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강촌(부내ㆍ분천동)은 농암 선생으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농암聾巖(이현보李賢輔ㆍ1467~1555)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농암가聾巖歌ㆍ어부가漁父歌 등 다수의 강호시가를 남겼으며 현재 농암종택에 있는 숭덕사에 배향되었다. 농암종택 옆에 위치한 분강서원은 1699년 농암의 후손과 사림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67년 농암종택 서쪽 애일당 좌편 영지산 아래에 복원했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도산면 운곡리로 이건하였으나 2007년 농암 선생 유적 복원사원으로 도산면 가송리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도산서원 진입로 아래 넓은 강변 지대에 자리했던 영천이씨 집성촌인 분강촌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만경창파가 되었다. 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겸재 정선ㆍ계상정거도)의 왼편 상단 지역에 강과 산이 접해 있는 길다란 지대가 수몰 전 분강촌 동네이다. 분강촌은 필자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이다.
분강촌의 입향시조는 670여 년 전인 1350년경 고려 말엽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이헌李軒 공이다. 분강촌 입향조인 소윤공(휘諱 헌軒)의 묘소는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모란에 있다. 사천재사沙川齋舍(소윤 선조 묘하墓下의 재사)와 추원재追遠齋(소윤 선조를 추모하기 위한 강당)도 이곳에 있다. 모란에 있는 이 건물은 소윤공파의 정신적 지주이자 터전이 된다. 아래 사진은 모란에 있는 소윤공 선조를 기리기 위한 재사와 묘소, 추원재 그리고 묘하墓下(조상의 산소가 있는 땅) 관련 비碑이다.
재사齋舍는 제사祭祀를 준비하기 위한 집이자 먼곳에 있는 제군祭君들이 와서 유숙하는 공간이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강학 기능을 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재사의 이름은 보통 지명을 따라 붙이는 경우가 많다. 농암 선조는 자운재사紫雲齋舍라고 한다. 농암 선생과 배위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묘제墓祭를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자운재사는 봉화 신남리 정자골에 있다. 정자골 북쪽에는 자운마을이 있는데 이곳 마을 지명을 빌려서 자운재사라고 했다. 소윤공의 재사는 기술한 것처럼 사천재사라고 부른다. 이 또한 녹전면 사천리沙川里의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재사의 형체는 "ㅡ형"이다. 하회 류씨 재사는 "튼ㅁ형"이라 볼 수 있다.
♤분강촌 입향시조인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소윤공(諱ㆍ軒)의 제사祭祀를 위한 사천재사沙川齋舍의 전경이다. 녹전면 사천리沙川里의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재사의 형체는 "ㅡ형"이다.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모란에 있는 분강촌 입향조인 소윤공(휘諱 헌軒)의 묘소 전경.
♤소윤 선조를 추모하기 위한 강당인 추원재追遠齋전경이다. 녹전면 서삼리에 있는 소윤 선조의 제사인 '추원재'는 안동시 유형유산 제60호(2010.3.12)'로 지정되어 있다.
♤소윤 선조 묘하墓下 관련 위치 표시를 한 비碑 이다. 묘하란 조상의 산소가 있는 땅을 말한다.
♤정자골에 있는 농암 선생 묘소 전경이다. 묘소 250여 미터 산 아래에 자운재사가 있다. 사진은 지난 2020년 설 다음날에 농암 선조 묘소에 새해 인사를 가서 담은 전경이다. 두 분의 문인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필자는 농암 선조의 16대 손이다. 수몰 전까지 분강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농암 선조의 재사는 자운재사紫雲齋舍라고 부른다. 농암 선생과 배위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묘제墓祭를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봉화 신남리 정자골에 있다. 정자골 북쪽에는 자운마을이 있는데 이곳 마을 지명을 빌려서 자운재사라고 한다. 1995년 행정구역이 변경되어서 안동시 예안면 신남리 정자골로 되어 있다. 사진은 농암 선생 묘소 아래에 있는 '자운재사' 전경이다. 지난 2010년 3월 12일 "안동시 유형유산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위 사진은 옛날 사진이며 지금은 보수가 되어 있다.<사진 출처: 다움 카페 [유장]행암공파(영양군24세)ㆍ2008>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으로 통하는 겸재謙齋(鄭敾ㆍ1676~1759)의 "계상정거도(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겸재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며 문신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인왕제색도 등 다수의 명작을 남겼다.
계상정거도는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풍광을 조망한 그림이다. 이 산수화는 서원 마당 오른편 천연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왼편 상단에 산과 강이 길게 접한 분강촌 마을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분강촌은 농암과 일생을 함께 한 선생의 터전인 고향 동네이다. 그림 속에는 도산서원 앞 전경인 도산오곡에 해당하는 탁영담과 함께 그림 왼편 상단 분강촌 앞에 무성하게 적수되어 있는 도산사곡 지대인 분강 주변도 훤히 눈에 들어온다. 겸재는 산수화 속 중앙 상단 바로 좌측 산중턱에 고스란히 그림처럼 걸려 있는 애일당과 그리고 다시 그 옆쪽 솔나무 숲에 둘러쌓인 농암종택도 잊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이지만 유년시절 우리가 뛰어놀았던 그 시절의 산천과 진배없다.
도산서당 속에 앉아서 서책을 대하고 있는 퇴계선생의 모습도 보인다. 퇴계退溪(李滉ㆍ1501~1570)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1574년에 건립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농암과 퇴계는 족질간이며 서른네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잊은 채 학문과 문학을 담론하는 등 벗으로서 분강촌에서 강호지락을 나누며 탈속적인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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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어나고 자라고 어릴적 추억이 쌓인곳 터전이 댐건설로 하루 아침에 고향마을이 수몰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옛날에는 가능했지~
정말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안동댐은 1971년 4월1일 착공하여 1976년10윌28일 완공되어 부내를 비롯하여 그립고 정겨운 고향 산천이 서서히 수장되어 영원히 다시 볼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1977년 2월21일 졸업을 하였으니 1학년부터 6학년 사이에 공사를 한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