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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들레 고등학교 3기 남한비 아빠 남기호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산청 간디중학교가 있는 간디숲속마을입니다
저의 가족은 저와 아내 큰 딸 솔비 그리고 한비 입니다
산청에 와서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그 전에 산청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한 9년 정도 됩니다.
큰 아이 솔비가 산청 간디중학교를 다니면서 산청과 인연을 맺게 됐지요
얼마 전에 민들레 샘들이 저희 집에 놀러 오셔서 원고청탁을 하였지요.
귀농 귀촌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고. 귀촌이라고 하지만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얘기를 쓸까 ? 고민이 되더군요.
제가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덜컥 쓴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나름 살아온 얘기를 써볼까 합니다.
담백하고 위트있는 글을 기대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솔비가 초등학교 5학년 때 , 아내의 친구 분에게서 간디 중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 일반학교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아내는 대안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까지도 저는 대안학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막연히 문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정도로 알고 있었다.
우연히 격월간 잡지 민들레라는 잡지를 읽어보면서 , 홈스쿨링 과 대안교육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솔비가 6학년 초에 중학교 진학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다.
그 때 4월 중순 쯤 제천 간디학교에서 중학교 과정 학생을 모집 한다고 하여 ,솔비엄마와 같이 견학을 다녀왔다.
일반학교와 사뭇 다른 분위기가 신기하기만 하였다.
학교 설명회를 들으면서 , 솔비엄마 이 학교에 솔비를 보내야겠다고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꿈의 학교란다. 그래서 입학원서를 내고 , 면접을 보았다.
제천 간디학교는 중고등 통합과정이라 입학하면 고등학교까지 계속이다.
그 당시 경쟁률 3대 1정도 된 것 같다. 얼마 지낸 다음 결과가 나왔는데 불합격이란다.
그래서 학교에 문의를 하니 산청에 새로 학교가 하나 세워져서 11월 정도에 학생을 모집 한다고 한다.
그 때 솔비가 제천 간디학교에 입학하였으면 ,아마 산청에는 오지 않았을 것 같다.
여름 방학 때 계절학기 캠프가 있다고 하여 , 신청을 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산청에 와본 것 같다.
그 당시에 간디중학교는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 있지 않고, 둔철마을에 조그만 폐교를 빌려 운영하였다.
처음에 학교를 가는데 포장도 안 된 산골길을 굽이굽이 돌아 학교에 도착했다.
뭐 이런 학교가 다 있나 싶다.
그 당시에 지금의 간디 숲속마을 주민을 모집 중이었다.
솔비를 데려다 주고 나서 지금의 갈전마을을 물어물어 찿아왔다.
그 당시에 마을에는 학교 기숙사만 지어져 있고,
마을 주민으로는 지금 마을 대표를 맡고 있는 동치미님과 바끄로님이 학교 기숙사에 입주하여 살고 있었다.
아직 마을은 만들어 지지도 않고 , 야산에 나무들만 있다.
동치미님 이왕 온 김에 사업부를 만나보고 가라고 한다.
그래서 사업부를 만나고 ,마을의 마스터플랜이라면서 이런 저런 설명을 들었다.
솔비엄마 꿈에 그리던 마을이라면서 ,우리도 이 마을에 들어와 살자고 한다.
그래서 주민 신청을 하고 , 허락을 받아 계약을 하였다.
마을에 살지는 않지만 주민으로 모집된 집들은 매달 한 번씩 주민모임을 하였다.
주민으로 선정 된 뒤 , 주민모임에 참석하니, 밤새 토론 하는데 100분토론 저리가라다.
이런 저런 주제를 가지고 갑론을박 밤새 토론을 한다.
그 당시 우리는 안동에 살고 있었다. 안동에서 산청오는데 한 3시간쯤 걸린다.
매달 한 번씩 주민 모임 참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솔비가 계절학기를 다닐 때 , 솔비엄마 나보고 대안학교 샘을 해보면 어떠냐고 한다.
그 당시에 금산에 간디교사대학원이 운영되면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대안교육기초과정이라고 하면서 대안교육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
10주간에 걸쳐 매주 토요일 일요일 1박2일로 수업을 하였다
. 그 때 처음으로 양희규샘을 보았다
여러 강사들이 나와서 대안교육에 대하여 강의를 하고 참석자들과의 토론 시간을 가진다.
