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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廟 李世玧 李奎煥 李秉健 創建興學堂 李挺柱 成爾鴻 愛民奬學 趙明勖 任安世 宋輝明 兪彦宗
李復祥 移建興學堂 閔百能 李昌遠 善治 宋溥淵 李應重 柳光翼 韓文洪 李星會正廟善政 尹晦東 李性重 趙祥逵 李釆 有碑 李秉淳 徐惇修 蘇洙中 純廟善治 李光斗 金熙臣 朴祖壽 金益秀 李龜星 李鼎耉 安廷喜 李羲升 宋錫老
洪淳謨 有碑 洪膺疇
성이홍(成爾鴻, 1691~1749)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거(仲擧), 호는 취음. 상주세거
권상하(權尙夏) 문하
1725년(영조1) 목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음.
조현명(趙顯命)ㆍ김재로(金在魯) 등의 천거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사어(司禦)에 이름.
1741년(영조17)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임명될 때, 영조가 어제시(御製詩) 1수를 하사하였다. 《性潭集 卷28 縣監成公行狀》
■가계
>4 성여백(成汝栢)
>3 성진승(成震昇)
>2 성호영(成虎英),
>1 성만징(成萬徵,1659~1711) 자는 달경(達卿), 호는 추담(秋潭)·환성당(喚醒堂). 『추담문집(秋潭文集)』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친명배청사상(親明排淸思想)이 강하였음
>0 성이홍(成爾鴻, 1691~1749)
■관력
1725목릉참봉, 1726부속,
■기록
○승정원일기 932책 (탈초본 50책) 영조 17년 6월 15일 무신 16/35 기사 1741년
成爾鴻爲知禮縣監
○승정원일기 933책 (탈초본 51책) 영조 17년 7월 16일 무인 20/24 기사 1741년
知禮縣監成爾鴻進伏, 上曰, 此與他守令, 有異, 履歷姑除之。鄭益河曰, 臣新自嶺營上來, 故詳知知禮事矣。知禮本以峽邑, 今年慘被水災, 一夜之間, 大水猝至, 沙石堆積, 永無田形處, 甚多, 古稱赤地, 今成白地, 雖使賢太守到官, 實無措手活民之路, 使道臣, 各別區劃, 覓給穀物, 然後可以救活矣。臣頃逢吏判, 問以此人, 何以除此邑云, 則以爲見其邑號之相稱而差除云矣。上笑曰, 讀書之人, 宜學古聖賢之事, 須如朱子南康故事, 可也。爾鴻曰, 朱書亦不云乎? 無麪之不托, 何以爲之乎? 聞前官之言, 則知禮田結, 前則千餘結矣, 今則不過二百餘結云, 官家似不成模樣矣。上曰, 水災如是孔慘云, 分付道臣, 各別區劃以給, 可也, 出擧條 上, 書下御製詩一絶, 使承旨傳與成爾鴻, 詩曰, 醴乎不設穆生去, 追憶下鄕心恧焉, 昔賢亦有治郡邑, 此命奚徒便養然。又賜胡楸[胡椒]一封, 上曰, 此乃特賜也, 其領受焉。爾鴻曰, 臣爲老母之便養, 欲赴任矣, 聖敎及此, 不勝惶恐。爾鴻退出後, 鄭益河曰, 此乃嶺南第一望士, 戊申尙州之不起亂, 此人之功也。上曰, 爲人, 極精矣
○실록 영조 9년 계축(1733) 1월 13일(을미)
영남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이 도신(道臣)과 연명(聯名)으로 아뢰기를,
