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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개비와 비개비
1. 주자의 집주 서설
개비, 비개비 이야기를 하다가 끝났는데, 너무 급격하게 들어가면 곤란하니깐, 다른 이야기를 좀 하겠다.
주자의 집주(集注)에 서설(序說)이라는 게 있다. 여기서 뭐라 했냐 하면,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백화식으로 되어 있어서 백화식으로 읽어야 한다. 송대에는 이미 백화를 쓰고 있다.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논어를 읽을 때에 모두 읽은 다음에도 전혀 아무런 일도 없는 사람도 있고,
모두 읽은 다음에 그 중의 한 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며,
모두 읽은 다음에 알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모두 읽은 다음에 곧바로 손이 춤추고 발이 춤추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白話(백화)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 중국말을 가리키는 말. 당(唐)때부터 시작하여 원(元)대에 개화
논어를 읽는데, 어떤 사람은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논어를 읽었는지 말았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놈들이 있고,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좋아하는 놈들이 있다. “학이시습지...’ 이거 얼마나 좋냐?” 만날 그것만 외는 사람이다. 한국의 과거 유생들이 전부 이 수준인 거 같다. 其中得一兩句喜者(기중득일양구희자). 대개 내가 어려서 보면, ‘공자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냐?’하고 그걸 가지고 좋아서 계속 훈시하는 양반들이 있었다. 이것도 답답한 사람들이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인간이 매사를 좋아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知好之者 아주 좋은 표현이다.
知好之者
이게 무슨 말이냐?
어떤 사람은 논어를 읽고 나니깐, 인간이 통이 넓어지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그리고 최후에는 부지불식간에 깨달은 것이 너무 기뻐서,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동동 뛰는, 그런 사람도 있다. 논어를 읽는 기쁨을 표현한 옛날 말이다.
手之舞之, 足之蹈之
논어를 읽고 ‘수지무지하고 족지도지’한 것이다. 옛날에 유학이라고 하면 점잖게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옛날 사람도 디스코를 추는 것과 마찬가지다. 논어를 읽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수지무지하고 족지도지하는 경지에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논어의 매력이다. 논어를 읽으면 사람이 이렇게 기뻐야 한다.
수지무지, 족지도지와 같은 말을 여러분들이 꼭 외워두어야 한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점잖지 않았다. 이게 달인들의 세계다. 공자는 개비들의 세계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그 다음 나오는 말이 더 중요하다.
今人不會讀書.
오늘날 사람들은 독서를 할 줄 모른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요새 놈들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今人은 요새 놈들이라는 나쁜 말이다. 요새 놈들은 독서를 할 줄 모른다.
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예를 들어 논어를 읽을 때, 아직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읽지 않았을 때, 이러한 놈이었는데 읽고난 후에도 이러한 놈이다. 즉 읽기 전이나 읽은 후나 변하는 것이 없이 똑같은 놈이라는 것이다.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이미 읽은 후에도 역시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논어를 읽지 않은 것이다.
논어를 읽는데, 읽지 않았을 적에 이러한 사람이었는데, 읽기 전에도 이런 놈이었는데, 읽고난 후에도 이런 놈이면, 그 놈은 읽은 것이 아니다. 읽어본 적이 없는 놈이다.
사도 바울 선생이 로마인서 12장에서 뭐라고 했나?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로마서 12:2
‘항상 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네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하라고 했다.
똑같은 이야기다. 논어를 읽으면 사람이 변해야 한다. 읽기 전에도 이 사람, 읽은 후에도 이 사람이면, 그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옛날 사람들의 말이다. 내 말이 아니다. 이렇게 생생한 말씀들이다. 논어를 옛날에는 이렇게 읽었다는 것이다. 논어를 읽음으로서 마음이 새로워지고 사람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항상 이야기하지만, 이 강의는 젊은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강의를 듣고, 논어를 읽은 다음에 사람이 변해야지. 읽기 전에 이 사람이었는데, 읽고 나서도 이 사람이면 안 된다. 그래서 이렇게 논어가 좋은 것이다.
2. 유(儒)의 의미
이제 개비와 비개비 이야기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이 내 강의가 판소리라고 한다. 미국사람이 저번에 와서 계속 들어서, ‘너 이거 알아 듣냐?’고 했더니 판소리 듣는 것보다 이게 더 낫다고 했다. 이 백묵이 부채 같다고 했다. 부채 움직이는 것보다 더 다양해서 낫다고 했다. 자기는 그냥 소리만 듣고 앉아 있다고 했다.
개비라는 말은 곧 유(儒)다. 유라는 것은 需에 사람 인(亻) 변이 나중에 들어간 것이다. 비 우(雨)가 있고 그 밑에 있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다.
