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길을 걷다
글/김덕길
지리산 둘레길이 열리기 전, 제주 올레길이 열리기 전, 사람들은 저 먼 나라 스페인 북서부 기독교 성지인 산티아고를 찾아 트레킹을 떠납니다. 트레킹은 하이킹과 등산의 중간개념으로 해발 5,000m 이하의 길을 하루 평균 20km씩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을 걸으며 때론 침묵합니다. 때론 나에게 길을 묻고 길에게 나를 묻습니다. 때론 내가 길이 되고 길이 내가 되기도 하는 여행입니다. 혹자는 트레킹을 도보순례라고도 합니다.
가끔 참석하던 산악회의 대장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김 선생님! 시간 되면 제주 올레길 같이 가시죠? 이번에 저렴하게 1박2일 코스가 잡혔거든요.”
“고맙습니다만, 평일에는 일을 해야 해서요. 일단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난 가을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아서 다시 가는 겁니다. 사모님이랑 함께 오세요.”
망설임 끝에 결국 아내와 함께 제주 올레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노점에서 장사를 하는 하루하루는 피곤의 연속입니다. 밤 열시가 넘도록 일에 파묻혀 살다보니 아내와 살가운 이야기조차 하기 힘듭니다. 집에 와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눈뜨면 아침이고 다시 또, 일을 나가야하는 반복된 생활입니다. 자연스레 나는 집에서 하숙생이 되고 아내는 밥이나 차려주는 주인 여자가 됩니다.
아내가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당신은 왜 허구한 날 나만 보면 밥달래? 내가 밥순이야?”
그런 아내에게 또, 잔소리를 합니다.
“도시락 싸줘. 당신이 너무 편해서 그러는군!”
“도시락 안싸줄거야! 벌써 13년째 도시락 싸는데 이젠 지긋지긋해.”
아내는 이 추운날씨에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사먹으란 소리입니다. 저를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이겠지만 도시락조차 싸기 귀찮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아내는 가급적이면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밖에서 고생하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합니다.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론 아내까지 노점바닥에서 추위와 싸우며 일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내 삶이 척박한데 그 척박함속에 아내까지 가두기가 싫은 까닭입니다. 어쩌면 하루 일을 더 하는 것보다 아내와 함께하는 낯선 곳으로의 동행이 더 값진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해보며 올레 길을 선택했습니다.
제주 올레길이 언론에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제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레 길에 대한 소문은 산과 도보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입니다. 이미 제주도는 개발할 만큼 개발이 된 상태입니다. 인위적인 개발로 자연 그대로의 제주는 자취를 감추고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구경거리가 사람을 붙잡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쉬이 싫증을 느낍니다. 인공미는 굳이 제주에 오지 않고 서울에 있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 이유는 인공적인 개발로 만든 구경거리가 아니라 제주 그 자체의 전형적인 시골의 아름다움, 고향 같은 편안함, 그 속에 묻어나는 잔잔한 여유를 그리워하며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절제한 개발로 이미 자연은 많이 훼손이 된 상태입니다.
제주 올레길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편안함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렌터카를 빌려서 여행을 합니다. 고작 걸어봐야 한라산 정도입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자전거 하이킹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주 전체를 걸어서 종주해보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주 올레 길은 바로 걷고자 하는 이에게 꿈길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한 곳은 외돌개가 있는 7코스부터입니다.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처음 와보고 25년만입니다. 거친 풍랑과 세파에도 외돌개는 의연한 모습으로 외로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풍파에 좀 깎이기도 했을 테지만, 세월의 무게에 몸뚱이가 좀 부서지기도 했을 테지만, 외돌개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있습니다. 삶이 위대한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의연히 서 있는 것은 아닐까요. 홀연 뒤돌아보았을 때, 내가 서있던 그 자리가 낯설게 보일 때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언제든 뒤돌아보았을 때 '네가 서있던 그 자리에 네가 없어 그렇게 허전해 보일수가 없더라!' 라는 말을 듣도록 노력하라고 외돌개는 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먼 하늘은 구름을 긁어모아 해를 감추고 먼 바다는 파도를 긁어모아 제주도 검은 바위를 감춥니다.
