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아는 평소와는 좀 달라 보였다. 평소처럼 까불기만 하는 경아가 아니었다. 좀 청순하고 조금은 엄숙함 마저 느껴지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별을 얘기하던 경아가 살며시 내 어깨에 몸을 기대왔다. 난 거부감 없이 한 팔로 경아를 살며시 끌어 안았다.
경아답지 않았다. 지금 내 팔에 안겨있는 경아는 내가 알고 있는 경아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경아는 내가 살며시 안았다 해서 이렇게 떨지는 않을 테니까.
경아는 떨고 있었다. 아주 작은 떨림이었지만 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음이 느껴졌다.
밤이라서, 인공 불빛이라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경아의 얼굴엔 엷은 홍조가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귀엽고 예쁜 나의 작은 어린 친구는 내 품에 안겨서 떨고 있었다.
-오빠, 사랑이 무슨 색인지 알아?
-몰라. 아마 핑크 빛이겠지.
-그럼 이별은 어떤 색이라 생각해?
-이별의 색깔은 상상이 되지 않는 걸.
-잘 생각해봐.
-음, 잘 모르겠다. 그냥 연한 파란색 정도.
-아냐, 이별은 잿빛이야. 그리움은?
-그리움은 보라색 정도.
-아냐. 그리움은 빨간 색이야. 기다림 그리움 따위의 색은 분명 빨간 색일 거야.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조그만 게 별걸 다 아네.
-오빠, 우체통이 왜 빨간 색인지 알아? 그 건 기다림의 색깔이 빨갛기 때문이야. 그리움의 색깔이 빨갛다는 의미이기도 해.
-오늘 경아에게 이 오빠가 많은 걸 배우는데.
우린 그렇게 별을 헤다가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경아는 예전의 경아로 돌아와 있었다.
경아는 내 친구 중에 미애를 무척 따랐다. 미애도 가끔 경아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집에 오기도 했다.
-언니 우리 오빠 좋아해?
-응, 넌?
-난 오빨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데 왜 여길 와?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랑하거든.
-호호 조그만 게. 암튼 경아는 언제 봐도 귀여워.
-언닌 오빠 어디가 좋아?
-어디가 좋긴, 그냥 친구니까 좋지.
-경아는 태수 어디가 좋은데?
-나를 담을 수 있는 넓은 가슴. 아마 오빠의 가슴속엔 경아 정도는 여러 명이 들어가도 꽉 차지 않을 거야.
-태수 너 조심해야 겠다. 경아가 널 찍어 놨나 보다.
미애가 웃으며 말했다. 미애는 나에게 가끔 경아에 대한 말을 했다. 나이에 비해 무척 어른스러운 면도 있는 데 반해 너무 천진 난만해서 사랑스럽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난 미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애의 말이 사실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경아는 이제 겨우 열 다섯 소녀였기에. 나에게 경아는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너무 사랑스러운 동생이자 친구였다.
이성의 감정을 느끼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았다. 나이 차이보다는 경아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나에게도 있었다.
만일 내게 애인이 생긴다 해도 지금 경아와의 정 보다는 깊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두 여자를 놓고 한 여자를 택하라 하면 난 당연히 경아를 택할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서든 한 사람만을 만나야 한다는 조건이 생긴다면 난 너무도 당연히 경아를 선택 할 것이었다.
경아를 향한 지금의 내 감정도 분명 사랑의 일종이었다. 사랑이라 해서 반드시 이성의 감정이 깃 들어야 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렇다. 난 경아를 사랑했다. 난 경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히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이성의 감정만 없을 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경아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게 될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지독히 사랑스러운 동생일 뿐이었다. 경아도 나와 같은 감정일것이었다. 나에 대한 감정이 미애의 말처럼 특별한 감정은 아닐 것이었다.
그건 말이 안되는 거 였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또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경아는 이제 겨우 열 다섯 소녀란 걸 난 알고 있었기에...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두고 미팅 제의가 들어 왔다. 일 학기 마지막 미팅이란 친구의 말에 선선히 응했다.
