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랑, 빵 하나에
정동식
아내가 외출을 다녀왔다. 손에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얼핏 보니 빵처럼 보였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점심을 하고 오는 길이란다.
나도 막 운동을 다녀와 숨을 고르고 있던 참이었다. 아내는 지금 일(바리스타)을 하기 전까지, ‘정아 자매’와 재봉틀로 베개 커버 등을 만드는 일터에 3년 정도 다녔다. 바리스타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째인데 자매와 식정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져, 진작부터 날짜를 조율하더니만 드디어 송별모임을 하고 왔나 보다. 한참 그 일을 할 당시에 아내는 언니랑 정서적으로 더 잘 맞았다고 했다. 늘, 살뜰히 챙겨줄 언니가 있으면 참 좋겠다, 하며 부러워했는데, 배려심이 깊은 정아 언니에게 따뜻함을 느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변수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언니는 손녀 돌보는 일에 바쁘고, 아내는 친정엄마 케어와 바리스타 일도 같이하니 시간이 잘 나지 않고, 정아는 도급받은 물량과 납품일자를 맞추어야 해서 단 3명의 약속인데도 이렇게 늦게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비닐봉지에는 낯익은 단팥빵과 앙금빵, 그리고 찹쌀떡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도 아내는 가끔씩 일터 부근,
할아버지 내외가 하시는 제과점에서 빵을 사 오곤 했었다. 점심 먹은지도 꽤 시간이 지났고 출출한 김에 잘 됐다
싶어 맛을 보려 했다.. 주저 없이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앙금빵을 집어 들었더니, 여보, 그 빵은 오래 두어도 괜찮
으니 다른 것부터 잡수세요, 한다. 나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찹쌀떡 하나를 먹었다. 어르신 부부가 만드는 빵은 유명브랜드는 아니지만 가격도 싸고 맛도 좋아서 자주 간식으로 즐겼다. 그런데 앞으로 이 빵은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고 한다. 최근에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가게를 접기로 했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빵은 차와 커피랑 잘 어울린다. 나는 날씨가 추워지면 한 잔으로 끝나는 커피보다 천천히 우려내며 마실 수 있는 차를 선호하는 편이다. 내가 맛보려는 '대웅포'는 무이산 암벽에서 재배한 차나무잎을 덖어 만든 차이다. ‘무이암차’라고도 한다. 예전에 중국의 황산, 삼청산, 무이산을 다녀올 때 구입한 차이다. 나는 이 차를 마실 때 약간의 다과를 곁들인다. 감말랭이나 곶감, 또는 부드러운 빵이나 케이크와 함께 먹으면, 차의 떫은맛을 줄이는 효과가 있어서이다. 솔직히 나는 차의 고유한 맛을 아는 마니아라기보다는 달콤한 다과를 더 좋아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빵을 가져온지 4~5일쯤 지났을까. 대구의 수은주가 영하 3도를 가리키던 날 아침에, 아내가 무이암차를 마시자고 제안을 했다. 팽주가 되어 차를 우려내는 몫은 내 담당이다. 오늘은 다과를 무얼로 할까? 나는 고민없이 앙금빵을 골랐다. 그러자 아내는 처음 그 빵을 먹으려 할 때와 똑같은 멘트를 했다. “여보! 이건 남겨두고 다른 빵부터~~”, 같은 말을 두 번 들으니 이번엔 조금 거슬렸다. 이 나이에 먹고 싶은 빵 하나 제대로 못 먹나, 비틀린 마음이 가슴 밑동에서부터 출렁거렸다. 아내와 나는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서 조금 차이가 난다. 나는 군음식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소식이며 다과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아내가 바라는 대로 다른 빵으로 다과를 대신했다.
그날 오후에는 처남이 시골에서 농사지은 배추를 가져와 김장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김치를 그다지 즐겨 먹는 편이 아니라서 식단에 필수 반찬은 아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처남이, 시장에 파는 김치는 맛이 없다해서 김장을 하게 되었다. 아마 내 평생 우리집에서 김장한 것은 많아야 예닐곱 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무려 13 포기나 했다. 여염집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이겠지만 우리에게 13포기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어느 겨울인가, 5 포기를 했는데 이듬해 봄까지 22 포기가 남았던 해가 있었으니 말이다.
밤늦게 김장을 끝낸 우리는 피곤했던지 다음 날 아침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평소와는 달리 아주 소박하게 아침을 먹고 차를 한잔 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집에 아직도 앙금빵 두 개가 남아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다과로 빵 한 조각을 곁들일 마음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아뿔사! 비닐 포장 안에 들어있던 빵에 시퍼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순간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아끼고, 제지하더니만 결국 미생물에게 헌납하고 말다니. 평소에도 나는 식재료나 음식이 썩거나 상한 꼴을 못 본다. 맛없는 음식은 용납할 수 있으나 변질된 음식은 용서가 안 된다. 차 마시기를 단념했다.
아내는 피로가 덜 풀렸는지, 잠이나 자야겠다며 설거지를 잊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오후 1시가 넘어도 숨소리만 들릴 뿐 잠자는 공주가 되어 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 일정이 있어서 김장김치로 혼자 점심을 먹었다.
싱크대에는 어제 점심부터 설거지할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5명이 세끼를 먹고, 전혀
설거지를 하지 않았으니까..... 만일, 누군가 식사를 한다면 밥을 풀 그릇도, 수저도 없었다.
순간 열불이 났다. 설거지를 할까, 말까? 번뇌가 꼬리를 물었다. 만감이 교차하다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다가 문득, 밴댕이가 떠올랐다. 밴댕이 소갈머리가 더 높이 날아올랐다.
어쩌면 내 속이 밴댕이 소갈머리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들어서는 난감하다.
이까짓 것이 뭐라고? 꼴랑 빵 하나에, 굳이 금슬이 뽀시라운 부부호에 풍랑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 깔끔하게 설거지를 하고 외출을 하자.
할 일을 다 하고 현관을 나서니 불편했던 앙금은 사라지고 나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22.12.21)
첫댓글 별일 닌니 것으로 부부가 마음이 상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더욱 분발해서 글을 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