옛날 무당들은 뭔가 공통적인 게 있다. 공자처럼 머리 위가 평평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유는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들이다. 비가 오라고 춤추는 모습이다. 유라는 것은 바로 개비다. 글자에서 증명이 된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다.
이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공자가 들어서서, 공자가 위대해지면서 따라서 좋은 말로 변한 것이다.
유라는 말도 원래는 侏儒라고 했다. 侏儒(주유) 小知小言의 난장이란 뜻, [예기] [좌전] [국어]에 용례가 있다.
주유라는 말은 난장이, 구루를 말하는 것이다.
구루(痀瘻) 곱사등이
주유랑 구루는 발음상으로 비슷하다. 산해경이나 순자에서 周公(주공)은 난장이에다 꼽추인 이상한 놈이었다. 그건 뭔 소리냐?
周公背僂.
주공은 꼽추였다. [논형] [골상편] 이외로도 [순자] 등에 기술되어 있다.
쌍계사 칠불암에 들어가면 아자방이라는 것이 있다. 亞(아)라는 자형은 토굴 모양이다. 옛날 사람들이 굴을 파면 亞의 모양으로 파 들어가 양쪽으로 방을 만들었다. 토굴은 어두컴컴하고 습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는 집을 제대로 짓지 못하고 토굴에서 살았다. 여기가 습하니깐 각기병, 구루병 환자들이 많이 생겼다.
이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못했다. 밭일을 못하고 농사를 못 지었다. 꼽추들은 앉아서 할일이 없으니깐 만날 하늘만 쳐다보고 살았다. 이들이 천문학을 개발한 것이다.
고대의 천문학은 바로 이러한 꼽추들이 만든 것이다. 낮에는 돌아다니지 못하니깐 낮에 자고 밤에 눈을 말똥거리면서 별만 쳐다보다가 천문관측인이 되었다.
고대 문헌을 보면 이 꼽추들이 나가 놀지를 못하니깐 앉아서 밤에 별들을 관측하다가, 일식과 월식의 법칙을 알아낸다. 그러면서 ‘내일 해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니깐 사람들이 떨었다. 그래서 이들은 권력자가 된다. 이들이 왕이 되었고, 이것이 제정일치라는 것이다.
제정일치(祭政一致)
무속출신의 제사장과 정치적 권력자가 동일시되는 인류고대사회의 보편적 현상
무당이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대인들의 지식을 이러한 무당이 독점한 것이다. 개비의 세계가 간단하지 않다.
고대사회에서 개비의 위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이러한 꼽추들이 주루, 난장이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앉아서 사색에 빠지고, 그러면서 이 세계의 법칙을 알아내고 과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고대사회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이들에게서 위대한 경전이 쓰여지고, 문자가 개발되고, 이러면서 이들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때때로 정권을 잡기도 하고,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이러한 고대 사회의 비밀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고전들을 그냥 보아서는 안 된다. 간단한 게 아니다.
3. 개비 공자
공자는 개비로 자란 건데, 개비의 삶이라는 것은 그렇다고 대단한 것은 아니다. 개비는 역시 개비였다.
그래서 공자는 계속 吾少也賤, ‘나는 천하게 태어났다’라고 말한다.
大宰問於子貢曰 :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태재(大宰)가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공자(孔子)는 성자(聖者)이신가? 어쩌면 그리도 능한 것이 많으신가?”
대제라는 사람이 자공에게 물었다. ‘너희 선생은 왜 그렇게 재능이 많으냐?’고 물었다.
子貢曰 : 固天稜之將聖, 又多能也.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선생님은 진실로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이시고 또한 능함이 많으시다.”
그러자 자공은 ‘성인이 되어서 그렇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성인이라는 말도 다시 해석이 되어야 할 말이다.
子間之, 曰: 大宰之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태재(大宰)가 나를 제대로 아는구나. 내가 젊었을 때 미천했기 때문에 비천(鄙賤)한 일에 능함이 많다.
대제라는 게 관직의 이름이다. 공자가 그 말을 듣고, 공자가 하는 말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천하게 컸기 때문에 비천한 일들에 능하다’고 한다. 남들이 안하는 젓대를 불고, 향을 피우고, 그런 일에는 능하다는 것이다.
君子多乎哉? 不能多. - 자한 6 -
군자(君子)는 능함이 많은가? 많지 않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군자는 나처럼 다능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여기 이런 말 속에 공자 인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 공자는 자기가 개비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개비의 세계에 머물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개비에서 비개비로 튄 사람이다.
박범훈도 마찬가지다.
박범훈 : 국악관현악단 운동을 통해 국악을 새로운 오케스트라의 개념으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공현을 하였다.
비개비나 마찬가지다. 그 사람은 세계적인 음악가다.
4. 황병기
아까 황병기 선생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이 양반이 원래 굉장한 부잣집 자손이다. 그래서 경기중을 들어갔다.