“바다 연안 지역 아홉 고을이 재해(災害)를 더욱 많이 입었으니, 청컨대 조정의 명령으로 대동미(大同米)를 매결(每結)마다 두 말씩, 그리고 기병(騎兵)ㆍ보병(步兵)의 군포(軍布)를 3분의 1을 감하게 해 주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은 예로부터 유현(儒賢)의 대가(大家)가 많았는데 갑술년 이후로 금고(禁錮)된 자가 많으며, 더구나 무신년을 겪고 나서는 사대부들의 인심이 크게 변하였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의 풍속은 다른 곳과 다릅니다. 한 마을 가운데 반드시 장자(長者)가 있어 거기에 나아가 모든 일의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면 모두가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영남 사람은 본래부터 고집이 많아서 자기의 소견을 한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만약에 그들을 감복(感服)하게 할 수만 있다면 뒷날 반드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버려둔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명현(名賢)의 후손일지라도 농부가 되는 데 만족하여 모두가 말하기를, ‘치우친 의논을 하면 역적으로 여기고 과거를 보면 조정에서 버림받으니, 차라리 내가 농사를 짓고 내가 우물을 파서 먹고 사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김성탁(金聖鐸)ㆍ성이홍(成爾鴻)ㆍ이만부(李萬敷) 세 사람을 조정에 추천한 적이 있는데, 김성탁은 얼마 전에 상경(上京)하였으나 성상께서 불러 보시지도 아니하셨으니, 아마도 장려하여 분발하게 하는 방법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것은 시작만 있고 끝맺음은 없습니다. 윤동원(尹東源)ㆍ박필주(朴弼周)는 아직까지도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또 다시 나오도록 권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유신에게는 대개 한가롭게 있도록 사정을 보아주려 하므로, 다시 부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78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 9월 18일 경인 19/20 기사 1734년
上曰, 向者不知成爾鴻之上來, 而不爲引見, 有若待穆生, 不設醴酒, 而憲臣今爲入侍, 未知嶺南之士, 讀書林下, 樂飢隱居者, 有幾許人耶? 相一曰, 嶺南之人, 以科目出身者, 今幾死亡, 而猶餘七八十人矣。上曰, 隱居者有幾人耶? 相一曰, 嶺南是名賢輩出之地, 遺風漸遠, 而多讀古人書者, 比比有之, 安東最多士林, 比於尙州, 亦可爲四五倍, 故其中自有良材美質, 隱居不求者矣。若魯曰, 今者下詢隱居人於憲臣, 聖意甚偉。今聞嶺南, 亦多有之, 而他道亦豈無之, 卽今收用之道, 拘於政例, 不過除拜參奉, 此豈崇用之道哉? 上曰, 先朝, 亦有處士之名, 豈不有張顯光乎? 此何地人也? 相一曰, 仁同人也。上曰, 曾於仁祖朝, 問孝廟學文之工於張顯光, 顯光, 以多謀難敎爲對, 此豈不樸直乎? 若魯曰, 此非但張顯光之樸直也, 可想聖祖容受之量矣。今日政官, 旣爲入侍, 分付各別收用, 何如? 上曰, 是爲虛事矣。寅明曰, 聖敎旣俯詢嶺南人才, 臣有所懷敢達。臣於戊申, 以嶺南望士成爾鴻·李萬敷·鄭葵陽等三人, 直陞六品事, 陳達蒙允矣。