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곤(金昌坤) (1882 ~ 1922)】 "대한광복군사령부 제6영장."
1892년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秕峴面) 홍희동(弘希洞)에서 태어났다. 같은 고향의 유학자인 조병준(趙秉準)이 1896년 증곡재(曾谷齋)에서 서북지역 청년 학도들에게 유학을 가르칠 때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중국 콴뎬현(寬甸縣)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참여하였다. 1920년 2월 신계관(申啓寬)·한철수(韓哲洙) 등과 함께 국내특파원으로 임명되었고, 관서지방 파견의 특명을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 주구배 처단과 지하기관 조직, 군자금 모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의주군(義州郡) 교외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 헌병 등 2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포위와 추격을 받았지만, 집중 공격을 피해 응전하거나 후퇴하기도 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무사히 귀환하였다.
1920년 8월 1일 서간도 지역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 한족회(韓族會)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3개 단체 연합의 통일적 행동기관이었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과 의용단(義勇團)이 결합하여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가 설립되었다. 대한광복군사령부는 재만(在滿) 교민의 통치기관으로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를 동시에 결성하였다. 대한광복군사령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직할기관이 되었으며, 각 지방에는 군영(軍營)을 설치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조직은 사령장 조맹선(趙孟善), 부관 여순근(呂淳根), 참모장 이탁(李鐸), 군정 겸 군기국장 김승학(金承學), 군법국장 유응하(劉應夏), 군령국장 박이열(朴利烈), 초모국장(召募局長) 홍식(洪植), 정보국장 양기하(梁基瑕), 훈련국장 여순근(呂淳根)이었다. 지방 군영은 제1영장 변창근(邊昌根), 제2영장 오동진(吳東振), 제3영장 홍식, 제4영장 최시흥(崔時興), 제5영장 채찬(蔡燦)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 대한광복군사령부 휘하의 지방 군영 제6영장(營長)이 되었다.
1920년 9월 경 한철수(韓哲洙)·장의환(張義煥)·이흥조(李興祚)·하병일(河炳一)과 함께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과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권총과 탄환 등을 소지하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 해 11월 정기두(鄭基斗)·정치민(鄭致敏) 등과 철산군(鐵山郡)과 의주군 등지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11월 9일 의주군 비현면 도봉동(道峯洞)에 거주하는 밀정 박윤권(朴允權)에게 찾아가 군자금 500원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고, 박윤권이 이를 거부하고 경찰서로 도망쳐 신고하려 하자 처단하였다.
1921년 1월 철산군·의주군·용천군(龍川郡)·선천군(宣川郡)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이어나가는 한편, 정치민·정기두 등과 함께 철산경찰서(鐵山警察署) 산하 백량면(栢梁面) 경찰관주재소 순사 김의주의 총을 빼앗아 사살하였다. 같은 해 3월 16일에는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어적동(於赤洞) 방면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문서를 살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 17일 한철수와 함께 주내면 어적동에 거주하며 압록강 나루의 국경감시소 헌병보로 근무하는 나자현(羅子賢)에게 독립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편의를 부탁하고자 하였다. 나자현의 소개로 같은 국경감시소에 근무하는 헌병보 하성진(河成鎭)을 만나 이를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였고, 부탁을 거절한 하성진과 나자현을 처단하였다. 나자현은 후일 이중 간첩으로 판명되었다.
1921년 6월 한철수와 함께 환런현(桓仁縣) 지역에 출동하여 지방대원 3인과 같이 친일파 토벌·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 강도들에게 행패를 당하고 있는 교포들을 구해주었다. 이 때 장쭤린(張作霖)의 중국군 부대를 만나 교전 중에 1명을 사살했지만, 포위된 후 붙잡혔다. 그리고 중국군에 의해 일제 경찰에게 인도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21년 10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강도 살인으로 사형을 받았다. 항소하였지만, 1922년 4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 해 7월 8일 오후 2시 평양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사망한 이듬해인 1922년 1월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와 통의부(統義府) 등이 주최하여 재만교민 4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콴뎬현에서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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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곤 사형 보도(『독립신문』 1921. 11. 11)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