황병기(黃秉冀 1936~) 경기중학교 3학년때부터 가야금을 배웠다. 김영윤, 김윤덕에게 직접 배우고 여러 산조를 섭렵했지만 결국 정남희(丁南希, 1905~1984)의 산조를 완성했다. 전통음악의 품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작곡으로 국악을 세계화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6.25때 부산에 피난을 갔다. 자기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는 중학교 3학년 때 괴짜였다고 한다. 지금도 대단한 괴짜다. 부인이 한말숙 선생이다. 우리 동네에 사셔서 아주 친하게 지낸다.
부산에 가서 학교를 다니는데, 나 같은 괴짜는 없다고 하면서 폼을 잡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반에 모범생인 반장이 한 명 있었다고 한다. 자기의 라이벌 급이었다고 한다. 얌전하고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자기는 국사시간에 가야금이라는 것을 우륵이 만들었고, 가야에 가야금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디 무덤 벽화에서나 볼 수 있지, 가야금이 그 당시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당시 피난통에 그런 것을 다 잊어버렸던 시절이다. 맞는 말이다. 누가 그 당시 가야금을 생각했겠는가?
어느 날 반장을 하던 그 아이가 찾아와서 ‘너 가야금 배우러 안 갈래? 가야 시대에만 있던 게 아니라, 지금 있대. 한 번 배워볼만 하지 않냐?’라고 했다고 한다.
황병기 선생이 그때 자신은 괴짜라고 폼을 잡았는데, 저 얌전한 반장이 가야금을 배우러 가자는 발상을 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럼 가야금을 어디서 배우냐?’했더니, 그 친구가 ‘우리 학교 가는 길목에 기생들 무용 강습소 같은 게 2층에 있었던 거 같아.’ 거기서 띵까딩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거기 무용 강습소에 가서 물어 보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황병기 선생은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이서 저녁 어둑어둑할 때 갔더니, 목조 건물의 시커먼 계단을 기웃거리는 데, 어떤 양반이 ‘집에 가서 공부나 하지. 왜 여기 와서 기웃거려!’라고 하면서 야단을 쳤다고 한다. 기생 후보들이 와서 춤을 배우러 오는 곳이니깐, 자기들이 딴 마음이 있어서 왔다고 생각하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가야금을 좀 배우고 싶어서...’라고 떨리는 가슴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가 기특하게 쳐다봤다고 한다. 그리고 “너희 정말 가야금을 배우려고 그러냐? 내가 가야금을 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분이 김철옥(金鐵玉, 1910~1968)이다. 한숙구의 제자였던 부친 김경식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강태홍에게도 사사받음.
그 할아버지가 감격을 해서 자기 방으로 데려갔는데, 벽에 먼지가 가득하고 가야금이 서너 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 번도 안 만진 것이다.
거기서 하나를 꺼내, 먼지를 퍽퍽 털더니 가야금을 띵디딩 치는 데 천년의 한이 자기 가슴에 맺혔다고 한다. 어린 자기 가슴에 그 소리가 ‘우리 민족의 소리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건 아마 최고의 연주였을 것이다. 그 순간에 중학교 3학년짜리 아이들이 부산 피난통에 그 노인의 농현(弄絃)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감동이 왔겠나?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자기는 가야금을 쳤다고 한다.
황병기 선생은 비개비 출신이지만 이미 개비의 세계를 넘어간 분이다. 중3부터 시작했으면, 개비라고 해야 한다. 개비들도 황 선생보다 몇 년 더 빨리 시작했을 것이다.
황병기 선생은 비개비 출신이지만 개비의 경지를 완전히 넘은 사람이다. 개비가 비개비 취급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개비들은 비개비라고 한다. 비개비는 철저히 비개비라고 한다. 그런데 황병기 선생이 갖고 계신 지식은 실로 대단하다.
5. 공자와 好學
공자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이 두 개가 있다.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야장]. 27
공자가 이런 말을 한다. ‘열 가옥이 있는 동네에 가면 나처럼 충직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공자의 일생을 지배했다. 왜냐하면 공자는 천민인 개비로 커서 평생을 배움에 갈망이 있었다. 이렇게 천하게 자란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있다.
박범훈이라는 친구도 얼마나 나를 따라다니면서 배웠는지 모른다. 그 사람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최근에도 박사를 받았다. 동국대에서 연구를 해서 어마어마한 책을 썼다. 하여튼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도올은 80년대를 통하여 악서고회(樂書孤會)라는 국악운동모임을 주도하였다. 우리나라의 많은 국악계리더들이 이 모임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
6. 자로의 슬
또 하나는 재즈의 명인이라는 것이다. 음악의 세계다.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공자의 제자는 누구에게나 음악을 가르쳤다.