수업이 끝나면 저녁에 술 한잔과 더불어 뒷풀이가 있었다.
여름방학때 군위간디학교에서 임시강사를 구하고 있었다.
수학샘이 2학기에 해외이동학습을 가기 때문에 한 학기 강의를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원하여 2학기에는 군위간디학교에서 1주일에 하루 가서 2시간씩 수업을 하였다.
그전에 계속 일반학교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개인지도를 하였는데 , 대안학교 학생들은 달랐다.
수학에 대한 기초도 부족하고, 수업시간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늦게 들어와서는 똥누러 간다고 나간다.
일반학교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이다.
한숨만 나오고 , 이런 아이들이 과연 대학은 갈 수 있나 ?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학기 대안학교에 대한 경험을 하였다.
아이고 대안학교 샘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무엇보다 월급이 너무나 적었다
그 당시에 간디학교 샘들의 한달 월급이 처음 1년은 80만원이고, 그 뒤 경력이 쌓이면 120만원이란다.
과외 한 두건 뛰면 그 돈 버는데, 그리고 하루 24시간 아이들과 붙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대안교육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교육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 때 같이 교육 받은 분들 중에 다른 간디학교에 지금도 근무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 해 11월에 간디마을학교에 입학원서를 내었다.
원서를 내는데 부모 소개와 학부모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 많았다.
대안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떤 활동을 해왔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쩝 소비가 미덕이고, 그냥 버릴까요? 냉장고에 넣었다가 버릴까요? 고민하면서 살아왔는데 ,대안적인 삶을 물어본다.
대안적인 삶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는 입학을 시켜야 겠고 , 어쨎든 이런저런 답변을 하였다.
그리고 합격이 되었다. 간디마을 주민 신청도 하고, 아빠가 대안교육에 대한 교육도 받고,
군위 간디학교에서 땜빵강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솔비가 합격이 된 것 같다.
군위간디학교는 그 다음해로 금산으로 이사하여, 금산간디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솔비엄마 바로 마을에 이사 오자면서 그해 도 교육청에 경남으로 발령 신청하는 도관이동 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마을로 주소를 이전하였다.
그 뒤로 오랬동낭 경남으로 발령이 나지 않아 포기를 하였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 여러 생각들이 바뀌었다
아이들을 위하여 대안학교를 보냈지만 , 부모님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는 것 같다.
대안 학교를 보낸다고 하면 , 사람들이 물어 보는 말이 있다.
아이는 행복해 하나요? 아이가 스스로 결정해서 갔나요?
그런 아이들도 있지만 ,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틀린 말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수시로 집으로 전화를 한다. 누구 때문에 속상하다고 한다.
아이들이 대안학교를 다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집을 떠나 처음 만난 친구들과 매일 24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
아이들 끼리 부딪치는 일도 많고 갈등도 많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아이들이 모였으니 너무나 당연하다.
솔비는 스스로 결정해서 간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엄마 아빠가 ,가라고 해서 대안 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래도 간디학교를 3년 보내면서 많이 성숙하고 , 생각이 깊어진 것 같아 대견하였다.
솔비가 중학교 1학년때 , 한비는 초등학교 5학년 이었다.
그 때 텔레비전 드라마에 “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 제빵사 파티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때 한비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제빵 제과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
심심하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한다.
마침 안동에 제과제빵 학원이 처음 생겨 , 교육생을 모집 중이었다 .
전화를 하고 찿아가니, 원장님 첫 말씀이 “ 대단하시네요?”다. 한비처럼 어린 학생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엄마랑 같이 다니다가, 나중에 혼자 다녔다.
중학교 1학년 나이 때 제과기능사 제빵 기능사 자격증을 다 땋다.
스스로 생각할 때 , 한비가 빵을 배우겠다고 할 때 , 흔쾌히 허락한 내 자신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다.
한비는 중학교 과정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홈스쿨링을 하였다.
홈스쿨링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묻는다.
공부는 어떻게 하냐고? 아빠 엄마가 명색이 선생인데 직접 가르쳤다.
그런데 남의 자식들은 잘 가르치는데, 참 자기 자식은 가르치기 힘들다.
애도 툭하면 짜증내고, 나도 이유 없이 화가 난다.
가르치면서 화가 나면 내 새끼고 , 화가 나지 않으면 남의 자식이라던가?
한비가 빵을 배우면서 꿈이 컷다.
