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근대역사관(木浦 近代歷史館)
전남 목포시 중앙동 2가 6번지에 위치한 목포 근대역사관은 1920년대 건축물로 지상2층 벽돌조로
건축양식은 후기 르네상스 양식에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건물로서 일본을 상징하는 모양이 여러 곳에 새겨져 있는데
정면 입구에 태양문양, 좌측 상단부 벗꽃 문양과 건물내부 1층 벽면에 장식된 태양문양 등이 있다.
일제의 잔재, 군부시절의 헌병대 건물 등의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외면되어 왔으나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아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지난 1999년 11월 20일에 문화재(전라남도 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목포 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주식회사였던 건물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제의 대표적 수탈기관의 하나로 동양척식회사를 들 수 있는데 현재 목포시 중앙동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구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이다. 1920년께 세워진 것으로 가슴 아픈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목포시가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대해 알아보면, 일본이 우리나라의 토지와 농산물 등
경제수탈을 위해 세운 국책회사이자 착취기관이다.
척식(拓殖)이란 ‘식민지 개척’을 말한다.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모두 남의 나라 토지와 자본을 수탈하고 경영하고 장악하기 위해 만든 식민회사다.
일본은 1908년 서울(경성)에 동척 본점을 세우고, 부산·목포·이리·대전·대구·원산·평양·사리원 등
전국 주요 농업지역과 교통 요충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특히 동척 목포지점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이었다고 한다.
남한지역의 지점들은 현재까지 확인 결과로는 건물이 남아 있는 곳은 목포와 부산밖에 없고,
부산 건물의 규모는 목포보다 작으며
부산의 건물은 그동안 미문화원에서 사용하다가 반환되어 부산시에서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 운영 중이다.
1950년대 목포지도
목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7년 개항된 이래 식민지 거점도시로 이용되면서 급속히 성장한 항구도시다.
목포에 일제의 흔적이 유난히 많은 것은 1897년에 이루어진 목포 개항과 관련이 깊다.
호남에서 생산되는 쌀·목화·누에고치 등이 이곳에 집산되어 일본 고베항으로 실려 갔으며,
일본에서 가공된 물자는 여기서 하역되어 철도를 타고 내륙으로 흘러들어 갔다.
일제강점기 조선 7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쓴 팔굉일우 비석.
이 비석은 1940년 10월 27일에 목포여자중학교 국기계양대 앞에 세웠다가 해방 후 땅에 묻은것으로 추정된다.
'팔굉일우'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1910년 시정방침연설에서 "황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전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드는)
국가의 정신에 근거한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세운 구호였다.
목포근대역사관은 일제 강점기 수난의 역사와 1920년대말 잊혀져가는
목포의 옛 모습을 생생하게 되돌아 볼 수있는 역사인식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목화의 고장 목포>
1904년 고하도에서 육지면재배를 처음 시작하였음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
면화재배 30년 기념사업회에서 건립, 원형은 고하도 이충무공 비각 옆에 있다.
목포 근대역사관
첫댓글 씁씁한 우리의 역사네요.
그래도 교육을 위해서는 잘 보존해야겠죠.
예 이런곳이 있어 과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더라고요
일제의 침략의 유적지지만 잊지 말아야할 각성의 현장입니다.
맞습니다.^^
아이들 공부하는 모습이 참 인상깊었던 곳입니다~
예 토요일인데도 학생들이 견학하는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이 슬픈역사를 절대로 잊으면 안되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가슴 아픈곳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