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 / 조미희
산동네를 잘라 색종이를 만들었다
가장 화려한 십이월의 누더기가 천장에서 달이 되어 흔들렸다
세 개의 계절은 늘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겨울에서 오래도록 연체되었다
숫자들의 악랄한 소진 법,
챙긴 것들이 없다고
앙상한 숲의 간격들을 내보이지만
겨울은 챙기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계절
잡목 숲은 오감을 잃은
나목들이 피부로만 숨을 쉬었다
십이월은 나무들만 추운 게 아니다
입김의 계절은 아주 조금씩 무너지지만
영하의 빗방울은 헐벗은 고드름을 선물했다
그것은 투명하다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푹신한 눈이 겨울에는 맞다
숲이 버리고 간 목소리를 주워 밤이면 바람의 흉내를 냈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이 흐느꼈다
함께 흐느낀다는 건 따뜻한 이불 같다
목도리가 알알이 빛나고 있다
일에서 십이까지의 숫자들을 꽁꽁 묶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겨울까지 돈 벌러 온
계절 직종의 위장술
주머니는 다 어디 갔는지
아무리 뒤져도 일밖에 없는 계절이다
공기는 수요와 공급처럼 약삭빠르게 자리를 바꾼다
최저 임금 상승만큼 살짝 올라가는
1월의 기온을 기다린다
-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 조미희 시인
- 서울 출생
- 시집 <자칭씨의 오지 입문기>
《 심사평 》
* 새로 발음하고 새로 뜻을 새기며
- 심사위원: 문혜원, 최현식, 김병호
《시인수첩》은 시인들이 문예지별로 무리를 짓고 벽을 세우는 것을 경계하며, 오로지 다양한 개성을 지닌 시인들에게 폭넓은 발표 지면을 제공하는 것을 잡지의 역할이라 여기고 있다. 더불어 《시인수첩》이 시 전문 계간지로서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몫과 사명은, 개성적 미학과 참신한 가능성을 갖춘 능력 있는 신인을 발굴, 육성하여 우리 시문학의 뿌리를 튼실히 하고 그 열매를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
종합 문예지였던 《문학수첩》부터 시 전문 계간지로 새롭게 출발한 《시인수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소설가로는 이장욱, 조정현, 윤성호, 남한, 서유미, 주영선 등이 있으며, 시인으로는 신혜정, 안승범, 이진희, 이병일, 황수아, 박소란, 배수연, 오성인, 석미화, 이병철, 평론가는 강정구, 정주아 등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우리 문학사의 한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제 몫을 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안목과 역할에 대한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절감한다.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응모자 수가 다소 줄었다. 사회·정치적으로 숨 가쁘게 보낸 한 해였기 때문에 격변의 이슈들 사이에서 시의 자리가 위축되었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여전히 시가 우리 시대의 위로가 되고 깃발이 되고, 나침반이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응모자 수는 줄었으나 응모작의 질적 밀도나 수준이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음이 이에 대한 방증이 될 수 있겠다.
본심에 오른 이들은 김재희, 김태우, 신윤서, 신희진, 이교전, 조미희, 조긍, 한형석, 한휼 등 아홉 명이었고, 심사의 최종심에서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치열한 각축을 벌인 것은 김재희, 한휼 씨의 작품들이었다.
먼저 김재희 씨의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예각의 시선과 그것을 안정적인 문장으로 잘 다듬어내는 솜씨에 동의를 모았다. 그러나 시 전반의 사유들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과연 시인이 이러한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한휼 씨의 경우, 거침없이 뻗어가는 사고와 문장이 돋보였다. 그러나 안에 담긴 서사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국한되어 있고, 그 내용도 통속적이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비유와 묘사는 상식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응모한 몇몇 작품은 빼어난 수준이었으나 함께 응모한 작품을 전체적으로 볼 때 당선자로 선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직 《시인수첩》에서는 평론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심사까지 몇몇의 응모자가 있긴 하였으나 심사위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우리의 시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우수한 작품뿐만이 아니라 이를 텍스트 삼아 연구하고 비평하며 시의 가치를 부여하는 평론가의 몫이다. 이에 《시인수첩》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역량 있는 신인 평론가를 기다리며, 적극 지원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다음 기회에는 예비 평론가들의 더 많은 응원과 도전을 기대한다.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된 두 시인에게 격려와 축하의 말을 전한다. 지금의 작은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 발음하고 새로 뜻을 새겨 오로지 자신만의 시를 세워나가길 응원한다.
《 집중심사평 》
*장롱 속 지우개의 십이월은 어둡다, 아니 투명하다
당선자 조미희의 집중심사평 - 최현식
삶의 고통을 더욱 배가하는 환란의 지속적 발생은 시(인)에게 과연 행운일까. 서사적 충동보다 서정의 감각이 현실성찰을 향한 언어적 격발에 시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시적 언어의 격발은 잘 준비된 총기와 유연한 자세가 동반되지 않는 한 대상의 심장을 꿰뚫기 어렵다. 일상을 향한 날카로운 눈빛만큼이나 언어와 형식에 대한 집요한 단련이 없다면 시는 방향 없는 감정의 폭발로 산탄散彈되기 마련이다.
조미희의 시는 현실과 언어, 감각의 탄착점 형성에 의미 있는 솜씨를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일상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번쯤은 뒤돌아보게 만드는 감각의 운용이 돋보인달까. 궁핍한 자들의 12월을 “산동네를 잘라 색종이를 만들었다”(「십이월」)는 표현은 어떤가. 이 ‘색종이’는 화려한 색상 뒤에서 한 번도 꺼내지지 않았을 침묵의 파편들이겠다. 그러나 이 침묵의 모나드들은 우울하지 않고 현실을 향해 늘 투명하려고 분주하다. 새 시인의 “지우개 사용법”과 대상이 지워진 자리에 탄생하는 빈 공간에 자주 눈길이 머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는 “맑은 구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거나 이제 “먹구름” 밟을 일만 남은 “당신을 위해 지우개 사용법을 권”(「지우개를 사용하세요」)한다고 적었던가. 그 실례로 「이상한 교실」과 「조언들은 다 죽었다」, 그리고 「장롱」을 들어보면 어떨까. 이것을 꿰뚫는 “폐허의 별”에 대한 상상력은 그러니까 우리들은 내남없이 ‘폐허’를 남기는 자들이라는 것, 아니 스스로 폐허로 전락하나 그것을 외면하는 비참한 실패자라는 것을 조곤조곤 암시한다. 그러나 끝내 “장롱은 목성木性으로 떠났다”고 썼던가. 그렇다면 ‘폐허’가 됨으로써 오히려 ‘인간성’으로 회귀하는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인 조미희가 시라는 “이상한 교실”에 놓인 언어의 “장롱”을 헤적여 우리에게 들려줄 “조언”의 한 방향일 것이다.
어려운 시업을 향한 당선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아무리 뒤져도 일밖에(물론 시의 일!) 없는 계절”을 명랑하게 통과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