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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시조집 |
출판사 |
수록지면 |
윤금초 |
『주몽의 하늘』 |
문학수첩, 2004 |
2013년 여름호 |
이우걸 |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발자국이여』 |
천년의 시작, 2009 |
2013년 가을호 |
유재영 |
『절반의 고요』 |
동학사, 2009 |
2013년 겨울호 |
이승은 |
『환한 적막』 |
동학사, 2007 |
2014년 봄호 |
박기섭 |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
만인사, 2003 |
2014년 여름호 |
이지엽 |
『북으로 가는 길』 |
고요아침, 2006 |
2014년 가을호 |
정수자 |
『허공우물』 |
천년의 시작, 2009 |
2014년 겨울호 |
고정국 |
『서울은 가짜다』 |
리토피아, 2003 |
2015년 봄호 |
박권숙 |
『홀씨들의 먼길』 |
고요아침, 2005 |
2015년 여름호 |
이종문 |
『봄날도 환한 봄날』 |
만인사, 2005 |
2015년 가을호 |
☐ 설문참여 시인 (등단 순)
정용국, 박희정, 유종인, 선안영, 손영희, 이송희, 이승현, 정혜숙, 이원식, 조성문, 김동인, 김남규, 김보람, 임채성, 박성민, 배우식, 변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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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를 대표하는 시조집 ① 윤금초 『주몽의 하늘』
시조의 아킬레스건(腱)과 맞서다
역사적 진보에 바치는 예술가의 봉사란 그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확신하고 어디에 동조하느냐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현실의 문제와 모순을 얼마나 힘차게 제시하느냐에 있다
-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중에서 -
정용국
1.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는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트로이전쟁 때 가장 용감하고 뛰어난 전사였으나 약점인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 인간 근육 중에서 가장 질기고 강력한 아킬레스건(Achilles 腱)은 그곳에 가장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던 영웅 아킬레스 때문에 고유명사였던 이 인명은 가장 강력하지만 결정적인 취약점을 지닌 이율배반의 뜻을 지닌 말이 되고 말았다. 윤금초가 도전하고 있는 <시조 형식의 변용>과 <서사성이 넘치고 현장감이 도드라지는 다양한 소재>, 이 두 가지 문제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공격 받고 있는 시조의 아킬레스건임에 틀림없다. 혹자들이 말한 대로 ‘정형인 시조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현상이나 정서를 포함한 모더니티를 담아내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거나 ‘시조시인들은 자연서정에만 몰입하여 현실적 삶의 국면에 집중하지 않아서 시대를 담아내는 노력이 결핍되어 있다’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주몽의 하늘』에는 이 두 화두에 적극 맞서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윤금초의 강력한 메시지와 실천적 의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시집의 해설을 붙인 유성호 교수조차도 “시조문학의 본령을 형식에서의 기율과 내용에서의 고전적 주제에 두는 관행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라는 위험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형식의 기율’은 차치하더라도 ‘고전적 주제’가 어찌 현대시조의 기저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물론 독재시대를 건너는 격변기에 시조가 ‘현실적 삶의 국면에 소홀’하였다는 질책에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 밖에 없겠지만 ‘고전적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주장은 현대시조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라 하겠다.
윤금초는『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상재했을 때도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시가 사라져 가고 있는 이 무잡한 시대에 특별한 울림을 주는 ‘말 부림’의 시조를 길어 올리기를”꿈꾸고 있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도는 이번만이 아니라 수십 년을 두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가 추구하는 시조 미학은 시조형식의 쉼 없는 변용과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려내는 새로운 인식과 거친 숨소리가 펄떡이는 현장의 이야기 등으로 축약할 수 있다. 형식과 내용을 아우르는 이 두 가지 화두는 현대시조 백년 간의 작품을 통틀어 살펴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단면들이어서 그의 도전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우스가 선물하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 것을 당부한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는 판도라가 그 계시를 어기고 뚜껑을 열어서 그 속에서 온갖 재앙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졌다는 비관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악이란 악은 모두 밖으로 나와 버려서 상자 안에는 희망만이 남았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전해 주기도 한다.『주몽의 하늘』을 읽으며 내내 판도라의 상자가 떠오른 이유는 시집에 참으로 그악하고 ‘무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군상들이 가득해서 시인의 말처럼 “내장을 다 쏟아낸 것처럼 부끄럽다”라는 표현이 가슴에 금방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든 악의 근원들을 몰아내고 시인은 우리들을 희망만 남아 있는 곳으로 인도해 줄 것 같은 생각이 거짓말처럼 밀려왔다.
2.
수록 작품 전체가 사설시조로 구성된 『주몽의 하늘』은 윤금초가 평생 사투를 벌이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늘 정형시의 영역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사설시조를 그는 왜 이렇게 집착하여 평생의 업처럼 안고 뒹구는 것일까. 사설시조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살펴보아도 다분히 정형시의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의도가 짙다. 이미 이능우는『국문학개설』에서 “사설시조는 시조와는 다른 독자적인 장르다” 라는 주장을 하였고 정병욱은『이조시가의 형태적 특징』에서 “사설시조는 선행하는 시조의 미학과 대립되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미학체계에 의하여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고야 마는 것이니 사설시조의 진정한 존재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라는 주장을 하였다. 김학성, 권두환 교수가 편한『고전시가론』중「사설시조의 구조와 그 배경」에서 박철희도 “사설시조는 자유시”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필자는 조금 새로운 방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서구의 문예사조와 문학이론이 유입되면서 ‘정형시와 자유시’라는 개념이 정립되었고 시조는 정형시의 유일한 대표가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많은 문학이론가들이 시조가 어떤 상황에서 사설시조로 발전하였는가에 대한 이론을 설파하였고 주지의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정형시만 존재했을 것인가?’라는 반문에서 출발해 보자.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의해 사설시조가 유행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종장의 율격을 지키며 길어진 장을 구사하다가 그것까지 박차고 나가 가사가 되었으며 더더욱 자유롭고 싶은 영혼들이 시조의 보법을 깨트렸을 것이다. 이렇게 시조는 점차적인 변형을 통하여 그 정형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소위 자유형식의 시가 된 것이지 서양의 문명을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자유시가 우리나라에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조선에도 자유시는 존재하였고 시조 -사설시조-가사-신체시 등의 단계를 거쳤을 것임은 아주 자연스러운 전개였다고 생각된다.
