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6.5.17.) 말씀/ 히브리서 3:1 생각의 힘을 키우고 가꾸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러분, 인간이 짐승과 구별된 점이 무엇이지요? 다양하게 많겠지만 핵심적으로 한 가지만 이야기한다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사람은 움직이기 전에 생각을 합니다. 모든 행동은 의식이든 무이식이든 생각을 통해 나타납니다. 우리가 요즘 책 읽기를 시작한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는 ‘라틴어로 고기토 에르고숨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그저 좋은 명언으로 이해하고 배웠지만 사실은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명제입니다. 인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성숙도도 생각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요? 당연 그렇습니다. 생각의 깊이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사유의 시선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사고하는 시선을 높이 끌어올리고 넓히며 확장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각대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성숙한 삶을 위해서 당연히 생각의 힘을 키우고 가꾸워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면 생각대로 살아간다.” 어떤 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행동들이 얼마나 유치한지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생각이 자라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도 아이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렇다며 우리가 어떻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생각을 가꾸고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생각이 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임진 왜란 당시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이 배를 버리고 도주할 때 거북선을 비롯하여 160여척에 이르는 점함이 격파됐고 1만여명의 병사가 전사했습니다. 나중에 한 달 후 삼도수군 통제사에 복직한 이순신에게 조선 수군은 더이상 가망이 없으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종군하라는 어명이 떨어졌을 때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기필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직 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9월 16일 이순신은 패잔병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을 이끌고 율돌목으로 가서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는 내 명령을 조금도 어기지 마라. 명령을 어기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군율도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열배나 넘는 적과 싸워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에이트 싱크’라는 책에서 이지성은 이순신은 오기의 병법을 띄어넘고, 손무의 병법을 띄어 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많으면 절대로 싸우지 말라야 한다고 명기되어 있는데 이순신은 10배가 넘는 적과 싸워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순신으로 수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기게하였을까요? 바로 씽크(생각). 이순신에게는 오기와 손무가 따라올 수 없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전쟁은 단지 전술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전술 위에 더 큰 힘이 바로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적탄에 맞아 죽을 때로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알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역시 죽음의 순간에도 부하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저는 이 재명 대통령이 숱한 어려움을 겪고, 내란을 극복하고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이런 생각이 있다고 봅니다. 지난 어린이날에 청화대에서 각계 계층의 어린아이들을 초청해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한 어린이가 손을 들고 "어떻게 대통령이 되셨냐"고 물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바로 국민이고, 대통령은 국민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할 사람을 선택해 맡기는 자리입니다. 국민을 위해 성실히 준비하고 노력해 인정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과 답변도 있었습니다. "대통령 일은 편하신가요"라는 물음에는 "많이 힘들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학생들도 힘들어도 공부해야 할 때가 있지 않나요"라고 미소 지었습니다. 어린이이들과 짧은 대화이지만 그 속에도 국민을 생각하는 대통령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국민인데 국민이 없는 사람들과 당도 있지요. “국민당” 이름이 부끄럽네요. 세종 대왕도 그렇고, 백범 김구도 그렇고 위대한 지도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가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은 믿으면 되지 무슨 생각이 필요한가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런 생각을 다듬고 가꾸는 것이 바로 인문고전입니다. 우리는 인문고전을 통해서 역사 속에 인류를 위해 많은 일을 창조하고 공헌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원 높은 생각을 하는 그들과 교제함으로서 우리 생각의 시선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은 곧 생각의 스케일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법주를 띄어넘어 세계를 생각하고 인류를 생각해온 사람들입니다. 속 좁은 사람들의 특징은 속이 밴댕이만 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입니다. 자신의 좁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은 생각만큼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바벨탑 사건 후 인간이 ‘생각하는 경향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말이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을 하나님은 육체가 되었다고 하셨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육체가 됩니다. 육을 생각하면 육, 영을 생각하면 영입니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sns 시대에 살다 보니 생각을 깊이 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원합니다. '깊이' 있는 것은 골치 아프다고 외면합니다. 남이 힘들여 해놓은 좋은 자료들이 쌔고 쌨는데 뭐하러 힘들게 생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클릭 복사만 하면 뭐든지 옮길 수 있는데 정말 편리하고 좋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편리한 것 너무 좋아하면 안 됩니다.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점점 생각이 없어집니다. 생각이 없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자신인데 생각이 없는 자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기 가치관은 무엇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지성작가의 <에이트; 씽크’> 를 보면 인공지능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는 로봇입니다. 로봇은 사람이 만든 기계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이세돌이가 인공지능 로봇과 바둑을 하였는데 졌습니다. 