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공범이라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 성씨도 같고 같은 집에 살다보니 이보다 더 좋은 공범들은 없다. 다음엔 막내에게도 핸폰을 지급해야겠다. 007 뺨치는 기동력과 수사력은 "내 애 맞어?" 싶다.
처음부터 엇갈린다. 삼성플라자로 갈까? 아냐 하나로가 장보긴 젤 좋아. 것보단 코스코가 어때? 그냥 동네서 대충보고... 밥이나 한끼 근처에서 때우지.. 의견백출이다. 도통 합의가 안된다. 외식 때마다 싸우더니 장보러 가는 길도 시끄럽다. 시끄러우면서도 항상 같이 몰려 다니는 이유를 남들은 알지 못한다. 하긴 나도 모르겠으니.... 다만 따로들 간 적은 별로 없다. 식씩대고 얼굴 붉혀도 한 5분만되면 언제 그랬냐는 별칭 까마귀팀이다. 오늘은 코스코로 정했다. 산 것도 없는데 돈만 많이 나온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건 그 사람이 고민할 문제다. 각자의 목적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의 불평을 들을 마음의 여유는 아무도 없다. 1층에서 돌아다니다가 퍼터를 만지작거리는데 탤런트 박인환씨도 와서 이걸저걸 만져본다. 가볍게 인사하고는 퍼터 가격하고 퍼팅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둥 그래도 있대는 둥 하며 몇마디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그만 놀고 장보러 지하층으로 내려가자는 전갈이 막내를 통해온다. 지금까지는 이런 코너에서 만지작거리며 살까 말까를 고민하는 행위도 시장의 한 구
성요소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그냥 논 것이구나하고 생각하며 지하로 내려간다.
저쪽에 예의 첫 번째 들르는 방앗간이 반갑게 나를 맞는다. 와인 시음이다. 10번째도 더 되었지만 항상 처음처럼 되묻는다. "이거 스파클링 와인이에요?" "네~ 괜찮은데...", 화이트, 레드 모두 맛보아 보았자 한 50cc나 될까. 5m뒤에는 스파클링 아닌 진짜 와인이 날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맛볼 수 없어 붐비지도 않는다. 아줌마들도 없다. 레드 화이트를 모두 맛본다. 오늘은 쇼비뇽이 나와 있다.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다. 하지만 너무 반한 듯, 눈에 감탄의 빛이 들어가면 안된다. 그러고 안사면 미안하기 때문이다. 약간 미심쩍다는 듯 입을 오무리며 생각해보겠다는 신중한 눈빛을 살짝 연출하면 된다. 실제 그런 신중한 눈빛의 이면에는
잔이 너무 쪼그만하다는 불만이 있어 연기가 가능하다. 우측으로 몸을 돌리면 커다란 병에 든 와인 Carlo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역시 거기에 가서도 화이트와 레드를 모두 시음한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물론 조금씩만 더 담아 놓았으면 적당히 얼근한 기분에 쇼핑도 기분파로 할 터인데... 아직 이들의 마케팅 전략과 생각이 좀 부족하다....싶다. 술 좀 큰 잔에 풀어봐라 기분내어 더 사지.... 바보들... 일단 6잔의 와인 시음으로 시동은 충분히 걸린 것으로 보인다. 구석에 70년대에 나를 사로잡았지만 지금은 멀어진 구운 닭이 줄맞추어 바나나 보트 돌아가듯이 돌아가고 있는 곳 옆으로 가면 와인 맛을 본 사람을 위한 안주가
물론 서양식으로 준비되어 있다. 야채와 닭고기에 소스에 버무린 것이 오늘은 나온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걸로 보아 이런 기회는 일단 놓치면 안되는 거 아닌가? 경험법칙상 그렇다. 1분 정도 기다려 하나를 받는다. 괜찮은 맛이다 역시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다. " 아빠 아직 여기 있었네?" "저기 이것 저것 난 한바퀴 돌았는데... 저 쪽으로 가자" 막내는 얼굴이 온통 즐거움이다. 짜아식 와서는 저리 즐거이 돌아다닐꺼면서...... 다 아빠 잘 둔 덕이다 ㅎㅎㅎ 거지가 아들하고 불타는 집 구경하다가 아들에게 넌 저리 탈 집이없는 아빠 잘 만난줄 알라고 한 그때 그 아빠의 생각이 지금의 내생각과 크게 다른 입장이 아니다. 한식으로
