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랍시고 너나없이 한마디씩 하는데, 마치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하고 성씨를 바꾸며 일본말 쓰다가 해방되니 그제야 독립운동가 행세하는 거짓된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 속이 쓰리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내놓았을 때,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을 가라앉히려고 내세운 구실 가운데 하나는 중국과 어긋나는 한자 소리를 바로잡는 말소리 정리, 즉 음운 정리였다.
중국 땅조차 사투리가 심해 소리를 적을 글자가 없었으니 한글은 한자의 발음기호 구실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 바탕은 글자를 몰라 제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들의 입을 열어주려는 한판 뒤집기였다.
신미대사 어쩌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당시 불경 몇 권을 한글로 풀었을 뿐,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절간에서는 승려도 모르고 신도도 모르고 귀신조차 알아듣지 못할 한문 글월을 목청껏 읊어댄다. 천도재고 구병시식이고 죄다 한문 넋두리다.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라며 뜻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외운다.
무당들이 한문 흉내 내어 지어낸 가짜 경문 읽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쇠활자인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1377년 불경인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내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섰다고 자랑하지만, 기껏 한문 경전이나 찍어 승려들끼리 돌려보고 선비들이 성리학 책이나 찍어 과거시험 보려고 숨겨 읽었을 뿐이다. 그 빼어난 인쇄 솜씨를 백성들은 구경조차 못 했다.
글자란 소설로도 나오고 시로도 널리 읊어져야 힘을 얻는다.
그런데 한글은 널리 펴낸 지 150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로 민간에 얼굴을 내밀었다. 허균보다 백 년 뒤에 태어난 빼어난 문장가 박지원조차 평생 단 한 편의 글도 한글로 쓰지 않고 오직 한문으로만 썼다.
우리가 오늘날 한글을 자유롭게 읽고 쓰게 된 것은 조선 지배층의 힘이 아니다.
1880년대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가 만주에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펴낼 때, 쇠활자 원조라던 조선에는 막상 한글을 찍어낼 기술이 없어 일본에다 한글 납활자를 맞추고 중국 심양에서 수천 부씩 찍어 들여왔다.
일본에 글자를 맞추고 중국에서 찍어 조선에 들여온 이 기막힌 역사를 두고, 지금도 입으로만 반일 죽창가를 부르는 자들은 무어라 답하겠는가.
존 로스 앞서 들어온 서양 신부들은 조선을 그저 중국의 속국쯤으로 보았다. 조선을 쥐락펴락하는 양반들이 한문 책만 읽고 공문서도 한자로만 쓰니, 한문으로 번역된 『천주실의』를 그대로 들여왔다.
결국 한문을 아는 양반들만 읽다가 사학죄인으로 처형당했고, 한문을 모르는 평민과 천민들은 읽을 수조차 없어 목숨을 건졌다.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이 몇 권만 더 쏟아졌어도 좋았을 텐데, 읽을거리가 없어 한글이 묻혀 있던 그 시절에 이야기 가득한 한글 성경이 퍼지면서 비로소 백성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성경을 읽히겠다고 방방곡곡에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쳤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 오지에 들어가 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듯 말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꺾지 못했다면 한글은 여전히 아녀자나 쓰는 '암클'이자 상것들의 '언문'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청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난 개화파들이 1894년 갑오개혁을 밀어붙이면서, 한글을 펴낸 지 448년 만에 비로소 한글이 법률과 공문서를 적는 나라의 으뜸 글자가 되었다.
수백 년간 한글의 숨통을 조이고 밟아대던 지배층의 후예들이 이제 와서 낯뜨겁게 한글 찬양에 열을 올리는 꼴이 우습지 않은가.
당시 갑오개혁을 이끌던 개화파는 훗날 죄다 역적과 친일파로 몰리고, 문을 걸어 잠그자던 척화파의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틈만 나면 문을 닫아걸고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며 외톨이를 자초한다.
이후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전용 정책을 밀어붙여 오늘날의 기틀을 닦았다.
197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한자를 걷어내고, 1980년대 중고교 교과서에서도 한자를 몰아냈다.
한자 섞어 쓰기를 고집하던 보수 신문들의 완강한 버팀도 결국 시대의 거센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한자는 괄호 ( ) 속으로 쫓겨났다.