‘시조의 보법을 지키며 종장의 율격을 살린’ 사설시조 작품까지를 ‘시조’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현재까지의 통례이다. 사설시조 작가들은 거세게 형식면에서 이의를 제기 당하면서도 왜 굳이 사설시조가 자유시로 취급되는 것에 반기를 드는가는 출발 시점에서의 인식 문제라고 생각된다. 인간의 세계에도 늘 경계인이 있듯이 문학의 장르 사이에도 경계가 분명하지 못하고 겹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사설시조가 분명히 시조의 기본율에 기초하여 점점 변화한 것이라는 신념을 지키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정형시와 자유시’라는 이분법적인 서구이론을 통해서 자유시는 ‘서구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잘못된 관념 때문에 사설시조 작가들은 이러한 적용을 매우 부담스럽게 느끼며 ‘시조’의 영역에 남고자 하는 의지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사설시조를 정형시의 편에서 보는 관점과 자유시의 편에서 보는 관점에는 작지만 엄연히 공통분모는 존재하고 있음을 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로 사설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논박은 접어두고 윤금초의 사설시조로 돌아가 보자. 이미 주지하는 대로 그는 단시조와 엇시조 그리고 사설시조 등을 한 작품 안에 혼재시켜 쓰고 그것을 ‘옴니버스 시조’라는 명칭으로 명명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분명 새로운 시조의 형태라 할 수 있고 특히 그가 자주 택하는 역사적 소재물들을 서술할 때 아주 효과적인 형태로 이용되며 그의 긴 호흡과 장단을 맞추는 데는 적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집에 담긴 많은 분량이 중장이 길어진 사설시조의 형태가 가장 많다. 이 방식은 시조의 3장 형식을 고려할 때 가장 무난한 전개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외로 단수와 사설시조가 혼재할 때는 여러 가지 전개 방식이 응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수+사설시조는 물론이고 단수+단수+사설시조+단수, 단수+사설시조+단수, 단수+사설시조+단수+사설시조 등 다양한 형태를 연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형식들은 시조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넘쳐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들끓는 생각과 마음을 담기에 적절한 형식이기 때문에 그는 번번이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과 음보의 폭을 사설시조를 통하여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윤금초의 사설시조는 어디에서 발원하여 어떻게 흐르기에 마르지 않고 끓어 넘치는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가늠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의 시편 속에서 그 연유를 찾아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왜 슬픈 색깔 푸른 옷을 걸치고 있는지, 불길도 없는데 왜 들끓고 있는지를, 망토를 걸친 그 명상가에게 바다가 말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의 증표로 푸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나의 마른 입술 해변은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다 헤어졌으며,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 때문에 나는 항상 들끓고 있습니다.”
바다는 타는 정염에 겨워 오늘도 철썩 철썩입니다
- 윤금초 「슬픈, 근원」전문
윤금초에게 있어서 바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근원 중의 하나다. 그의 고향 해남은 예로부터 서울과는 가장 먼 곳이었다. 그래서 교통이 부실했던 왕조시대에 해남은 훌륭한 유배지였다. 위리안치하기에 맞춤한 곳이라는 뜻이며 그곳에 놓이게 된 것만으로도 관료들에겐 형벌이었다. 윤선도가 그랬고 정약용 형제들이 그랬다. 그러니 고향에서 그들의 발자취와 소문을 듣고 자란 해남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태어나 자란 고향이 말 그대로 유배의 본향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위 시의 내용들은 그런 작자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 있는 듯하다. “슬픈 색깔 푸른 옷”이 그 첫 번째 이유다. ‘푸른색=슬픔’이라는 의식은 어디에 근거할 수 없는 막연함을 가지고 있다. “부끄러움의 증표=푸른 옷”의 관계에도 객관적인 어떤 이유도 작용하지 않는다. 시인이 그렇게 느꼈으므로 이 두 구절은 숨김없는 시인의 의식과 상통한다고 보면 된다. 쉽게 짐작할 수는 없지만 분명 시인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는 이 두 의식이 그를 들끓게 하고 있다면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외에도 그를 키워낸 주변 환경에는 가족과 성장환경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 시를 아주 작은 단초로 삼는 것이다.
세월도 뒷짐 지고 저만큼 물러선 자리
밀물에 부대껴서, 썰물 북새에 떠밀려서
유배지 무지렁 땅에 뿌리뽑힌 질경이다.
대명천지 밝은 날은 땡볕 외려 섬뜩해라.
하늘 밑창 맞물린 저 수평선 이고 서서, 초라니 망둥이 새끼 3·4調로 헤갈대는 진수렁 뻘밭 헤집는 따라지 민초들은 저마다 방패막이 울짱 같은 연막 친다.
한평생 자맥질하는 천덕꾸리 달랑게로.
- 윤금초「개펄」중 일부
이 작품도 윤금초의 의식세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자신의 고향을 “유배지 무지렁 땅”으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수렁 뻘밭 헤집는 따라지 민초”라거나 “한평생 자맥질하는 천덕꾸리 달랑게”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한학과 정규학교를 오가며 지낸 고향 해남에서의 생활은 서울에 유학하면서 완전히 떠나오게 된다. 그러나 20년 그를 키워낸 해남은 이미 그의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어서 “불길도 없는데 왜 들끓고 있는지를” 막연하나마 제시해 주는 것이다. 또한 1970년대 이후 호남의 대 기근으로 농촌은 점점 피폐해져 갔고 연이은 독재군사정권들의 호남 차별은 보이지 않는 손처럼 심화되었다. 그 후 5‧18민주화운동을 정점으로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오랜 시간 동안 유배지의 신세를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종합적인 상황과 시인의 진한 감수성은 남도가락과 어우러져 윤금초의 사설시조를 키워냈다고 유추할 수 있다.
3.
