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剛齋先生集卷之九 / 墓表 / 三洲崔公墓表
崔希說 | 1536 | 1607 | 水原 | 景賚 | 三洲 |
余嘗序錦城之草洞八賢行錄。而知三洲崔公之賢矣。今於墓文之請。顧何可終辭。按公諱希說。字景賚。崔氏。系出水原。高麗隋城伯文惠公諱永奎。爲鼻祖。高祖諱淳。敬差官。曾祖諱賁溏。僉使。祖諱瀛。參奉。考諱樂竆。濟用監正贈左承旨。妣光山金氏。部將攀女。公生于嘉靖丙申。姿貌魁偉。性度溫和。僉使公墓在草洞西麓。有人作室。近犯塋域。承旨公爲移奉先世祠版。方抵京。公時未冠。卞于官而毁其家。人皆器之。受業於栗亭崔公鶴齡之門。孝友文雅。崔公甚期許之。萬曆癸酉司馬。壬午登明經第。歷典籍,兵禮二曹佐郞。出監珍原縣。有淸政碑。時東西分黨。朝象不靖。公與同閈柳南湖溵。謝仕南下。詩以見志。有靑雲難入手。白髮易生頭。床上黃金盡。歸歟碧海秋之句。李山海。公之中表親也。時秉銓。勉留公。公曰。今日朝論携貳。不務鎭靜。互相攻擊。欲以我爲鷹犬用耶。浩然而歸。斂跡鄕園。與洞裏七賢。築精舍於寶山下。講討從容。任眞逍遙。庚寅。丁承旨公憂。戚易兩盡。壬辰亂。大駕播越。與張野憂以吉。上疏請回鑾豐沛鄕。以爲根本圖。戊戌權元帥慄。留陣順天府。移書請共濟艱難。公與洪松㵎千璟,張松亭以慶諸公。募兵鳩粟。以助軍勢。癸卯。丁內憂。過哀成疾。纔闋服。卒于丁未正月六日。享年七十二。松亭張公文以哀之曰。七十居喪。先儒危之。三年執禮。是爲病根。公旣死安。我又何哀云。墓在水多面芽界山酉坐原。配耽津崔氏。卽栗亭公之女。柔嘉靜淑。甚有婦道。沒後公十四年。而月日則同。墓公墓右麓巽坐原。有二男一女。男長纘。當昏朝。作大君哀歌。爲凶黨所構。六載錮囚。仁祖反正後。官直長。次繼生員。女適徐景介。纘一男二女。男仁嶫。女適李克承,張承後。繼二男二女。男仁峻,仁㠎。女適生員梁軫南,承訓郞羅好義。庶子仁岫。女奇國柱。仁嶫二男一女。男東漢,東渭。女適張溟翮。庶子東泌東洤,東𣼳。女李敬亮,閔計鄭望起。仁峻無子。以東渭爲后。仁㠎一男東洙。玄孫以下。不能盡錄。其顯者七代孫昌國文科參知。八代孫逵翰文科正言。噫。以公文學才猷。不事進取。相時恬退。操守可觀。而鄕慕先生之風。社擧俎豆之禮。且其家庭所授。弟效忠貞於壬辰。男著節義於昏朝。觀於此。尤可以知公矣。今來請文者。八代孫碩翰。九代孫基馨。而伐石刻竪。終始致力者。七代孫孝國云。
강재집 제9권 / 묘표(墓表) / 삼주 최공 묘표〔三洲崔公墓表〕
내가 금성(錦城 나주)의 〈초동팔현행록(草洞八賢行錄)〉에 서문을 쓴 적이 있었는데, 삼주 최공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았다. 지금 묘문(墓文)을 청탁하는데 어찌 끝끝내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희열(希說), 자는 경뢰(景賚)이다. 최씨는 선계가 수원(水原)에서 나왔으며 고려 시대의 수성백(隋城伯) 문헌공(文惠公) 휘 영규(永奎)가 비조이다. 고조는 휘 순(淳)으로 경차관(敬差官)이며, 증조는 휘 분당(賁溏)으로 첨사(僉使)이며, 조부는 휘 영(瀛)으로 참봉이다. 부친은 휘 낙궁(樂窮)으로 제용감 정(濟用監正)을 지냈으며 좌승지로 추증되었고, 모친은 광산 김씨로 부장 반(攀)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 병신년(1536, 중종31)에 태어났다. 용모가 뛰어나고 성품은 온화하였다. 증조부 첨사공 묘가 초동(草洞)의 서쪽 산기슭에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지으면서 무덤 영역을 바싹 침범하자 승지공인 부친이 조상의 사판(祠版 신주(神主))을 옮겨서 봉안하려고 서울에 왔다. 공은 당시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관청에 해명해서 그 집을 무너뜨리자, 사람들 모두가 크게 될 그릇으로 여겼다. 율정(栗亭) 최학령(崔鶴齡)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효우(孝友)하고 학문이 뛰어나 최공이 대단히 기대하였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6)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임오년(1582, 선조15)에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전적(典籍)과 병조와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고, 진원 현감(珍源縣監)으로 나갔는데 청정비(淸政碑)가 있다.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당(黨)이 나누어져 조정의 형편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공은 같은 마을의 남호(南湖) 유은(柳溵)과 함께 벼슬을 사직하고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시로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는데 아래와 같은 시가 있다.
