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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편집
산상수훈. 19세기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의 작품
이 부분의 본문은 초기 기독교입니다.
예수가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설교를 하며 군중을 이끌던 때와 예수의 죽음 이후[주해 1]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다.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4]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5] 사도들이 부활한 예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대사명[6]을 받았다고 여겨졌고, 이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성령을 받기까지 10일간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도했다고 하며, 성령을 받은 사건 이후[7] 이들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8]. 이 사건을 기독교 교회들에서는 성령강림절(성령 강림 대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었고, 자신들이 유대교와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 쓰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부정적이었다.[9] 사도행전 15장에서는 훗날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리게 된 회의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결정하면서, 우상 숭배의 금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거나 짐승의 피를 마시지 말것 정도 만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0]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시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점차 서로 다른 교리와 집단을 갖는 별개의 조직으로 분화되었으며, 마침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르렀다.[11][주해 2]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는 전파와 함께 박해를 받았다. 사도행전 7장 59절에는 스테파노가 유대교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2장 2절에는 대 야고보 역시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제국은 64년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였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Annales)에서, 네로 황제가 로마에 일어난 화재를 기독교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12] 그러나, 네로의 박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 후로도 3세기 무렵까지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특별히 엄단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 기독교가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후대에 부풀려진 이야기이다. 3세기 무렵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의 민중들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받았는데, 기독교인들이 도시의 수호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을 매우 무례한 행위로 여기거나, 도시에 재앙을 초래하는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팽창이 멈추고, 노예제, 빈부 격차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심화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신 앞에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르쳤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불안한 삶을 살던 민중을 위로하였던 것이다.[13]
복음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복음서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행적을 글로 남긴 적이 없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 전승되어 온 예수의 행적을 모아 다양한 복음서들이 제작되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기원후 70년 무렵 마르코 복음서가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에 이를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만들어졌다고 추측한다.[14] 이 때문에 이들 세 복음서는 요한 복음서와 달리 서로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어 공관 복음서라고 불린다.[15]
초기 기독교는 특별한 교단이나 교리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오강남은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영성을 강조한 요한 복음서나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은 도마 복음서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본다[16] 복음서들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주로 살았던 근동 일대의 공용어였던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의 일종인 코이네(koine, 공동)로 쓰였다. 2세기 중엽까지 비슷했으나 통일되지 않은 목록의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서 문헌이 사용되었으나 마르키온의 구약제거와 일부 문헌의 사용 주장이 대두되어 전래되던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7개를 정경으로 인정한 목록을 만들었다. 이 목록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신구약 정경에 어떠한 문헌을 정경으로 수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구약 부문에서 마르키온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교파마다 의견이 다르다.[17]
고대 후기의 기독교편집
로마 제국의 공인편집
고대의 기독교 전파지역
325년
600년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18]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였으며[19],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 로(
)를 그린 후 전투에 승리하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20]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21]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통하여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22] 324년에서 330년 사이 로마 제국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하였다. 새로 지어진 건물 가운데에는 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23]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학의 집대성도 함께 이루어졌는데, 아우구스티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대표적이다.
테살로니카 칙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테살로니카 칙령입니다.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24]
일곱 공의회편집
니케아 신경을 들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주교들
공의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첫 일곱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중요 신학적인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교였는데, 이것은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교회 조직과 전례 등을 정비하였음을 보여준다.[25] 한편, 초기의 일곱 공의회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 동방 정교회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최한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26][27] 일곱 공의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대 후기 기독교의 분화편집
콥트 교회, 아리우스파 및 네스토리우스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초기 일곱 번의 공의회 과정을 통해 보편교회주의가 만들어짐에 따라 이들과는 다른 신학을 가져 이단으로 배척된 교파들은 분화되어 서로 독자적인 전파와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된 이후에도, 칼케돈 공의회가 예수의 양성설을 공인하자 단성설을 주창한 콥트 교회, 아비시니아 교회, 야고보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가톨릭주의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였고, 689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자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선교를 통하여 당나라까지 기독교를 전파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9]
중세의 기독교편집
중세 초기의 동서 교회편집
켈트 성경
중세 초기인 5세기에서 10세기까지 기독교 전파지역은 계속하여 넓어져 갔다. 서유럽과 북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도 이 쯤의 일이다.
