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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58회.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2000.02.26.)
58회 :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방송일: 20000226 조회수 : 1365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원고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방송/2000년 2월 26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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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규장각 안으로 카메라 들어가고 18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규장각. 여기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아버지의 흔적을
담아 놓은 책이 있다.
#영괴첩으로 z.i 6 -영괴첩이 그것이다.
#지도 f.s 4 -영괴첩에는 한 장의 궁궐지도가 있다.
#영괴대 나무로 z.i 8 -사도세자가 활을 쏘던 곳을 기리기위해 그린 온양행궁도.
#지도 f.s 5 -온양행궁은 이렇게 우리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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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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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
#기본세트...'영괴첩' 나와있다
-이 책이 "영괴첩"입니다. 신령스러울 '영'자에 느티나무'괴'자, 이름그대로 풀이하면 신령스러운 느티나무와
관한 기록이라고 할수 있는데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위해 아버지가 활을 쏘던 장소를 영괴대
라고 하고 그 내용을 이 한권의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책이 펼쳐지면서 '온양행궁도' 빠져나오고
-이 책에 바로 '온양행궁도'라는 지도가 들어있습니다. 예쁘게 채색이 돼있습니다.
온양행궁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바닥에 지도 깔리고 그 위를 걷는다
-지도를 보면, 여기 하얗게 표시된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임금이 다니는 길, 어도입니다.
어도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가면 내정전, 그러니까 왕의 침소가 되고, 이곳은 외정전, 집무실인 셈이죠.
그리고 담장밖으로는 건물이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 궁궐의 실무를 담당하던 상서원
같은 각종 정부 부서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울의 궁궐이 축소된 형탭니다.
-'온양행궁', 행궁이라는 말이 좀 낯설텐데요. 왕이 궁궐밖으로 나가서 행차할 때 머무르는 곳을 '행궁'이라고
합니다. 왕이 머무르니까 궁궐은 궁궐이되, 잠시 머무른다는 뜻인데요. 온양행궁도 왕이 행차를 하면서
머무르는 궁이었습니다.
-온양행궁은 지금의 온양에 있었습니다. 온양은 백제때부터 온천으로 이름난 곳인데요.
온천으로는 제법 유명했지만, 여기에 궁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온양행궁은 어떤 궁이었는지, 오늘 이시간에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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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온양 전경 pan 9 -온양에는 사도세자가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온양온천동 한가운데 있는 영괴대다.
#까치집 3
#영괴대 나무서 t.d
~현장음 살리고...여기서 활을 쏘았다. 저쪽에 과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조가 아버님이 활을 쏘던 데라
기념하기위해 영괴대라는 현판을 써서 내려보내고, 역대 왕들이 활을 쏘던 장소고.
#영괴대 비각에서 느티나무로 pan 9
-영괴대에는 지금도 세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240여년전인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가서 심은 것이다.
#마주선 나무 10 -활쏘던 자리에 그늘을 드리기 위해서 였다.
#비각으로 z.i 19 -영괴대의 사연을 듣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비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영괴대비다.
이 비에는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정이 담겨있다. 울창하게 자란 느티나무에 서린 아버지의 은덕이 후대에
까지 경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아들의 마음이다.
#비각에서 부감으로 z.o 18 -원래 온양행궁안에 있었던 영괴대. 영괴대는 이 일대가 온양행궁터라는 증거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온양행궁과 관련이 있는 또다른 흔적이 있다. 신정비다.
#걸어가고 10 -세조가 속리산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온양온천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온양행궁에
간 것이 계기였다.
~현장음 살리고...4일째 되던날 온천수 옆에서 물이 나와 전국 8도에 방을 돌리고 축하하던 유래가 있는데
#비 t.d 18 -뜨거운 온천수 옆에서 신기하게도 찬물이 샘솟는 것을 보고 세조는 길조로 여겼다.
그래서 '신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물이 궁안에 있는 뜰을 적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신정 또한 온양행궁 안에 있었던 우물이다.
#f.s 15 -현재 여기 남아있는 영괴대와 신정비는 이곳이 온양행궁터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온양행궁은 하루아침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일본 팜플랫 t.d 13 -일제강점기, 온양행궁은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 온양온천주식회사로 바뀌었고,
다시 신정관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었다.
일본에 의해 온천숙박업소로 변한 것이다.
#당시 사진 14 - 왕의 거처이던 정전이 있던 자리조차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단장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구한국 외교문서 표지 3 -일본의 온양행궁 파괴는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무단점용건 17 -일본인들이 온양행궁을 무단점거해서 파괴하자 대한제국 외부대신 윤치호는 일본공사측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정당통보 10 -그러나 일본공사는 어이없게도 행궁파괴행위를 정당한 것이라고 회신한다.