올레 길에서 억새는 그 흔들림으로 길을 감추고 길은 그 구불거림으로 억새사이를 파고듭니다. 해안선을 끼고 걷는 길은 그야말로 꿈길입니다. 돌을 깎아 길을 만들고 길을 깎아 계단을 만든곳을 지나니 드디어 흙길입니다. 제주도 흙은 발에 엉겨 붙지 않습니다. 현무암가루가 섞인 흙은 신발에서 부서집니다. 천지가 귤농장입니다. 샛노란 귤이 이파리 사이에서 빼꼼이 얼굴을 내밉니다. 조금 더 가니 귤만 있고 귤을 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귤을 비닐에 정성껏 담아놓고 천원이라고 비닐에 쓰여 있습니다. 곁의 메모지에는 무인판매라는 표지가 보입니다.
“여보! 천 원짜리 있어? 우리 이것 한 봉지 삽시다.”
“어머? 말로만 듣던 무인점포네. 호호”
아내가 천 원짜리 한 장을 돈 통에 넣고 나는 귤 한 봉지를 들고 즉석에서 귤을 까먹습니다. 제주가 온통 내입에 베어 물려 입안이 상쾌합니다. 올해만큼 귤값이 폭락한 적이 또 있던가 싶습니다. 귤값이 싸다보니 귤을 따봐야 인건비도 나오지 않아 귤수확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시골선 배추 값이 폭락해서 배추밭을 통째로 갈아엎던 기억이 있습니다. 농수산물은 수확과 공급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도 수확과 공급의 조화를 어떻게 맞춰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만 하겠습니다.
제주 올레 길은 때 묻지 않아서 좋습니다. 길을 가면서 수많은 야생화를 봅니다. 동백도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유채꽃도 보입니다.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갈대는 환상입니다. 바닷가 검은 현무암 사이로 부서지는 파도역시 일품입니다. 주상절리와 용머리 해안은 세계적인 자랑거리입니다. 우리는 걷고 또 걷습니다. 아내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줄줄이 나눕니다.
점심때 강정리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강정 농협 앞에 있는 ‘솔대왓’이란 식당인데 옥돔에 삼겹살에 해초 국까지 차려서 단돈 5천원입니다. 우리 일행 40여명은 배불리 먹습니다. 귤은 덤입니다. 식당 아주머니께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여기 너무 맛있어요. 제가 인터넷에 자랑 좀 해 드릴게요. 하하."
식당 아주머니의 표정이 금세 환해집니다. 커피는 덤입니다.
우리는 또, 걸어갑니다. 오늘 걸었으니 내일 또, 다른 길을 걸어가야지요. 때론 산길도 있고 때론 초가집 마당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때론 중문해수욕장 바닷길을 때론 하얏트 호텔 로비 앞을 걸어가기도 합니다.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환합니다. 지치고 힘든 심신을 여기 바다에 뉘이고 섬에 뉘여 보는 시간, 삶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여유입니다.
우리 바쁜 걸음 조금은 보폭을 줄이고 잠시 쉬어가기로 해요. 억새와 친구하고 바람과 친구하고 길가에 핀 야생화와 친구하기로 해요. 그리고 사랑하기로 해요. 오늘 같이 걷는 사람을, 오늘 같이 걷는 이 소중한 모든것들과의 인연을…….
첫댓글 올래길 ~~하루종일 걸어야 하나요? 궁금해서리,,,
모든 코스 다 걸을려면 나흘정도 걸어야 해요. 걷는건 자기 마음입니다. 물론 혼자갈때..ㅎ 평균 하루에 다섯시간정도 걸으면 좋습니다. 무리도 안가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