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은 고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자원이었다. 철기의 보급과 제철 기술의 시작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전쟁무기 등 의 군사적인 용도 외에 농기구와 같은 생산 활동까지 광범위하게 이용 되었다.
생활과 밀접한 금속인 철은 필요한 여러가지 도구뿐만 아니라 불상을 조성하는 재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철불은 철을 재료로 제작한 불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철불의 등장은 9세기로, 그 이전의 금속 불상은 동합금으로 제작해왔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불두만 있는 것을 포함하여 50여 구에 이르는 철불이 현존하고 있 다.
불상은 돌, 흙, 나무 등의 재료를 이용하여 조성하거나, 금속일 경 우 구리[동]로 만들어졌다.
특히 동은 위세품 제작에 사용하는 가장 대 표적인 금속이었으며, 불상을 조성할 때 역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금속 이었다.
삼국시대 불교를 수용한 이래로, 금속으로 불상을 조성할 때는 늘 동 으로 주조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통일신라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불상을 조성할 때 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철은 용융점이 1,500℃ 이상으로 동보다 높고 강도가 강하여 주조 후에 섬세 하게 다듬기 어려우므로, 불상을 조성하기 적합한 재료라고 보기 어렵 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철로 불상을 조성한 것은 그 당시 정치와 사회, 경제적인 배경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철로 불상을 조 성한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 그러나 여러 견해 중 에 우리나라 철불의 기원에 관해서는 명확한 의견이 제시되었다고 보기 는 힘들다. 9세기에 시작한 철불의 조성은 고려 전기에 수량이 증가하였으며, 고 려 전기를 지나면서 점차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 물론 현존하는 불상 만을 대상으로 파악하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 대를 통틀어 명확한 증가와 감소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불의 증감 현상에 대해서 면밀히 연구된 것이 없다
. 이러한 흐름은 당시의 사 회적인 배경 안에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철은 무기나 생활도구와 밀접하므로,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부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자원으로서의 특징 때문에 증감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한 다.--신라하대, 고려철불 연구- 권보경의 논문에서
울산은 철이 생산되는 고장이었다.
철이라는 것은 전쟁과 농사 등의 물자로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관리하지 않고 국가가 관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청동기에 철로 변화는 금속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다.
이러한 금속으로 부처를 제작하는 것은 불심과 상당한 돈을 들여야 한다.
전국에 많은 철불이 있지만 유독 울산에는 없다고 하였지만
한 군데에서 발견 하였다.
비록 울산에서 만들지 않았지만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철비는 책에도 울산에는 철비를만들었지만 현존하지 않아 기분이 그저 그랬는데
울산에서 본 철불은 아주 잘 만들어 졌으나 조금 작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철불의 설명에는 당대의 것이라 하였는데 이 당대가 그 당시의 것인지 아니면
당(唐)나라 것인지 제대로 설명이 없다.
유리관속에 있는 이 철불은 흑화로 되는 과정과 금칠이 벗겨져 녹이 쓰는 과정이 제대로
보인다.
머리는 라발로 되어 있고 손은 촉지인 이고 발은 가부좌 형태이다.
크기는 70cm .정도 로 크지는않다.
통견으로 표현된 것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은듯 아래로 중생을 굽어 보는 모습이
보리사트바를 제대로 표현 하였다고 본다.
이 귀하고 귀한 철불을 제대로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많이 드는데...
옥산 이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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