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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장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는 동안 남 유다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웃시야는 나라가 부강해지자 교만해졌다 급기야는 왕의 권력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사장 노릇까지 하려 들었다. 이때 선지자 이사야가 웃시야와 유대 백성에게 경고한 말이다.
여기서 거역하다는 히브리어 동사 파샤(פָּשַׁע)에서 나온 것인데 그냥 싫다고 떼를 쓰고 듣기 싫다고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세게 반역하는 것도 넘어서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즉 쿠데타를 일으킬 때 쓰는 용례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야 총과 탱크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정면으로 반박하고 사탄처럼 비난하면서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말씀을 말살시키는 쿠데타는 하나님을 짓밟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다는 용법을 네 가지로 쓰인다
파샤(פָּשַׁע:pasha : 하나님께 무력을 사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다.)
마라드(מָרַד marad: 하나님께 행동으로 반항하여 난동을 일으키다 선동하다 소요를 일으키다)
바가드(בצד bagad : 자기 욕정, 부패에 이끌려 마음대로 하나님을 저버리다.)
마하스(מאס mâ'as :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거절하다, 부인하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히브리어 정확한 표현은 “하늘과 땅은 귀를 열고 잘 듣는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자식은 내가 양육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지 않고)나에게 반역을 행한다”라고 직역 할 수 있다.
양육(養育)이라는 것은 보살펴 자라게 하는 것이다 여인이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양육하려면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한가?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모두 다 어머니의 생명을 갉아 먹고 산다”는 격언은 진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낳아서 기르신 하나님께서, 그 분 스스로를 갉아먹어 우리를 그렇게 키우신 것도 감동이지만 하나님의 양육은 어미의 그것 보다 더 구체적이다.
양육(養育)이란 단어가 우리 말로 한단어지만 히브리어로 쓰인 본문은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가달 (גָּדַל ; gadal ) 과 rum의 합성어인데 ָגָּדַל 이 라는 동사는 외적성장을 도모해 준다는 의미이고 רוּם 이라는 동사는 내적성을 도모할 때 쓰는 단어이다. 인간은 외적으로 성장한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자고하는 생물학적 용도로 끝난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자유도덕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제대로 된 인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녀를 גָּדַל하고 רוּם하신 것이다.
심지어 에스겔 16:6에는 우리가 어느 형편에서든지 끝까지 보호하고 사랑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지금 힘들더라도 언젠가는 기회가 주어질 터이니 너는 그저 간절하게 살아만 있어다오 라고 호소하고 계신다.
그렇게 간절하게 돌보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끝까지 거역한다.
하나님은 반역하는 너희들은 짐승만도 목하다고 질책하신다. 다음 구절을 가 보자
이사야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 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
댕댕이를 기르는데 그 댕댕이는 한 번도 나에게 반항을 하지 않는데 혼이 나면 눈을 내리깔 고 귀를 접어 눈치를 볼 뿐 나의 처분에 맡기고 반항하지 않는다. 간절하게 나의 눈을 쳐다보면서 음식을 줄 것에 처분을 기다린다. 댕댕이는 주인의 음성을 알고 무조건 순종한다. 짐승도 알고 깨달아 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피조물 중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
지구는 23시간 56분 4초 동안 스스로 돈다. 완전하게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한다. 단 하루도 예외가 없다. 만일 23시간만 돈다면 지구의 생물은 어떻게 될까? 백합꽃에서 아름다움을 일으키신 것을 보니 백합이 하나님께 완전히 넘겨진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받은 우리들이 절반이나 일부만 드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완전하게 하실 수 있겠는가? 하실 수 없다. 우리가 완전히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일을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자녀에게 자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내 주머니에 볼펜이 있는데 볼펜은 글쓰기라는 한 가지에 목적에 전적으로 바쳐져 있다. 이 볼펜으로 제대로 글을 쓰려면 그 것이 전적으로 내 손에 맡겨져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볼펜의 한쪽을 붙잡고 있다면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이 옷은 내 몸을 가리기 위해 전적으로 내게 맡겨져 있다. 지구는 우주의 한 귀퉁이에 물리적 법칙에 완전하게 맡겨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완전하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매일 내 안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교만이고 불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조건 즉 나의 완전한 순종이 있을 때만 나에게 일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할 권한이 있으시다. 그런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복된 일을 힘 있게 하실 수 없으시다.
순 종이라는 원어를 살펴보니 구약에서는 샤마 שמע(shama)이고 신약에서는 휴마코에(ὑπακοή)이다.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나의 말을 마음에 끊임없이 새겨라(刻印) ”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병아리는 깨어나 처음 보는 존재를 각인하여 자기 어미로 인식하여 따른다. 댕댕이도 어릴 때 돌본 첫 번째 존재가 어미로 여겨 따른다. 심지어 길 잃은 여우를 키웠더니 그도 강아지보다 더 사람을 더 잘 따른다. 이것이 각인 효과다. 그러므로 순종은 각인이다. 그런데 짐승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유독 “끊임없이”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왜 그럴까? 창조된 천연계의 다른 것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Free moral being)가 주어진 존재라서 끊임없는 선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0:17에 이 말씀이 주어졌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구절만 딱 떼어놓으면 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그리스도의 말씀만 잘 들으면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바로 앞 구절에 함정이 있다.
