈밑에가로놓여 멀리 安山諸峯이 模楜히 바라다보인다 富平의鎭山으로 歷代 詩人의 입에 오르내리고있는 名山이라하겠다 (당시의 맞춤법, 띄어쓰기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개발이 이루어지기 이전 계양산에서 바라보는 사방의 전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재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기록이다.
2. 계양산의 유적
계양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의 유적이 다수 보인다. 여기서는 유적을 시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하 내용의 서술은 문화재청에서 발주하고, 인천광역시와 인하대학교에서 발간예정인『문화유적분포지도』(계양구, 부평구, 서구, 옹진군)에 역사분야 조사원으로 참가한 필자가 계양산 일대를 조사하고 기록한 것을 중심으로 하였다.
1) 삼국시대
● 계양산성 : 계양구 계산동 산 10-1 번지 일원, 시 기념물 제10호
계양산성은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산 1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2년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계양산성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1530년 간행된 ????���新增東國輿地勝覽????���으로 富平都護府 고적조에‘계양산 고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1,937척으로 지금은 무너져 내렸다’고 되어 있다.
계양산은 주봉의 높이가 해발 395m로 인천내륙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며, 조선시대 부평도호부의 진산이다. 계양산의 서쪽은 서해에 닿고 있으며, 나머지 방향으로는 대부분 낮은 구릉이나 평지이어서 탁 트인 視界를 갖는다. 따라서 한강하류 지역을 놓고 삼국이 쟁탈했던 삼국시대에는 관방의 주요 요충지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계양산성은 계양산의 정상부가 아닌 동쪽 기슭의 표고 202m지점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란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이는 산성의 축조목적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다를 통해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나머지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계양산성은 석성을 먼저 쌓고 그 안쪽에 흙을 다져가며 쌓은 내탁식 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 현재(2006년 5월) 정자가 있는 곳에서 계양산 정상을 향해 150여m 되는 지점 왼쪽, 즉 산성 중간 되는 곳에 높이 210cm, 폭 356cm, 11단의 석축의 일부만 남아있다. 계양산성 내부에는 동쪽과 북쪽으로 두개의 문지와 수구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내부에 헬기장과 체육공원, 정자 등이 들어서 있다.
2) 고려시대
● 명월사지 : 계양구 계산 2동 산 52번지
계양산 북쪽 중턱 황어현 쪽에 있는 사찰지이다. 명월사는 1656년 간행된『東國輿地志』사찰조에‘明月寺在桂陽山’이라 되어 있고, 1760년 간행된『輿地圖書』사찰조에 ‘萬一寺明月寺奉日寺以上舊有今無’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엽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이규보의 詩가 남아있어 고려시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가 남긴 題詠을 통해 명월사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데, 이규보의「명월사시」에 “황무한 가시숲 헤쳐도 열리지 않으니, 돌길이 평탄한 데가 적구나. 말에서 내려 걷다가 또 엎어지니 내 석자 되는 지팡이가 부러졌다. 깊숙한 곳의 날다람쥐는 사람에 익지 못하여, 앞발을 모으고 서서 멍한 모양을 한다. 굶주린 호랑이야 너는 으르렁대지 말라 충성과 믿음만이 내가 믿는 바이다. 나무 끝에 암자를 찾아내니,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얹었네. 어떤 사람이 이름지어, 명월이라 표방하는고. 달을 가져 마음을 깨끗이 하려 함이런가. 창해 넓은 것이 다가 보인다. 전일에 하늘에 오르기 어렵다 들었더니, 홀연히 이미 하늘 위에 있도다. 물빛이 멀수록 더욱 희어, 서리같은 흰 비단을 펼친 것과 같은 모양이네. 침침한 구름 갠 놀이 경각 사이에 천만 가지 형상이로다. 큰 배가 물결 가운데 있는 것이, 가벼운 갈매기 헤엄치는 것 같다. 어주자(魚舟子)에게 말을 부탁하노니, 정신을 들여서 노를 잘 저어라. 너의 한가히 노는 모양을 내 시속에서 넣으련다. 아 나는 부서(簿書)에 빠져서, 맑은 흥취 저버린지 오래되었으니, 이 고을에 이른 지 2년 동안 오래 마음으로 그리던 취미에 매우 맞네. 청하건대 그대는 다시 머물라. 이것이 하늘이 주는 바이다.” 등과 같은 句節에서 험준한 산간에 위치하였고 또 해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949년 인천시박물관에서 시행한 계양산 방면 고적조사 당시의 기록에는‘계양산 북면 약 200미터 중복에 십 척 이상을 石築平地하고 남북 50미터, 동서 100미터의 사지에는 아직도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있고 동측에는 큰 우물이 있어 석축은 頹落되었으나 아직도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西串지방 사람은 이곳을 약수터라고 한다. 사지에서 이조시대의 와편과 자기편을 다수 발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당시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석축이 남아 있다.