한때는 프랑스의 르꼬르동 블루에 유학을 갈까, 아니면 미국의 CIA에 갈까? 아니면 동경제과 학교에 갈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일본에 유학을 가보면 어떨까 하여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비가 중학교 2 학년 때 언니가 간디학교를 졸업하고, 같이 집에서 홈스쿨링을 했다.
같이 마땅히 배울 팀이 없어 두 딸래미와 내가 같이 일본어를 같이 배우러 다녔다.
아빠가 같이 공부하니 좀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 .
운동이 부족하다 하여, 검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여 같이 해동 검도를 배우러 다녔다.
3부녀가 같이 도장에 가니 , 관장님이 신기해 한다. 우리 3부녀가 도장 선전용으로 사용되었다.
“해동 검도는 가족이 같이 하면 좋은 운동입니다”
검정고시를 치는데 , 수학 점수가 제일 나쁘다. 아빠가 명색이 수학선생인데.
어느 날인가 서울에 사는 조카가 전화로 한말이 기억이 난다.
‘삼촌집은 신기해“ ”왜?“ 엄마는 공교육 아빠는 사교육, 큰애는 대안교육, 작은애는 홈스쿨링, 너무나 신기해”한다.
그 말이 재미있어 솔비엄마에게 얘기했더니,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는 대안학교를 보내면서, 본인은 공교육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스스로 공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돈을 벌기위해 학교에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그 때는 이명박 정부시절이었고 ,학교에서 일제고사가 부활되면서 , 학교에서 부담도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 경북 도 교육감은 명품교육을 내세우며, 대학교 입학결과를 내세우는 시절 이었다
어느 날 솔비엄마 학교를 그만 두고 싶다고 한다.
속으로 뜨금했다. 남들이 다 철밥통이라고 부러워하는 직장인데,
앞으로 돈 들어가야 할 일이 많은데, 그만 두겠다고 한다.
명절에 형제들이 모였을 때 , 그 이야기를 했더니 , 전부 반대를 한다.
나도 속으로는 더 다녔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만 , 본인이 다니기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협안을 제시했다. 시골의 조그마한 학교에 다시 발령을 받아 , 학교생활을 하면 어떠냐고?
그래서 봉화 소천이며, 안동 주변의 땅들을 둘러보러 다녔다.
어떤 조건이 마음에 들면 ,다른 조건이 걸리고,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면 가격이 비싸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고 ,가격도 비싼 것이 맞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포기를 하고 산청에 들어와 살기로 하였다.
당장 학교 그만두고 산청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지? 고민을 하였다.
그런데 교사생활 20년이 지나면 명예퇴직 신청을 할 수 있고 ,명예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용기를 내서 명예퇴직을 하였다.
그리하여 산청에 들어올 생각을 하였다
. 산청에 들어와 집을 짓는데 , 한 10년은 늙은 것 같다.
아파트 살 때는 돈만 주면 끝 이었는데 , 업자를 만나 설계를 의뢰하고 ,
하나하나 모든 것을 직접 다 결정해야 하는데, 머리에서 쥐가 난다.
“아이고 그냥 지어진 집 구해서 살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짓고 산청으로 이사를 왔다,
9월 달에 이사를 왔는데 , 뒷정리가 장난이 아니다.
집이 지어져도 가구를 배치하면서 다시 손 볼 것도 있고 , 다시 AS 받아야 하는 것도 있다.
포크레인으로 토목공사를 하고, 텃밭을 만들었는데 ,엄청 시간이 든다.
기존의 논밭이 아니라 ,임야상태에서 땅을 밀어 놓으니, 쌩 진흙땅이다
처음에 밭을 만드는데 진도가 안 나간다. 하루 종일 땅을 파는데 겨우 한두평이다.
돌은 왜 그리 많은지 .한두 평 파는데 돌 옮기는데 시간 다 보낸다.
그리하여 텃밭을 만들었다. 이사 처음 온 첫해는 왜 그리 추웠는지, 그해 보일러 난방비가 엄청들었다.
그래도 춥게 지냈다. 밤에는 바람소리는 왜 그리 심하게 들리는지. 시골 생활이 만만하지 않다.
아파트에서 생활할 때는 ,문제가 생기면 관리실에 연락하면 ,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해결이 되었는데,
시골에 들어와 사니, 맥가이버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저런 공구도 잘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기계치가 되어서 공구도 잘 다루지 못 한다.