만일에 이대로 가다보면 사람은 인공지능 로봇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AI 인공지능 정말 대단합니다. 앞으로 AI가 대세입니다. AI가 일자리를 빼앗아갑니다. 제가 그동안 시를 써놓고도 시평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는데 AI에게 시 평론을 부탁하니 기가막히게 해줍니다. 마치 최고의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감동적입니다. 앞으로 어쩌면 회계, 경리, 상담, 금융 보험, 법률, 통 번역가들이 직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것도 AI에게 물어보면 답해줍니다. 데이터를 조합, 분석, 답을 내놓는 지능 기억은 인공지능이 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약점은 스스로 창의적 생각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을 안 한다면 인간의 자리는 모두 AI 탑제 로봇이 대체될 것입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대안이 바로 생각입니다. 생각만이 인공지능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모든 컴퓨터나 기계들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빌게이츠는 “만일 인문학이 없었더라면 컴퓨터도 없었을 것이고, 마이크로 소프트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실제로 컴퓨터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기계식 계산기는 팡세를 쓴 파스칼이 개발하고, 라이프니츠가 개발했다고 합니다.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최초로 선보인 ‘해석기관’의 창안자 찰스배비지는 철학자이자 공학자였다고 합니다. 발명의왕 에디슨은 발명의 천재 이전에 ‘도서관을 통체로 읽은 벤처의 선구자’ 였습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인류의 문명을 건설한 천재들의 생각과 만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니체, 아윈스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데카르트 등 천재들의 생각과 만나서 우리의 생각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입니다. 생각만이 인공지능을 지배하고 콘트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우리가 할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3:1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왜 믿기만 하면 되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까? 다윗은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 주께서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은 자신과 가문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다윗은 자기 의가 아닌 은혜를 헛되이 여기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단지 믿음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도비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큰 사랑으로 값없이 구원받았지만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믿음을 삶에 적용할 것인지? 그럴 때 감동이 밀려오고, 믿음도 더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일을 이루셨습니까? 구약시대부터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셨고, 약속하고, 예언하고, 마침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말씀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죄사함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 : 12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큰 은혜로 인하여 거저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 한 사람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셨는지 깊이 생각할 때 이 큰 구원을 우리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속좁은 편견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생각은 그릇입니다. 그릇이 적고 삐뚤어지면 그 안에 담긴 내용도 삐뚤어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큰 소리로 아멘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은 자연히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한 백부장이 병든 하인을 위해서 간청할 때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믿음의 크기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가 로마인으로서 이만한 큰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의 믿음이 깊은 생각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하인을 생각했습니다. 하인을 사랑하는 마음, 어찌하던지 고쳐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다음에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생각하였습니다. 나도 군대 상관으로 부하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하며 그대로 순종하는데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은 집에 가시지 않아도 능히 말씀만으로 고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요청하였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사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다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칭찬하셨습니다. 이사야 55:8-9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처럼 하나님도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의 높이 깊이가 다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높고 깊은 생각을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근본 성령으로 깨달음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 깊이 생각하는 마인드를 힘을 키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문고전 철학을 읽는 것은 바로 그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크기를 키워 우주적인 마인드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독서모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매너리즘에 빠진 수요예배 보다도 큐티와 책을 읽으면서 생각의 키우고 실천적 삶을 키우는 독서모임을 정했는지 신기합니다. 10시 30분까지 이 독서모임을 통해서 책을 읽으며 아주 효율적인 예배를 드리는 이런 곳은 제가 알기로는 세계에서 단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두 분이 예수를 만나고 예배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읽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으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배우게 되어서 더욱 효과적이고 더 많은 것을 배우니 참으로 유익합니다. 이렇게 생각의 깊이와 사유의 능력을 키우는 목적은 결국 다시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 실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 우리는 AI나 로봇등 현대 기계 문명의 시대에 살며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12절을 보면 베레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똑같이 말씀을 받아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 더 믿음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믿음을 갖고 있지만 생각의 힘을 키우고 가꾸는 사람이 되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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