#온양온천에서 영괴대로 pan z.i 22
-그후 (사이) 사라진 궁궐, 온양행궁. 오직 영괴대와 신정비만이 당시의 자취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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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기본세트...온양행궁 지도 나와있고
-영괴대에 심어놓은 느티나무와 비각이 남아있어서 다행히 온양행궁의 위치를 가늠해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양행궁의 모습을 알수 있는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온양행궁이 어떻게 생겼는지 현재로서 알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바로 이 한 장의 지도, 온양행궁도 뿐입니다.
#온궁지도 확대되고
-자, 이 지도를 자세히 봐주십시오. 이 지도에서 누가 보더라도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건물이 있는데요.
바로 여기, 온천입니다.
온양은 예로부터 온천이 유명했으니까 궁에 온천이 있을수도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온천건물이 있는 위치를 보십시오. 궁 한가운데, 궁궐의 가장 핵심건물이라고 할수 있는 정전 바로옆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전과 함께 있는 온천건물. 그것은 온천이 얼마나 중요한 건물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왕의 온천이 있는 궁, 온양행궁. 실제 온양행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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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연구실로 들어가고 8 -온양행궁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궁궐 건축에 대해 연구중인 김동욱 교수를 찾았다.
#얼굴에서 책으로 10 -화성행궁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온양행궁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물로
평가했다.
~현장음 살리고...온양행궁의 경우는 온천을 목적으로 한것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건물이라고 볼수 있다.
보통 행궁이라는 것이 왕이 머무는 건물이 있고 신하들과 행궁에 가서도 만나기 때문에 두 개의 중심 건물이
있는데 온양행궁은 온천을 할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 있는게 가장 큰 특징이다.
#책 넘기고 5 -일반적으로 행궁은 그 쓰임에 따라 용도가 나뉜다.
#북한산 행궁 4 -피난용으로 만든 행궁이 있다. 북한산 행궁과 강화도 행궁이 여기 속한다.
#강화도 행궁 5
#화성행궁 5 -또 수원화성행궁과 같이 수도를 이전할 목적으로, 만든 대규모 행궁도 있다.
#국정기관 2D 그래픽(홍문과 상서원 승정원 사간원 한림원 25)
-그렇다면 온양행궁은 어떤 궁일까. 온양행궁은 궁궐의 특징을 그대로 옮겨왔다.
자문기관인 홍문관을 비롯해서, 궁궐의 살림을 담당하는 상서원, 왕명을 받드는 승정원,
왕에게 진언을 올리는 사간원, 왕의 칙령을 기록하는 한림원같이 왕을 보좌하는 주요 국정기관이 모두 있다.
#군사기관 2D 그래픽(수문장청 병조빈청 별무사청 무예별감청 17)
-뿐만 아니라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경호하기 위한 군사기관도 있다. 궁궐문을 지키는 수문장청,
병조대신들이 회의를 하는 병조빈청, 국방과 무기관련 관청까지, 서울의 궁궐이 옮겨온듯 하다.
#정전과 온천 2D 그래픽 15, 7
-온양행궁의 특징은 정전옆에 그 어떤 궁에도 없는 '온천'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온천, 즉 목욕을 위한 건물이 궁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 건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장각 외관 3
#서고안으로 12 -온천궁이었던 온양행궁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의문을 풀기위해 취재팀은 온양행궁에 관한 각종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귀중본 서고로 trk 12 -궁궐과 관련된 기록은 국가 기밀 사항이어서 일반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규장각에서 온양행궁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낼수 있었다.
#온궁사실 책 z.i 10 -귀중본 서고에 보관된 '온궁사실'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온궁사실은 아직 학계에서 조차도 해석되어 소개된 적이 없다.
#목차 넘겨서 보고 10 -이 책은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끈 부분은 온양행궁을 수리한 부분이다.
#장순용 소장 사무실 2s 6 -창경궁과 경희궁 복원설계를 했던 장순용 건축사와 함께 검토한 결과 온양행궁의
내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장음 살리고...온돌2칸이 있고, 온돌 아래 백휴지로 초배를 하고, 온돌방에 해당하고,
대청 4칸에 지게문 8짝,
#온궁수리부분 글귀 12 -온궁사실의 기록은 아주 상세하다. 행궁수리를 기록한 배설부분은 행궁의 주요시설
내부를 마치 보고있는 것처럼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벽지 꺼내보면서 이야기 하고 20
-실내에 도배하는 방법과 도배지의 색깔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사용된 벽지는 청색이나 백색 능화지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벽지모양이 운현궁에서 확인된 벽지의 문양과 동일한 것이었다.