입을 돌린다. 돼지목살이래나 손도 크게도 잘라놓았다. 아주 맘에드는 아줌마군... 두 개를 묶어 한번에 이쑤시개로 들어올리려면 약간의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와인 따른 후 병돌리는 기분으로... 만약 놓칠 경우는 주변의 눈총을 뒤집어쓰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깔끔히 처리해야 한다. 한정식의 핵심은 조기 아닌가? 중국에서 왔겠지만 열심히 발라놓는 아줌마의 손길은 기다리는 이를 유혹한다. 이건 정말 강적이다. 이쑤시개를 여기에선 없애야 한다. 어쩌다 조그만 조각하나 정도를 건질뿐 조금이라도 큰 덩어리는 여지없이 부서져 이쑤시개를 조롱한다. 체면상 입맛을 다시며 짧짤한 기분만 맛보고 물러설 밖에...... 화가나서 조기는 안산다. 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사지.... 방향을 바꾸어 소시지를 구어주는 곳으로 간다. 소시지는 참으로 맘에 든다. 이쑤시개에 잘도 메달려 오기 때문이다. 물만두 고녀석도 괜찮은 녀석인데... 간혹 와인돌리기를 못하면 바닥에 떨어트린다. 너무 익어 풀어진 물만두는 도전 안하는 것이 내 철학(?)이다. 이미 두어차례 독자적인 순례를 마친 막내는 종합 평가를 내린다. 저쪽 새우튀김하고, 드레싱 얹은 야채, ㅇㅇ 물만두가 오늘의 하이라이트래나... 호밀빵에 마늘빵, 생크림 바른 바게트 빵으로 적당히 배를 채우면 처음의 긴장되었던 약간의 눈치는 이젠 사라진다. 입가심으로 막무쳐놓은 갓김치와 총각김치를 하나씩 맛본다. 빵먹은 뒤에 가야되는 코스다. "아빠 이리와봐.. 저기 삼겹살 무지 맛있어..." 아이 녀석 창피하게 스리... 김치 버무리는 아줌마가 웃는다... "뭐? 뭔대그래?" 하면서 아이를 말리듯 따라가지만 눈은 이미 공격목표를 향하고 있다. "아빠, 우리~~" "응, 뭔데?" "1층으로 나가면서 옷 좀 보자" "무슨 옷?" "안과 밖이 다른 재킷같은 거 말야" "한군데 맛있는 곳을 여러번 공략하려면 옷을 뒤집어입고 갈 수 있는 그런 옷이 어떨까?" "............. 끄응.." 나보다 한수 위다. 이 정도면 어디에 혼자 보내놔도 잘 적응할 실력이다. 가디건같은 거 옷하나 더입고 와서 안에는 시원하니 벗었다 입었다해도 될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아낀다. 자유로이
창의력을 발휘하게 그냥 놔둬 볼 생각이다. 자동으로 김굽는 코너에서 고소하게 막나온 김을 몇 개 집어 먹으며 그런 옷 있으면 나도 하나 살까? 고민에 빠진다... 시리얼 샘플하고 쵸컬릿 캔디 한두개 맛을 보고 이상한 퓨전 음료들 샘플이 있는 곳을 지나친다. 물론 지나친다는 말은 다 한번씩 맛보고 간다는 말과 동의어다. 장보러가면 나의 임무는 핑계인즉 막
내가 어디갈지 모르니 보호한다는 명목이지만 장에서의 나의 역할은 참으로 자유로운 taster다. 막내를 앞세워 나무라는 듯하면서 맛있는 시음코너 코너를 찾아나서는 막내를 내심 대견해 못견딘다. 그렇다고 내가 물건을 안사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사실 이것저것 맛본 후 많이 사기도한다. 최종 계산대에서 50% 정도 누군가의 힘에 밀려 강제 탈락되지만......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테스터스 초이스 커피가 시음하라고 길을 막는다. 길을 막어? ㅎㅎㅎ 하여간 나에겐 막는 것으로 보인다. 무조건 두 잔을 들이킨다. 식후에 먹는 커피는 역시...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다 오늘은 더워진 날씨 탓인지 냉커피도 있다. 핸드폰이 울린다. 도대체 어디 있길래 보이지도 않느냔다. "응 커피시음하는데.." "알았어요.. 바로 옆이네.." 와이프도 커피를 좋아하니 와서 커피는 먹는다. 맛보면 사야된다는 강박관념에 다른 코너에서는 잘 맛보지도 않는 편이다. 한마디로 바보다. 뭐 선보면 다 결혼하나?
퍼터 고를 때 보았던 박인환씨도 장보기를 마쳤는지 커피 시음하러 왔다. 한번 보았기에 눈인사를 한다. 그 사람이야 하두 여러 사람이 흘낏흘낏보니 내 기억도 없으련만... "아니 맛보면 보았지 왜 입에다 다 묻히고 다녀요? 애들처럼...." 아 참 입을 덜 닦았나보다. 이런 실수가
있나? "포도쥬스에 김도 먹었구려.... ㅎㅎㅎㅎ 고춧가루는... 에구 김치도 맛보았나보네.." 창피하게 약간은 남이 충분히 들을 정도 볼륨으로 떠든다. 얼른 주변을 살피며 짐짓 입을 닦는다... 바로 옆에 있던 박인환씨 표정이 텔레비에서 자주 보았던 쯧쯧거리며 혀차는 표정 바로 그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아~ 오늘 일진이 좋지 않군. 스타일 구긴다......
카트를 끌고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길. "저녁으로 뭐 먹을까? TGI갈까? 쌈밥 사먹을래 너희?" 큰 애는 "아무거나..." 하며 별 주장이 없다. 날 쳐다본다. 5초정도 말을 안하고 짐짓 딴짓을 한다. 박인환씨 표정이 떠오르며 왕방울처럼 들렸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뭐,,.. 배도 부른데 그냥 집에가지 뭐... 나중에 배고프면 된장찌개나 한 술 먹고말지..." "배가 불러요?" "응 배가 딴딴한데 ㅎㅎㅎㅎ" 복수했다. 하지만 집에 그냥 내 뜻대로 못들어갈 것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