청운은 손에 넣기 어려운데 / 靑雲難入手
백발은 머리에서 쉽게 자란다 / 白髮易生頭
책상 가 황금이 바닥났으니 / 床上黃金盡
푸른 바다로 돌아가야 할 때로다 / 歸歟碧海秋
이산해(李山海)는 공의 중표친(中表親 내외종(內外從) 형제)이다. 당시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에게 머물기를 부탁하자, 공이 “오늘날 조정 의론이 분열되었는데 진정하는데 힘쓰지 않고 서로 공격하고 있다. 나를 응견(鷹犬)으로 사용하려는 것인가.”라고 말하고서는 호탕하게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자취를 숨기고, 마을의 일곱 사람과 더불어 보산(寶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느긋이 지내고 마음 가는 대로 소요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승지공의 상을 당했을 때는 형식적인 예법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 가자 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과 함께 소(疏)를 올려 풍패(豐沛 전주(全州))로 돌아와 근본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요청했다. 무술년(1598, 선조31)에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순천부(順天府)에 진을 치고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자고 청했다. 공은 송간(松㵎) 홍천경(洪千璟), 송정(松亭) 장이경(張以慶)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양식을 조달하여 군사력을 도왔다. 계묘년(1603, 선조36)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지나치게 슬퍼하여 병이 생겼다. 상기를 마치자마자 정미년(1607, 선조40) 정월 6일에 작고하였으니 향년 72세였다.
송정 장이경이 제문을 지어 애도하기를 “70에 거상(居喪)하는 것은 선유(先儒)도 위태롭게 여겼다. 3년 동안 예법대로 상을 치루어 병의 뿌리가 되었다. 그대야 죽어서 편안하겠으니 내가 또 무엇을 슬퍼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묘는 수다면(水多面) 아계산(芽界山)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 배위는 탐진 최씨(耽津崔氏)로 율정공의 따님이다. 부드럽고 얌전하며 대단히 부도(婦道)가 있었다. 공보다 14년 뒤에 작고하였으며 월일(月日)이 같다. 묘는 공의 묘 우측 산등성이고 손좌(巽坐) 언덕이다. 2남 1녀이다. 장남 찬(纘)은 혼조(昏朝 광해군) 때 〈대군애가(大君哀歌)〉를 지었다가 흉당(凶黨)이 죄로 얽어매어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인조반정 후에 직장(直長)을 지냈다. 차남 계(繼)는 생원이며, 딸은 서경개(徐景介)에게 시집갔다. 찬은 1남 2녀로, 아들은 인업(仁嶫)이고, 딸은 이극승(李克承)과 장승후(張承後)에게 각각 시집갔다. 계는 2남 2녀로 아들은 인준(仁峻), 인집(仁㠎)이며, 딸은 생원 양진남(梁軫南)과 승훈랑 나호의(羅好義)에게 각각 시집갔으며, 서자로 인수(仁岫)와 기국주(奇國柱)에게 시집간 서녀가 있다. 인업은 2남 1녀로, 아들은 동한(東漢), 동위(東渭)이며, 딸은 장명핵(張溟翮)에게 시집갔으며, 서자로 동필(東泌), 동전(東洤), 동집(東𣼳)이 있으며, 서녀들은 이경량(李敬亮), 민계(閔計), 정망기(鄭望起)에게 각각 시집갔다. 인준은 자식이 없어 동위를 후사로 삼았다. 인집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동수(東洙)이다. 현손 이하는 모두 다 기록하지 않는다. 현달한 사람으로는 7대손 창국(昌國)이 문과 급제에 참지(參知)이며, 8대손 규한(逵翰)은 문과 급제에 정언(正言)이다.
아, 공은 학문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벼슬자리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시국을 살펴 명예나 이익에 욕심을 두지 않고 은퇴하였으니, 굳건히 지조를 지켰음을 볼 수 있다. 마을에서는 선생의 풍모를 사모하였으며, 사(社)에서는 제향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또 집안에도 가르침을 주었으니 아우는 임진왜란 때 충성을 바쳤고 아들은 광해군 때 절개를 드러내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더욱 더 공을 알 수 있다. 지금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한 사람은 8대손 석한(碩翰)과 9대손 기형(基馨)이다. 그리고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고자 시종 노력한 사람은 7대손 효국(孝國)이다.