今聞李萬敷·鄭葵陽二人, 已爲身死, 只成爾鴻一人生存云矣。近來御史之自嶺南來者, 及曾經本道道臣之人, 皆言故名臣金誠一之旁孫, 安東居金聖鐸, 鄭經世之後孫, 尙州居鄭胄源, 林下讀書, 才行竝過人, 金聖鐸, 則三除齋郞, 終不膺命, 鄭胄源, 亦曾爲齋郞, 上來肅謝後, 仍爲棄歸, 此兩人俱宜超擢調用, 而陞六事體至重, 臣惶恐不敢煩請矣。上曰, 金聖鐸·鄭胄源兩人, 依李萬敷例陞六, 而令政院書成爾鴻·金聖鐸·鄭胄源, 三人之名以入, 銓官, 亦爲勿忘,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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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監成公行狀
송환기(宋煥箕,1728~1807)
公諱爾鴻字仲擧。姓成氏。昌寧人。翠陰其號也。高麗太子中允仁輔爲鼻祖。自是簪紳奕世。入我朝有ⓟ諱孝淵。官正贈贊成。歷三世至諱灠號聽竹。受業於栗牛兩賢。除佐郞不就。當昏朝屛居尙州。後人爲之祭社。寔公五代祖也。高祖諱汝栢號魯溪。以經學屢入銓擬。曾祖諱震昇號東郭。司馬。自丁丑媾成後廢擧斂跡。祖諱虎英。志氣卓偉。從遊尤翁之門。考諱晩徵號秋潭。師事蹇水齋權文純公。除王子師傅不就。妣南陽洪氏。通德郞震大之女。公以肅廟辛未十二月十二日生于恩津之江景寓舍。天資近道。精明端雅。秋潭公大加奇愛。七歲受小學。一遵義方之敎。危坐不動。小無惰容。其戱嬉恰如鄒聖幼時。設ⓟ俎豆揖讓之儀。見者異之。弱冠以親命執贄于江門。先生始以庸學數章奧義發問而對之無礙滯。則甚喜曰吾儒職事。已覰頭顱。學於尊翁。安得不然。辛卯春丁秋潭公憂。哀毁踰節。肂殮盡禮。雖當盛暑。不脫衰絰。甲午冬往拜師門。留侍累日。講質庸學。多所覷得。仍受伯父洞虛齋行狀而歸。是後往來薰炙。實不尋常。辛丑聞師門易簀。卽發赴。與尹屛溪,蔡鳳巖諸公議定服制。初終諸節商確者多。乙巳除穆陵參奉。以親病呈辭不就。丙午除翊衛司副率。以親命一肅而還。壬子方伯趙顯命䟽薦嶺中五人。而以公爲ⓟ恬靜溫雅。力學不倦云云。癸丑上因繡衣李宗伯筵白。特命該曹以公付軍職。仍下諭道臣。使之一依漢家勸駕之例。於是道伯金始烱裁書勸起。公答書曰爾鴻本非辭爵祿者。曾於除命之下。輒卽赴肅。而老母在堂。定省無人。不獲已遞歸。此豈彷彿於難進者哉。今玆下諭。恩禮曠絶。何敢承當。幸望俯察情實。特爲轉聞。俾安私分。如是往復者凡三度。是秋除司圃署別提。公乃以爲前日勸駕之命固不敢當。今此一司職名。眞呂與叔所謂吾義所安者。遂肅謝而還。過數月後上因筵臣朴文秀所達。ⓟ以公肅命時未得召見。特致悔意。下諭道臣。俾爲勸起如向時。道伯以書勸之至再。而公終以親病辭焉。丙辰夏自上下諭本道曰。尙州前主簿成爾鴻必欲一見。而當此易經始講之日。林下之人尤切思想。卿其詳諭此意。卽爲勸送。公以癠憂竟未承命。辛酉三月除翊衛司司禦。乃以親命謝恩。玉堂李成中陳達其上來。公特蒙入侍。上曰予方虛心以待。咫尺前席。畢陳所蘊可也。山野之人。初入君前。必不自陳。予當設問矣。三代以後更無三代何也。公對曰此非賤臣率爾仰對者。而嘗聞先輩緖論。三代ⓟ之前有直字。故能致三代之治。三代之後無直字。故不能致三代之治矣。上曰直字何謂也。對曰明其道不計其功。正其誼不謀其利。是直字義也。上曰三代之後更無直字何也。對曰末世功利之私漸勝。故直字不行矣。上曰欲爲直字之工則從何處始乎。對曰孟子浩然章似爲頭顱矣。上曰其言好矣。予雖不能致儒者。而聞欲輔元良而上來。予甚欣喜。此後頻頻出入經筵。輔予不逮。亦輔元良。是所望也。對曰恩諭至此。豈無感激圖報之心。而老母無他子。以是歸心日促矣。上命承旨書傳敎曰。ⓟ幾年招致。今見其人。深喜。山野之人。延頸元良亦幸。因此而入侍講筵。輔予不逮矣。今八十偏母在堂。而聞今之上來。卽其母之勸成云。可謂贒矣。儒臣之父亦抄選曾經師傅。連代抄選。宜爲存問。司禦成爾鴻之母卽令道臣食物輸送。亦爲時時存問顧助醫藥。以便儒臣之心。