윤금초의 사설에는 진한 토속적 언어들로 가득하다. 사투리도 그러하거니와 속어, 속담, 하물며 비속어(卑俗語)까지 태연하게 시에 들어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아서라, 달궁」「질라래비 훨훨」「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산은 둥둥 내게 와서」「할미새야, 할미새야」등은 이미 제목에 가락이 저절로 따라 올만큼 구어체여서 사설시조의 가락에 더없는 운율을 담아내고 있다.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할미새야, 할미새야」
파충류도 아닌 것이 도룡뇽도 아닌 것이 -「백악기 여행」
불길에 몸 부리면 쾅쾅 타는 쾅쾅나무 -「숲. 3」
눈빛 초롱한 야광나무, 거센 오줌발 놋요강 뒤집는 복분자 -「숲. 4」
둥근 열매 반질반질 중대가리나무, 솟을 대문 홍살문 안채 별채 옥상옥 짓는 층층나무 -「숲. 5」
피리 부는 말뚝벙거지 양 볼이 부풀어 있고 -「산빛에 물빛에. 12」
둥그렇게 불거져 나온 개구리눈, 옴폭하게 들어 간 옴팡눈 -「눈」
너무 질겨도 병통이요, 너무 여려도 병통일세 -「귀에 관한 단상」
오금아 날 살려라 살려. 가운뎃다리도 살려라! -「게걸음, 가제걸음」
환관이 중 상투 거머잡고, 중은 환관 불알 쥐어 당기며 -「우화. 6」
위와 같은 표현들은 이미 구전으로 전해들은 것들이거나 시인의 날카로운 눈썰미와 입담이 잡아낸 촌철살인의 구절들로 읽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터지고 시의 상황이 훤하게 그려지는 익살스런 광경들로 가득하다. 18세기 이후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던 평민문학에서의 근대적 성격을 그대로 이어온 것으로 평시조의 절제와 균형을 허무는 동시에 풍자와 분방한 체험을 표현하고 있는 사설시조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윤금초의 시는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고 해석하여 나름대로 현대적 평가와 칼을 들이대는 일을 서슴지 않기 때문에 그가 제시하고 지적하는 과단함은『주몽의 하늘』에 있어서 최대의 강점으로 부각될 만 하다. 그래서 시조가 ‘현실감각과 참여정신이 부족하다’라는 질타에서 예외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타! 타타탕···· 억장 무너진 그날 그 불의 거리.
너울너울 물결치듯 고꾸라진 생령들아. 치고 패고 할퀴어서, 직신 작신 짓밟혀서, 청소차 상여 타고 이에 저에 끌려다닌, 꽃젖가슴 도려내진 풀빛 소녀 헌화가로 큐비즘화면 속에 피의 역사 기록했나. 터럭발은 터럭발대로, 두개골은 두개골대로, 한 뼘 땅 잠들 곳 없이 사대 각각 흩어진 채 생채기 혼백들 항간을 떠도는데
납골당 차디찬 하늘, 유골들이 일어선다
- 윤금초 「상황과 인식‧ 2」 일부
『주몽의 하늘』에는 많은 그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등장한다. 이중섭의 그림은 여덟 작품이 시로 그려져 있고「산빛에, 물빛에」연작에도 단원과 겸재의 작품이 윤금초표로 바뀌어 그려져 있다. 위 작품은 ‘피카소의「납골당」’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피카소의 그림 중에「게르니카」나「한국에서의 학살」과 더불어「납골당」도 대규모 학살을 주제로 그려진 대작들이다. 그러나 시인이 지금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시대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시에 나오는 ‘큐비즘’은 대상을 입체적 공간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원색을 칠하고 자연을 재구성 하는 실험적인 공간 구성과 대상의 표현 양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눈에 두드러진 입체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미술의 기법이다. 윤금초의 날카로운 시각은 당시의 처참했던 장면들을 마치 큐비즘 작가가 대상물을 표현하듯 광주의 비극적 사실들을 클로즈업하여 입체화된 생생한 날것의 화면들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 장면이었던 광주를 이 정도의 시각과 깊이로 시조에 드러낸 시인은 아직 없었다. 수많은 자유시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투쟁하다가 죽고, 감옥에서 고문으로 신음할 때도 시조단은 나름 조용하였다. 그러니 『주몽의 하늘』은 그러한 분위기에 대한 진실한 반성이었을 것이다.
4.
윤금초는 위 작품 외에도「인터넷 유머」시리즈에 해학이 넘치는 필치로 가장 최근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역사의 질곡을 헤치고 들어가거나 재인들의 발자취를 통해 서민들의 고단한 삶에도 부단한 눈길을 던진다. 또한 역사 인물들에게 서늘하고 냉철한 돋보기를 들이대어 그들의 등골에 식은땀을 흐르게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쉼 없이 대한민국 땅 위에서 벌어지는 한국판 판도라의 상자를 기꺼이 열어 보고 만다. 다초점 렌즈로 잡아 낸 소재들은 바닷가 해산물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신선한 생선들처럼 그의 손길을 거쳐 펄떡거리며 움직이게 된다. 윤금초의 시작 과정에서 가장 소재의 현실과 상황을 극대화하기 좋은 부재(副材)로 그는 늘 사설시조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 두 요소가 서로 어우러져서 감칠맛을 더하고 쟁쟁하게 피어나는 현장감을 도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령산맥 한 허리, 남원성 무너지던 그날
대숲 구시렁거리는 소리 다 앗아간 정유재란 뒤끝, 거제도 황소바람 성난 파랑 아득히 넘어 타관 땅, 타관의 물에 실려 예까지 끌려왔다. 땅거미 어스름한 가고시마, 화산재 뒤섞인 빗줄기 하염없이 흩뿌리는 가고시마에 멱살 잡힌 조선 도공 볼모로 끌려왔다
가마터 척박한 골에 풀씨 하나 깃을 쳤다
비우면 그 넓이만큼 도로 밝아오는 둘레
한 시대 흔들림에 몸체 흔들리고 흔들리다 돌아와 묵묵히 물레 돌린다 (중략) 현해탄 가르며 가르며 끌려온 새벽 4백년, (중략) 때로는 울부짖고 때로는 흐느끼는 막사발,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막사발 파편 조각 (중략)
허물고 다시 빚으면 아 그윽해지는 질량
(중략) 상처받고 금간 틈새 대물림 물레 돌리는 위풍당당 심수관을, 그냥 그렇게 바라만 보아선 안돼, 앙가슴 풀어헤쳐 와락와락 껴안아야 돼!
4백 년 되돌린 시간, 꿈결같은 시간에.