[주-D001] 최공 : 최희열(崔希說, 1536~1607)로,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경뢰(景賚)로 진원 현감(珍源縣監)을 지냈다.[주-D002] 초동팔현행록(草洞八賢行錄) : 《강재집》 권5에 〈초동팔현행록서(草洞八賢行錄序)〉가 있다. 팔현은 나주 서쪽 20리에 초동(草洞)이란 마을에 가정(嘉靖)과 만력(萬曆) 연간에 활동한 여덟 사람으로,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 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 창주(滄洲) 정상(鄭詳), 한천(寒泉) 유수(柳澍), 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 금애(錦崖) 이언상(李彥詳), 남호(南湖) 유은(柳溵), 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을 말한다.[주-D003] 응견(鷹犬) : 사냥하는 매와 개로 남의 앞잡이라는 뜻이다.[주-D004] 보산(寶山) …… 짓고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에 있는 보산정사(寶山精舍)를 말한다. 보산은 다시면 보산동(寶山洞)을 말한다.[주-D005] 아우는 …… 바쳤고 : 아우 최희량(崔希亮, 1560~1651)은 호가 일옹(逸翁)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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剛齋先生集卷之五 / 序 / 草洞八賢行錄序
錦城西二十里。有山水名區。曰草洞。嘉靖萬曆間。洞有李竹潭惟謹,張野憂以吉,鄭滄洲詳,柳寒泉澍,崔三洲希說,李錦崖彥詳,柳南湖溵,崔莎村四勿諸公。相繼登第。卽輿地勝覽所稱八文官是也。一時人物之盛。雖系乎昭代休運。豈山水亦有明麗之應耶。八公築精舍於洞之北寶山之下。以時講習訓導後進。至今數百餘年。州之人士。欽誦不衰。而八家後承克守遺䂓。相與葺理。故精舍。亦得以無恙焉。張公傍裔憲周。文雅士也。從余遊。一日袖示八公行錄而曰。八賢生並一世。居在一洞。所講究者經傳也。所砥礪者名節也。或厄于時。或短於命。不能展布所蘊。而考其所成就。則實非尋常朝士之比。而遺風餘韻。有足以起後人者。吾鄕已擧祭社之禮於寶山精舍。追述其事蹟。以詔來遊於精舍者。文獻無徵。草率如是。甚可慨惜。願得一言。以弁諸卷。此吾鄕諸長老之意也。嗚呼。余之陋劣。固非其人。且諸公之賢。有請業於金河西,奇高峯二老之門而蒙奬與。托契於朴思菴,鄭松江,尹梧陰諸賢之間而見推重。斯足以不朽。而其見幾於陰陽消長之際。倡義於島夷猖獗之時者。自可以垂後矣。至如竹潭三洲二公之胤。昏朝樹立之卓。尤可驗家庭所受之正。又何待余言而發揮也。八家後承。思欲闡揚先美。惟在自修之如何耳。是則所可爲之致勉者。而抑又有所感焉者。余性好山水。一至草洞。周覽其勝槩。因登精舍。想像諸公當日之趣。則豈非快事。顧衰病不可得。可恨也已。遂書此以塞張君之請。
강재집 제5권 / 서(序) / 초동팔현행록서〔草洞八賢行錄序〕
금성(錦城 전남 나주시)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산과 물이 아름다운 지역이 있는데 ‘초동(草洞)’이라고 한다. 가정(嘉靖)과 만력(萬曆) 사이에 마을에는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 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 창주(滄洲) 정상(鄭詳), 한천(寒泉) 유주(柳澍), 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 금애(錦崖) 이언상(李彥詳), 남호(南湖) 유은(柳溵), 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 등 여러 공(公)이 차례차례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바로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말한 ‘팔문관(八文官)’이 바로 이들이다. 한때에 인물이 흥성한 것이 비록 태평성대와 관계가 있더라도, 어찌 산과 물에도 또한 밝고 아름다운 호응이 있지 않겠는가. 여덟 분의 공(公)이 마을의 북쪽 보산(寶山) 밑에 정사(精舍)를 짓고, 때맞추어 강습하고 후진을 훈도하여 지금까지 수백여 년이 지났는데도, 주(州)의 인사들이 변함없이 우러러 칭송하며, 여덟 집안의 후손들은 공들이 남긴 규범들을 잘 지키고 서로 힘을 모아 정사를 보수하였으므로, 정사 또한 아무 탈이 없을 수 있었다. 장공(張公)의 후손인 헌주(憲周)는 문아(文雅)한 선비이다. 나를 따라 배우다가 어느 날 소매에서 여덟 공의 행록(行錄)을 꺼내어 보여 주고 말하기를, “여덟 명의 현인은 태어난 것도 한 세대를 함께하였고 사는 것도 한 마을에 같이 사셨으며, 연구한 것이 경전이고 갈고닦은 것이 명절(名節)이었습니다. 