自是每當召對。輒令入侍。公於講解經史。應對顧問。極其精確明剴。上曰善哉言乎。非有實得。何以及此。公出入講筵殆浹一望。而前後敷陳。不啻累十條。若其論學問之要。說理氣之奧。尤非諸人所能及也。四月晦呈辭還鄕。六月除ⓟ知禮縣監。七月辭陛。特命引見。使之伏玉堂席而問心經贊文義曰。惟精故一。惟一故中云者。有淺深界分否。對曰不必以淺深言。乃以知行工夫與功效言之者也。精者知也。一者行也。中者功效也。精擇人心道心之間謂之精。旣擇而後專一於道心而固守謂之一。知之旣精守之旣一。則動靜云爲。自無過不及之差。而皆得其中。是乃功效也。仍以先儒所論人心卽道心者。反覆辨析。又擧直字以陳戒。上深致嘉歎。遂敎曰頃者恩禮未終。以致下鄕。每思醴酒不設之意。不勝歉歎。今此外方之除。固出於便養之計。ⓟ得賢字民。亦可以絶一邑之憂。對曰臣才踈學短。固無以當百里之寄。而聖敎如此。敢不竭誠盡心。報效萬一耶。上親題一詩以賜曰醴乎不設穆生去。追憶下鄕心恧焉。昔賢亦有治郡邑。此命奚徒便養然。公感泣圖報之忱。益不能已。及莅任勵精爲治。蔚有茂績。癸亥四月賦歸。悠然有徜徉自適之趣。日與門徒講討不倦。丁卯遭洪夫人喪。哀戚甚。雖在不致毁之時。而守制盡禮。一如前喪。己巳年五十九而以腹疔卒於十一月二十七日。翌年正月葬于州北釜院山負坎之原。自朝家因領府事金在魯啓禀。特ⓟ用可據之例有官庀喪需之典。公聰悟異凡。文藝夙就。擩染庭訓。服習師敎。以篤學博識。名著當世。與諸名勝論學說理者甚多。李陶菴閔蟾村嘗歷到興巖。公往會。論人物五常及本心善惡。陶菴以爲本心則氣質之淸明純善。不可以善惡言。蟾村以爲本心之理無善惡。而其氣質之有善惡種子固自若也。陶菴曰如此說則易歸於明德有善惡之說矣。公曰明德乃氣質中淸一邊所得之理。如四端之爲七情中善一邊。陶菴問大學君子有大道。忠信以得之。驕泰以失之。此得失何所指。公曰大道得失。陶菴曰天理得ⓟ失。公問體用之說有三。一則理爲體氣爲用。一則理有體用。氣亦有體用。一則曰理則有體用。而氣則更不可以體用言。何說得之。陶庵曰前二說得之。公曰愚則以後一說爲的當。盖以理爲體。以氣爲用則理中只有體而無其用。可乎。理之體用。行乎氣之動靜。只是一體用而已。不可以理之體用。氣之體用對頭說也。如曰無極而太極。是爲理之軆也。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是爲理之用也。此非理軆氣用之謂也。陶庵曰先儒嘗斥太極爲軆。陰陽爲用之說。子言似然也。後嘗與尹屛溪語及性理辨。斥心純善之說曰ⓟ所謂氣質之性。乃指心之氣質中所墮者言之。而心之氣質有淸濁。故性隨而善惡耳。豈以軀殼血氣貼性而言氣質之性耶。愚聞性有本然與氣質之分。而未聞心有本然氣質之殊也。作此議論者。未免認心爲性。同於佛氏之見。將恁所爲。無所拘檢。猖狂自恣。其害無窮也。屛溪甚以爲然。仍問曰中庸鬼神之爲德。侯氏言之曰鬼神形而下也。德形而上也。朱子非之。而吾意則不知其不可也。公曰鬼神旣云造化之跡。則跡非形而下乎。朱子非之者。必有別意也。屛溪曰是其不必分析言之。故斥之也。如言人之爲德。不ⓟ必分人與德也。公平居潛玩經籍。精透理義。以至星曆律呂籌數醫卜之書。亦皆融通理會。最於禮學從事益篤。隨處措事。不失儀度。奉先之節。盡其誠敬。睦族之道。篤其恩義。居官以興學爲先務。幾致絃歌之化。至若殿最得其儒𧗱吏事不相牴牾之目者。儘實際語也。鄕黨亦莫不穪其言行之懿而歎服不已。文章在公爲餘事。而所著述甚典重。遺稿若干卷。禮記分類幾卷藏于家。公初配咸平李氏。縣監相吉之女。墓在州西凜義某坐原。有一女適尹休文同中樞。後媲南原尹氏通德郞以發之女。墓在州西安養某坐ⓟ原。有一男宗柱。一女適任時集。側室女呂弘中,朴喬齡。宗柱一男祖烈。一女適申晫。尹壻男鎰。縣監女金箕榮。祖烈一男在大。二女長適李秉天。次適申光漸。嗚呼。以公學行之卓。特被聖上之恩遇。甚爲師友之推重者果如何哉。而惜乎壽未及耋。位不穪德。竟無以大展其才志也。今公曾孫在大以公行錄一通來示余。請得爲狀。顧何可以昏耄辭。謹第錄如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