@장순용 INT...일반 사대부집은 창호지를 써서 벽을 하얀 벽지로 해서 끝나는데, 궁궐에서는 치장성을 위해
벽지를 사용했다는 것이 이 기록에서 확실히 입증이 된다.
#벽지 6 -조선시대 궁궐전용 도배지는 마름모 문양의 능화지였던 것이다.
#사무실 pan 9 -온궁사실의 건물보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건물을 복원해보기로 했다.
#컴퓨터 화면 17 -건물 수리를 위해 언급해놓은 기록으로 정전을 비롯한 주요건물의 복원이 가능했다.
내정전과 외정전, 이 건물은 서울의 궁궐에 비해 크지 않지만 모양은 궁궐건축의 기본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장소장 지도 보는 모습 20 -그러나 문제는 온양행궁의 전체적인 배치다.
이 지도만으론 온양행궁의 규모와 궁궐의 모양을 알수 없다. 온양행궁도는 정사각형으로 돼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정사각형 모양의 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순용 INT...배치자체는 그린대로 똑같다고 할수 없고, 우리나라 어떤 궁도 방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환경이라는 것이 궁궐을 만들 때 특히 환경을 변하지 않고 만든다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철저하게 지켜져
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새롭게 완전히 지반을 평탄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림상으로 이상화
해서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trk 10 -궁궐의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기위해서는 온양행궁터의 지형 조사가 필요했다.
#아산시청 외관 4 -다행히 취재팀은 아산시청에서 1935년도에 만들어진 지적도를 구할수 있었다.
#지적도 찾고 4
~현장음 살리고...이 지적도가 아산시 지적도인데 온양온천동 지적도다. 이 위치가 온양관광호텔이다.
지번 설정은 1912년 일제때 지금은 구획정리로 바뀌었다.
#옛날 지적도로 z.i 24 -도시계획상 하천이나 주요통행로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지적도에서도 이런 특징이 확인됐다.
이 지적도를 통해 온양행궁터의 규모를 유추해볼수 있다.
~현장음 살리고...일제시대때 만들어진 지적도인데 요근래 만들어진 지적도하고 비교해봐서
여기가 행궁지인 것 같고, 여기가 개천이 흘러서 행궁이 이 개천을 넘어 갈수 없는 상황이고
#지적도 17 -지적도에 따르면 행궁근처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천을 중심으로 지적선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온양행궁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래픽(하천 표시되고) 14 -행궁은 하천 안쪽에 있었으며, 남서쪽과 서북쪽의 모서리가 안으로 들어간 형태로
추정됐다. 이렇게 자리잡은 온양행궁의 전체 규모는 약 6천평에 이른다.
#그래픽 정전 복원 55 -(보다가) 이를 바탕으로 온양행궁의 정전과 전체 모습이 드디어 복원됐다.
16칸 규모의 내정전을 중심으로 34개의 건물이 6천여평에 이르는 땅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던 궁궐.
이것이 바로 온양행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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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복원된 온양행궁 문열고 들어간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온양행궁입니다. 여기가 바로 정전입니다.
물론 이 건물은 서울에 있는 정전에 비해 적습니다. 늘 거주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의 규모로 왕의
권위를 살릴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만든 듯합니다.
#동쪽문으로 걸으며
-왕의 출입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래 궁궐건축의 기본은 남향입니다. 그러나 온양행궁은 왕이 드나드는 문이
동쪽으로 나있습니다. 온천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궁이기 때문에 형식에서도 벗어났던 것 같습니다.
#온궁지도 불러오고
-온양행궁의 특징은 다른 건물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온양행궁에서 왕이 사용하는 건물을 제외하고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한 건물이 부엌, 수라간입니다.
부엌이 안팎으로 나뉘어서 두군데나 되는 것으로 봐서, 왕이 행차하면서 함께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종친부'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왕의 종친들이 머무르는 공간이었는데요.
왕의 친척까지도 이곳에 왕을 따라왔던 모양입니다.
그외에도 땔감을 관리하던 관청, 음식을 총감독하는 관청이 있었는데요. '상의원'이라는 옷을 짓는 관청이
있었습니다. 보통 상의원이 왕을 동행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닌데요.