혹은 시대의 멍에를 지기도 하고 혹은 운명이 짧기도 하여 몸에 쌓아 둔 것을 펼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성취를 살펴보면 실로 보통의 벼슬아치에게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유풍과 여운은 후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보산정사(寶山精舍)에서 사(社)에 제사하는 예를 이미 올렸고 그 사적(事蹟)을 뒤늦게 기술하여 정사에 와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데,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어 이와 같이 소략한 점을 대단히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한 마디 말을 얻어 책머리에 붙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희 마을 어르신들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아아! 나는 견문이 좁아 정말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다. 또 공들은 현명하여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 두 어른의 문하에서 학업을 청하여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박사암(朴思菴 박순(朴淳)), 정송강(鄭松江 정철(鄭澈)), 윤오음(尹梧陰 윤두수(尹斗壽)) 등 현인들과 의기가 서로 맞아 존경을 받았으니, 이것은 후세에도 잊혀지지 않을 일이다. 그중에 음양이 사라지고 자라나는 즈음에서 기미를 보고 섬 오랑캐가 창궐하는 때에 의병을 이끈 것은 저절로 후세에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죽담(竹潭)과 삼주(三洲) 두 공의 아들은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절의를 우뚝 세우기도 하여, 집안에서 받은 올바른 가르침을 더욱 검증할 수 있으니, 또 어찌 나의 말을 기다려서 발휘하겠는가. 여덟 집안의 후손이 선조의 미덕을 널리 드날리고자 생각한다면, 자신을 닦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열심히 노력할 만한 일이고 또 거기에서 느끼는 점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천성이 산과 물을 좋아하여, 한번 초동(草洞)에 이르러서 아름다운 경치를 두루 살펴보고 또 정사에 올라서 그 당시 공들의 흥취를 상상해 본다면 어찌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늙고 병들어서 갈 수 없는 것이 참으로 한스럽다. 이에 이 글을 써서 장군(張君 장헌주(張憲周))의 요청에 답한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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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가을 …… 됐네 | 최희열(崔希說, 1536~1607)은 자가 경뢰(景賚), 호가 삼주(三洲)이다. 그는 병조 좌랑, 예조 좌랑 그리고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정치가 문란한 상황을 보고 유은과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를 짓기를 “청운은 손에 넣기 어렵고, 백발은 쉽게 머리에 생기는구나. 상 위의 황금이 다 없어지니, 돌아가자 가을날 푸른 바다로.〔靑雲難入手 白髮易生頭 床上黃金盡 歸歟碧海秋〕”라고 하였다. 《八賢行錄》 | 존재집(存齋集) |
2 | 보산사(寶山祠) |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時面) 영동리(永同里) 초동(草洞)에 있다. 이곳에는 가정(嘉靖)과 만력(萬曆) 연간에 활동한 여덟 사람을 모시고 있는데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창주(滄洲) 정상(鄭詳),한천(寒泉) 유주(柳澍),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금애(錦崖) 이언상(李彥詳),남호(南湖) 유은(柳溵),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이다. 《강재집》 권5에 〈초동팔현행록서(草洞八賢行錄序)〉가 있다. | 강재집(剛齋集) |