자로에게도 음악을 가르쳤다. 자로는 원래 무인이었다. 가야금을 튕겨도 거칠게 퉁겼다. 살기가 돌았다.
子曰 : 由之琴奚爲於丘之門?
공자께서 유의 슬을 어찌 나의 집에서 연주하겠는가?
그러니깐 공자가 ‘가야금을 내 집안에서 감히 그따위로 치고 있냐!’하고 욕을 바가지로 했다.
門人不敬子路.
다른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것 봐라!’하고 같이 욕을 했다.
子曰 :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선진 14
공자께서는 “유의 학문은 당에는 올랐으나, 아직 방에 들어오지 못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셨다.
그러자 공자는 ‘이 자식들아, 그래도 자로는 升堂(승당)은 한 사람이다. 入室(입실)은 못했어도...’ 그러면서 또다시 자로를 높여 주었다.
7. 제나라의 소(韶)
음악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子在齋聞韶.
공자가 노나라에 있다가 젊어서 제나라에 갔다. 제나라에 가서 제일 먼저 한 게 소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三月不知肉味,
소는 당대 궁중 제일의 아악이었다. 이걸 듣고 공자가 3개월동안 고기의 맛을 몰랐다고 한다. 옛날부터 중국의 고기 요리는 알아준 거 같다. 3개월동안 고기맛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술어 13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음악이 이렇게 위대한 수준까지 오를 줄은 몰랐다.’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자기는 니 산에서 엄마한테 삼현육각이나 했던 것이다. 제나라에 와서 아악 심포니를 들으니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아! 내가 배울 세계가 있구나!" 그 당시도 그렇게 음악의 수준이 달랐던 것이다.
8. 공자의 문(文)
이런 것이 공자가 겪은 삶의 과정이다. 그 다음에 공자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문(文)이라는 것이었다.
문(文) 문화라는 추상적 의미가 아니고, 글자라는 구체적 의미이다.
文이라는 것은 구체적 의미로, 단순하게 한문 글자를 쓸 줄 안다는 것이다. 이게 대단한 것이다.
지금 칠판 글씨를 내가 자유롭게 쓰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알파벳이 아니다. 알파벳은 스물 몇 개만 외우고, 이것만 조합하면 되지만, 한문은 8만개다. 나는 4~5만개를 식별할 수 있다. 이런 경지에 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공자라는 사람은 씻김굿과 같은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공자가 말하는 예(禮)는 일차적으로 상례이다. 개비들의 세계는 상례다. 개비는 죽음의 예식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죽으면 우선 무당을 불렀다. 그럼 가서 시나위를 해주고, 씻김굿을 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그러한 사람으로 컸다.
그런데 상례의 과정에서 문자가 들어간다. 제문(祭文)을 써주고, 이것저것을 써주었다. 그것은 당대에 어마어마한 지식이었다. 보통 사람은 갖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파워였다.
천하게 컸지만 이 사람은 문자를 달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문자의 세계에 깊게 천착(穿鑿)해 들어갔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문자를 하나라도 더 알고 더 터득하려고 했다.
문헌(文獻)이라는 말은 공자가 쓰는 말이다. 공자가 계속해서 하는 말이다.
宋不足微也, 文獻不足故也.
- 팔일 8
문헌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문헌을 계속 연구해 들어갔다.
9. 광(狂)과 도(盜)
공자의 삶은 결국 개비에서 비개비로의 탈출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살펴보자.
우선 儒라는 말을 조금 더 깊게 분석해 들어가자. 유라는 것은 기우제와 관련이 있는 무당의 세계라고도 했는데, 儒라는 말을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자.
먼저 盜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도둑놈이라는 말이다. 공자가 도둑놈이었을까? 맞다. 공자의 집단은 盜로 규정할 수 있는 집단이다. 이런 말을 들으시면 헛갈리실 거다. 공맹지도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도둑지도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헛갈리실 거다. 盜에는 도둑의 의미가 분명히 들어있다.
문자라는 것은, 예를 들어 狂(미칠 광)이라는 글자가 있다. 미쳤다는 뜻이다. 그럼 狂이라는 게 뭐냐?
20세기의 가장 존경할만한 불란서 출신의 학자, 미셀 푸코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광기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 ‘이성의 시대에서 광의 역사’라는 것이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의 철학자, 알퇴세르 밑에서 공부, [배제의 원리]라는 개념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구조를 날카롭게 해부
광기의 역사(Madness and Civilization : A History of Insanity in the Age of Reason)
그 책에서 미친놈을 규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미친놈이라고 하느냐? 그건 멀쩡한 사람의 구조가 나온다는 것이다.
광(狂)을 규정하는 태도는 시대마다 다르다. 그래서 광(狂)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보면 멀쩡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금세기 서양의 광, madness라는 것은 이성주의가 비이성적인 인간을 감금시키기 위해서 만든 개념이라고 한다.