● 만일사지, 서구 공촌동 산 1번지
만일사지는 계양산 서면 징맹이고개〔景明峴〕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만일사는 1656년 간행된『東國輿地志』사찰조에‘萬日寺在桂陽山’이라 되어 있고, 1760년 간행된『輿地圖書』사찰조에‘萬一寺明月寺奉日寺以上舊有今無’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엽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의 시에 “지는 해는 침침한데 물은 홀로 밝고, 어지러운 산이 구불구불 서렸으니 길이 평탄하기 어렵네. 구름은 먼 개(浦)의 1천 돛 빛을 희미하게 하고, 바람은 긴 강의 한 피리 소리를 떨어뜨리네. 몇 사람이나 건넜는고, 배는 스스로 떠있고, 외로운 호랑이를 지저귀어 쪼고도 새는 오히려 운다. 가고 오면서 깊이 강호의 흥취를 얻었으니, 홀연히 순채(蓴菜)와 농어(鱸魚)가 만리의 정취를 일으킨다” 하였다. 1871년의『부평부읍지』산천 계양산조에는 이규보가 “처음 만일사의 누대 위에 올라 바라보니,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았다. 돛대가 가는 것은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 절의 중이 와서 내가 바라보는 것을 돕다가 문득 손가락으로 섬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것은 자연도ㆍ고연도ㆍ기린도입니다’ 라고 하였고, 산을 가리켜서는, ‘저것은 경도의 곡령, 저것은 승천부의 진ㆍ용산, 인천의 망산, 통진의 망산입니다’라고 하면서 뚜렷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 이때문에 내가 매우 즐거워서 함께 놀러온 자와 같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왔다”라고 기록하여 만일사에서 바라본 서해바다를 묘사하고 있다. 만일사지로 가는 길은 몇 가지가 있으나 계양동에서 공촌동으로 넘어가는 도로인 경명로를 왼쪽으로 두고, 계양동과 공촌동 경계를 표시하는 곳에서 공촌동 쪽으로 30여m를 가다 보면 우측에 계양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이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우측에 중심성지 안내판이 나온다. 여기서 약 40여 미터 정도 더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사지는 서향으로 위치해 있는데 전체 규모는 길이(서남동북) 약 60미터, 폭 약 25미터 정도이며 상하2단으로 구분된다. 상단에는 현재 본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위치해 있어 사찰의 중심사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본전의 양측 및 하단에는 요사채를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본전 추정지는 15.2m x 9.3m정도의 건물지가 있는데, 주춧돌과 남쪽 끝에는 약 4.5m의 석렬이 남아있다. 건물지 옆에는 우물지가 남아있다. 본전의 북쪽에도 10x7m 정도의 건물지와 무너져 내린 석축이 약 10미터 정도 이어져 있으며 동쪽에도 5.5x5m 정도의 건물추정지가 남아 있다. 본전 추정지 앞으로는 돌들이 무너져 내려있어 상하로 구분을 이루고 있는데 아마도 계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지의 하단부는 무너져 내린 토사로 초석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일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사지 곳곳에는 기와편, 자기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인천고적조사 당시의 기록에 ‘계양산 서면 景明峴 너머에 있는 고려초기의 사찰지로 현재는 土砂의 반출로 초석 같은 것이 변모하여 가람배치를 복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寺址에서 발견되는 와편 자기편은 고려 및 이조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전에 사지 자체에도 변모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봉일사지, 계양구 계산동 산 20번지 현 백룡사 일대