지금도 중국을 섬기던 묵은 버릇에 빠진 일부 유림과 보수 지식인들이 어려운 한자어 몇 자 아는 것을 벼슬인 양 뽐내고, 관료들은 '비점오염'이니 '만전을 기하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같은 일본식 한자어를 버릇처럼 쓰지만, 언어의 큰 줄기는 분명히 우리말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글로 쓴 글은 같은 소리글자인 알파벳보다도 뇌가 알아차리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도로 표지판이나 안내문을 볼 때 한글의 ‘눈에 띄는 힘(가독성)’은 세계 으뜸이다.
소리글자이면서도 글자마다 한 덩어리로 모아써서 한눈에 뜻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한문과 비교하면 한글을 읽어내는 속도는 견줄 바가 못 된다. 느낌과 생각을 드러내는 힘 또한 매우 뛰어나다. 한자는 소리 나는 대로 외래어를 적기 어렵고, 영어는 소리와 철자가 딴판이라 또렷하지 못하다.
반면 한글은 컴퓨터, 빵, 넥타이, 치즈, 피자 같은 온 세상의 외래어를 거침없이 받아들여 우리말로 녹여낸다. 외래어를 제 소리대로 적지 못해 엉뚱한 소리를 내는 일본어나, 뜻글자의 감옥에 갇혀 외래어를 억지로 번역해야 하는 중국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툭하면 한자 교육을 되살려야 한다, 한글 한자를 함께 쓰자고 떠드는 자들이 많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1년 내내 책 한 권 안 읽는 어른이 열에 여섯이다.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조차 1년에 몇 권 읽지 않아, 5천만 인구 가운데 참된 독서 인구는 기껏해야 백만 명 남짓이다.
나머지 수천만 명은 그저 남 헐뜯고, 발목 잡고, 유튜브와 누리망(SNS)을 기웃거리며 살아간다. 이런 대중이 한자 좀 모른다고 나라가 망하겠는가.
어린 학생들이 어휘력이 모자란다고 혀를 찰 일이 아니다. 글을 쓰는 지식인들부터 쉬운 우리말로 글을 쓰면 된다. 정작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어쭙잖은 한자어와 일본식 법률·행정 말로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엉터리 먹물'들이다.
그렇다고 한자어를 모조리 파내고 토박이말만 쓰자는 외통수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한자어라도 이미 우리 핏속에 들어온 말은 그 뿌리를 제대로 알고 또렷하게 쓰자는 것이다.
어떤 자가 '도저하다'는 말을 쓰기에 무슨 뜻인지 물으니 "남들이 유식해 보여서 쓰길래 쓴다"고 했다. 그러니 ‘도저하다’ '도저히'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쓴다. 바닥(底)에 이를(到) 때까지 끝까지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러니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은 '바닥까지 다 훑어보고 온갖 수를 다 써보아도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처절한 뜻이다.
'근면성실' 역시 그저 부지런하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힘쓰고(勤勉), 말에 거짓이 없으며 알맹이가 꽉 차 있다(誠實)'는 깊은 뜻을 품고 있다.
이처럼 우리말과 한자어의 속뜻을 제대로 살려 쉽고 단단하게 쓰다 보면, 앞으로 백 년 뒤에는 한글로 쓰인 우리말이 온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문명어가 되어 있을 것이다.
* (사진 위) 조선일보는 한자 교육을 주장하며 오래도록 한자 기사를 내보냈다. 월간조선 같은 경우는 더 오래 버텼다.
(아래왼족) 한자, 알파벳, 한글 간판. 눈에 가장 잘 띄고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는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아래오른쪽) 맞춤법 틀려도 한글은 웬만하면 말한 이의 생각을 담을 수 있다. 한글은 그릇이 큰 문자다. 그래서 외래어를 아무리 담아도 거의 다 우리말처럼 녹아든다.
* 그렇다고 순우리말만 쓰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딸이 한자어 때문에 힘들어 못살겠다고 호소하여 내가 <우리말 독립사전>을 만들었다. 어른들도 막상 한자어를 제대로 알고 쓰는 이가 드물다.
어떤 놈이 '도저하다'고 하길래 무슨 뜻이냐 모르니 그냥 남이 쓰니 쓴다더라. '도저히'가 뭐냐고 해도 모른다. 그러면서 잘난 척한다. 바닥까지(底) 파고들다(到)는 뜻이다. 도저히는 '바닥까지 다 훑어봐도' 방법이 없으니 안된다는 뜻이다.
또 근면성실하다는, '죽을힘을 다해 힘쓰고, 말이 정성스럽고 좋은 음식을 내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말을 조금씩 더 풀어 쓰다 보면 백년쯤 뒤에는 우리말이 세계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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