3 | 보산사우(寶山祠宇) | ‘보산팔현(寶山八賢)’이라고 불린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 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 창주(滄洲) 정상(鄭詳), 한천(寒泉) 유주(柳澍), 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 금애(錦崖) 이언상(李彦詳), 남호(南湖) 유은(柳殷), 사촌(沙村) 최사물(崔四勿)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정조13)에 세운 사당이다. | 존재집(存齋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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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집 제22권 / 축문(祝文) / 보산사우나주 예성 축문〔寶山祠宇 羅州 禮成祝文〕
아 어진 여덟 분이여 / 猗歟八贒
한 고장에서 도탑게 태어났구려 / 篤生一坊
운명이 밝은 시대 만나고 / 運際文明
순수한 양기 타고 났기에 / 氣稟純陽
이 나라에 태어나서 / 生此王國
왕정을 잘 보좌하셨네 / 黼黻思皇
당대에 인재가 띠풀처럼 나오니 / 彙征一代
옥 패물에 구슬로써 / 瓊佩琳琅
도를 몸소 터득하여 / 道得於躬
임금님의 신의가 돈독했고 / 際孚于王
수양 학문을 귀히 여겨 / 學貴爲己
좋은 행실 남겼도다 / 貽厥斯臧
보산에서 강론하고 익히니 / 寶山講肄
찬란하다 이 당이여 / 奐焉其堂
학규는 백록동을 본뜨고 / 規成白鹿
의리는 주나라 태학을 따랐으니 / 義遵周庠
물가의 대나무 사이에 / 水竹之間
찬란히 그 빛을 발하였네 / 輝赫其光
통달한 재주 모두 써서 / 材達竝用
세속의 좁은 소견 버렸으니 / 俗祛面墻
도내의 준수한 선비들이 / 一方譽髦
오랠수록 더욱 칭송하리라 / 久而彌芳
금성산 기운 가득 우뚝하고 / 龍岑扶輿
영산강 물결 넘실대는 곳에 / 錦水洋洋
번듯하게 솟은 누각 하나 / 巋然一閣
유풍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 遺風不亡
제사 올려 공로에 보답하니 / 報功作祀
경전에 있는 가르침으로 / 經訓有常
사당 제사의 의리가 / 祭社之義
백 년 되어 빛나는구나 / 百歲乃章
엄숙한 저 사당이여 / 有侐其廟
그분들 자취 잊지 못하리라 / 杖屨罔忘
봄가을로 제사 드림에 / 春秋俎豆
향불이 피어올라 / 升其馨香
예식이 이제야 이루어져 / 縟禮肇成
이 좋은 날 만났으니 / 迨此辰良
삼가 이처럼 아룁니다 / 謹以云云
효성과 우애 그리고 문장으로 / 孝友文章
세상을 맑게 하여 명성이 자자했으니 / 淑世聲華
수령으로 교화를 잘 펼치고 / 化洽字牧
의리를 결정함에 가르침이 전해졌네 / 義定貽謀
위는 죽담(竹潭)에 관한 것이다.
고봉의 뛰어난 제자요 / 高峯茂弟
남쪽 고을의 고상한 선비로 / 南州高士
큰 공로는 나라를 빛내고 / 功大光國
바른 표상은 세상을 맑게 했네 / 標正淑世
위는 남호(南湖)에 관한 것이다.
빛나는 관직 두루 거치며 / 華班歷揚
뭇사람 중 빼어났더니 / 超倫拔萃
강호에 물러나도 나라 걱정으로 / 退憂江湖
마음은 늘 종묘사직에 있었네 / 心懸王社
위는 야우(野憂)에 관한 것이다.
선친을 훌륭히 이었으니 / 克肖皇考
뛰어난 유학자에 인재인데 / 通儒全材
하늘이 안회처럼 수명을 주지 않아 / 天嗇回壽
사람들이 고상한 풍모를 애석하게 여기네 / 人惜高標
위는 사촌(莎村)에 관한 것이다.
지모가 출중한 선비로 / 出倫謀士
세상에 이름난 유학자라네 / 名世弘儒
연원이 이미 바르고 / 淵源旣正
도의의 교분 딱 들어맞았네 / 道誼合契
위는 한천(寒泉)에 관한 것이다.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과 우애로 / 因天孝友
부자간에 모두 뛰어난 문장이니 / 幹蠱文學
남겨 주신 가르침 귀에 선하여 / 貽謨洋洋
자손들은 닮고자 노력하네 / 雲仍式穀
위는 금계(錦溪)에 관한 것이다.
문장과 덕행은 집안을 계승했고 / 文行克家
충성과 의리로 적개심을 일으켰지만 / 忠義敵愾
맑은 바람에 각건 쓴 은자로서 / 淸風角巾
가을 서리 내린 푸른 바닷가에 살게 됐네 / 秋霜碧海
위는 삼주(三洲)에 관한 것이다.
덕은 몸가짐과 들어맞고 / 德符儀容
학업에 부지런하여 온통 그을음 / 業勤煤帳
아픈 몸 이끌고 의기를 떨쳐 / 輿疾奮義
남쪽 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렀네 / 鏖賊南洋
위는 창주(滄洲)에 관한 것이다.