합리적인 자기들의 수학적 이성에 들어오지 못하는 인간을 이 사회에서 싸그리 없애려고 만든 게, 병원이고 포로수용소 같은 정신병동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이 미셀 푸코라는 사람은 근세 이성주의를 이렇게 까고 들어간다. 이성주의를 위해서 감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자에 있어서 광(狂)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공자는 광견(狂狷)이라는 말을 쓰는데, 광견(狂狷)이라는 말은 향원(鄕原)이라는 말과 대비되는 말이다.
광견(狂狷)<---->향원(鄕原)
향촌에 사는 부드럽고 점잖은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점잖은 놈들은 덕지적야(德之賊也)라고 한다. 이놈들이야말로 나쁜 새끼라는 것이다.
子曰: 鄕原, 德之賊也. [양화] 13
동네에서 점잖고, 친화롭고, 유화스럽게 하고, 어디를 가나 약방의 감초같이 돌아다니는 이러한 놈들이 정말로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다. 아예 미친놈같이 날뛰는 사람들이 향원보다 낫다는 것이다. 공자의 생각이고 재즈의 감각이다. 논어에서 광(狂)이라는 말이 나쁘지 않다. 그러니깐 이성주의로 이런 사람들을 감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도(盜)라는 말도 그 당시에는 결코 나쁜 의미로 쓴 것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이성규 교수라는 분의 논문이 있다. 그 논문을 보시면, 도(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성규 교수는 고대(高大)의 대사학자인 이홍직 선생의 아드님이다. 아드님도 훌륭한 사학자다.
李弘稙 1909~1970
20세기의 대표적 국사학자. 경기도 이천출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이왕직국조보감 찬집의원. 고려대학교 박물관장. 수준 높은 논문으로 국사학을 발전시킴. 국사대사전 지음
이성규 선생의 논의에서 도(盜)라는 게 뭐냐? 옛날에는 성읍국가라고 했다. 그러한 성읍국가의 지배체제 하에서 벗어난 곳에 사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그 당시에는 盜(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런 지배체제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도둑질도 할 수 있지만, 이 사람들은 균분(均分), 즉 균등한 분배를 하고 권력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지배자가 없는 것이다. 들판에서 자기들끼리 산 사람들이다. 이게 도둑이다. 도(盜)라고 한다.
균분(均分) 사회 재산의 균등한 분배 [장자] [거협]
임꺽정은 도둑이었다. 홍길동의 활빈당도 도둑이었다. 어디에도 소속이 없었다.
이러한 도(盜)의 무리들이 대개 공자의 밑으로 몰려든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기존의 질서에 반항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체제를 못 견디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공자라는 개비는 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문자를 가르쳤다. 그것이 집단을 형성해 갔다.
이것이 儒(유)의 집단을 형성하고, 인류사의 최초의 士의 집단의 출현이었다.
공자가 말하는 사(士)라는 것은 이런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내가 선비라고 하는데, 족보를 따지고 올라가면 도둑이다. 자유롭게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고, 구속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문화를 제공하고 이들로 하여금 정권을 새롭게 담당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盜를 士로 변화시켜간 과정이 곧 공자의 삶이다.
여기에 공자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논어 강의를 한다고 하니깐, 기존 체제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했을 것이다. 다들 점잖아지고, 얌전해지고, 어른 공경할 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공자 강의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도둑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논어]의 사명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도둑들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게 공자가 한 일이다.
10. 大儒와 小儒
우리가 공자의 일생에서 이런 도(盜)의 문제를 생각할 적에, [장자]의 외물편을 보면 기발한 것이 있다. 내가 보기엔 엄청난 이야기다.
외물(外物)
장자, 제26편. 인간이 밖의 사물에 집착하여 지혜를 잃는 것을 경고하는데 유(儒)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다.
[장자]의 외물편에 보면 大儒(대유)라는 말과 小儒(소유)라는 말이 나온다. 여러분들은 기절초풍하실 것이다. 대유와 소유는 모두 도굴꾼들이다. 대유는 밖에서 망보는 놈을 말하고, 안에서 훔치는 놈들을 소유라고 한다.
이들이 밤새도록 땅을 파서 들어갔다.
지금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된 줄 아는가? 미리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들이 다 낮에는 왕후장상의 장례를 지내고 보물을 다 자기들이 묻었다. 거길 다 아니깐, 그날 밤에 가서 파내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현실적인 이야기다. 이게 유(儒)의 세계다. 이러한 것을 적나라하게 장자는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픽션이 아니다.
그래서 대유가 ‘동쪽에 먼동이 튼다. 빨리빨리 해라!’라고 한다.
東方作矣, 事之何若?
날이 밝는데 일은 어찌 되어 가나?