옷을 만드는 관청까지 여기에 동행해서 온 것을 보면, 왕이 장기간 머물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5명의 임금과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을 다녀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평균 35일정도를 머무릅니다. 이렇게 많은 왕이 온양행궁에 와서 한달이 넘도록 머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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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한학자와 독해하고 15 -'온궁사실'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위해 한학자 성백효 교수를 찾았다.
여기서 사도세자가 왜 온양행궁에 갔는지를 확인할수 있었다.
~현장음 살리고...종기가 곪기도 하고 혹은 터졌더라. 영조가 말하기를 동궁이 앉아서 말할수 있더냐?
#글자 짚고 8 -다리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온양행궁 행차는 추진된 것이다.
~현장음 살리고...여러 의원들이 온천이 언제 좋다고 하냐? 지금이 가장 좋다고 한다. 목욕에는 습창을 다스리는
데는 좋습니다.
#글자 짚고 7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가서 묵기위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준비물을 챙긴다.
~현장음 살리고...여기보면 약재가 들어갑니다.
#2s 11 -사도세자의 온양행궁 행차에는 궁궐안 약
방인 내의원에서 각별히 준비한 물건이 있었다.
#온궁사실에 약물 내용 그래픽, 목욕시 소용 24
-약재였다. 부용향 한재와 소목 한근, 울금 여덟량, 그리고 마시는 차로 알려진 당작설 여덟량이다.
특이한 것은 이것이 모두 목욕에 소용된 것이라고 적고 있다는 점이다.
#약재 꺼내고 10 -부용향은 왕실에서 쓰던 것으로 여러 가지 약재를 넣어서 만든 일종의 향인데,
그 용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 약재다.
#소목과 울금 15 -소목과 울금은 기를 원활하게 하는 효능이 있는데, 이 두가지가 배합될 경우 효과가 탁월하
다고 알려진 약재다.
@지창영 INT...울금은 뭉치고 막혀서 흝어지지 않는 것을 흝어주는 역할을 한다. 피부병 창질이 걸렸을 때
순환이 안됐을 때 기운을 풀어주는 것이다. 인체의 정상적인 기운이 환부에 도달할수 있도록해서 자연회복을
촉진 시키는 것이다.
#글 읽고 8 -치료에 쓰인 약재와 당시 사도세자의 증세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사도세자는 병의 근원이
단순한 종기가 아님을 알수 있다.
@지창영 INT...이것은 일반적으로 열이 심해서 창을 만드는 것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실제 왕세자가 다리에
창질을 앓고 있었지만 기록을 살펴볼 때 병의 근본이 되는 것은 화가 울한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동의 보감에도 창이 왕성한 것은 화가 왕성했을 때 창이 생긴다고 하고 있다.
요새말로는 울화통,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것으로 생각해볼수 있는 것이다.
#왕조실록 검색 16 -조선왕조 실록에서 온양행궁을 다녀간 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5명의 왕이다. 그들은 최고의 의료헤택을 받던 왕들에게도 종기는 난치병이었다고 보고 있다.
#김훈 컴퓨터 검색하고 16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을 연구하고 있는 부산 동의대 김훈 교수.
@김훈 INT...조선시대 역대임금뿐 아니라 일반백성들도 피부질환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학서적 안에도 피부질환이 상당부분 많이 기록돼 나오고 피부질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의학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로 보건데 피부병이 상당히 많았고 치료가 잘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볼수 있다.
#치종지남 책 30 -조선시대 획기적인 외과서적으로 손꼽히는 치종지남. 이 책이 나오게 된 것도 당시 사람들이
앓고있던 피부질환인 종기치료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종기치료를 위해 치종청이라는 종기전문치료 관청이
있었지만 대개 탕약이나 침술이 사용됐다.
그러나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찾게 되면서, 대담하게 환부를 절개하는 외과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피부병 10 -종기와 같은 피부병은 치료가 까다롭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인 탕약을 고집했다.
#현종실록 15 -현종은 5차례나 치료차 온양행궁을 방문했는데, 현종실록을 보면 어의들은 탕약과 같은 방법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어의들은 종기에 온천이 효과가 있다고 진단했다.
#온천물 13 -온천에서 그 증상에 따라 약물을 섞어 목욕을 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어의들. 온천은 종기치료를
위해 어의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처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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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정전 앞에서 온양행궁도 바라보다가
-부용향과 소목, 울금, 그리고 작설을 넣었던 약물탕이라? 좀더 효과적으로 온천욕을 할 방법을 찾은 모양입
니다. 이렇게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조선의 역대왕들은 온양에 가서 온천욕을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왕의 목욕시설은 온양행궁의 온천건물이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목욕을 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에서 목욕과 관련한 기록은 극히 제한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연산군 일기에 일반적으로 목욕을 어떻게 했는지 유추해볼수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연산군일기에 보면,
#실록 기록 불러오고(大鍮沐盆四 牢厚鑄成)
-대유목분사, 놋으로 만든 큰 목욕통 네 개를...