- 윤금초「사금파리. 2」일부
사설시조 세 편이 함께 어우러진 대작이다. 마치 긴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고 난 듯 격랑의 물결이 구비치고 거친 파도가 마음 깊은 곳까지 넘쳐 들어와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재는 정유재란 당시에 일본으로 끌려 간 도공 심수관 일가의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런데「사금파리」라는 제목에 담아놓은 작가의 의지가 강렬하게 독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도공은 가마에서 완성품을 꺼내 자기 상태를 일일이 점검하고 일정 수준이 안 되는 작품은 깨어버리게 마련이다. 그 순간 자기는 박살이 나고 ‘사금파리’가 튀게 되는 것이다. 완성품 자기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지만 실패작에서 나온 사금파리는 날카롭고 위험한 비수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이 시제에 아마도 여러 가지 비의를 숨겨 두고 있는 듯하다. 제목인 ‘사금파리’는 ‘실패’, ‘원한’, ‘오기’ 등의 다양한 중의를 지니며 대작 세 편을 아우르고 관통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쟁도 잘못된 일이지만 심수관 일가를 강제로 끌어 간 일, 타관 땅에서 도자기를 빚어 주어야 하는 상황들이 모두 ‘사금파리’의 부정적 이미지와 상통하며 격하고 집요하게 얼룩진 역사의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는 모습은 비장하고 숨이 차다. “4백년 되돌린 시간, 꿈결 같은 시간에”라고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기 직전에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고 만다. “상처받고 금간 틈새 얼룩이며 눈물이며 고난의 허울 다 벗어 던진 심수관. 대물림 물레 돌리는 위풍당당 심수관을. 그냥 그렇게 바라만 보아선 안 돼. 앙가슴 풀어 헤쳐 와락와락 껴안아야 돼!” 이 비명 같은 외침 속에는 도자기가 되지 못한 사금파리의 절규가 들어 있고 심수관의 원혼이 들어 있다. 결국 ‘사금파리’는 소름끼치는 날카로움의 이미지로 살아서 작품 전체를 이끌고 있는 모습은 당차고 힘이 세다. 이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소재들은 윤금초 특유의 긴 호흡과 상상력의 힘으로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며 유장한 봇물을 이뤄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사설시조가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에는 몇 가지 시대적 변수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봉건제의 부분적 와해와 이에 따른 평민들의 의식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사회에서 양반제도의 몰락과 민중봉기 형태로 대두되는 엄청난 격변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시조의 형식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바 정형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한글을 매체로 한 평민문학으로 발전을 거듭해 나가게 된다. 시조의 정형률에 답답함을 느낀 평민계층에서 엇시조, 사설시조, 가사, 신체시 등으로 전이를 거듭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설시조에서의 정형률, 정제미, 압축미의 요소들은 감소되고 직설적이면서 구어체의 성격이 짙은 시어가 거침없이 자리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의식이 성장한 서민들이 양반을 공격하거나 세태를 풍자하는 소재들을 택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장형화하게 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윤금초의 사설시조도 다분히 현실적 소재를 통해 세태를 비판하고 풍자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을 많이 따르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구릿빛 느물거리는 자본주의 황금똥,
초례청 굿청 지나 말잔치 청문회 마당 이실직고 할까 말까 세 치 혀 나불대다 마음조려 애태울 땐 똥줄 탄다
생똥 피똥 (중략) 빨치산똥 오르가슴똥, 우라질 체면
- 「뜬금없는 소리」 중에서
줄타기 잰 걸음은 기껍고 수월한데 연줄 빽줄 검은 돈줄 발새 빠른 그 물살 타기 힘겨워 힘이 겨워도
-「아서라 달궁. 1」 중에서
이승만 바이러스, 4.19백신으로 치료된다. // 박정희 바이러스/ 매년 5월 16일 되면 활동하는 아주 질긴 바이러스. 한국의 예루살렘 바이러스라 한다. (중략) 전두환 바이러스/ 박정희 바이러스 사라진 후 등장한 대머리 바이러스
-「인터넷 유머. 4」중에서
위 세 작품의 내용들은 군사정권 하에서라면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소재였을지도 모른다. 언론과 방송은 물론 경찰과 정보부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학생과 민간인들의 사생활까지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윤금초의 시선은 늘 세리(稅吏)의 눈과도 같이 사회적 모순과 비리들을 찾아내고 날카롭게 비꼬고 흔들어 놓으며 독자들의 대리만족을 유발시키고 있다. ‘똥에 관한 연구’라는 부제가 붙은「뜬금없는 소리」에는 단순한 나열만을 통해서도 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풍자하게 만드는 파노라마 같은 수법을 연출하고 있으며, 줄광대나 땅재주꾼 등 재인들의 놀이를 노래하는 과정에도 슬몃슬몃 더럽고 부패한 현실의 세태를 연결시켜 놓아서 자연스럽게 사설이 생동감 넘치고 긴장미가 감도는 효과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유성호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조의 주제가 ‘고전적’이라는 말은 지나치지만, 아직도 예민한 현실이나 진보적 사안들을 수용하는 면에서는 소극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금초의 시조에는 아주 작심을 한 듯 자유시의 어느 것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대담성과 예리한 칼날을 숨기지 않고 있다.
5.
불꽃은 종려나뭇가지로 / 번져가고 번져가고 ···
「일어서는 불사조」중에서
젖은 뚝방길 내달릴 때 / 웃자란 억새풀 / 뒤척이고 뒤척이고 ···
「백악기 여행」중에서
강물빛 이슬방울 / 궁굴리고 궁굴리면 / 허리 가는 산등성이 / 저 이내 가 머물까. / 돌아라 휘돌아라
「장수풍뎅이」중에서
낯바닥 뾰루지엔 / 생선 자반 고기 바르면 / 쉬 낫는다기에 낫는다기에
「우화‧ 3」중에서
위의 글 밑줄 친 부분에서 살필 수 있듯이『주몽의 하늘』에는 사설시조에서 확장된 중장의 음보에 대구와 가락을 살려내기 위한 세심한 배려와 노력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지나치게 산문화된 중장의 비운문적 요소들은 늘 사설시조가 흠을 잡히는 부정적 측면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지적이다. 작품 곳곳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반복과 대치가 가락 속에 녹아들어 있는데 그것은 사설시조 작품들에서 대구가 잘 지켜지지 않음으로 인해 음보가 흐트러지고 더 나아가 시조의 가락이 흔들리는 문제가 야기된다는 평단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정제미와 압축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사설시조에는 이를 뒤집는 사설 고유의 입맛과 낭창대는 가락의 맛이 살아 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사설시조의 운치를 지켜내면서도 시조 정형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종장을 지키기 위해 시인은 자못 큰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사설시조가 정형시인 시조의 본령을 허문다는 이유로 자유시 쪽으로 밀어 붙이려는 눈길과 주의에 대한 강력한 항의이기도 하다. 아래의 모음들은 시집에 수록된 아흔 한 편의 작품 중 종장에 과음보의 협의가 있는 것들만 추려 본 것이다.