봉일사는 계양산에 있었던 사찰로 창건 및 폐사연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1481(성종12)년에 편찬된 ????���東國與地勝覽????���에는“奉日寺在京畿道富平郡桂陽山”이라 되어 있고, 1799(정조23)년에 편찬된『梵宇攷』에는“今廢”,『부평부읍지』에는‘奉日寺在桂陽山今廢’라 되어있어 대략 조선 중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실시한 1949년 인천지역 고적조사에서 계양산 남록에서 고려시대 늦어도 조선 초기라고 인정되는 높이 2미터의 삼층석탑과 門址, 法堂址, 講堂址 등이 있음을 발견하여 이를 봉일사지로 추측한바 있으며, 또한 조선 초기의 우수한 인동문이 있는 와편을 검출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토대로 1961년에 실시한 봉일사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사지의 규모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선 실측조사에 있어서 사지의 규모는 總長 50.6m, 幅 46.2m이며, 寺址는 위로부터 삼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本殿址는 長 9.50m, 幅 22m로 現存한 몇 개의 초석으로 미루어 3칸× 5칸의 규모로 추정하였다. 중단과 하단 사이에는 약 2미터 정도 깍여져 내려와서 길이 9.40m, 폭 46m의 하단 區內에는 강당과 같은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동서 양측에는 요사지라고 보이는 長 50m, 幅 20m의 터 등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61년의 기록에서도 심한 沙汰로 새로운 谿谷을 이루어 태반이 깎여져 없어지고 말았다고 하여 변모 소실됨을 우려하였다. 당시 조사에서 범문이 새겨진 고려상감자기를 비롯한 고려 및 조선시대의 자기 및 기와편 이 십 여점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봉일사지는 1990년대 경인여자대학의 건물 신축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약 30년 전에 건립된 백룡사가 있다. 현재 백룡사에는 봉일사지에 있던 삼층석탑을 경내로 이전하여 놓았으며, 이와 동시에 계산동 963번지 삼천리아파트자리 개울섶에 있던 미륵불도 같이 이전하여 놓고 있다.
봉일사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창건 및 폐사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950~60년대의 조사에 의해 채집된 磁瓦片 등과 구지에 남아있던 석탑 등을 통해서 볼 때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사찰이었으며 조선중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봉일사지 삼층석탑, 계양구 계산동 산 20의 5번지 현 백룡사 경내
봉일사석탑은 인천에서는 봉일사 원위치에 남아있던 유일한 탑이었는데, 1975년 백룡사를 건립하면서 탑을 현재 대웅전 앞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50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흑백사진에 의하면, 계양산 자락 봉일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중의 기단위에 탑신과 3개의 옥개석이 나란히 올려져 있으며, 塔頭部는 없어지고 그 위에 자연석 하나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하대지석은 한 돌로 만들었으며 중석을 올리기 위한 이단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중석 역시 한 개의 석재로 만들었는데 평면사각형으로 우주나 탱주 등이 모각되지 않았다. 그 위로 바로 탑신부를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기단갑석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탑신부는 1층 탑신으로 추정되는데 탱주는 없고 우주를 陽刻하였다. 옥개석은 모두 삼단의 받침이 있다. 塔頭部는 없어지고 자연석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이 탑은 백룡사에 옮겨 복원하는 과정에서 화강석을 깍아 3층의 탑신부를 보완하고, 상층기단부를 마치 1층 탑신처럼 옥개석 밑에 놓음으로써 전체적으로 3층의 규모로 만들었다.