뇌후주성, 튼튼하고 두껍게 만들어라...
이 목욕통 네 개를 생일에 맞춰 대궐로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목욕통에 칠할 옻을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려보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궁궐안에서 목욕은 아마 목욕통이 소용됐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온양행궁의 온천에서도 목욕통을 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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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국립민속박물관 pan 11 -현재 목욕과 관련해서 남아있는 유물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목욕통은 물론이고, 목욕에 소용된 물건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수대야 24 -유일하게 목욕시 소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물건은 세수대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목욕용품에 대해서는 왕실은 물론, 일반 사대부가 사용했던 것마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목욕문화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온천 내부와 관련한 온궁사실 기록 15
-그러나 온궁사실에는 목욕시설인 온천건물안의 구조를 짐작할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온천에는 여러개의 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순용 INT...온궁사실하고 그림하고 확인해봐서 몇가지 단서는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우선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고, 량방이라고 기록이 돼있는데 목욕하고난 뒤에 시원하게
앉아있을수 있는 방이 북량방, 남량방 이렇게 있는 것으로 봐서 건물 자체가 목욕하고 관련된 시설로 준비
됐다는 것을 알수 있고, 또하나는 목욕은 일반건물이라고 치면 대청쯤 된 자리가 탕실로 된 것 같습니다.
#장소장 지시하고 10 -온궁사실의 기록에 의존해서 온천 건물 내부의 공간 배치 작업에 들어갔다.
#온천내부 배치 그래픽 24 -먼저 가운데 있는 탕실을 중심으로 남북으로는 통로로 보이는 협루가 있고,
찬바람을 쐴수 있는 방이 남북으로 하나씩, 동서에 온돌을 깐 욕실이 양쪽에 있다.
그리고 남북으로 협실이라는 좁은 방이 있었다. 이 가운데 온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탕실이다.
#탕실과 관련한 내용 그래픽 15 -온궁사실에는 탕실 보수부분을 언급하면서 이층 목층교와 상하 탕간석,
탕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빙천 걸어가고 10 -창덕궁 안에 있는 빙천을 간이 목욕시설의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가 있다.
전통공간에서 물의 흐름을 연구하고 있는 황용득 기술사다.
~현장음 살리고...사방이 구릉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비원에서도 가장 아늑하고 프라이버시가 보호될수 있는
적지로 보인다.
#가서 살펴보고 18 -빙천은 비원입구에서 30분 정도 걸어들어가야 할만큼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골짜기는 여름이면 나무로 둘러싸여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에 인공적인 시설을 만들어서
물을 흘려보낸 흔적이 남아있다.
~현장음 살리고...기존의 바위를 좌대형식으로 가공해서 여기서 발을 담그고, 앉아서 한여름에 등목을 하는
그런 정도의 목욕도 하면서 그렇게 유희적으로 이용한 시설로 볼수 있습니다.
#좌대 8 -물을 유희적으로 이용했던 조선시대 궁궐. 온양행궁의 탕실도 물의 흐름을 이용한 구조물이었을 것
으로 그는 추정하고 있다.
#사무실서 이야기 하는 부감
~현장음 살리고...지금 이밖에 표현한 것이 안의 구조를 설명하는 그림이 될수 있겠고,
#이어서 17 -황용득 기술사는 지도에 그려진 온천앞 구조물이 곧 온천안의 탕실구조로 보고있다.
건물밖으로는 실내에서 일단 한번 사용한 하수가 흘러나가게 되는데, 이 경우, 지하 배수시설을 통해 흘러가도록
만드는게 일반적이다.
~현장음 살리고...구조를 보면 온천물이 나오는 샘이 있는데 깊지 않았을 것 같고, 여기서 연결돼서 탕으로
가는데
#그림그리고 30 -두 개의 돌로 만든 탕 가운데, 하나는 온천물이 솟는 곳이고, 한곳은 목욕을 할수 있는 시설이
된다. 이런 전재하에 탕과 탕 사이에는 물길을 조정할수 있는 탕간석이 있었을 것이고, 이층 목층교는 탕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된다. 온양행궁에 있는 목욕탕의 독특한 시설일 것으로 추정된다.
