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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3년(성종 24)~1534년(중종 29) = 42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 사간(司諫)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자는 언주(彦冑), 호는 야천(冶川)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합천(陜川)이다. 아버지는 이조 정랑(正郞)박조년(朴兆年)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현감(縣監)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조부는 상주목사(尙州牧使)박임종(朴林宗)이다. 선조(宣祖)의 국구(國舅)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박응순(朴應順)의 아버지고,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조부이다. 송당(松堂)박영(朴英)의 문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로서 활동하다가, 훈구파와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의 박해를 받고 귀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18년(중종 13) 가을 향시(鄕試)에 1등을 차지하고, 1519년(중종 14) 봄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해에 치러진 식년 문과(文科)에서 갑과(甲科) 장원(壯元)을 하였는데, 회시(會試)에서 고강(考講)할 때 강석(講席)에 나아가서 시관(試官)의 질문에 차분하고 상세하게 응대하니, 여러 시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기를, “오늘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子)에 임명할 적임자를 얻었다” 하였다. 그때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조광조가 시관으로서 강석에 참석하여 말하기를, “그 인품을 보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필이면 정자(正字)에만 임명되리라고 기대하는가?” 하였다. 당시 과거의 대과(大科)에 을과나 병과에 합격하면, 대개 정9품의 홍문관 정자나,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 박소가 대과에 장원 급제하자, 여러 시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과연 조광조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 하였다.
중종 때 조광조가 과거의 개혁을 주장하여,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문장으로 사람을 뽑는 것보다 인품으로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박소는 이미 현량과에 추천된 인물 속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굳이 과거의 3과(科)를 볼 필요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향시·사마시·회시를 정식으로 치루고 대과에 갑과 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해 10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 등 사림파가 몰락하였는데,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그는 현량과에 뽑혔지만 식년과(式年科)에 정규적으로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기 때문에 <기묘사화>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20년(중종 15) 1월 성절사(聖節使)박영(朴英)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522년(중종 17) 9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그해 11월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1523년(중종 18) 4월 이조 좌랑(佐郞)이 되고, 1525년(중종 20) 1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그해 7월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527년(중종 22) 6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고, 그해 8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1월 다시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가, 도로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그는 조광조를 추종하는 신진 사류(新進士類)와 함께 조광조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1529년(중종 24) 10월 평안도 어사(御史)로 파견되었고, 다음해 1530년(중종 25) 4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으나, 전한(典翰)조종경(趙宗敬) 등과 함께 척신 김안로 일당을 탄핵하려다가, 사전에 일이 김안로에게 누설되면서, 도리어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그는 여러 번 권신 김안로 일당을 탄핵하였으므로, 그들의 미움을 사서 그해 12월 파직당하였다. 그때 마침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이 밀양(密陽)에서 어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서 그 대신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그는 이언적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하여 언행을 삼가고 그와 만나는 것조차 꺼리고 피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언적도 사간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당시 박소는 이미 사림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므로, 남곤(南袞) 등 훈구파의 견제를 받고, 척신 김안로 일파의 시기를 받아,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는 경기도 남양(南陽)의 시골집으로 은둔하여,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고, 겨우 1년 만에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합천(陜川)으로 내려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독서에 정신을 쏟았다.
1534년(중종 29) 8월 21일 병약했던 그가 돌아가니, 향년 42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였다. 유작(遺作)으로 『반양이선생유고(潘陽二先生遺稿)』가 남아 있는데, 그의 조상인 박상충(朴尙衷: 좌의정박은의 아버지)과 박소(朴紹)가 지은 글을 합쳐서 편찬한 책이다. 두 사람은 반남박씨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유학자였다.
성품과 일화
