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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준비하는 사람
2005년 10월 5일 / 히 9:27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앞으로 몇 십 년, 넉넉잡고 100년 후면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신문이나 TV를 보아도 우리는 쉽게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지나가다 보면 표시판에 어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를 표시해 줍니다. 2001년도에 한국인이 사망한 숫자는 243,000명인데, 그 중에 59,000명이 암으로 사망하여 4명중에 1명은 암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흡연 인구가 5명중 1명꼴인 11억 명에 달하며 이중에 5억 이상이 담배로 사망할 것이라고 세계보건기구(WHO)가 밝혔습니다. 10초당 1명이 담배로 사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는 하루에만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종 질병이나 산업과 자연의 재해로 인하여 죽었으며, 전쟁과 기근으로 인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사실이 남의 얘기 같다가도 갑작스런 사고나 병을 얻게 되면 죽음은 나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종말, 세계적인 종말을 논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종말은 언제 어느 때 올는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고작 자기가 묻힐 묘소를 준비하고 수의를 준비하고 관을 준비하며 재산을 분배하고, 유언을 남기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준비란,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가는 준비입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 위에 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다운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날에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하는 인사말이 “아침 드셨습니까?”였습니다. 점심때 만나면 “점심 드셨습니까?”, 저녁에 만나면 “저녁 드셨습니까?” 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인사가 어른들 중에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 희랍의 철인들은 아침에 하는 인사말이 “죽음을 준비하셨습니까?” 하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은 “보이는 이 세상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 하늘나라는 영원한 것이라.”고 말씀하므로 천국의 실체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약 4:14 / 인생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잠깐 있다 없어질 안개니라” / 벧전 1:2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도다
전 3:1 /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는데, 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을 때가 있다.
죽음은 개인 개인에 따라 갑자기, 천천히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서 죽는 사람이 자주 있는가 하면, 가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점차 회복이 되어서 10년, 20년, 오래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매우 신비스러우면서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장례식이나 공동묘지를 보면,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엄연한 진리 앞에서 숙연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 성경을 살펴보아도 죽음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누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 5장에서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셋은 912세를 살았고,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그리고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무두셀라는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창 6:3에 보면 인간이 계속 타락하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120년으로 단축하셨습니다. 죽음이 빨리 오게 된 것입니다.
열왕기를 보면, “어느 왕이 몇 년을 치리하다가 죽었다. 몇 년을 치리하다가 죽었다.” 하는 말들이 계속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죽을 때가 다가올 것이라!”고 일러주셨고, 히스기야 왕에게는 “너는 네 집에 유언을 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도 죽음에 대해 종종 말씀하셨는데, 눅 16장에서 한 부자가 죽어 음부에서 고통 받고 한 거지는 죽어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거하는 모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농부에게 (눅 12:3)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 성경은 개인적인 죽음뿐만이 아니라 많은 무리의 죽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왕과 그의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은 사실이라든지(출 14장) / 노아 시대에 노아의 8식구 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홍수 심판으로 죽음을 당한 사실 / 소돔과 고모라 성은 롯의 가족들만 구원받고 모두 불과 유황불로 심판을 받아 죽고 / 왕하 19장에 보면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명이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으며 / 출 32장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하고서 회개치 않은 이스라엘 백성 3천명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또한 성경은 지구의 최후의 날이 될 아마겟돈 전쟁 때,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계 16, 19장).
죽음을 준비하십시다.
히 9:27에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정해졌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호흡이 멎을지 모르는 육체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죽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갑자기 당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천재지변이나, 교통사고, 자살, 강도, 전쟁, 심장마비 등 모두 예기치 못했던 갑작스런 죽음이었기 때문에 회개하거나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없이 죽어 아무런 준비 없이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원망이나 후회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는 곳곳에 교회가 있고, 성경이 있으며,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방방곡곡에 있는 교회에서 매주 선포되고 있고, 또 라디오와 TV에서 그리고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널리 전파되고 있습니다. 눅 16:29에서 지옥에 있던 부자가 세상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들려주기 위하여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때 “저희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한 말씀처럼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몰랐다고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처럼 복음의 물결이 세차게 일고 있는 곳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죽을 때 입고 갈 수의를 준비하거나 묘지를 사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지 … ” 구원의 확신 위에 서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죽을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모든 소유를 버려두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의 보화를 세상에 쌓지 말고 도적이 없고 좀이 슬지 않는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이 구제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좀더 많이 봉사하고, 선교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늘 정결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침대에 누워서 “한번만 살려 주시면 예수 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봉사도 많이 하고 열심히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병이 다 낫고 퇴원을 하면 언제 그랬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다급할 때 예수님을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어지면 마음이 변하는데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저마다 교회를 나가게 되는 어떤 계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잘 되어서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업이 실패하므로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할 때 나오지만 어떤 사람은 병을 얻게 되어서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기 바로 전에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의 권유나 전도로 인하여 교회에 나오게 되는 계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상황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시고, 예수를 믿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바로 이런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육체의 기회가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를 믿고 구원의 터전 위에 굳게 서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다가 주님 앞에 자랑스럽게 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을 확보하십시다.