그러니깐 소유가 말하기를 ‘아직 빤스를 못 벗겼소! 보니깐, 아가리에 옥구슬이 있어요!’ 하며, 시경(詩經)을 읊는 거였다.
‘푸른 보리가 저 언덕에 피어나 있구나. 그런데 살아서 보시 한 번 못한 새끼들이 어떻게 죽어서 아가리에 위대한 구슬을 머금고 있는고.’
未解裙襦, 口中有珠.
수의를 못 벗겼는데 입에 구슬이 있네요.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
파릇파릇 보리가 무덤가에 돋았네. 살아서 베풀지 못했는데 죽어서 어찌 구슬을 머금으리.
시를 읊어가면서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유는 밖에서 망보고 있다가 ‘야, 임마, 빨리빨리 해!’라고 하니깐 소유들이 시체의 머리를 탁 낚아채어서 아가리를 탁 벌리니깐 옥구슬이 도르르 나온다. 그걸 담아서 도망가는 장면이 나온다.
接其鬢,壓其顪,儒以金椎控其頤,徐別其頰,无傷口中珠!
그 놈의 머리를 잡고 그의 턱수염을 누른 다음, 쇠망치로 그의 턱을 쳐서, 천천히 그의 볼까지 벌린 다음, 입 속의 구슬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잘 꺼내시게.
11. 소인과 군자
공자가 살았던 세계는 이런 儒(유)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게 죽음의 세계다. 공자는 이런 죽음의 예식과 죽음의 세계로부터 어떻게 삶의 세계로 탈출하느냐를 고민했다. 송의 문화에서 주나라의 문화로 어떻게 가느냐? 어떻게 꿈에 그리던 周公(주공)을 만나느냐? 이런 것을 고민했다.
이건 뭐냐? 공자는 이런 세계에선 살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깐 항상 이 사람은 유(儒)의 세계를 저주하는 것이다. 공자에게 진짜 유(儒)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 사람은 유(儒)라는 개념을 무엇으로 바꾸냐?
당당한 지식과 예술을 갖고, 정치를 할 수 있게 변한 인간을 이 사람은 뭐라고 부르냐? 그걸 군자(君子)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君子儒, 小人儒라는 말을 쓴다.
君子儒 <------ 小人儒 -옹야 11
공자는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개비의 세계는 소인유의 세계라 했다. 어떻게 소인유의 세계에서 군자유의 세계로 탈출하느냐는 게 공자 일생의 과제였다. 그러기 때문에 공자는 항상 君子와 小人이라는 말을 쓰지만, 小人이라는 말을 일반백성들에게는 안 쓴다.
일반백성은 소인(小人)이라는 칭호의 대상이 아니다. 소인은 지식인에 대한 공자의 비판이다.
사(士) 중에서, 지식인 중에서, 관료 중에서 소인과 대인을 쓴다. 왜냐하면 일반백성들은 소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은 그냥 사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소인과 군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지식인 사회에서 이렇게 다 깨어있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였다.
소인이 되지 말고 군자가 되라고 한다. 소인이 되어서, 무덤이나 파먹고 사는 놈이 되지 말라는 말이다. 죽음의 제식을 빙자해서 돈이나 뜯어먹고 살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당대의 종교 세계였다.
공자는 이러한 종교의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종교의 세계를 주나라 주공이 펼친 인문의 세계, 문화의 세계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무덤 속의 어둡고 컴컴한 세계에서 대낮 같은 광명의 세계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종교의 세계에서 인문의 세계로, 죽음의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가는 것이 공자의 斯文(사문)이었다.
이것이 유교의 위대한 문화이다. 이것이 사문, 이 문화(斯文)인 것이다.
12. 자로, 중니제자열전
공자의 이러한 삶에서 드라마틱하게 공자의 일생을 규정하는 게 자로와의 만남이었다.
자로(子路)
8살 연하의 초기제자, 평생 공자의 곁을 지킨다. 이름은 중유(仲由)
자로라는 제자는 공자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인간이다. 그런데 자로는 원래 완벽한 盜(도둑)였다. 사납고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子路性鄙, 好勇力, 志伉直
자로는 성격이 거칠고 용맹하며 뜻이 강하고 곧았다.
공자가 이 사람하고 만나는 이야기가 있다. 자로는 원래 변(卞) 사람이라고 했다. 이 변이라는 곳은 공자가 사는 노나라의 변경지대이다. 완전한 野人(야인)이라고 했다.
변(卞) : 노나라와 위나라 사이에 위치한 편벽한 곳
尸子曰 : “子路, 卞之野人.”
아주 비천한 盜였다. 공자에 비해 겨우 9살 어렸다. 그 당시 9살은 맞먹을 수 있는 나이였다. 대단히 기골이 장대한 무인이었다. 그래서 공자와 자로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사방에 묘사가 되어 있다.