● 고려 응방지(국영 매방지) : 서구 공촌동, 중심성지 아래
국영매방지는 원래 개성에 있던 것을 주민들이 민폐가 크다는 상소로 고려시대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국영매방지를 계양산 서쪽 징맹이 고개로 옮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부평의 호족들과 고려 왕실과의 관계로 내왕이 많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려 25대 충렬왕이 5차례나 이곳에 들러 매사냥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충렬왕이 계양에 매사냥을 온 것은 국영매방이 있었기 때문이며 왕은 그 이유로 계양도호부를 길주목으로 승격시키고 자기가 죽으면 길주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양녕대군도 계양산 경명현에서 매사냥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1914년 일제의 의해 공해루 경명문이 헐려질 때 같이 없어진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국영매방에서 사육하는 매가 민가에 날아와 가축을 잡아가고 민폐를 끼치는 일이 빈번하자 주민들이 이 매방을 이전해 줄 것을 건의하니 매방 관리책임자인 이탁은 부하 박향에게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고 박향은 매사육사 윤수에게 명하여 장소를 물색한 결과 계양산 서쪽 기슭 고갯마루에 자리를 잡고 매방을 이전하였다.
● 금륜역지, 계양구 다남동 80-6번지, 고려~19세기 전반
현재 계양구 다남동의 고려시대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던 역참이다. 조선왕조는 도로의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전국 도로 요지에 驛을 설치하고 驛制를 운영하였다. 조선시대 驛路行政을 총괄하는 기구는 병조였고, 그 밑에서 구체적 실무를 맡던 곳은 乘輿司였다. 승여사의 관할 하에 각 역에는 驛丞을 두어 그 임무를 맡게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종9품의 역승 외에 종6품의 察訪을 함께 두어 교통행정을 책임지게 하였다.『經國大典』에 의하면 종6품 찰방 23, 종9품 역승 18 등, 총 41개 驛道에 537개역이 분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기도에는 迎曙道察訪(양주 迎曙驛), 良才道察訪(과천 良才驛), 平丘道察訪(양주 平丘驛), 重林道驛丞(인천 重林驛), 慶安道驛丞(광주 慶安驛), 桃源道驛丞(장단 桃源驛)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림도에 속해있는 역으로는 중림역, 慶信驛, 盤乳驛(금천), 石谷驛(안산), 金輪驛(부평), 終生驛(통진), 南山驛(양천) 등 7지역이다.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주요한 군사정보 그리고 사신의 왕래에 따른 迎送접대를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으로 郵驛이라고도 부른다. 역은 30리 간격으로 하나씩 설치하였으나 지형 등의 형편으로 일정치가 않았다.『富平府邑誌』와 『東國與地勝覽』 驛院條에는‘在府北十三里’라 되어 있고『大東地志』에는‘在府北一里’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다남동 大村마을이다. 금륜역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대촌마을 논 한가운데에 고사한 측백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곳이 역사자리라고 구전되고 있다.
3) 조선시대
● 사직단지, 계양구 계산동 계양산 서쪽 기슭
『동국여지승람』부평부조에는‘부평의 사직단은 부 서쪽 2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사직단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고을의 수령들이 중앙에서 임금이 행하는 의례를 대행하여 실시하였다. 인천도호부에도‘부의 서쪽(도천현고개)에 있다’라고 한 것에서 지방의 읍치의 서쪽에 사직단이 설치되었고, 제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부평의 사직단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 초 태종 6년(1416)에 州縣의 社稷祭가 실시되었으므로, 부평도 이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평의 사직제는 매년 2월 8월의 첫 戊日에 지냈다.
부평의 사직단은 일제 강점기에 헐어 없앴는데(1915년), 현재는 계양산 서쪽 지선사 뒤 산림욕장에서 계양산을 오르다 보면 등산로 왼쪽에 1.5m높이의 석축과 동서 9m, 남북 9m 정도의 터와 축석이 남아 있다.