@황용득 INT...이건 뜨거운 물이 존재해서 그런 물을 지속적으로 이용할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구조는 온천
이 위치한 곳이 궁궐이 있지 않으면 존재할수 없는 구조라고 볼수 있고,
특히 전통공간에서 대규모로 목욕탕이 만들어진 것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온천 기둥서고 공간분할되고 34 -12칸 짜리 온천 건물은 약 서른평 정도 규모였다.
(보다가) 왕은 북쪽문을 통해 온천건물 안으로 들어온 다음 협루를 거쳐 찬 공기를 쐴수 있는 양방을 지난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겉옷을 벗고, 실제 목욕공간인 탕실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해볼수 있다.
#탕실에 욕조 만들어지고 10 -10평정도 크기의 탕실에는 두 개의 탕이 있었고, 탕 가운데 하나는 목욕하기
좋게 식힌 온천수가 채워져 있어서 몸을 담글수 있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다.
#건물 한바퀴 돌고 지붕 만들어지고 35
-온양행궁의 온천은 왕의 목욕전용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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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복원된 탕실 안
-바로 이곳이 왕이 목욕하던 곳, 탕실입니다. 가운데 돌로 만든 큰 탕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두 개의 탕이 있었다는데, 앞에 보이는 이곳이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고, 옆에 있는 이 탕이
목욕탕이었던 것으로 추측해볼수 있습니다. 물론 탕 부근에는 모두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지엄하신 왕의 몸에 돌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탕안으로는 들어가는 계단이 삼면에 있고,
기록에는 열두폭짜리 푸른 목면 90척으로 휘장이 쳐져 있었다고 하는데 휘장이 어떻게 쳤는지 알수 있는
흔적이 없어서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탕에 물 채워지고
-이렇게 해서 물이 채워진 탕이 바로 조선의 궁궐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목욕탕인 셈이다.
#탕실 창 보고
-그리고 탕실의 창이 특이하지요? 햇볕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더운 습기를 빼기 위해 이런 모양의 창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습기제거에 신경을 쓴 곳은 창뿐만이 아닙니다. 벽에도 흙벽이 아니라 판자벽을 대서 도배를 한
것입니다.
#온궁사실 기록 불러오고
(梧桐瓢子, 黑眞漆盤, 大咸之朴, 軟朴, 鍮大也, 座子, 倚子, 手巾)
-목욕에는 어떤 용품이 필요했을까요? 온궁사실에는 당시 사도세자가 목욕을 하러갈 때 준비했던 목용용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동표자, 오동나무 바가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흑진칠반, 옻칠한 소반이 필요했다는데 용도는 분명히 알수 없지만 바가지나 이런 물건을 올려놓는 데
사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큰함지박, 연박...조그만 물바가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놋대야와 의자가 필요했군요.
또 수건도 14장이 필요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자주색 비단에 솜을 넣어만든 옷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요즘의 목욕가운쯤으로 생각하면 될 듯
싶습니다. 그러면 왕은 어떻게 목욕을 했을까요? 구한말까지 궁중에서 생활한 상궁들로 부터 궁중생활에 관한
내용을 채록했던 김용숙 선생의 이야깁니다.
#김용숙 선생 INT...왕은 목욕을 할 때 옷을 다 벗지 않고 했으며, 유모나 나이많은 상궁이 몸을 씻겨 주었다.
-왕은 목욕을 할 때도 옷을 다 벗지 않고 입고 했던 모양입니다.
-온천을 위한 궁궐이었던 온양행궁. 여기서 온천수로 목욕한 왕들은 과연 온천의 효험을 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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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온천물 쏟아지고 목욕하고 24
-온양에 온천이 발견된 것은 백제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리를 다친 학이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온양은 예로부터 온천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주민 INT...의술이 발달 안되고 병원이 없어서 전부 여기와서 치료받느라고 온양온천 전다리 모인다는
소리가 생겼다. 점심먹어가며 나아가니 신비의 온천이다.
#동의보감 4
#온천부분 20 -동의보감에도 온천수의 효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힘줄과 뼈가 오무라드는 경우,
특히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조선의 왕들이 온천을 찾은 것도 바로 이 온천수의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z.o 6 -그런데 왜 하필이면 조선의 왕들은 온양온천을 택한 것일까?
~현장음 살리고...서울이 있고, 백리권안에 이천에도 온천이 있었습니다.
황해도 평산에도 온천이 있었고,
#현종실록 기록 10 -현종실록에는 그 이유를 수온과 지리적인 여건으로 적고 있지만, 여기에는 의학적인 판단이
작용했다.
