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사도행전10장17~33절
제목 : 경계를 넘어선 만남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①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2절)
②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4절)
③그는 의인이요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22절)
④그는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33절)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 중에 사자를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게 하십니다.
고넬료는 그의 부하를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 보내어 그를 청합니다.
베드로도 그 시간에 환상을 보게되고 그를 찾아온 사람을 맞이합니다.
그들과 함께 유숙하고 이튿날 욥바에서 온 형제들과 함께 고넬료에게로 갑니다.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베드로가 견고한 인종의 벽을 부수고 이방인 고넬로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1. 고넬로의 사람들이 베드로를 방문(17~23절).
1) 밖에서 베드로를 찾습니다(17~18절)
“[17]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18]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환상의 의미를 의아해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문 밖에 도착하여 베드로를 찾았습니다.
여전히 자기가 본 환상의 의미에 대하여 골똘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성령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2)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19~20절).
“[19]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20]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고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나가서 그들을 만나 사연을 듣고 안으로 들여 함께 유숙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의 주도권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본문이 끊임없이 암시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일을 주도한 것이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문제가 되어 힐난을 받을 때 베드로가 다시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유대인 형제들에게 말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3) 고넬료의 말을 전합니다(21~22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고넬료는 세 사람을 보냈는데, 성령이 말씀하실 때는 두 사람이 찾아왔다고 한 것은 아마 함께 온 군인 한 사람은 숫자에서 빼고 사환 두 사람만 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예화-군인을 사람으로 계산하지 않음).
베드로는 이 일에 개입시키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왜 하필 베드로 일까?
고넬료가 그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며,
베드로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거침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시고,
바로잡으시기 위해, 또는 얽매인 고정관념이나 전통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10:28)이라는 전통과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들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28절)
이렇게 본다면 이 사건에서 고넬료가 단순히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이방인의 대표라는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이 사건에 등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쳐져야 할 부분은 바로 유대인들이 고쳐져야 할 부분입니다.
(행11:4~18)
3) 한 지붕 밑 세 가족이 머뭅니다(23절)
“[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베드로는 성령이 지시하신 대로 고넬료의 집으로부터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였습니다.
이 짧은 한 마디로 누가가 그려내는 기가 막힌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정한 사람 무두장, 거룩한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 그리고 깨끗지 못한 이방인의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같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이질적인 세 종류의 사람이 한 지붕 밑에서 같이 한 밤을 지내고 있는 충격적인 모습을 누가는 이런 식으로 생생하게 그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한 지붕 밑에서 유숙하는 무두장, 유대인 사도, 이방인(23절)이 머물고 있습니다.
무두장의 집에 유대인 사도가 여러 날을 머무르고 있다는 충격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한 이 사건은 마치 시리즈를 펼치듯이 부자연스러운(아이러니) 상황을 더해가다가 여기서 절정을 이루고, 무두장의 집에서 고넬료의 집까지 50km나 되는 먼 길을 세 사람의 이방인과 일곱 사람의 유대인이 한 무리를 이루어 걸어가고 있는 모습(23절)으로 진행되다가, “저희가(고넬료 집의 이방인들)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48절)는 말로 이 사건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 사도에게 자기 집에서 며칠 더 쉬었다 가라는 요청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전개를 통하여 누가가 시도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독자로 하여금, “무엇이 이러한 모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유발해 내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독자 스스로 그 대답을 얻어내게 하려는 것 아닌가?
펼쳐지는 상황들을 이와 같은 시각으로 접근하는 독자는 무너진 장벽과 편견의 현장을 생생히 확인하면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해서 가능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고, 결국 얻어 내는 결론은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대답입니다.
누가는 그것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자신은 한 번도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 담을 헐고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 베드로가 부정한 무두장의 집에 머물고 있고,
무두장의 집에 베드로와 고넬료의 집 사람들이 한 지붕 밑에서 같이 기거하며 밤을 지내고 있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함께 기거하며,
고넬료 집의 이방인들이 유대인 사도 베드로에게 며칠을 더 머물라고 요청하고 있는 장면(행9:43~10:48)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부정한 자와 거룩한 사도가, 더러운 자와 유대인이 함께 먹고 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이 아닌가!”하고 충격을 받는 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을 읽는 묘미이기도하고 사도행전을 설교하는 설교자의 즐거움이기도 하고, 본문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누가는 어떤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도록 독자의 상상력을 유발하고,
그 장면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누가가 전달하고 하는 메시지를 듣게합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시고, 에디오피아인 내시를 빌립과 만나게 하시고, 고넬료를 베드로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의 혈통적 장벽을 넘어서도록 하나님은 비상으로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지체들이 복음 전파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나와 만남을 갖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복음을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그것은 종교입니다. 취미 생활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종교에서 신앙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이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 속에서 살아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지는 삶이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날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자기 자신이 죄인으로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있는 현장을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요구하는 종교에서 주님의 요구를 생각할 줄 아는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베드로와 고넬료와 만남(24~29절)
1)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들어갑니다(24절).