● 안동권씨묘역, 계양구 임학동 산 7-5번지
안동 권씨 묘역에는 義禁府副摠官을 지낸 權瑍을 비롯하여 權丙勳, 權世銓 등 안동 권씨들의 무덤이 다수 분포한다. 현재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철조망으로 막혀 있으며, 묘 16기와 비석 4기, 상석 8기, 망부석 2기 등의 석물이 함께 위치하고 있다.
(1) 권환묘갈
권환(1636∼171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장(仲章), 호는 제남(濟南)이다.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대윤(大胤)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현감 두명(斗明)의 딸이다.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권대운(權大運)의 조카이다. 이민구(李敏求)에게 수학하였으며, 허목(許穆)을 사사하였다. 1658년(효종 9)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8년(현종 9)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고, 평안도와 경상도의 암행어사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에 허적(許積)․윤휴(尹鑴) 등의 당인으로 연루되어 북평사(北評事)에서 파직되어, 처향(妻鄕)인 김포 제진(濟津)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황해도관찰사․공조참판․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한성부좌윤․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다. 1694년 갑술옥사로 파직되어 향리에서 후진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마쳤다. 기사환국 때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이세화(李世華) 등이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문 때문에 화를 당하자, 반대파의 입장에서 이들을 비호하는 구제상소를 올렸으므로 그 후손들로부터 재생의 은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제남집》 27권이 전한다.
권환의 분묘는 쌍분으로 묘역 1단에 있으며, 묘갈은 봉분 동쪽에 있다. 6세손 權丙勳이 짓고, 李琮夏가 썼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석등 2기, 문인석 2기가 있다. 묘갈에는 '國○○濟南權公墓碣銘'이라 쓰여 있다.
(2) 권병훈묘비
권환 묘갈 앞에 권병훈의 묘와 비석이 있다. 안동 권씨 묘역 2단에 위치한다. 비석은 갈색 대석 위에 갈색비이고 비갓도 갈색이다. 전면 '黃海道判事行檢事安東權公丙勳之墓 淑人晉州鄭氏附左' , 후면'一九九五年 潤八月二十九日 立'.
(3) 권세전묘비
권병훈 봉분 좌측에 있다. 안동권씨 묘역 2단에 위치한다. 전면 ‘成均進士權公世銓之墓 配恭人羅州丁氏 祔’
(4) 권인수묘비
안동 권씨 묘역 제일 아랫단인 3단에 위치한다. 전면 ‘學生權公仁壽之墓 孺人寧越辛氏祔 亥坐’
● 중심성지 : 서구 공촌동
중심성은 계양산 징맹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서로 연장된 성으로 현재는 인천 외곽순환도로가 관통되어 있다. 부평 지역의 해안에서 서울까지 70여 리의 여정 중, 징맹이 고개를 제외하고는 낮은 구릉조차 없는 평지가 펼쳐져 부평 연안의 방비가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중심성은 병인양요(1866년) 이후 1883년 부평부사 박희방이 당시 주민의 의연으로 축조한 것인데 문주를 세워 경명(景明)문주라 헌액하였다. 현재 중심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기록은 <衆心城事蹟碑>가 유일하다. 이 석비는 중심성의 문루에서 서쪽으로 약 20m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훼손이 심하여 1949년 7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전하였고, 이듬해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사적비 초석도 도로개설로 분실된 것을 현재 서구청에 보관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4) 기타
● 백룡사 미륵불, 계양구 계산동 산20-5번지 현 백룡사 경내
원래는 계산동 963번지 삼천리아파트자리 개울 섶에 있던 불상이었다고 하는데 1975년 백룡사를 건립하면서 봉일사터에 있던 삼층석탑과 이 미륵불을 같이 이전하였다.
미륵불은 얼굴과 몸통을 한돌로 만들고 머리에 초립 같은 보관을 얹어 놓은 형태이다. 4등신의 어린아이 모습으로 기다란 얼굴과 커다란 귀에서 바로 어깨가 시작된다. 양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 홀 같은 것을 쥐고 있으며 불상의 하단부에는 도식화된 이중연판문 위로 활짝 핀 연꽃과 연잎 등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정교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토속적인 형태로 조성 시기는 그리 올라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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