구르는 / 저 달도 불러 세운 / 월명사 피리소리 / 문득 붉다
한바탕 / 춤추는 만신이, / 얼리고 놀리고 / 거드름 떤다
담록색 / 목도리 두르고 / 폴카 폴카 / 춤추는 이 한낮
어름치 / 쉬리는 말고 아, / 큰가시고기 / 가여운 우리 아빠!
그러면 / 그렇지 말고, / 이제 막 보릿대 막춤 풀어놓고 있네
그것은 / 한 개 작은 점, / 허공을 떠도는 / 한 개 점이었다
마지막 / 봄꽃 이우는 순간, / 재 속에서 새내기 불사조 태어납니다
한 번만 / 귀여겨듣고도 / 그대로 훔쳐 내는 / 귀썰미가 있어야지
죽기가 / 그리 어려운 건가. / 약을 마실 때 세 번이나 입에서 떼었으니 내가 이리 어리석은가
그런데 밑줄 친 세 작품의 종장은 확실한 과음보의 자국이 있지만 나머지 종장들은 두 음보로 끊어 읽는 데는 특별하게 늘어진 것들은 아니다. 그리고 시조의 가장 강력한 정형률을 들이대야 하는 종장 첫 구 3‧5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흔 한 편 모두가 완벽하게 지켜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
지금까지 살펴 본 윤금초 시집『주몽의 하늘』은 시조의 가장 예민한 부분인 ‘정형성’과 ‘현실감각의 부재’라는 질기고 질긴 아킬레스건과의 한 판 전쟁과도 같은 치열한 길항(拮抗)이었다 해도 마땅할 것이다. 정형의 틀을 각고의 노력으로 조율하고 연접(連接)시켜 새로운 시험과 명칭을 구사한 점도 그러하거니와 통섭(通涉)의 부재라거나 한계를 가진 문학이라는 시조에 대한 통념을 부수기 위해 그가 시도한 우리의 지난했던 역사와 이념, 불행했던 현대 민주화 과정의 소재까지 두루 섭렵한 그의 노력은 새로운 시조의 지평을 연 괄목할만한 획득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성호 교수도 해설을 통하여 ‘서술성을 통한 시조의 양식론적 확장의 적공(積功)’을 이 시집의 가장 큰 의미로 본 것도 같은 시각으로 보여진다. 물론 시조를 보는 시각에 따라 적대적인 판관의 죽비가 내려질 수도 있겠지만 21세기를 여는 초기에 젊은 시인들이 선정한 현대시조 시집으로서『주몽의 하늘』은 객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놀드 하우져의 ‘예술가의 봉사’를 글 맨 처음에 붙인 이유도 이 두 업적을 위한 것이었다.
정용국 : 경기 양주 생. 2001년 계간 《시조세계》로 등단.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집『명왕성은 있다』외.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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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를 대표하는 시조집 ① 윤금초 『주몽의 하늘』
역사의 새 하늘을 여는 웃음들
유종인
1. 역사적 인물과 실존적 인물의 조우
시가 역사를 말할 때는 계몽(啓夢)과 선각(先覺)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시뿐만 아니라 역사를 취하는 여러 인문학적 장르들은 그 역사의 대목을 조명할 때 이미 그 내용을 어떻게든 쥐어짜 걸러내야 하는 시각(視角)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이 아닌 어둑한 역사는 반성과 성찰의 계몽적 요소들을 취합하길 바라고, 활달한 기개와 냅뜰성의 개척과 혁신의 역사는 선각적 요소를 산출하길 바란다.
고여 있는 물로서의 역사는, 그리고 그 역사의 갈피에 수많은 여줄가리로 묻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평범한 서사는 새로운 존재의 국면을 요구한다. 아니 요구 받는다. 역사는 한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읽는 이에 따라서, 되새기는 이에 따라서 새로운 눈길을 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헌 물이 아니라 새 물로 받아 마실 수 있으려는 바람에는, 후생가외(後生可畏)의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새삼스러운 발견이 종요롭기 때문이다. 묵은 노래가 새 노래로 들리는 역사의 저편에 아직도 그런 목소리가 묻혀있다 눈길을 주는 이가 시인이다.
몸 낮출수록 우람하게 다가서는 저 산빛
떡갈나무 숲 흔들고 오는 문자왕 그의 호령 중원 고구려비 돌기둥 휘감아 도는데 들리는가, 산울림 우렁 우렁 일렁이는 소리
찾찾찾찾자되찾자… 기차소리, 하늘의 소리.
-<중원, 시간 여행> 전문
타임머신은 가공의 상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의 눈길이 가닿는, 가 닿으려는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역사인식의 소슬한 마당이다. 화석(化石)이 아니라 숨을 끌어모아 쟁여둔 채 누군가 지긋이 들여다봐 주기를 고대하는 늘 여명(黎明)의 돌이다. 여명은 그렇다. 검은 빛이며 동트는 어둠인 것이다. 어둠과 빛이, 역사와 실존이 서로 머뭇대다 갈마들고 넘나들이 하기를 고대하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현현(玄玄)의 상태라고나 할까.
그리움도 한 시름도 발묵(潑墨)으로 번지는 시간
닷 되들이 동이만한 알을 열고 나온 주몽(朱蒙)
자다가 소스라친다, 서슬 푸른 살의(殺意)를 본다.
..............(중략).....................
금개구리 얼굴의 금와왕 무리들 와 와 와 뒤쫓아오고 막다른 벼랑에 선 천리준총 발 구르는데, 말채찍 활등으로 검푸른 물을 치자 꿈인가 생시인가, 수천 년 적막을 가른 마른 천둥소리 천둥소리… 문득 물결 위로 떠오른 무수한 물고기, 자라들, 손에 손을 깍지 끼고 어별다리 놓는다. 소용돌이 물굽이의 엄수를 건듯 건너 졸본천 비류수 언저리 오녀산성에 초막 짓고 도읍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도(四神圖) 포치(布置)하는, 광활한 북만(北滿) 대륙에 펼치는가 고구려의 새벽을…
둥 둥 둥 그 큰북소리 물안개 속에 풀어놓고.