冠雄鷄, 佩豭豚,
수탉의 깃을 꽂은 모자를 쓰고, 수퇘지 가죽으로 장식한 劍을 차고 다니면서,
자로를 만났는데, 머리에 닭의 깃털 같은 것을 꽂고, 허리에는 산돼지 가죽으로 된 것을 차고 있었다. 자로의 모습이 좀 색다르다.
陵暴孔子
공자를 무시하고 모욕하였다.
자로는 공자에게 대드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람이 어찌나 사납고 포악한지, 공자를 처음 만나자 마자 ‘야 이노무 새끼야!’하며 때리려고 했다. 능폭공자라고 했다. 능멸하고 폭행을 가하려고 했다. 공자가 덩치는 더 컸을 것이다.
孔子設禮, 稍誘子路,
공자가 예의를 다해, 자로를 조금씩 바른길로 이끌어 주자,
그러니깐 공자는 예로서 살살 달랬다는 것이다.
子路後儒服委質, 因門人請爲弟子。
나중에는 유자의 옷을 입고 예물을 올리고 공자의 문인을 통해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중니제자열전
그래서 자로가 감화를 받아서 나중에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했다.
12. 자로, 공자가어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는 간략하게 나왔지만 왕숙의 [공자가어]에 보면, 아주 재미있게 표현이 되어 있다. [子路初見]이라는 장이 있다.
자로초견(子路初見) 공자가어 제19편
거기에 보면, 자로와 공자가 처음 만났을 때, 공자가 자로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냐?’
汝何好樂?
자로는 ‘나는 장검을 좋아한다.’고 한다.
好長劍。
그러니까 공자가 ‘야 이놈아,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니고, 네가 가지고 있는 호용(豪勇)에다가 학문을 덮어씌우면, 너는 참 위대한 그릇이 될 거 같은데, 왜 그렇게 내 말을 못 알아 듣냐?’고 한다.
吾非此之問也,徒謂以子之所能,而加之以學問,豈可及乎?
그러니깐 자로가 ‘학문을 해서 뭐하냐? 배워서 뭐하냐?’고 한다.
學豈益哉也?
그러니깐 공자가 하는 말이 ‘임금이 되어서 간(諫)해주는 신하가 없으면 실정하게 되고, 선비는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귀가 멀게 된다.’
夫人君而無諫臣則失正, 士而無教友則失聽。
‘미친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잠시도 놓을 수 없고, 활을 당길 때는 이미 두 번 다시 당길 수 없다. 나무는 목수의 먹줄이 닿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御狂馬者不釋策, 操弓不反檠, 木受繩則直, 人受諫則聖.
‘배움을 얻고 물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고 하면서 ‘사나이라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君子不可不學。
자로가 굴복하지 않고 으르렁거리면서 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남산에 대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휘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잘라서 쓰면 곧바로 과녁을 뚫을 수 있는데, 뭔 공부를 하라는 거냐?’
南山有竹, 不柔自直; 斬而用之, 達於犀革, 以此言之, 何學之有?
자로도 멋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푸른 대나무가 있는데, 스스로 곧고, 그걸 가지고 다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휘어서 학문을 한다고 그렇게 불필요한 짓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깐 공자가 ‘그 화살을 가져다가 앞을 잘 깎아서 거기다가 쇠 촉을 끼우고, 뒤에는 깃털을 달아서 잘 가공하고, 그걸 쏘면 무섭게 뚫을 것이다.’고 한다.
栝而羽之, 鏃而礪之, 其入之不亦深乎?
화살 한 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 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들어가는 깊이가 더욱 깊어지지 않겠냐?
그러니깐 자로가 ‘삼가 가르침을 받겠나이다.’하고 무릎을 꿇는 장면이 나온다.
敬而教
-공자가어
그래서 자로가 공자의 제자가 된 다음부터는 공자 주변에 대한 험담이 없어졌다고 한다.
自吾得由, 惡言不聞於耳.
내가 자로를 얻게된 후로부터는 내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
자로가 다 까불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내 귀에 오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로가 충직했다. 평생을 한결같이 공자하고 모셨다.
12. 자로의 죽음
그런데 공자가 죽기 바로 한 해전에 자로가 비극적으로 죽는다.
자로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다. 번 땅이지만 위나라에 대소가(大小家)가 모두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위나라에 영공(靈公)이라는 아주 불민한 임금이 있었다.
위령공(衛靈公)
공자시대의 위나라 임금. 남자(南子)는 그 부인이었다.
영공에게는 아주 음탕한 남자(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다. 어찌나 음탕한지 공자도 침실로 불러갈 정도였다. 이건 나중에 두고두고 이야기하겠다.