박순(朴淳)이 지은 그의 비명(碑銘)에는 그의 자품이 특이한데다가 학문까지 몸소 실천하고 터득하여, 마음이 밝고 모습이 한가로웠는데, 관대하면서도 절제하였고, 화합하면서도 시류(時流)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그에 관하여 참되고 솔직하여 거짓이 없이 한결같았으므로 모두 그를 옥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8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서 경상도 합천(陜川) 야로현(冶爐縣)으로 내려가서 외가(外家)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기질과 특출한 품성으로 사람들이 이미 큰 사람이 될 만한 그릇으로 여겼다. 나이 겨우 10여세 때 외조부 윤자선이 병을 앓았는데, 그가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곁에서 간호하자, 외조부가 칭찬하기를 “이런 손자 하나를 두었으니, 나의 병이 낫고도 남겠다.”고 하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유학의 도(道)를 탐구하려는 뜻을 지녔다. 조광조의 스승 한훤(寒喧)김굉필(金宏弼)이 일찍이 합천 야로현 말곡촌(末谷村)에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훌륭한 인품을 자주 이야기하자, 그 말을 들은 박소는 김굉필을 사모한 끝에 그 문하에서 수업한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 언론과 행실을 일일이 기록하고 체득하였다. 그때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 김종직·김굉필 등이 연산군에게 살륙(殺戮)을 당한 직후였으므로, 유학자들의 사기(士氣)가 꺾여서 모두 학업을 포기하였으나, 박소는 혼자 낙망하지 않고 뜻을 기울여 학문을 갈고 닦았다. 어린 나이에 가야산(伽倻山)의 절로 들어가서, 주자(朱子)의 『근사록(近思錄)』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을 읽으면서 사색하고 궁리하느라고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25세에 과거에 응시하기 전까지 산사(山寺)에서 혼자 수학하면서 어머니에게 문안드리는 일 이외에는 7~8년 동안 산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그 뒤에 송당(松堂)박영(朴英)의 학문이 깊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식견이 더욱 넓어지고 행실이 더욱 독실해져서 주자학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한 시대의 젊은 유학자들이 모두 그와 사귀기를 원하였고, 스승 박영도 칭찬하기를, “그대는 나의 스승이지, 나의 제자가 아니다.” 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맹자(孟子)』를 읽으면 문장에 능하다고 말하지만, 나의 생각에는 『논어(論語)』가 더욱더 절실하다고 여긴다.” 하고, 매달마다 반드시 『논어』를 한 차례 읽었다. 그가 일찍이 동료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먼저 흩어진 마음을 수렴하여 근본을 함양하고 의리와 이끗을 분변하여 대체를 수립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현(聖賢)의 한마디 이야기나 한마디 말씀이 모두 지극한 가르침이다. 그에 따라 나아간다면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문장은 평이(平易)하고 전아(典雅)한데다가 이치가 정연하고 문법이 순조로운가 하면 시(詩)도 온후(溫厚)하고 평담(平淡)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가 지은 시를 보면, “마음이 없으면 망각하기 일쑤이고, 뜻을 두면 도리어 부자연스럽게 된다, 긴장과 휴식이 적절하면 효과가 있는데, 이것이 망령의 인연을 없애준다.[無心每到多忘了 着意還應不自然 緊慢合宜功必至 寔能除得妄中綠]” 하였는데, 학자가 학문을 할 때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파직되어 배를 타고 남쪽 시골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읊은 시를 보면, “앞에는 명리(名利) 길이 몇 천 개나 있는데, 강상(江上)으로 돌아오니 고기잡이배만 있구나. 물과 같은 한 마음을 몸 안으로 거두고, 구름 같은 세상 만사를 하늘에다 부치노라.[名利前頭路幾千 却來江上有漁舡 一心似水收吾內 萬事如雲只付天]” 하였는데, 그는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작은 배를 타고 낙향하는 심정을 읊고 있다.
영남학파의 태동
1517년(중종 12)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왔다. 박소와 인척 지간이었던 김안국은 평소 젊은 박소의 판단력을 존중한 나머지 모든 일을 반드시 자문한 뒤에 시행하였다. 어느 날 김안국이 한 편의 글을 지어서 박소에게 보이며, “내가 도내(道內)의 선비들로 하여금 이것을 모범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고 싶은데,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박소가 말하기를, “이는 상공(相公)께서 인재를 육성하려는 아름다운 뜻이므로, 초학(初學)인 저로서는 감히 무어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글이 주자의 ‘십훈(十訓)’과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 더 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김안국이 깨닫고 웃으며, “내가 관찰사로 부임하고부터 주야(晝夜)로 생각하여 이 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별로 긴요하지 않은 데에 공력을 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자기가 지은 글을 찢어버리고 주자의 ‘십훈(十訓)’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규약(規約)을 써서 군현(郡縣)으로 내려 보내어 도내 모든 고을의 학교 벽에다 이것을 게시하여 영원히 법도로 삼도록 하였다.
박소는 관찰사김안국을 도와서, 경상도에 주자학의 학풍을 진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때 경상도 각 고을의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반드시 주자의 훈육(訓育)을 체득하게 하고, 서원에 규약을 마련하여 유생들에게 주자의 성리학을 학습하게 하였다. 경상도에서 이처럼 유풍(儒風)을 진작시킨 결과 안동(安東)에서 퇴계(退溪)이황(李滉)과 김해(金海)에서 남명(南冥)조식(曺植)이 나타나서 영남학파를 일으켰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1616년(숙종 22) 7월 나라에서 문강(文康)의 시호를 내려주었다. 비명은 박순(朴淳)이 지었다. 1534년(중종 29) 12월 경상도 합천 야로현 서쪽 화양동(華陽洞) 괘산(掛山) 남쪽 산등성이에 외조부 현감윤자선과 나란히 묻혔다. 그보다 44년 뒤에 향년 85세로 돌아간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경기도 양주(楊洲) 풍양현(豊壤縣) 남쪽 금촌리(金村里)에 따로 묻히었는데, 묘표(墓表)가 있다.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2남 박응순(朴應順)은 선조의 국구(國舅)가 되어 돈녕부 영사(領事)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이 되었고, 3남 박응남(朴應男)과 4남 박응복(朴應福)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는 그의 손자 박동로(朴東老)·박동현(朴東賢)·박동선(朴東善)·박동량(朴東亮)·박동설(朴東說)·박동망(朴東望)과 증손자 박원(朴垣)·박엽(朴燁)·박정(朴炡)·박황(朴潢)·박의(朴漪)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재상이 된 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그는 일찍 죽었으나, 그 자손들이 출세하여,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전라도 나주(羅州)의 반계서원(潘溪書院)과 경상도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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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양이선생유고 ( 潘陽二先生遺稿 ) 1669(顯宗 10), 木版本, 32.9×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