@이덕일 INT...온천이 있는 지역의 지방관에게 서울에 온천물을 올려보내게 해서 어의들이 임금이 겪는 질병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선별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세종 어진 19 -역대 왕 가운데 온천에 관심이 가장 많은 왕은 세종이었다. 고기를 좋아해서 어진의 모습과는
달리 살이 쪘던 것으로 알려진 세종은 안질, 두통, 등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학자들은 이 모든 병의 근원을 당뇨병으로 진단하고 있다.
@김훈 INT...세종임금은 30세를 전후해서 당뇨를 앓기 시작했는데 이후에 세종이 당뇨의 고충을 이야기 하면서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동이만 되겠느냐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건데 당뇨증세가 심했고, 합병증이 생겨 안질이 세종을 괴롭힌 질병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으로 z.i...훈민정음 z.o 30 -세차례나 온양행궁에 가서 온천욕을 했던 세종은 안질에 차도가 있어 마지막으로
온양에 다녀오던 이듬해, 훈민정음을 완성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재발이 잦아지자,
서울로 온천을 옮겨온다해도 다시는 온천욕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당뇨병을 앓았던 세종에게 온천욕 자체가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훈 INT...온천욕이 임금에게 있어서 질병치료의 근본적이 방법이 아니라 한정적인 방법이고,
온천수보다는 휴식 취하고 잘 조리해서 일시적이나마 효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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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
#온양행궁 안에서
-조선 왕조실록에 보면 당시 세간에는 목욕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말이 있었는데요.
"하루 목욕하면 3일 휴식하는 것과 같고, 이틀 목욕하면 엿새동안 휴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목욕이 휴식에 더할수 없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온양행궁에 행차한 왕은
택일을 해서 목욕을 하는데요. 사도세자의 경우 행궁에 7일동안 5차례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거의 매일 온천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온천욕 탓인지 온양행궁을 다녀간 왕들은 병이 나은 것은 아니지만 건강상태가 한결 나아진 상태에서 서울로
돌아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행차한 왕만 온천을 했을까요? 온양행궁도를 보면 목욕을 할수 있는 '온천'이라는 건물은 한곳뿐입
니다. 하지만 왕만 온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록 기록 불러오고(溫水湧出處 掘井造家 男婦皆得沐浴)
-세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온수용출처" 온천수가 솟는 곳에 "굴정조가" 우물을 만들고, 집을
지어서 "남부개득목욕" 남자와 부녀자들이 모두 목욕할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입니다.
이 지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어딘가에 지역주민들이 목욕 할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온양에서 그 흔적을 찾을수는 없었습니다.
#온궁지도 본다
-대개 온양행궁에 행차한 왕은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두달 이상 머무르는데요.
그렇다면 온천을 하는 것 외에 행궁에서 왕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요?
온양행궁에서 단지 온천욕으로 질병치료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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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f.s 10 -서울에서 온양행궁까지 가는 길은 머나먼
일정이었다.
~현장음 살리고...과천에서 하루를 잡니다. 그리고 수원까지 와서 하루자고, 직산을 거쳐서 마지막날 천안을
거쳐서 온양으로 오는 코스다.
#지도 18 -서울을 출발한 행렬이 온양행궁에 당도하는 데는 보통 3박4일이 소요됐다.
온양행궁은 대부분의 왕이 서울을 떠나 가장 멀리까지 행차한 경우에 해당한다.
서울에서 온양까지는 240리. 백리밖을 벗어난 것이다.
#백리권 표시 9 -그러나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은 백리밖을 나가지 않았다.
@김문식 INT...굉장히 이례적이다. 조선시대 왕이 궁궐을 벗어난 케이스가 그렇게 많지 않고 궁궐을 벗어나도
도성을 벗어나는 경우가 드뭅니다.
도성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경기도 일원에 왕릉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경기도를 방문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런데 온양처럼 도를 지나서 충청도지역까지 가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라 할수 있습니다.
#화성능행도 19 -조선시대 왕의 행차는 대부분이 선왕의 릉을 방문하는 경우였다. 왕릉은 경기도 일원에 흝어져
있기 때문에 왕의 행차는 백리안, 그러니까 경기도 일대에서 이루어졌을 뿐이다.
#군사에서 사람들로 pan 15 -강력한 왕권으로 왕이 곧 정부였던 조선에서 왕의 행차에는 대규모 군대와 인력이
동원됐다. 사도세자의 행차에도 군사가 8백명과 수행인원이 560여명에 이르렀다.