이 여자가 송나라 여자인데 시집오기 전에, 이 여자가 송조(宋朝)라는 기생호라비같은 놈하고 바람은 피고 왔다. 그리고 시집와서 양공하고 사이에서 괴외라는 아이를 낳았다.
괴외(蒯聵) : 영공과 남자 사이에서 난 아들. 훗날의 장공(莊公)
그런데 이 괴외가 송조의 아들인지, 영공의 아들인지 모른다고 한다. 아무튼 이 괴외가 커서 어머니의 음탕한 짓을 보다 못해서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사전에 발각이 되어서 괴외는 진나라로 도망을 간다.
그런데 영공이 죽었다. 그래서 영공의 뒤를 괴외의 아들인 첩이 잇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출공이다.
첩(輒) : 괴외의 아들로서 괴외 망명 후 임금의 자리에 오름. 출공(出公)
출공은 아버지 괴외가 위나라에 못 들어오도록 12년간 온갖 짓을 다해서 막는다. 괴외가 들어와서 왕이 되려고 하니깐, 결국 부자간의 싸움이 된다. 자기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너 이 자식아, 내가 왕을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괴외가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백희인데, 백희는 바로 괴외의 누나였다.
백희(伯姬) : 영공의 딸. 괴외의 누나. 공문자(孔文子)에게 시집 감.
이 여자가 공문자라는 사람한테 시집을 가서 잘 살면서, 공회라는 아들도 낳았다. 이 공회가 당시 위나라 재상을 하고 있었다.
공회(孔悝) 괴외의 누나인 백희의 아들. 당시의 위나라 재상. 자로는 이 사람 밑에서 가신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공문자가 죽고 나자, 이 백희가 혼량부(渾良夫)라는 놈하고 정을 통한다. 혼량부는 원래 공씨 집안의 노비인데 잘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괴외는 혼량부를 구워삶아서 자신의 입성을 도와주면 누나랑 결혼하게 해 주고, 재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꼬신다. 백희를 통해서 공회를 잡으려고 한다.
바로 그때 자로는 위나라에 가서 공회의 가신을 하고 있었다.
결국 괴외가 공회를 잡아서 누각에 있으니깐 자로가 급하게 간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면서 이제 대세가 기울었으니 가지 말라고 한다.
그러지 자로는 ‘그럴 수 있냐? 내가 공씨의 가신으로 있는데, 내가 모시는 분이 위기에 있는데 가야 된다!’고 하면서 집으로 들어간다.
由不然, 利其祿, 必救其患. 사시, 위강숙세가
그리고 자로가 괴외에게 공회를 내어 놓으라고 소리친다. 못 내어놓겠다고 하니깐 불을 질러버린다. 그러자 괴외는 석걸(石乞)과 우암(盂黶)이라는 검객을 급파한다.
환갑 넘어 늙은 자로는 싸움이 안 되었다. 날쌘 놈이 치니깐 머리에 칼을 맞고 갓이 뒹굴었다. 그러니깐 ‘잠깐만!’하더니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 없다!’고 말했다.
君子死, 冠不免.
그리고 정좌하고 앉아 관을 집어서 쓰고 칼에 맞아 목이 날아간다. 자로는 그렇게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다.
遂結纓而死.
이게 무슨 말이냐? 죽을 때도 관을 버리지 않는 자로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5,60년 전에 처음 공자를 만났을 적에 산돼지 가죽을 두르고 공자를 때리려 했던 사람이 그렇게 정좌하고 당당하게 관을 쓰고 앉아 죽는 모습은 이미 선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로의 모습은 선비의 모습이었다.
자로 삶의 변화가 곧 공자 삶의 변화이다. 공자의 위대함은 자로 같은 사람을 위대한 선비로 만든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면서 인류사회 최초의 선비상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결국 후마니타티스, 인문의 전범이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스투티아 후마니타티스(studio humanitatis, 인문학)
자로가 이렇게 비장한 최후를 맞은 후, 공자는 자로를 죽여서 그 시신을 소금에 절여 짠지로 만들어서 동문에 걸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자는 그 소식을 듣고 자기 집에 있는 짠지 독을 모두 엎어버렸다고 한다.
使者曰, 醢之矣. 遂命覆醢. 예기 단궁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자로에 대한 사랑과 자로와의 만남으로 공자의 학파가 출발한 것이고, 자로의 죽음으로 공자도 같이 죽은 것이다. 자로라는 인간과 공자의 삶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두 인간의 끈끈한 애정과 사랑, 친구이자 제자의 관계가 논어의 구석구석에 아름답게 스며있다.
공자와 자로의 대화는 대부분 안회의 원래 기록일 것이다.
나는 논어 속에서 이 두 사람에 관한 기록만이 공자의 가장 진실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이렇게 공자에 대한 생각을 갖고 이렇게 생생한 모습을 논어에서 읽어야 한다. 죽은 사람들을 만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