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강변을 걷다 보면
갖가지 색들의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붉은 꽃, 파랑 꽃, 노랑꽃 등 저마다 곱게 피어있다.
그런데 꽃들은 함께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서로 다투지도, 자랑하지도 않는다.
노랑꽃이 붉은 꽃을 향해서
너는 왜 붉지 않고 노랑이냐고 다투지 않고,
나는 일찍 피는데
너는 왜 그렇게 늦게 피느냐고 다투지 않는다.
강변에 하느작거리는 하얀 갈대를 보고는
너는 왜 사시사철 똑같은 색이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유리한 순경(順境)에서는 그렇게 선하게 보였던 사람도
내가 불리한 역경(逆境)에 처하면 악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사람도 추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렇게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이라 여겼던 사람도
비도덕적인 사람, 추한 사람으로 보인다.
사람의 마음은 왜 그리 변심이 심할까?
내 마음은 하나인데 왜 이리 변덕스럽게 변할까?
그 변덕스러운 마음을 경전에서는 <육창일원(六窓一猿)>이란 말로 비유한다.
원숭이 한 마리가 여섯 개의 창을 기웃대며 얼굴은 내민다는 뜻인데
이는 호기심 많은 원숭이가 여섯 개의 방을
들락날락하면서 창문에 기웃거림을 비유한 것이다.
원숭이들을 보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이 가지 저 가지로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홀로 있으면 무엇을 먹거나
아니면 자기 털을 핥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밝고 아름답게 꾸며진 방에서는
밖은 얼마나 더 아름답고 밝을까 하고 창을 내다보고,
어둡고 음산한 방에서는 밝고 화려한 방이 어디 없을까? 하고
밖을 향한 창문을 기웃거린다.
나무 막대기를 바나나로 착각하고 먹으려고 달려들기도 하고,
털이 많은 인형을 보고는 사자로 여기고 겁을 집어먹기도 한다.
이렇게 방안에 갇힌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이렇게 들락날락하는 마음은 호기심 때문이다.
이 호기심이 바로 분별심이다.
육창(六窓)은 곧 육식(六識)을 상징한 것이다.
불교 인명론(因明論)에서는 우리가 사물 인식을 3가지로 분류한다.
이를 삼량(三量)이라 한다.
첫째는 현량(現量)으로
현재의 현상을 그대로 양지(量知:헤아려 앎) 함으로
안식(眼識)이 색에 대한 것과 같다.
눈으로 밖의 대상인 꽃을 보면 마음속에 기억 되어져 있는 것(眼識)과
화합하여 꽃이다 라고 분별한다는 것이다.
둘은 비량(比量)으로
현재에 나타나지 않은 경계를 추측해서 하는 것이다.
마치 연기가 나면 불이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셋은 비량(非量)으로
눈앞에 드러나는 경계나,
또는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잘못 인식하는 것이다.
마치 허깨비를 보는 것과 같다.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은 이해할 수 있지만 현량(現量)은 그 의미가 깊다.
장미꽃을 본다고 가정해 보자.
눈으로 붉은 꽃송이를 보면(現境) 마음속에 잠재되었던
그 형상과 일치하는 경계(對境)가 떠오르게 되면
장미라는 이름(名字)으로 분별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장미라고 바로 분별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내 마음속에
그러한 현상을 지닌 상(像)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 꽃을 보는 순간 이것이 장미다, 국화다 라로 인식하고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유식은 이를 대경(對境)과
현경(現境)이 화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식(六識)이 현경을 통해서 화합하여
명자상으로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진실로 보지 못하고 허상을 진실로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 의미를 다른 예로 보자.
금반지와 금수저는 모양은 달라도 그 본질에 대한 느낌은 동일하다.
산길을 걷다가 피곤하면 쓰러진 통나무 그릇 터기에 앉아 쉬어갈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통나무 그릇터기가 천하대장군이나
불상을 다듬어 놓은 것이라면
편안한 마음으로 걸터앉아 쉴 수 있을까?
대개 사람들은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같은 나무인데도 그 형상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무엇 때문일까?
이는 우리가 상(像)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나무나, 대장군이나 불상도
모두 그 재질은 같은 나무인데도 그 형상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 어떤 상(像)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識)의 작용 때문이다.
식(識)의 작용이란 다름 아닌 분별심이다.
그 분별심은 경계 즉 육진(六塵)의 식(識)과
<나>라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과거에 축적되어 있거나 이숙(異熟)된 것이
현재의 대상과 화합함으로써 일으키는 식(識)의 작용인 것이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생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교학은 근본무명이라고 말한다.
경(經)은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법은 허깨비[幻]ㆍ아지랑이ㆍ물에 비친 달ㆍ꿈ㆍ
그림자ㆍ메아리 등과 같고,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생김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공(空)이고 무상(無相)이며 무원(無願)이니,
드러나되 취할 만한 것도 없고
장애(障礙)도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라.”<무변선행방편품>
<나>라고 여기는 그 마음을
양파껍질을 벗기듯 내 마음의 사고(思考)와
감정(感情)의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무엇이 있을까?
마음이 <나>라는 것도, 육체가 <나의 것>이란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
실체가 아닌 허상에 집착하여 있다.
그 마음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알음알이로 또 다른 알음알이를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내 마음을 알겠는가?
길은 오직 하나.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다.
깨달음 외에는 다른 경계가 없는 것이다.
고승들은 말한다.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 같고,
목숨은 석양 같으니, 비록 오늘 살았다 해도
내일을 보장키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라고 말한다.
어렵다. 내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하니.
나의 본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산은 첩첩하고 물은 잔잔한데
푸른 산은 옛 대로 흰 구름 속에 있네
山疊疊(산첩첩) 水潺潺(수잔잔)
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의구백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