가끔씩 솔비엄마 옆집 아저씨와 비교를 한다.
누구는 뚝딱 뚝딱 잘도 만드는데, 당신은 뭐하냐고?
학생들이 공부 잘하는 엄마 친구 아들 때문에 인생이 괴롭다더니,
시골에서는 일 잘하고 공구 잘 다루는 옆집 김가이버 때문에 인생이 괴롭다.
그해 겨울 한비가 민들레에 입학했다.
면접 보러 가는데 , 교감선생님, 첫 말씀이
“대학교 보낼 생각이면 우리학교 보내지 마세요. 우리 학교는 공부보다 노동을 중요시 하는 학교입니다” 다.
그 뒤 여러 이야기가 있었고, 학교 소개 내용도 읽어 보았지만 ,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었다.
자발적인 가난이라는 부분이다.
“부자 되세요”가 새해 인사이고, 가난은 죄악인 시대에 , 스스로 가난해 지자니.
그래도 이 학교의 교육 목표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거라고 하여, 마음에 들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하고 , 백수가 즐비한데,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하니,
그래서 한비보고 “너 이 학교 다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솔비는 연기에 관심이 많아서 , 알아보던 중에 진주에 연기 학원이 하나 있어 연기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안동에 있을 때 , “코리아” 라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 한 이후 연기에 관심을 가진다.
수천 명이 엑스트라로 출연했으니, 솔비 얼굴이 화면에 나오지도 않았겠지만 , 그래도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 큰 아이가 간디학교를 다녔고, 둘째가 민들레 학교를 다닌다고 하니 사람들이 질문하는 내용이 있다.
간디학교와 민들레 학교의 차이점이 뭐냐고? 간디학교의 교육이념은 사랑과 자발성인데, 민들레학교는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간디학교는 교가에서 “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네”,
그런데 민들레 교장 선생님은 꿈같은 것은 꾸지도 말라고 강의를 한다.
간디 학교 학생들은 중학교 때부터 참 연애도 많이 한다.
커플이 수시로 생기고 찢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애들도 알고, 샘들도 알고, 부모님들도 알고 마을 사람들 모두 다 안다.
그런데 민들레 학교는 이성교제 금지란다.
아이고 그 좋은 것을 못하게 하다니. 학부모님들의 문화에도 차이가 있다.
간디학교에서는 학부모 모임을 하고 나면 푸짐한 안주와 맥주 소주 막걸 리가 있다.
민들레 학교에서는 학부모모임을 하는데 푸짐한 안주만 있다. 술이 없다. 민숭맨숭하다.
술 한 잔 하고 허튼 소리도 좀 해야 하는데.
주님을 믿는 분들이 왜 주님을 멀리 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3년이 지나니, 그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솔직히 간디학교 학부모님들 주님을 너무나 좋아 하신다.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비가 민들레 학교 3년을 지나고 나니 많이 의젖해졌다 . 민들레 학교에서 많은 도움도 받았다.
언제나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그렇게 한해가 지나고 다음해 봄에 처음으로 텃밭에 이것저것 심어보았다.
100평 정도의 텃밭에, 어디 가서 농사짓는다고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
잡초는 왜 그리 많이 나는지,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다.
고추모종을 심는데 아무따나 막 심었더니 , 동네사람들 훈수를 둔다. 고추는 두둑을 높게 해야 한단다.
열무는 한 두평씩 심어 ,금방 뽑아 먹고 , 또 심고해야 하는데, 씨앗 한 봉지를 다 심었다.
나중에 수확한 열무가 너무 많이 처치곤란이다
. 보관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내다 팔 만큼 양도 아니고, 결국 이웃집에 다 나우어 준다.
상추도 조금만 심어야 하는데 씨앗봉투에 잇는 것 다 뿌렸더니 , 양이 많아 처치곤란이다
. 그래서 이웃집에 나누어 준다. 그렇게 시골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래도 처음 지어보는 텃밭 농사지만 , 아무렇게나 꽂아 놓았지만 잘 자라는 식물이 신기하다.
그리고 텃밭에서 나는 채소는 너무나 맛있다.
상추가 나올 때면 ,아침 상추 점심 상추 저녁 상추다. 감자를 캐고 나서는 아침 감자 점심 감자 저녁 감자다.