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시급한 문제는 천국의 시민권을 확보해 놓는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을 확보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모든 인생은 죄 값으로 죽음이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신 죽으시므로 내가 죽어야 될 죄의 값을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사 지낸 바 사흘 만에 부활을 하심으로 이를 확실히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와 어떤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훌륭하게 살아내서 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제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고, 슬픔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과정이요,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고통과 죄와 슬픔은 이제 사라지고, 이제 영원한 기쁨과 영생복락의 안식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 1:21)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또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잠언 14:32절에서는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죽기 며칠 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부르시더니 “내가 죄 사함 받은 것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대해서 말씀 좀 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내 선행 때문도 아니고 교회에 헌금한 것 때문도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공로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죄 값을 다 지불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면서 기도해 드렸더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준비되었습니다.”(Thank you. I'm ready.) 하고 소천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는 아직도 이 놀라운 사실을 모른 채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려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실체를 전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명이 먼저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죽읍시다
▶ 얼마 전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충격과 분노로 요동친 적이 있습니다. 중동선교의 꿈을 가지고 이라크로 떠났던 그가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그는 가장 잔인하게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는 인질로 잡혀있는 20일 동안 시간 시간마다 휘몰아치는 죽음의 공포에서 떨어야 했습니다. 그가 살고 싶어 했던 삶의 고백들은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김선일씨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동정심과 애정을 갖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인질로 잡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나에게 죽음이 올 때 나는 어떤 자세로 설 것인가에 대한 깊은 자기의식과 또 마음에 신앙적 고백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기에 우리의 모든 생각은 주님에게 집중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주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께서 나를 향해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잠잠히 기다려야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당신의 정체성을 밝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인 지도자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가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지만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존재로 왔다. 만약에 너희들이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제자도에 대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인류를 살리는 길인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전에 갖은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피 흘리셨으며, 채찍에 맞아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셨으며, 그 나무에 손과 발이 못 박혀서 피를 흘렸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문제와 죽음을 해결해주셨습니다.
▶ 우리는 죽음 앞에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로 세워야 됩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산다.’ 예수님은 살고 죽는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재해석한 말씀이 갈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말을 하고 행동도 하십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은 예수가 죽었다고 믿지만 우리는 내가 죽었다고 믿습니다. ‘내가 죽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 위에서 자기를 세워야 됩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연합해서 죽고 예수님과 연합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순교자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 양화대교 건너편에 두 개의 성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의 성지 양화진이요, 다른 하나는 천주교의 성지 절두산입니다. 양화진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요, 절두산은 조선 말기 대원군 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았던 곳입니다. 머리를 잘라 처형했기 때문에 절두산이라 부릅니다. 지난 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교수대에서 목이 잘리면서도 전혀 마음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았으니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 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순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죽음이 휘몰아쳐 올 때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죽는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바르게 세워야 됩니다.
▶ 유세비우스 교회사를 보면 12제자는 전부 다 순교자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임을 당해 죽었고,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 가서 지내다가 핍박을 만나 기름 가마에 던져졌는데 기적적으로 살아서 그것을 보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깜짝 놀라서 밧모섬으로 귀향을 보냈는데 거기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썼고 그곳에서 수명을 다하고 죽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었고, 바돌로메는 알매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의심 많은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 메임을 당해 죽었으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림을 당해 죽었고, 가나안의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하고 유대에 돌아와 활에 맞아 죽었으며, 야고보 동생 유다는 파사에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 대신 제비 뽑혀 들어간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든지 한번 죽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기왕에 죽는 것 하나님을 위해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 내가 죽으므로 사랑을 실천합니다 /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사랑하며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서 최고의 위대함을 드러냈습니다. 남을 미워하면 순교자가 되지 못합니다. 성도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용서하고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 죽을 때도 “아버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용서하시면서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순교는 원수의 칼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의 칼을 무장해제하는 것입니다. 원수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증인으로 자기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순교는 원수가 나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을 원수를 위하여 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는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사는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인 원수들을 위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이름이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예수님의 인격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부 잘할 수 있습니다. 학위도 딸 수 있습니다. 인물이 잘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됩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담을 때 가능합니다.
공부는 못해도 인격자가 되십시오. 사회적인 지위는 높이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사람이 되십시오. 원수 맺지 않고 원수까지도 용서하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인격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해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그들을 용서하면서 사십시다. 이때 내 삶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 내가 죽으므로 다른 사람을 살려냅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죽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살려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순교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아야 된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나무도 고목이 되어 썩으면 작은 나무를 살리듯이 내가 이 땅에 살다가 어떤 모양으로 내 인생이 끝나든지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사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 우리는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자기를 죽여서 나와 함께 영생에 이를 것인가 날마다 자기 욕심으로 살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 인간성대로 살아서 나도 죽이고, 남도 괴롭히면서 결국 멸망으로 갈 것인가'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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