[주-D001] 보산사우(寶山祠宇) : ‘보산팔현(寶山八賢)’이라고 불린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 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 창주(滄洲) 정상(鄭詳), 한천(寒泉) 유주(柳澍), 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 금애(錦崖) 이언상(李彦詳), 남호(南湖) 유은(柳殷), 사촌(沙村) 최사물(崔四勿)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정조13)에 세운 사당이다.[주-D002] 당대에 …… 나오니 : 군자 한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의 어진 인재가 모여드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泰卦) 초구(初九)〉에 “띠풀의 뿌리를 뽑듯 동지들이 모여드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征 吉〕”라고 하였다.[주-D003] 옥 패물에 구슬로써 : 임랑(琳琅)은 아름다운 옥석(玉石)으로, 어질고 재주 있는 인재를 뜻한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왕 태위(王太尉)를 찾아가 보니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명사(名士)와 인재(人才)였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 가서 보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모두 임랑과 주옥(珠玉)이었다.”라고 하였다. 《世說新語 容止》[주-D004] 학규는 백록동을 본뜨고 : 주자가 정한 백록동 서원의 학규는 ‘오교지목(五敎之目), 위학지서(爲學之序), 수신지요(修身之要), 접물지요(接物之要), 처사지요(處事之要)’ 다섯 가지이다. 《晦庵集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주-D005] 수령으로 …… 펼치고 : 이유근(李惟謹, 1523~1606)은 자가 택가(擇可)이고, 호가 죽담(竹潭)이다. 1572년(선조5) 겨울에 대구 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정사가 청렴하여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다고 한다. 《八賢行錄》[주-D006] 의리를 …… 전해졌네 : 이유근의 동생 이유회(李惟誨)는 광해군 때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이유근의 큰아들 이지효(李止孝)는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계축옥사 때 옥중에서 죽었던 일을 가리킨다. 《八賢行錄》[주-D007] 큰 공로는 …… 빛내고 : 유은(柳溵, 1540~1590)은 자가 심보(深甫), 호가 남호(南湖)이다. 한천(寒泉) 유주(柳澍)의 아우이다. 1589년(선조22) 유은은 윤근수(尹根壽)를 따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다음 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로로, 윤근수는 광국 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훗날 1594년에 유은은 종계변무의 공로로 공신에 추록(追錄)되었다. 《八賢行錄》[주-D008] 강호에 …… 있었네 : 장이길(張以吉, 1529~1595)은 자가 천응(天應), 호가 야우(野憂), 본관은 흥성(興城)이다. ‘야우(野憂)’라는 호는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물러나 멀리 강호에 거처하게 되면 임금을 걱정한다.〔居廟堂之高則憂其民 處江湖之遠則憂其君〕”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八賢行錄》[주-D009] 선친을 훌륭히 이었으니 : 최사물(崔四勿, 1544~1587)은 자가 희구(希具), 호가 사촌(莎村),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최사물의 부친은 율정(栗亭) 최학령(崔鶴齡)이다.[주-D010] 연원이 …… 들어맞았네 : 유주(柳澍, 1536~1588)는 자가 시숙(時叔)이고, 호가 한천(寒泉)이다. 유주는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리고 사암(思菴) 박순(朴淳),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송강(松江) 정철(鄭澈),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등 당대 명현과 교유하였다. 《八賢行錄》[주-D011] 부자간에 …… 문장이니 : 원문의 ‘幹蠱’란 ‘幹父之蠱’의 준말로, 아들이 부친의 뜻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周易 蠱卦 初六》 이언상(李彦詳, 1536~1579)은 자가 경지(景智), 호가 금계(錦溪)ㆍ금애(錦崖)이다. 부친은 이림(李琳)이다.[주-D012] 남겨 주신 가르침 : 이언상은 《수훈집(垂訓集)》 1권을 후손에게 남겼는데 중국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가 후손에게 남긴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본뜬 것이다. 주요 내용은 충군(忠君), 효친(孝親), 수신(修身), 제가(齊家)이다. 《八賢行錄》[주-D013] 각건(角巾) : 옛날 은사(隱士)나 관직에서 은퇴한 이들이 쓰던 방건(方巾)이다.[주-D014] 가을 …… 됐네 : 최희열(崔希說, 1536~1607)은 자가 경뢰(景賚), 호가 삼주(三洲)이다. 그는 병조 좌랑, 예조 좌랑 그리고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정치가 문란한 상황을 보고 유은과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를 짓기를 “청운은 손에 넣기 어렵고, 백발은 쉽게 머리에 생기는구나. 상 위의 황금이 다 없어지니, 돌아가자 가을날 푸른 바다로.〔靑雲難入手 白髮易生頭 床上黃金盡 歸歟碧海秋〕”라고 하였다. 《八賢行錄》[주-D015] 학업에 …… 그을음 : 창주(滄洲) 정상(鄭詳, 1533~1609)은 각고의 뜻을 세워 부지런히 학업을 익히면서 밤새도록 등불을 피우느라 방 안의 벽에 모두 검은 그을음이 끼었다고 한다. 《八賢行錄》[주-D016] 남쪽 …… 무찔렀네 : 정상(鄭詳)이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閑山大捷)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것을 말한다. 《八賢行錄》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이주형 채현경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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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집 제12권 / 행장(行狀) / 수사 증 형조 판서 이공 행장〔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공의 휘는 지효(止孝), 자는 중순(仲純)이다. 이씨는 선계가 함평(咸平)에서 나왔으며 고려의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휘 언(彦)이 시조이다. 대대로 벼슬아치가 이어졌으며 절의로 저명하였다. 고조 휘 종수(從遂)는 부사정(副司正)으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휘 종인(宗仁)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시(偲)는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를 지냈다. 아버지 휘 유근(惟謹)은 대구 부사와 지제고(知製誥)를 지냈고 호는 죽담(竹潭)이며 초동(草洞) 보산사(寶山祠)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부사 한(翰)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32년 계축년(1553, 명종8)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영리하여 여느 아이와 달랐다. 