로마서 10:16 “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귀로는 들었지만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 아이는 말을 잘 듣는다”고 표현하면 그 아니가 청력이 좋다 귀가 밝다는 얘기가 아니라 몸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여기에 16절을 해석하면 들음은 몸으로 들음을 말한다. 귀로 듣고 흘러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들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를 들면 어떤 신자가 결심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단 한번”이라도 살아보겠다고 몸으로 실천하고 순종해 봤더니 차원이 다른 믿음의 세계로 들어감을 경험했다. 신기한 것은 한 번 실천한 본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청종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버리고 예배당에서 귀로 듣고 감동만 수 백 번 받아도 단 한 번의 순종이 각인된 경험이 있는 자를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단 한 번이라도 실천해 보자. 평생 말씀을 귀로만 들으면 평생 귀로 들음으로만 산다.
순종에 대해 이해을 넓히기 위해 정말 중요한 구약의 한 말씀을 살펴보자.
유명한 절구 신명기 28:2 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는 말씀을 읽었다 그런데 여기에 숨어 있는 묘한 구절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게 뭐가 중요한가? 여기에 “하면”을 잘 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하면"의 “면”은 히브리어용법 중 하나인 불변화사(不變化詞)라고 정의한다. 이게 뭐가 중요한지 살펴보자.
소사(小辭)라고 달리 부르는 불변화사(不變化詞 Particle)는 전형적인 굴절어(인도유럽어족 따위)에서 인칭,수,성,격 따위에 따라 어형변화하는 품사인 동사,명사,대명사,형용사 따위를 제외한 품사의 총칭을 말하는데 다른 언어에서도 대응하는 품사의 총칭으로 쓰인다. 부사 전치사 접속사 감탄사 조사 등을 말한다.
히브리어의 대표적인 불변화사는 헨(hen הֵן) 루(Lu) 룰레(Lulle) 악(ak) 아멘(amen) 감(Gam), 키(Ki)등이 있는데 본문의 신명기 28장 2절의 “~면”은 “gam”으로 읽는 불변화사로서 동사의 강조를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구약의 두 가지 불변화사의 예를 살펴보면 이해가 훨씬 쉽다.
첫째는 창세기 3장 6절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여기에 “~도”라는 말도 히브리어 감(גם : gam)이라는 불변화사이다. 여기서 불변화사 감(gam)을 쓰면 하와가 단순하게 손에 들은 과일을 남편에게 주었다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와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계속해서 몰입한 나머지 다른 이성적인 것 이론적인 것 상황적인 것이 모두 배제되고 자기 몰입 그대로 남편에게 전가(轉嫁) 시켰다는 의미다. 즉 같은 원리 같은 동기 같은 형태로 죄를 옮겼다는 의미다.
하나 더 보면 에서의 말에서 힌트를 얻는다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창 27,34).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야곱에게서 빼앗겼을 때 쓴 말인데 여기서 “~도”가 불변화사 גם 이다. 에서가 순간 화가 나서 예기 헸다기 보다. 더 큰 의미 즉 이제야 장자의 특권이 큰 줄 깨닫고 야곱이 가졌던 똑같은 생각과 감정이 이입되어 아버지께 한 말이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서 보면 신명기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여기서 “청종하면”이 그냥 귀로 듣는 의미겠는가? 아니다 계속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끊임없이 감정과 이성이 혼합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매일 각인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이 너무도 중요하고 소중한 순종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 순종의 형태를 자신의 경험으로 한 고백 형식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2:12) 라고 표현했다. 이구절을 또한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이 예수님의 속량을 통해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해한다. 그렇게 이해하자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받아라” 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루라라고 했다 “이루라”는 영어로 “work out” 헬라어는 κατεργάζομαι 로서 “κατα”는 아래라는 의미이고 “εργάζομα”의 합성어로서 “일, 행동”을 의미하는 ἔργον의 동사형이다.여기에 κατα를 합성하여 “끝장을 볼 때까지 끝까지 행동하라”라는 의미다. 얼마나 소중한지 두렵고 떨림으로 행동하라고 경고한다.
“광막한 공간의 자취 없는 궤도를 따라 세세토록 저희의 일정한 노선을 운행하는 별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천연계와 만물은 하나님을 순종한다. 그 대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호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넓은 공간에 널려있는 무수한 세계를 돌보시는 이는 동시에 아무 두려움 없이 노래를 부르는 작은 참새의 필요한 것들도 순종의 대가로 돌보아 주신다...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 인간의 불순종과 죄의 범위를 과소 평가하는 습관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마련된 은혜도 과소 평가하는 습관을 이루기 쉽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서 복음의 가치와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미구에 성경 자체까지도 내어 버리게 된다. ” 정로의 계단 보급판 169.170 대쟁투 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