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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죽림굴(대재공소)
박해시대 피난처로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2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억새벌길 200-78
죽림굴, 곧 대재 공소(1840-1868년)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근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렸다. 폭 7m, 높이 1.2m 규모지만 입구가 낮아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년)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Catacombae)였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1860년) 때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미사를 집전하며 스승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하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교우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죽림굴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언양에서 간월행 버스를 타고 호류 폭포에서 내려 왕방재로 등산해 간월산 정상에서 배내 쪽으로 2km 정도 내려가는 길은 왕복 3시간이 걸린다. 혹은 언양에서 밀양으로 연결된 24번 국도로 석남사를 지난 뒤, 이천행 비포장 도로를 따라 이천(배내) 본 동네 입구에 이르기 전 안내판 표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닦여진 산길은 3.6km 정도의 거리이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타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장하치명’(杖下致命)한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와 오빠 김영제가 체포되자 그 뒤를 따르고자 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김 아가타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들었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웠다. 그녀는 3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토마스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결국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김 아가타의 유해는 간월 공소 뒷산에 모셔졌다.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정녀 김 아가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잡혀 가려 했던 그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만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3월 4일 부산교구는 간월에 있던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했다.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6년 2월에는 죽림굴 주변을 정리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우고 입구에 계단도 만들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28일)]
최양업 신부의 열아홉 번째 서한
작성시기 : 1860년 9월 3일
작성장소 : 죽림
수신인 : 리브와⋅르그레즈와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과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께 공동 편지를 보내드리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니다. 이 작은 편지를 두 분께뿐 아니라 모든 경애하올 신부님들께 이렇게 한꺼번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겨져, 그분들이 아직 살아 계신지 어떤지 조차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전달될 수 있을는지도 의심됩니다.
(1859년 말에 서울에서 시작하여 1860년에 전국적으로 파급된 경신박해는) 그 박해의 발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체포된 신자들은 많지 않고 감금된 여인들도 거의 없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선교사 신부님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에서 17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이고, 여자가 3명이라는 소식을 저에게 알려왔습니다. 그 밖의 교우들도 특히 이 도(道)의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자기 마을에서 쫓겨났고, 집과 전답과 생활필수품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데도 없고 몸 붙여 지낼 곳도 없이 극도로 처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잡혀 감옥으로 끌려간 마을에서는 포졸들이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 질러 버렸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친척이나 천주교 신자인 친구들을 피신시켜주었던 외교인들도 천주교 신자와 같은 운명을 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의 주민들은 같은 고장에서 이웃으로 함께 사는 천주교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즉 천주교 신자들이 마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몰아내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대단히 많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감옥에 가둬둘 수도 없고, 일일이 모두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깊은 산골짜기마다 꼭꼭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를 몽땅 체포할 뜻은 없어 보입니다. 그 대신에 포졸들을 여기저기 사방에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천주교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주민들을 선동하여 천주교신자들을 핍박하도록 충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박해 방법이 우리들에게는 훨씬 더 가혹하고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왕도(서울)로 압송되었고, 한 명은 이 도의 수도인 대구(大邱)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즈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도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 아주 열심한 노파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여 많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우촌을 세웠고 철저한 교리교육과 신심의 모범으로 그 교우촌을 지탱하여 왔습니다. 그 노파는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용맹히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그 상처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慶州)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들은 세 차례나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문초를 당할 때마다 용감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 하였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처참하게 고생하면서도 신앙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 중 열여섯 살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다른 누구보다 더 굳세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으며 비신자들조차 탄복하였습니다.
스물네 살쯤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이 특출하여 모든 교우들 중에서 뛰어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하고 감옥에 끌려가기를 간절히 자청하였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는 포졸들 주변을 맴돌면서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교우들의 강요에 따라 마지못해서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두 처녀들과 함께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두 처녀는 하나는 열일곱 살이고, 하나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이 동정녀가 선생처럼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지도하던 처녀들이었습니다.
포졸들이 오자 그녀는 자기도 아버지와 오빠와 같은 종교를 믿고 있으니 함께 감옥으로 잡아가 달라고 자원했습니다. 이때 두 처녀들도 이 동정녀를 본받아 같이 잡혀가기를 자청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세 처녀의 엄지 손가락을 묶어가지고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포졸들은 그 처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농락하거나 다른 데 팔아먹으려 하였습니다. 포졸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포졸들에게 자기들을 놓아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포졸들의 짐승 같은 욕정을 진정시키셔서 처녀들은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그들 중에서 큰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는 아버지와 오빠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돌봐주는 이나 의지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숱한 위험을 겪으면서 이리저리 헤매 다니다가 결국 저에게로 피신하여 왔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아가다는 둘러 있던 교우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임종경의 마지막 경문을 끝내자 아가다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에서 많은 외교인들 중에서 예비자들이 속출하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에서만도 세례 받을 준비가 된 등록된 예비자가 거의 천 명에 이르렀을 정도입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경문과 교리문답을 얼마나 열성적으로 배우는지 서로 경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인하여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마을마다 천주교의 상습적 동조자들을 추방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지고, 아직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자로 보입니다.