외모가 헌칠하고 재주도 뛰어났으며 절의(節義)를 좋아하였다. 《한서(漢書)》를 읽다가 충신과 열사의 전(傳)에 이르면 그때마다 무릎을 치고 감정이 고조되었다.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에 증광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경인년 3월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도총부 도사로 옮겼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경력(經歷)에 승진하였으며, 여름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결백하여 인사 고과에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옮겼는데 1년이 안 되어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임기가 아직 차지 않았는데 창성 부사(昌城府使)에 발탁되었다. 행정이 청렴하고 은혜가 두루 미치자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이웃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서 아이들을 들쳐 업고 왔는데 거의 수백여 가구나 되었다. 관찰사가 치적을 높이 평가해서 보고하여 통정대부로 특별히 승진시켰다. 얼마 있다가 봉화 전달에 실수해서 파직되어 귀향하게 되었을 때 고을 주민이 대궐로 가 상소를 올려 1년을 더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덕비를 새기고 또 생고치 수백 말을 거두어 본가로 실어 보냈는데, 토산품으로써 떠난 후에도 잊지 않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공이 물리치면서 싣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가지고 되돌아가도록 하고 고을 백성이 세금 낼 때 보태 쓰라고 하였다. 싣고 온 사람이 밤중에 공의 대문 바깥에 몰래 두고 가버리자 공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여 마침내 가난한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구성 부사(龜城府使)에 제수되어 청렴하게 지내면서 잘 돌보아 주기를 창성 부사에 있을 때와 같이 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받들기를 부모처럼 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조정에서 변방에 우환이 있다고 여겨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옮기게 하였다.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하는 데 모두 적절하게 하였으며 위급상황에 대비하는 데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2월에 모친 곽부인 상을 당하였다. 슬퍼하면서 울부짖다 기절하여 주위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거상(居喪), 장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삼년상을 마치고 4년이 지나 충청도 수군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부임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무기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하였으며 성벽의 깃발도 활기찬 모습을 띠면서 확 바뀌었다. 이해 12월에 상의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하였으며 교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그대를 의지하여 만 리에 성을 쌓고 절도사 임무를 맡긴다. 그대가 나라에 한마음으로 봉사한 것을 가상히 여겨 포상하는 은전을 특별히 내린다.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쓰일 때가 있으니 하급 병졸 사이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신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임금이니 참으로 장수에서도 걸출한 사람이다. 군량을 비축하고 말꼴을 쌓아 두어 군수물자를 풍부하게 하고, 창을 만들고 갑옷을 수선하여 너의 군사를 다스리라. 칭찬이 날로 이르는 것은 나의 좌우가 사사로이 하는 말이 아니며 공적인 논의가 오는 것은 실로 그대의 명성과 공적이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누차 변경 지방으로 나가 벼슬하였으므로 풍토병을 심하게 앓았다. 마침 질병이 심해져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귀향하는 여장은 텅 비어 단지 수중(手中)에 채찍 하나 뿐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극력 감탄하였고 공의 현명함을 자주 칭찬하였으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이 아저씨의 청렴결백함은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하고 국사가 나날이 잘못되자 공이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하기를 “이러한 시국에 벼슬하니 마음이 부끄럽다.”라고 하면서 끝내 가족을 데리고 풍덕(豊德)의 시골 별장에 이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국구(國舅)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감옥에 갇히자 인목대비를 별궁(別宮)에 두자는 논의가 계속 일어나서 인륜이 무너지려 하자 여론이 통분하였고 소인배들의 기세가 물길처럼 치솟았는데 어누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분통을 견디지 못하고 앞장서서 상소문을 지어서 대궐로 달려가 올렸으나 흉악한 일당이 물리치고 왕에게 올리지 않았다. 공이 더욱 울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집에 곧장 달려가서 책망하기를 “대감이 어찌 차마 하늘 아래에서 이이첨(李爾瞻) 패거리와 함께 인륜을 무너뜨리고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대비를 폐위하고 국구를 죽이려 하니 이것은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대감이 그들과 함께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간악한 무리의 기세는 반드시 중단될 것이니 대감이 헤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감은 이이첨 패거리와 함께 나의 손에 있는 한 자루 칼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시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단지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 버리기로 작정해서 의분에 찬 의견을 올렸으며 눈치 보는 것이 없었다. 흉도들이 벌벌 떨면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으며 공이 역적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엮어서 감옥에 가두었다. 공은 감옥 속에서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대비가 계시는 곳에 절하고 7일간 먹지 않고 말하기를 “국모가 없는 나라에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피를 토하고 사망하였다. 