#집앞서 구경하는 사람들 7 -행차를 구경하러 오는 인파도 많아서 왕의 행차는 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최대행사
였다.
@김문식 INT...1795년에 정조가 화성행차할 때입니다. 이때 규모를 보면 관원 및 병력이 대거 동원되는데요.
행렬에 나타난 인원이 1200명, 말이 8백필정도 동원되고 행렬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동원된 인원은
6천여명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왕이 한번 행차한다고 하면 최소한 수백명이상이 일거에 동원되는 큰 행사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온주지 29 -온양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온주지'에는 왕의 행차때 지역수령들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인근의 마흔개 고을에서 도로정비와 행궁수리는 물론 진상품을 나눠서 전담한 기록이다. 왕의 행차는 지역주민
들에게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었음을 알수 있다.
#온양행궁지에서 z.o 14 -따라서 왕의 행차에는 반드시 지역민에 대한 배려가 따랐다. 그중의 하나가 지역에서
치러지는 과거시험이었다.
~현장음 살리고...거의 온궁에서 이쪽으로 구릉지대였다. 무과시험을 이 일대 하지 않았나.
왕을 모시고 온 군사들이 서울에서 무과시험에 합격을 못하니까 여기와서 시험을 보는거예요.
이 사실을 조정에서 알아서 요즘 말로 하면 주민등록 확인해서 이 일대 사는 사람만 응시자격을 주고
#현종실록 14 -현종6년, 온양에 행차한 왕은 과거시험을 치르는 목적이 지역민에 대한 혜택인 만큼 반드시
충청도에 거주하는 사람만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고 있다.
#과거보는 그림 30 -지역에서 치러지는 과거시험은 응시자가 적다는 점을 이용해서 타지인이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치러진 시험에서 문과 7명, 무과 200명을 선발했다.
그러나 별시에 통과된 경우, 서울에서 관직에 임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행차할때마다 거의 매번 별시과거를 치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덕일 INT...국왕은 일반백성들과 접촉이 차단된 존재기 때문에 일반백성과 접촉할때는 자기 자신이 성군
이라는 이미지를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중 하나가 그 지역민에게만 실시하는 과거를 실시
하는 것이고
#맹사성 고택안으로 들어가고 -지역에 대한 혜택이 과거시험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현장음 살리고...온궁에 많은 왕들이 오셨는데, 영조가 오셔서 효성이 지극한 맹정승에 대해서 치제를 지낸곳.
#pan 하고나면 9 -우의정을 지낸 맹사성은 늙은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세 번이나 벼슬을 마다하고 사직을 원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다.
#마루 25 -온양행궁에 행차한 영조는 신하를 시켜 맹사성을 위한 치제를 올리게 했다. 이렇게 행궁에 행차한
왕들은 모두가 효자 효부에게 상을 내리고, 덕을 치하했다. 그리고 지역의 70세 이상 노인에게 관직을 주고,
음식물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질병치료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렇게 지역주민에게 관심을 보인 데는 이유가
있다.
#기록 15 -현종12년, 대사헌 조복양은 온양 행차의 뜻을 현종에게 아뢴 기록이 있는데, 행차는 그 뜻이 백성을
살피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김문식 INT...조선시대 국왕은 거기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나서 민원사항을 청취
하고 정책이 민의 생활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확인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또 국가에 바치는 조세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그런 조치도 있었습니다.
#지도의 온천건물에서 z.o 15
-왕의 온천이 있었던 온양행궁. 질병치료를 위한 휴식궁이었던 온양행궁은 지역에서 왕의 생활을 엿볼수 있는
역사의 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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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7(클로징)
#복원된 건물 앞으로 걸어오면서 '行幸'글자 불러오고 h
-왕이 궁궐밖으로 행차하는 것을 行幸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왕의 행차는 복을 입을수 있는
좋은 일이라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왕의 행차는 백성들에게, 특히 지역주민들에게 적잖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역주민만을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하기도 하고, 효행상을 주는 등 각종 혜택을 줬던 것입니다.
#온양행궁도 불러오고
-우리나라 궁궐가운데 유일하게 왕의 목욕전용건물이었던 온양행궁.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남긴 이 지도와 '온궁사실'을 통해 온양행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당시 모습을 복원할수 있었습니다. 국정을 보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질병이 많았던 조선의 왕들.
왕의 질병을 치료하기위해 만든 온양행궁은 조선의 휴식궁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휴식과 치료를 하며 머무르는 동안 온양행궁은 국정을 보던 또하나의 궁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