-「주몽의 하늘」부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까지의 우여곡절을 환기하는 시적 되새김질은 과연 어떤 뉘앙스를 불러오는가. 그것은 역사적 혹은 신화적 입김을 수용한 채 오늘의 시적 자장(磁場) 안에서 어떤 알심을 갖는가. 평면의 역사가 입체의 역사를 가지려 함인가. 아니 평면은 무엇이고 입체는 과연 시적으로 무얼 함의하는 바인가. 주몽의 고구려 건국신화(建國神話)가 당대의 우리 현실에 어떤 포에지(poesy)를 새뜻하게 건넨단 말인가. 여기에 앞서 말한 계몽적 발단(發端)과 선각의 위의(威義)가 섭새김돼 있기 때문인가. 범박하게 말해서 역사적 취재가 과연 시적 발흥의 고유한 밑천이라면 그 해묵은 발흥이 오늘에 안기는 화두란 무엇인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주몽의 하늘」은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을 관통하는 우련한 물음의 자명고(自鳴鼓)가 아닐까 싶다. 내용적으로 보면 운율감각을 살린 역사적 사실의 추수가 그 대간(大幹)인데 그 여운은 작금의 현실에까지 묘한 여운을 번져놓고 있다. ‘광활한 북만(北滿) 대륙에 펼치는’ ‘고구려의 새벽을’ 다시금 오늘의 시공간에 펼치는 ‘둥 둥 둥 그 큰북소리 물안개 속에 풀어놓’ 는 번짐에 있다. 이 번짐은 역사라는 일반적인 통시성(通時性)을 전환하여 작금의 당대와의 공시성(共時性)으로 확장하는데 있다. 역사적 사실의 반복적 입말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현재화를 꾀함 속에 있다. 그 역사 속 변천과 반전과 숙명과 극복을 존재의 실존으로 여투는데 있다. 즉 역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깨우는데 있다.
그것은 역사적 인물을 되살리고 상상함으로써 당대의 실존적 인물로 현역(現役)에 복귀시켜 보는데 있다. 역사가 작금의 실존(實存)으로 넘어가는 지난한 과정, 그 내밀한 속살을 엿보고자 함이 윤금초가 지나간 옛 시간들의 요철(凹凸)을 아득히 그러나 확연하게 더듬어내는 적바림의 수순이 아닐까 싶다.
과거를 과거의 서사(敍事)로 쟁여만 두지 않고 오늘의 정신사적 여백 속에 여투고자 하는 노력은, 존재는 단독자로만 살 수 없다는 명제와도 일정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주몽이라는 영웅적 태왕(太王)은 결국 소박한 평민들 속에 얼마든지 갈마든 실존적 양상일 수도 있다는 선의의 도그마(dogma)를 거느리게 함이 아닐까. 그러한 존재의 활성(活性)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역사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풋풋한 애정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러는 눈칫밥에 한뎃잠 설쳤기로, 논틀 밭틀 한을 묻고 거리죽음 뜬쇠들아. 아픔의 응어리로 북을 때려 시름 푸른, 풍물잡이 시나위는 민초(民草)들 앙알대는 목소리다. 짓밟고 뭉갤수록 피가 절로 솟구치는, 투박한 그 외침은 뚝배기의 태깔이다.
앙가슴 풀어헤쳐서 열두 발 상모를 돌려라.
-「사물놀이」부분
영웅적 서사나 신화 한 토막은커녕 풍운(風雲)의 꿈조차 꾸어볼 요량조차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민초들이지만, 그러기에 영웅적인 주인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인물로 화석화(化石化)되는 것보다 실존적 고투를 지닌 지극한 인간으로 깨어나는 자각을 갖는 것이다. ‘아픔의 응어리로 북을 때려 시름 푸른’ 존재의 참된 ‘목소리’를 지니는 것일 수도 있다. 신분이 미천하고 가진 게 궁핍해서 ‘짓밟’ 히고 누군가 ‘뭉갤수록’ ‘피가 절로 솟구치는’ 실존적인 ‘외침’을 갖는 것이다. 그 자기 목소리의 ‘태칼’이 있음에야 진정 소박한 영웅의 인간이 시작인 것이다. 아니 인간이라는 평범한 영웅에 가 닿는 순간이다. 즉 역사의 영웅이 아니라 삶의 실존에 부합하는 인간을 살아내는 것일 게다. 그런 차원에서 「주몽의 하늘」은 역사 속 한 시대의 하늘만이 아니라 작금 오늘의 현실로 살아가는 하늘로 깊고 푸르다 할 수 있지 않은가.
2. 역사의 미소와 당대의 유머의 만남
역사는 잠시 외면할 수 있어도 아주 돌려세울 수는 없다. 역사의 빛과 그늘이 우리들 후대의 실존적 바탕이기 때문이다. 몸바탕일 수도 있고 정신의 여줄가리로 한 얼을 이룰 수도 있음이다. 주몽(朱蒙)의 하늘이 흘러가버린 하늘만이 아니듯이 우리들의 의고(擬古)에는 참된 갱신(更新)과 극복의 여지가 낙낙하다. 이 넉넉한 긍정과 냅뜰성에는 천혜의 것이면서 자기 고투로 지켜가야 하는 의지와 품성이 관계한다.
떡 주무르듯 떡 주무르듯 점토 이겨 올린 몸맨두리
고개 갸우뚱 입도 마냥 헤벌리고 웃는 듯 우는 듯 뭉툭한 그 눈매
한 자루
푸짐한 익살
부려 놓은 가야 사람아.
-「토우, 가야의 미소」전문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백제의 미소라는 수식이 붙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 듯 없는 듯 잔잔한 그야말로 여래(如來)의 미소로 완연하다. 가야 흙 인형이 가지는 미소 또한 영리나 목적성을 띠지 않은 인간 본래의 가만한 낯으로 몸에 드러난 얼의 지극한 늡늡함이다. 이 미소의 낯은 능히 한 시대의 민초들의 보편적 심성의 오롯함으로 생물학적 죽음의 숙명을 감수하더라도 후대에 전해지는 여명(黎明)이다. 단순히 소비적인 얼굴 표정의 한 여줄가리가 아니라 한민족 본연의 긍정적인 만년청춘의 깊은 일면(一面)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여러 시대를 거쳐 민초들의 삶의 얼굴에 갈마들어 있는 즐거운 바람의 몸짓 같은 것일 게다.
북소리 날라리소리 파랑 치는 신명이어라.