“[24]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베드로가 욥바를 출발하여 이틀이 지난 뒤에 고넬료가 기다리고 있는
가이사랴에 오후 3시를 전후해서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굳게 믿고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굳게 믿고, 자신의 친족과 친구들까지 초청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 것은,
함께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2)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아 발 앞에 엎드립니다(25절).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가 베드로를 마중할 때 보여준 자세는 마치 신적인 존재나,
로마 황제를 대하는 듯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에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보여주며,
또한 고넬료의 겸손하고 순수한 성품을 나타냅니다.
특히 고넬료가 베드로를 대할 때 신적인 권위 앞에서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베드로를 환상 중에 경험한 천사의 말과 관계된 사람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고 하십니다(26절)
“[26]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고넬료의 행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겸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있으나, 한편으로는 사도와 일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로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 행위가 로마인들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4) 베드로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았습니다(27절)
“[27]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누가는 이 표현을 통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음을 강조하려 했을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배타적 우월감을 버리고,
15절에서 지시한 주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을 한 형제로 용납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17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경혐한 환상의 의미에 대해 고심했지만 지금은 그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베드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말합니다(28~29절)
“[28]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29]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고넬료 집 안에 모여 있는 고넬료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24절)을 향해 베드로는 자신의 방문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언급합니다.
즉 신7:3, 4규정을 확대 해석하여 모든 이방인과의 교제를 죄악시하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식품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대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베드로 자신의 고넬료집 방문은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넬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가 일종의 모험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3. 고넬료가 베드로를 부른 이유(30~33절).
“[30]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31]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32]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33]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0~32절은 10:4~6절의 말씀을 재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나흘전에 제구시(오후3시)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하여 사람을 보내었다고 합니다.
“나흘 전”이라고 하였는데,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한 날로부터(3절)나흘이 지났음을 밝히고 있는데,
고넬료의 하인들이 이틀 만에 욥바에 도착하였고(9절)
욥바서 하루를 묵고(23절),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 걸려 도착하였으므로 3박 4일이 지난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흘'이란 표현은 타당합니다.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 희고 빛난 옷은 거룩한 천사의 옷으로 자주 묘사됩니다(1:10;마 28:3;막 16:5;눅 24:4).
그리고 이제 오셨으니, 이제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넬료가 말합니다.(33절).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십니다.
둘 사이에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촉명받는 로마의 장교와 갈릴리 어부의 삶이 겹칠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유일한 교집합을 점점 넓혀가십니다.
기도하는 두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2,9절), 서로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하신 후에, 만남을 주선하십니다.
그렇게 분열의 높은 담장의 돌을 하나씩 덜어내심으로 만물을 통일하시고 인류를 화해시키시는 새 창조의 역사(엡1:10)를 진행하십니다.
2) 말씀 전할 자와 말씀 들을 자를 모두 준비시키십니다(19~23절).
사울을 두려워한 아나니아를 설득하시고 사울에게는 아나니아가 방문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처럼, 베드로에게는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하시고 고넬료에게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묵상과 기도를 통해 누구를 만나라 하시고, 누구를 초청하라 하시는지 귀 기울여봅시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24,25절).
이 모습은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기꺼이 빌립 앞에 엎드려 세례를 받았던 장면과 겹칩니다.
세상의 지위를 따지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낮춥니다.
나는 예배들릴 때에 주님의 임재 앞에서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나를 낮춥니까?
2)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성령에 이끌려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그들이 복음을 들을 대상이라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합니다(26~29절).
바울의 충격적인 회심과 즉각적 복음 선포와 비교하면, 베드로의 변화는 작고 느립니다.
그러나 그 느릿한 걸음으로 인종의 높은 벽을 완전히 넘어서는 순간이 오고 있습니다.
나도 느린 보폭일지라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걷다 보면, 놀랍게 변화된 자신의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