약 안치고 비료 안주고 키우니 , 마트에서 사먹던 상추며, 채소는 이제는 맛이 없어 못 먹겠다.
시골에서 사니 이런 호사를 누린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야채며 음식은 왜 그리 쉬이 상하는가?.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음식이 쉬이 상하는 까닭은 ,이웃과 나누어 먹으라는 하느님의 배려가 아닌가 ? 생각을 해본다.
집도 짓고 텃밭도 만들었으니 돈벌이를 해야 한다.
농사를 지어 볼까하여 거창 귀농학교에서 교육도 받았다. 여기 저기 이런 저런 교육도 받으러 다니고, 아이고 백수가 더 바쁘다.
한비 엄마도 교육을 받으러 다닌다.
시골에 오면 카페를 차려 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커피 바리스타 교육도 받으며 원지며 인근에 가게를 알아보러 다닌다.
한때 중고차를 사서 이동카페를 해볼까 하여 타우너 중고차를 산다. 그런데 중고차가 고장이 잘난다.
오토만 몰다가, 스틱 자동차를 모니, 운전이 서툴다.
그래도 얼마동안 커피장사를 하였다. 이것도 쉽지가 않다. 준비할 것도 많고 , 신경 쓰이는 것도 많다.
그런데 결국 차가 문제여서 포기했다. 돈만 깨졋다.
겨울이 다가와 처음으로 곶감농사를 지었다. 감을 깍아 걸어만 놓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 이것도 쉽지 않다.
남하는 것 보면, 다 쉬워 보이는데, 내가 하면 어렵다. 그리고 학설이 구구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니, 여러 학설이 나온다. 어쨎든 곶감은 생산했다.
돈이야 되던지 말던지 일단 데크에 곶감이 가득하니 , 마음이 배부르다. 이런 맛에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모양이다.
물건은 만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팔지?
서울에 회사 다니는 처남, 둘째 처남댁 우리 형제들 , 민들레 학부모, 간디 학부모 , 아는 사람들 총 동원이다.
처분은 다했다. 반은 팔고 , 반은 선물로 보냈다 . 만드는 것 보다 판매가 문제다
. 먹는장사는 풀어야 되지 않나? 맛을 봐야 물건을 사지.
다 계산 해보니 적자는 면하고 곶감 값은 벌었다. 돈 벌기 쉽지 않다.
선물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아까웠다. 저거 다 팔면 돈이 얼만데.
그러면서도 지난날을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선물을 받아만 왔지, 누구에게 선물 준 적이 없다.
이래서 이제 까지 받아 온 것 다 토해내는 모양이다. 그 뒤로 이런 저런 일들이 많다.
일당 받으며 , 일하러 다녀도 보고, 취업을 하려고 여기저기 원서도 내 보았다.
나이가 들어 보이니 취업은 잘 안 된다. 할 줄 아는 일도 없다.
언젠가 김인수 교장 샘이 한말이 기억이 난다.
“ 제가 이래 뵈도 못하는 것이 엄청 많습니다.”
교장 선생님 , 언제나 근엄한 줄 알았는데, 가끔씩 썰렁 개그도 잘 하신다. 쩝 나도 그런대.
다음 해에 솔비엄마 대구에서 가게를 얻어 커피가게를 얻어 장사를 하였다.
몇 개월 하다가 돈만 까먹고 다시 돌아 왔다. 장사도 쉽지 않다. 참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일당 받으러 일 하러 가서는 , 일당 보다 병원비가 더 나간다.
며칠 일 하고 나면, 손목 인대 나가고 , 어깨 나가고, 허리 나간다.
청담한의원에 침 맞으러 참 많이 다녔다. 그렇게 이제까지 생활 해왔다.
작년에는 마을 군유지를 빌려 고사리를 심었다, 군유지에 표고버섯도 300본정도 키우고 있다.
작년에 합천에 산 땅에 고사리도 심고, 이리저리 돈벌 궁리를 한다.
이건 언제나 돈이 될까? 시골에서 살아도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 돼야 한다.
우리 마을은 전국 각지 도시에서 온 분들이 많다. 땅도 좁고 농사지을 땅도 없다.
바캍에서 공무원 하시는 분들도 있고 , 유정란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분들도 많다.