번잡도 허탈도 멀리 강물 따라 실어 보냈어라. 잎도 아닌 꽃도 아닌 검푸른 풀 무늬 배 바닥 하얀 살결 위에 꿈틀거리는 술장군, 진양주 두어 말쯤 갈무리했을 분청사기 술장군, 허리띠 풀어헤친 술장군 거나한 눈빛이다가, 얼굴 둥근 막새기와 오롯이 섬긴 신라 와공(瓦工) 눈짓이다가, 쥘부채 접었다 펼칠 때 두루마기 자락 스치는 저 바람결 미소이다가,
더러는 아승기겁 헤고도 남을 그런 눈웃음이어라.
-「하회탈 양반의 눈웃음」전문
미소는 작고 웃음은 큰 것만이 아닐 게다. 그것은 표면적 재량이자 재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 보자. 미소는 웃음의 어머니요, 미소는 웃음의 초발심이라구 말이다. 그러니 미소와 웃음을 따로 구분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대의 무수한 질곡(桎梏)에 무던히도 자유로운 민초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더군다나 신분제 사회의 엄연함과 냉혹함은 뼛골에 사무치기 부지기수였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도 한국인의 천성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움직씨를 지녔다. 웃음이라는 움직씨가 도는 명사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진양주 두어 말쯤 갈무리했을 분청사기 술장군’ 의 ‘거나한 눈빛이다가’ 이내 ‘막새기와 오롯이 섬긴 신라 와공(瓦工) 눈짓’ 으로 넘나들며 '쥘부채 접었다 펼칠 때 두루마기 자락 스치는 저 바람결 미소' 로 갈마들기를 거듭한다. 끝내 이 천연덕스러운 웃음의 계승과 번짐은 ‘아승기겁 헤고도 남을 그런 눈웃음’으로 냅뜰성을 가진다. 이 웃음 보짱이야말로 가식적 사교술의 한 측면이 될 수가 없고 삶과 그 주변을 낫낫하고 넉넉하게 승인하고 용인하려는 긍정의 원천에서 번져나오는 얼의 여줄가리가 아닌가 싶다.
숱한 외침의 참화(慘禍)와 궁핍한 백성들의 셈평이 결코 민심을 늡늡하게 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금초는 이런 역사의 행간에 묻혀있는 이름 없는 민초들의 마음바탕을 결코 어둡게만 그려내지 않는다. 그것은 성명(性命)이 어질고 밝은 그 본래의 심포(心包)에서 우러나온 어울림의 정서이자 드레진 품성의 만연함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제 잇속만 챙기는 영악한 부류들은 늘 백성들 속에서도 미립이 나지 않는 가납사니처럼 겉돌 뿐이 아니겠는가. 드레지게 배워서 도덕이 밝은 것이 아니라 살림이 드레나도 그 본래의 선량함을 도덕삼아 마음의 제시중을 드는 바가 우리 백성들의 알심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어려워도 가난해도 핍박받아도 본래 잘 돕고 어우러져 이냥저냥 살아가는 모습이 웃음에서 춤으로 갈마들기도 한다.
민물조개 몸 속 산란하는 납자루를 보겠는가.
여울여울 이어지는 물풀 흐드러진 모래자갈밭, 각시붕어 묵납자루 칼납자루 임실납자루 줄납자루 큰줄납자루 가시납지리 편리공생 보겠는가. 대리모 조개 속에 알 싣는 납줄개 편리공생을 하마 예서 보겠는가.
한 입씩 베어 먹힌 알의 황홀한 그 반란을!
-「춤추는 물고기 5」전문
미소의 배짱이 두둑해지고 우뚝해지면 웃음은 그예 미소를 뒷전에 두고 앞으로 나선다. 그 웃음이 일시적인 촌극(寸劇)이 아닌 삶의 뒷배처럼 우리들을 지켜나갈 때 우리네 심성에는 두루두루 곁을 두는 선린(善隣)이 만연해진다. 뻐꾸기가 제 알을 붉은머리오목눈이 새 둥지에 맡겨 기르게 하듯이, 민물조개 몸 속에 산란하는 민물 속 납자루의 ‘편리공생’ 은 또한 지극한 상호주의의 민물 생태계의 웃음 마당이 아니겠는가. 즉 미소는 싱글(sigle)의 형태로 자족하지만 웃음은 더블(double) 이상의 관계적인 양상을 전제로 번지는 것이어서 미쁘다. 이런 웃음의 소용이야말로 단순한 기쁨의 낯빛만을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웃음이 소리를 전제로 한 시각적 대응이라면 춤은 시각을 전제로 한 청각적 대응이 아닐까. 혹은 그 반대의 양상을 상정할 수도 있는 공감각적인 지향이 아닐까 싶다. 웃음이 몸과 마음에 도저하게 번지면 춤은 그 미쁜 흥취를 삶의 긍정과 환희의 비유로 전경화(全景化)되기에 이른다.
무르익은 늦봄 한때 천도복숭아 가지 입에 물고
한쪽 다리 껑충껑충 가벼운 날갯짓하는 깃 푸른 수탉, 두둥실 흥에 겨워 어깨춤 추는 저 수탉과, 복숭아 꽃잎 흩날리는 공중 향해 집게발 헤벌리고 새끼발 주춤주춤 옆 걸음치는 저 달랑게가
그러면 그렇고 말고, 이제 막 보릿대 막춤 풀어놓고 있네.