기독교의 서유럽 전파편집
기독교 전례에 따르면 기원후 423년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전해진다.[30] 5세기 후반에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서유럽 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다른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기독교도 같이 전파되었다.[31] 앵글로색슨 칠왕국[주해 3]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600년 경의 일로써 켈트족의 기독교 전파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598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였다.[32]
기독교의 북유럽 전파편집
820년대에서 830년대 초,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 사업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다른 지역과 달리 북유럽의 기독교 전파는 비교적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기원후 1,000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33]
기독교의 동유럽 전파편집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동상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 무렵이다. 동방정교회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대모라바 왕국 등의 동유럽 국가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선교를 위해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의 내용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이 문자가 키릴 문자의 기원이다.[34]
수도원 운동편집
클뤼니 수도원의 성당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세속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노동하며 묵상하는 수도원들이 유럽 곳곳에 들어섰다. 동방 교회에서는 305년에 안토니우스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서유럽에서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530년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만든 이후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다.[35]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은 봉건제에 편입되어 그 자체로 영지를 가진 권력 기구로 변해갔다. 각국의 국왕들은 수도원에 봉지를 하사하는 대신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행사하여 교회를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자 하였다. 910년 아퀴텐 공 기욤은 클뤼니 수도원을 만들고 이를 베네딕도회의 엄한 계율을 따르는 교황 직속의 수도원으로 삼았다. 클뤼니 수도원은 수도원장을 자율 선거에 의해 추대하였고, 교구 주교로부터도 독립적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성공이후 이를 본딴 수도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36]
동서 교회의 분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동서 교회의 분열입니다.
로마 제국 말기 서쪽의 서방교회인 로마교회와 동쪽의 동방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이스라엘 교회, 안디옥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여왔다. 원래는 로마지역 교회의 대주교인 로마교회 교황은 대주교들에 대한 존칭이었을 뿐인 이 용어를 절대적 의미로 변화시켰다. 로마교회 대주교 자신이 베드로의 후임으로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의 주교이며, 이는 모든 주교들에 대해 수좌(首座)로서의 권리를 갖는다고 천명하였다.[37] 이와 함께 신학적으로 5세기 무렵 기독교는 대주교들이 이끄는 교구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는 모든 지역의 주교들의 대표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대주교의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교황 레오 1세는 이 땅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대표이기 때문에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로서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고 선언하고 자신의 관할하에 있던 서유럽과 북유럽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직접 주교를 임명하였다. 동서 교회는 이 때부터 사실상 별개의 교회로 분할되었고, 이전의 대주교에 대한 존칭인 교황은 명목상 명칭에 불과하였던 것을 레오 1세는 서방교회의 실질적인 국가로 대규모 국토와 백성을 거느린 봉건제 황제 자격의 교황이 되었다.[38]
레오 1세는 아틸라와 담판을 지어 로마를 지켰고, 이후 반달족의 침입으로부터도 시민의 안전을 지켜 로마의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었다.[39] 서 로마가 멸망한 뒤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은 서유럽의 여러 국가와 민족을 아우를 수 있는 단일한 조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뿐만아니라 프랑코 왕국의 피핀 3세가 교황령을 기증한 뒤, 교황청은 실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40]
이렇게 서로 다른 교회 조직과 지역으로 나뉘게 된 동서 교회는 점차 서로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신학적인 문제에서는 삼위일체의 한 축을 이루는 성령에 대해 동방정교회가 381년 독자적인 공의회를 열어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왔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내용을 니케아 신경에 삽입하자,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왔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따르던 로마 가톨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41] 필리오케 문제라고 불린 이 문제는 동서교회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종교학자 캐런 암스트롱은 필리오케 문제는 서로간에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갈등의 증폭때문에 결국 해결이 불가능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42]
867년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의 섭정이던 바르다스가 포티우스를 콘스탄티노블의 대주교로 임명하였지만, 로마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포티우스 분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분열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43] 그 뒤로 동서 교회는 사실상 별개의 교회로 있는 채 마지 못해 서로를 인정할 뿐이었다. 이후 1054년 동서 교회는 서로를 상호 파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