봄이면 고사리 뜯고, 딸기쨈 , 생강차, 산야초 효소, 이런 저런 생산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마을이 처음 만들어 질 때는 업자에게 맡기고 집을 지은 분도 있지만, 스스로 힘으로 집을 지으신 분들도 많다.
초창기에는 마을에 목수가 넘쳐났다.
허리에 연장띠를 매고, 한손에는 전동 드릴, 또는 타카로 중무장 한 목수 군단들.
통나무집, 스트로베일 집 , 한옥, 목조주택, 조립식 주택, 여러 종류의 집들이 있다.
스스로 집을 지으신 분들 진짜로 대단하다.
초창기에 먼저 들어 와서 마을을 일구신 분들 덕분에 , 나중에 들어 와서 고생을 그나마 적게 한다.
우리 마을도 생긴지 거의 10년이 다 되간다.
간디학교는 올해 10주년이 되었다.
6월 13일 14일에 ,10주년 행사를 준비 했는데, 메르스 때문에 연기 되고, 종강할 때 같이 축제를 한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와 사시는 분들 , 자존심도 강하고, 개성도 강하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 어디나 오해와 반목이 있는 것 같다
. 우리 마을 주민들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마을주민으로 선정 될 때부터 자주 들은 말이 있다.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 참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표용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인간은 선한 존재도 아니고 악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이익을 위하여 서로 싸운 다고 하지만, 때로는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싸우기도 한다.
벌써 마을이 생긴지 9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하여, 어떤 부분은 포기하고, 어떤 부분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 2년 전부터 마을에 협동조합이 발족되었다.
마을 사람들끼리 마음을 모아 같이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 협동조합을 마을기업으로 신청했다.
얼마 전에 간디숲속마을 협동조합이 마을기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모두들 축하해 주세요. 주 아이템은 생강차를 파는 것으로 하고 사업내용을 하나 둘 늘리기로 했다.
민들레 학부모님들도 많이 팔아주세요. 마을 대표님께서 많은 수고를 하여주셨다.
올해 초에 마을 기업 신청하면서 동네 분들과 같이 마을기업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사업 계획서를 쓰는데, 저보고 회계를 담당하라고 한다.
수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회계도 잘 할 거라고 생각한다.
회계는 하나도 모르는데. 그래서 만학도가 되어 , 열심히 회계공부하고 있다.
얼마 전에 전산회계 2급 시험을 보았다.
내 나이 또래는 없다. 전부 20대 30대다,
전산 세무회계 1급 까지 따면 ,법인회계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내용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없지만, 시험은 시험인지라 붙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나중에 자격증 다 따면, 그 때는 주위에 일거리 있으면 부탁합니다.
한비 엄마는 얼마 전부터 동네분의 소개로 일자리를 구해 , 일하러 다니고 있다.
원지에서 진주 나가는 길, 큰길로 올라가기 전에 왼쪽에 , 하나로 구들 이라고 있다.
거기서 사무도 보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
지나 가다가 시간 나면, 들려서 , 구경도 하고 차도 한잔씩 하고 가기 바랍니다.
구들이 필요하신 분들은 주문도 하시고요.
시골에 들어 와서 생각하는 것이 있다. 행복한가? 행복이 무엇일까?
산청에서 처음 시골 생활 하는 것도 아닌데. 산청 오기 전에 경북 영양에서 4년 청송 진보에서 1년 영주에서 몇 년 살았다.
영양 산골짜기에서 살 때는 시골 생활의 무료함이 싫어서,
그리고 아이들 교육은 도시에 나가서 시켜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도시로 나가기를 바랬다.
그런데 한비 엄마 안동에서 몇 년 살면서 , 영양 산골짜기에서 살 때가 그립다고 하였다.
교원사택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시냇가에 가서 골뱅이도 줍고, 영양 수비계곡에 놀러도 가고, 그래서 다시 시골을 선택한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 놓고 보니 그 때가 행복했던 것 같다.
그 때 농사도 좀 배우고, 땅도 좀 사 둘걸. 행복은 과정인 것 같다.
가끔씩 솔비 한비에게 썰렁 개그를 해본다. 그런데 반응이 재미없단다.
짜식들 . 아빠가 한번 웃겨보겠다고
썰렁개그를 하면, 마구마구 웃어주는 것이 배려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대안교육을 더 받아야 하나? 그리고 보니 글이 길어진 것 같다
. 애국가가 명곡이지만, 4절까지 부르면 지루하다고 하질 않던가.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