-「보릿대 막춤」-이중섭의「닭과 게」전문
지극한 신명과 흥취의 춤은 닭과 게로부터 말을 얻어듣게 한다. 사회적 조건과 세속적 지위 분별, 소유의 차별 등으로 볼 때 무엇 하나 변변한 것이 없는 소외된 당대의 화가에게 춤은 화류계 기생이나 고급한 문화 영역의 무용가의 공연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진정한 춤은 자연이 벌여주는 것, 그리고 그 자연을 바라보는 화가의 마음 안에 새뜻하게 도드라지는 소박한 인상일 수밖에 없다. 가난하나 결코 가난하다 하여 볼 수 없는 것이 아닌 것. 오히려 가난한 맑은 영혼의 눈길에만 봄날 분홍빛 꽃잎 흩날리는 날에 기이한 신명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조박한 춤사위 대목이다. 이는 춤이 웃음으로 번져 나왔다던가, 아니면 춤이 웃음을 불러낸다던가, 또 아니면 춤과 웃음이 서로 모른 체 할 수 없이 마주보고 넘나들이 하는 명지바람 속의 소극(笑劇) 한 대목을 살아 보고자함인가. 이중섭 부제(副題)가 붙은 시편들은 하나같이 웃음의 난장이라 할 수는 없지만 삶이 어찌하여 이리 부박함에 스스로 존재의 광기와 찬란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화자의 오관(五官)이 거기에 회동하는 바가 있다. 웃음은 슬픔과 대척의 관계만이 아니라는 것, 그 둘은 여사여사하여 서로 슬며시 어깨동무를 하며 서귀포 쓸쓸한 바닷가 바닷바람을 걷는 요량이기도 하다는 것, 말이 없어졌으니 한 가락이 바람의 옆구리에서 실밥처럼 터져나와 당신과 나의 귀를 서늘하게 간질이기도 하다는 것, 그것은 웃음이며 울음이겠다. 또 낫낫한 슬픔이며 처연한 기쁨의 놀라운 다른 기척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그리고 기타(其他)의 웃음
웃음을 한참 기울여 겪어보니, 한 개인의 눈과 귀와 코와 살갗을 넘어 웃음이 한 시대의 우여곡절을 어르고 달래며 눙치는 설법(說法)의 오지랖을 가지게 됐다. 역사는 이제 능히 현대사(現代史)의 정치사회를 불러놓고 그 협량함에 능갈치고도 싶어진다. 조박하게 옛 억하심정을 되가져다가 욕설을 퍼붓고 탓하고 다그치는 건 이미 시효가 지나 말맛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니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나. 어찌하긴, 가까이 흘러간 일이지만 아주 눈감아줄 수는 없는 것이니, 더불어 웃겨주는 일일 수밖에 없다. 더불어 비웃었다는 말도 있으나 너무 그런 것만은 아니니 비웃음은 역시 비난의 뉘앙스가 완연함으로 다같이 웃고 반성해보자는 진작이 더하여 그야말로 정치 유머(humor)가 막 나비넥타이를 메고 미스터 빈처럼 등장했다고 치자.
앞산도, 저 바다도 몸져누운 국가부도 위기.
03 대통령 IMF기사를 읽다가 임프! 임프가 뭐꼬? 묻는다. 경제수석 더듬거리며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것입니다. 03 대통령, 누고? 누가 국제전화 많이 써 나라 갱제를 이지경으로 맹글었노? 도대체 이번 사태까지 오게 된 원인이 뭐꼬? 뭐꼬? 네네네 네,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종금사 부실 경영이… 03 대통령 탁자를 내리치며 도대체 종금사가 어데 있는 절이고?
이튿날 대중 대통령, 긴 한숨 내쉬며 언제 디카프리오(빚갚으리오).
-<인터넷 유머 1> -IMF, 정축 국치
이 유머 속에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회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국가적 실책을 바라보는 방관자적 한숨만 서린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려는 유머 정신이 웃음의 콩트를 만들어내었다. 일방적인 야유가 아닌 풍자적인 대목과 접목됨으로써 유머는 뼈아픈 실책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그 현실을 품는다. 웃음이 아니면, 웃음을 자아내는 눈길이 아니면 이 도저한 국가적 실책을 달리 품을 방법이 없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유머의 속살을 한 번 더 그윽하게 짚고 들어가는 방편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우화(寓話)다. 웃음은 많이 가셨으나 여전히 그 잔잔한 눈웃음의 그윽함은 남아서 조금은 준열해지는 바를 품었다 할까.
윤금초에게 그런 우화는 역사의 강가에서 눈썰미 있게 혹은 ‘귀썰미’ 있게 뜰채로 떠온 것이다. 역사 속의 인물이 가진 우여곡절의 삶의 한 대목을 취재함으로써 그 역사의 시효를 옛것에서 오늘의 것으로 되살리는 방편이 바로 우화의 한 역할이 아닐까. 삶의 궤적은 옛것이지만 그 삶의 방식이나 태도는 여전히 오늘의 삶을 교정하고 반추하게 하는 역할로 오늘의 현실로 다가든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삶을 곡진하게 경영해 가려는 실존적 각성을 촉발하는 측면에서 우화는 마냥 웃음만은 아니지만 여전히 생각하게 하는 웃음의 시선을 깔고 있다 하겠다.
용모는 비록 추했으나 뛰어난 글 솜씨가 그 허물 덮고도 남았네.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이 마치 떠 있는 것 같고, 죽어 세상 떠나는 일이 쉬는 것과 같네. 사는 게 무엇이 그리 영화로우며 쉰들 무엇이 슬프겠는가.” 승지 벼슬 벗어두고 벗어 두고, 베옷 입고 떠도는 ‘늙고 고단한 선비’. 길이 멀고 발새 험해도 풍찬노숙 떠도는 성현
풍악산 개울물 자락에 풀어놨네, 골계담(滑稽譚)을.
-「우화 1」-성현(成峴)
유머에 비해 뛰어난 웃음의 요소는 많이 가셨지만, 이 우화는 발작적이고 공격적인 해학의 난장 대신에 삶을 가만히 선처하는 길라잡이의 웃음 바탕이 스며있다. 단숨에 얻는 웃음이 아니라 잔잔하고 늡늡하게 삶을 미소짓게 하는 서늘함이 있다. 습습하달까 낫낫하달까 그러나 가볍지 않은 삶의 진실을 여투고 있으니, 그 삶의 진진한 풍경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골계(滑稽)라 해도 큰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고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밑본과 같은 것이라는 게 윤금초의 역사 취재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역사가 큰 홍복을 누리지 못하고 수난과 외침과 격랑의 파고 속에서 부침했음에도 끝내 굴복되지 않고 좌초하지 않고 꿋꿋한 자존과 극복의 역사를 써올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런 웃음의 미학과 천분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슬픔과 절망과 암울함을 웃음의 냅뜰성으로 품어 안아버리는 데에 있어서 그 환난은 서서히 제 스스로 물꼬를 트고 다른 곳으로 벌물처럼 흘러 달아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윤금초의 <주몽의 하늘>은 단순히 역사의 취재에 바탕한 사유와 인상만이 아니라 그걸 오늘의 삶을 다시 웃음으로 불러내 존재의 여명을 앞당기는 마중물 같은 것이 아닐까. 여전히 역사는 퇴물이 아니라 신생의 모태라는 나름의 역사인식을, 그러한 한 하늘의 뉘앙스를 능란하게 얼러내고 있음이니, 이 또한 도처에 웃음의 생물(生物)을 잘 잡아 드셔보시라, 눈썰미 귀썰미 있는 당신들을 불러 세우고 있지 않은가.
유종인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시,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 외,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
--출처 : 《나래시조》2013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