약속 장소에 나가서도 파트너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파트너와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흥겨운 노래를 부를 때도 가끔 경아가 떠올랐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가 경아였으면 싶었다. 경아와 함께라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잠깐씩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내가 파트너를 바래다 주고 집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술이 거의 다 깨기는 했었지만 아주 조금은 내 의식의 일부를 잠식하고 있었다.
문은 그냥 열렸다. 방에 들어가자 경아가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조금 남아 있던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전신을 휘 감았다. 무언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확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난 경아를 안고 생각에 잠겼다.
'난 왜 경아를 잊고 있었을까? 경아가 올거란 걸 알면서도 난 왜 경아를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경아는 어떻게 내가 미팅에 나간 걸 알았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잠들어 있는 경아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때 경아가 잠에서 깨었다.
-기다리다 잠들었나 봐.
-집에서 걱정 하시겠다. 잠 깼으면 빨리 가자. 근데 어떻게 알았어?
-아까 오빠 친구한테 전화해서 알았지. 아직 안 들어 온 걸 보니 잘 된 모양이라며 부러워 하던데?
-그저 그랬어. 난 네가 기다리다 그냥 갈 줄 알고 신경도 안 썼지. 경아가 계속 기다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왔을 텐데.
-흥, 다른 여자 만나느라 경아는 안중에도 없었으면서... 만나서 여태 뭘 하느라 이제 들어 왔어?
-그냥 놀았어.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난 경아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말해야 했다. 결국 다 듣고 난 후에야 경아는 나를 놔 줬다.
그런 경아가 너무 깜찍했다. 마치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 같았다. 난 다시 경아를 집에 바래다 주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난 방학이 시작된 후 곧 바로 시골에 내려가 며칠 묶고 다시 올라 왔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뵙기 위해서 였다. 경아도 얼마 후 방학을 맞이했고 우린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극장에 가기도 했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소래에도 가끔 갔다. 즐거웠다. 경아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즐거웠다.
경아는 내 팔을 베고 눕는 걸 좋아했다. 가끔 내 방에서 내 팔을 베고 누워 잠들기도 했고 우리 학교 잔디 밭에서도 내 팔을 베고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기도 했다.
더러는 경아의 침대에서도 함께 누웠다가 그대로 잠든적도 있었다. 경아의 부모님도 알고 계셨지만, 나를 믿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셨다.
아니, 어쩌면 이상한 눈으로 볼일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경아는 아직 어렸고, 또 나는 경아의 오빠였으니까.
경아는 안개꽃을 좋아 했다. 안개꽃을 보면 하얀 눈물이 떠올라 좋다고 했다.
이름처럼 안개를 닮은 안개꽃, 투명하진 않지만 하얀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안개꽃, 한 송이로는 꽃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여러 송이가 모여야 만이 꽃의 기능을 발휘하는 꽃.
눈과 너무도 닮은 꽃. 한 송이 눈은 아름답지 않지만 수많은 눈송이는 가슴을 설레임으로 물들이 듯이 안개꽃도, 여러 송이가 모여야 비로서 안개가 되는 꽃.
경아는 그런 이유로 안개꽃을 좋아했다. 특히 눈을 닮아 좋아한다 했다.
난 길을 가다가 꽃집이 보이면 안개꽃을 사다가 경아의 머리에 꽂아 주기도 하고 한아름 안겨 주기도 했다.
경아는 나에게 안개꽃을 선물받으면 너무 좋아했다. 여름에도 눈을 느낄 수 있는 꽃이라며 환하게 웃는 경아는 나까지 기쁘게 했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여름이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여름의 자리를 살며시 엿 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여름은 쉽게 물러나기 싫은듯 한낮엔 찌는 더위를 안겨 주었다.
그 무렵 경아는 내게 물망초 한 송이를 건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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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그 세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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