오늘까지 굳세고 용맹하게 신앙을 지킨 교우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나이 어린 젊은 과부나 처녀들은 더욱 큰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벌써 한 교우 과부가 외인한테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명과 처녀 한 명도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여자들은 몸의 순결을 보존한 채 풀려났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교우 처녀들을 어절 수 없이 외인들에게 정혼시켜버렸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이미 외인들과 정혼한 처녀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납치와 능욕의 위험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제가 위에서 언급한 아가다에게 다음과 같이 허락할 수 있다고 여겼을 정도였습니다. 즉 저는 아가다에게 비록 기적이 없이는 굶어 죽을 것이 뻔하지만, 어떤 동굴에 숨어서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가다는 이 허락을 받고서도 죽을 병에 걸리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 피난처에서 또다시 강제로 추방된 다음 저와 떨어져서 다른 구원의 피난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조씨 성을 가진 양반이요, 학자요, 상당한 부자인 가족이 자기 가문의 여러 후손들과 더불어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가옥과 모든 것을 팔고 나서 출생지인 고향을 떠나 십여 일 전에 교우촌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포졸들한테 모든 것을 다 빼앗겼고, 또 포졸들이 집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열여섯 식구가 거의 알몸으로 쫓겨나 어떤 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집은 교우 가족이 살다가 포졸들의 등쌀에 못 이겨 버리고 떠난 집이었습니다. 조씨는 이 집에서 어떤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당분간 살아가기에 꼭 필요한 세간살이를 장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집에서도 쫓겨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고 다른 데로 피신할 수밖에 없어서 친구들에게 구걸하면서 처참하게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전에 그는 아무것도 아쉬움 없이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 착한 예비교우들은 자기의 영광스러운 불행한 신세에 대해 크게 한탄하거나 원통해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박해의 북새통에 아직 세례받지 못한 것만이 유일한 고통이랍니다. 이 집안 식구가 열네 명인데 집에 선교사 신부님을 모셔다가 세례 받게 되는 날만 고대하고 있습니다.
조선 조정과 온 백성들은 천주교 신자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무슨 음모나 꾸미는 자들이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저들은 다음과 같이 추리합니다. "자기네 종교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 종교이고, 또 천주교의 겉모양은 그럴듯하고 멋있게 보이는데, 그 겉모양 아래 흉칙한 음모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왜 비밀리에 전도하는가? 특히 선교사들이 남의 나라에 몰래 잠입하여 비밀히 자기 교리를 전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의 나라가 매우 강력하다고 떠벌리나 겁낼 것이 아무것도 없을 터이다. 그들의 교리대로라면 그 종교는 모든 이가 구원받기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의 군주들이 그 종교의 신봉자들로서 그 종교의 포교를 힘껏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그들 신봉자들인 군주들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그 종교의 팽창을 조선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강요하고 밀어붙여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가) 왜 합법적으로 행하지 아니하는가? (프랑스 선교사들이) 왜 공개적으로 오지 아니하는가? 왜 정부끼리 우호적이고 합법적으로 행하지 아니하는가? 왜 몰래 입국하여 모든 것을 비밀히 행하다가 그다지도 처참한 지경을 당하는가? 그들의 행동 방식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무슨 흉계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등등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론으로 조선 조정과 백성들은 신자들과 서양 함선들에 대하여 큰 경멸과 증오와 적개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주 오는 서양 함선들이 천주교 신자들인 줄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서양 함선들을 무서워했고, 그 함선들에 대하여 굉장한 무엇이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여러 해 전부터 서양 함선이 자주 나타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서양함선들을 해적선으로 여깁니다.
조선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다음과 같이 수군거립니다.
"저 큰 함선들은 틀림없이 해적선이거나 범죄자들의 선박이다. 만일 그 함선들이 합법적으로 성립된 권력을 가진 어떤 국가에 속한다면 어떻게 공공권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이처럼 자주 침범할 수 있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유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간다면 어찌되는가? 예의를 모르는 야만인이거나 강도질을 할 기회를 엿보는 도둑임이 틀림없지 않겠는가?“
모든 이가, 일반 서민이거나 시골 농사꾼들까지도 이와 같이 추리하고 이러한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이나 백성 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하여 최대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2년 안에 프랑스 함선들한테서 마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친주교 신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이 나라에서 말살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1886년에 가서야 조선과 프랑스는 수호조약을 맺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 우리 눈이 모두 당신의 자비에 쓸려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이 당신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우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우리의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우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옛 자비를 기억하시어, 우리와 당신의 모든 성인들의 기도를 어여삐 들어 허락하소서.
우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하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금년에 저의 사목 순회 도중 중단된 성무 집행의 연발 보고를 드립니다. 1,622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어른 203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어른 임종자 13명에게 대세를 주었고, 예비자 398명이 등록하였습니다.
지극히 비천하고 순종하는 종, 조선 포교지 탁덕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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