이이첨 패거리가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를 “통쾌하게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대비가 공이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들었지만 공이 감옥에서 굶어 죽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공의 생사를 묻자 의금부에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대비가 매우 슬퍼하였다. 내탕금(內帑金)에서 조복(朝服) 한 벌과 고운 무명 50단(段)을 추후에 부의하고 해당 관아에 교서를 내려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하고 아울러 공의 자손을 등용하라고 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나주(羅州) 서쪽 죽포면(竹浦面) 분토동(粉土洞) 임좌(壬坐) 언덕 선영에 안장하였다.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부사 여랑(汝良)의 따님으로 어질고 자애로웠으며 부녀자의 법도가 모두 격식에 맞았다. 공보다 몇 년 뒤에 작고하였으며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선철(先哲)은 군수이며, 차남 선계(先繼)는 양자로 나갔고, 딸은 사인 장륜(張綸)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정(珵)이고, 손녀는 교리 조중려(趙重呂)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만영(萬英)이고, 증손녀는 심각(沈殼), 이광화(李光華)에게 시집갔다. 현손은 천삼(天三)이고, 현손녀는 홍서징(洪瑞徵), 김태광(金泰光)에게 시집갔다. 5대손은 경휘(景輝)이며, 둘째는 현감인 경악(景岳)이며, 셋째는 경항(景恒)이고, 5대손녀는 정시창(鄭始昌)에게 시집갔다. 공이 작고한 지 1백여 년 뒤에 광주(光州)의 진사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를 올려서 정증(旌贈)하고 사당을 세울 것을 청원하자 조정에서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다고 판단하여 단지 정려문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아, 공은 기이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덕행이 뛰어났다. 무관으로 출신(出身)하였으나 문장 또한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검소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였지만 재산 증식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빙벽(氷蘗)에도 한결같은 절조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으며 가정에서는 화목하게 지내고 인척과는 친근히 지내고 친구와 신뢰로 사귀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공이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있을 적에 첨사(僉使) 원유남(元裕男)과 평소 사이좋게 지냈는데 원유남이 마침 사건에 연좌되어 잡혀가면서 공에게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하자 공이 자기 집사람처럼 보살펴주었다. 원유남이 남에게 공의 풍모와 의리를 말할 때마다 옛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당대의 명사 모두가 인정하였으며 감히 무인(武人)으로 보지 않았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금용(金墉)의 변이 일어났을 적에 위로는 조정의 관료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흉당(凶黨)에 달라붙어서 다투어 흉악한 상소를 올렸다. 흉악한 패거리들이 함정을 크게 설치하여 말하는 사람은 무거운 죄를 주겠다고 하자 사람들 모두 겁을 먹었다. 하지만 공은 직책도 없는 무신(武臣)으로서 백사 이항복,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보다 먼저 상소를 올려 대의(大義)를 말하여 “단지 국모가 있음을 알고 내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올린 소가 승정원에서 막히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국정을 책임지는 영의정을 꾸짖고 기세등등한 흉도를 멸시하였다. 7일간 감옥에 있으면서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였는데 순수하고 강직한 정기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굳세고 결연한 태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아, 위대하다. 계축년에 올린 소가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한 채 산일(散逸)되어 후대에 의를 숭상하는 선비가 고증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초동팔현행록(草洞八賢行錄)》에 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죽담공(竹潭公)의 행적과 관련된 부분에서 공이 수립한 탁월한 업적도 대개 거론하였다. 지금 공의 후손 돈풍(敦豐)이 공의 외손(外孫) 부솔(副率)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오랫동안 붓을 잡지 않았지만 공의 탁월한 절개와 위대한 행적이 후대에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쓴 것이 이와 같다.
[주-D001] 이공 : 이지효(李止孝, 1553~1613)로,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중순(仲純)이다. 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역임하였으며 형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계축옥사 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혀 죽었다.[주-D002] 보산사(寶山祠) :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時面) 영동리(永同里) 초동(草洞)에 있다. 이곳에는 가정(嘉靖)과 만력(萬曆) 연간에 활동한 여덟 사람을 모시고 있는데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창주(滄洲) 정상(鄭詳),한천(寒泉) 유주(柳澍),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금애(錦崖) 이언상(李彥詳),남호(南湖) 유은(柳溵),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이다. 《강재집》 권5에 〈초동팔현행록서(草洞八賢行錄序)〉가 있다.[주-D003] 정증(旌贈) : 사후에 정려문을 세워 포창하는 일을 말한다.[주-D004] 빙벽(氷蘗)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 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3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주-D005] 금용(金墉)의 변 :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것을 말한다. 중국 삼국 시대의 위주(魏主) 조방(曹芳)과 진(晉)나라의 혜제(惠帝) 등이 각각 폐위된 뒤 금용성(金墉城)에 옮겨진 것에서 유래한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김정기 (공역)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