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PDP 만든 삼성SDI 연구진“PDP로 만든 집에서 살고파”
한 외국인이 갑자기 뛰어들어 삼성SDI 김하철(43) 상무가 타고 출근하던 차를 가로막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세계적 가전업체의 바이어였다”고 했다. 그가 이른 새벽부터 김 상무 집앞을 지키고 서 있다 한 말은 ‘물건을 조금이라도 더 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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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SDI의 PDP 생산설비 | 김 상무는 요즘 직장뿐 아니라 집에서도 바이어의 전화에 시달린다. 내용은 한결같이 PDP 모듈을 더 사고 싶다는 것이다. 불과 3년 전 회사가 처음으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을 땐 반대로 김 상무가 제발 사달라고 가전업체 구매담당자들을 괴롭혔었다.
지난 1월 6일 삼성SDI는 세계에서 가장 큰 80인치(가로 1786㎜ 세로 1128㎜) PDP (Plazma display panel) 제품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PDP는 유리판 사이에 네온이나 아르곤 가스를 넣고 그 안에서 나온 자외선을 이용해 화상을 만드는 장치다. 가전업체들은 삼성SDI가 생산한 디스플레이 장치를 가지고 PDP TV를 만들어 판다.
두께 89㎜… 크기는 세계 최대
80인치 PDP TV는 세계에서 가장 큰 TV지만 두께는 89㎜에 불과하다. 얇고 공간을 적게 차지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벽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PDP TV는 벽걸이형 TV로 불린다.
삼성SDI는 지난해 12월 세계에서 PDP를 가장 많이 만드는 업체로 부상했다. 일본 조사업체인 TSR은 2003년 12월 기준 삼성SDI의 PDP 월 최대 생산량이 13만대로 세계 최대라고 밝혔다. 2위인 LG전자는 6만5000대, 3위인 NEC는 5만6000대다.
한국업체들이 PDP 분야에서 이루어낸 성적은 눈부시다. 미국 투자자문회사인 메릴린치에 따르면 2001년 국내 업체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0%였다. 그러나 2003년 삼성SDI가 세계 시장의 17%를, LG전자가 15%를 차지했다. 2004년엔 삼성SDI가 24%를 LG전자가 23%를 차지할 전망이다.
일본 후지쓰는 1995년 이미 42인치 PDP를 생산했다. 삼성SDI가 본격적으로 PDP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7월이다. 일본 업체와 기술격차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삼성SDI는 불과 2년 6개월여 만에 80인치 제품을 내놓고 세계에서 가장 큰 PDP를 만들 기술력을 가진 업체임을 선언했다. 바이어들이 충남 천안시 성성동 SDI 사업장 앞에 줄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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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SDI PDP 개발팀 실무개발자들. 허은기차장,박정태대리(아래 좌측부터).고민호사원,김진성과장(가운데 좌측부터).최영오사원,안정근대리,김태성사원(위쪽 좌측부터) |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을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삼성SDI의 연구개발인력이다. 안정근(35) 대리는 지난 연말 80인치 TV 개발 막바지 작업을 할 때 36시간 동안 자지 않고 일했다. 그냥 책상 머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생산라인을 뛰어 다녔다. 점차 모습을 갖춰 나가는 세계에서 제일 큰 PDP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달려가야 했다. 입에는 마스크, 몸에는 방진복을 걸친 상태였다. 생산라인 내부에는 의자도 없다. 먼지와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다. 오래 있다보면 눈이 침침해진다. 습기는 품질의 최대의 적이다.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안구건조증으로 고생을 한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다
“막바지에는 사람들 말이 안들리더군요.” 안 대리가 마지막에 들은 이야기는 가서 좀 자고 오란 말이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박정태(31) 대리다. 지난 연말 바깥 세상에선 새로운 1년을 맞이하는 축제가 벌어졌지만 삼성SDI 개발진은 전쟁을 치렀다. 연구원들은 아직도 전쟁의 여파에 시달린다. 박 대리는 “크리스마스 때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어겼다”며 “냉전 중인데 화해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PDP 개발팀원 가운데는 연말 분위기를 즐긴 사람이 없다. 고민호(31)씨는 지난 연말 하루에 2~3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그나마 제대로 자리에 누워서 잔 기억이 없다. “외부 협력업체에 오가는 차안에서 잠깐씩 잤다”고 했다.
제품을 발표했다고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다. 허은기(38) 차장은 올해 시무식에서 PDP 개발 실무 책임자로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사에서 주는 기술대상과 적지않은 상금을 받았다. 동료들과 축하 회식을 하기로 했지만 아직 축하의 술잔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개발진 가운데 일부가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가전박람회(CES)에 80인치 PDP를 말 그대로 모시고 라스베이거스에 갔다. 80인치 PDP는 올해 세계가전박람회의 꽃이다. 이들은 1월 셋째주에 돌아온다.
주5일 근무 시대에 주7일 근무
세계 1·2위 PDP를 들고 전람회장을 찾은 업체는 모두 한국업체다. LG전자는 2003년 10월 당시 세계 최대였던 76인치 PDP를 개발했다. LG전자는 이 제품을 가지고 박람회장을 찾았다. 세계 최초로 70인치 벽을 넘은 업체는 삼성SDI다. 회사는 2003년 5월 70인치짜리 제품을 발표했다. 두 회사가 피말리는 세계 1위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주5일 근무 시대라지만 연구직원 가운데는 주7일 근무하는 사람이 상당수다. 개발 인력에게 일요일은 특별히 열심히 일하는 날이다. 그것도 새벽 2~3시가 가장 바쁜 시간이다. 생산직원들이 하루 24시간 3교대로 연중 무휴로 일해도 물건을 댈 수 없는 상황이다. 일요일에도 공장은 돌아간다. 제품 개발을 위한 시제품을 만들려면 생산라인을 차지해야 한다.
생산효율이 가장 낮은 시간이 바로 일요일 새벽이다. 그래서 개발자들이 생산라인을 차지하는 시간도 주로 일요일 새벽이다. 한 관리부서 직원은 “평소에도 연구개발 직원들은 일요일에 절반은 출근한다”며 “순수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연구인력들은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실패할 기회를 꼽는다. 역설적이지만 세계 1위에 가까워지면서 연구팀이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실패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항상 앞서가는 기업 연구팀이 닦아 놓은 길이 있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모험이라기보다는 모방이었다. 누군가 만든 제품을 따라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오로지 얼마나 빨리 따라 할 수 있는가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삼성SDI 연구팀원들은 실패를 기록하는 일이 많아졌다. 김진성(32) 과장은 지난해 무한 콘트라스트(contrast·색조대비) 기술에 도전했다. “어두운 곳에서 검은 화면을 보면 완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뿌옇게 떠 있다는 느낌이 들지요. 말하자면 어둠 속에서 검은 화면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실과 비슷한 색을 구현하자는 것입니다.”
실패를 통해 얻은 성과가 중요
한동안 기술개발에 매달렸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상사나 주변 누구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서류상으로는 실패지만 같이 일하는 개발자들은 그 실패하는 과정에서 얻은 성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회사가 내놓은 세계에서 가장 콘트라스트 비율이 좋은 제품에는 그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가 들어있다. 삼성SDI는 그가 실패하면서 얻은 기술을 활용해 더 선명도가 높은 제품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 삼성SDI는 이른바 선행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원이 전체의 절반에 육박한다. 선행기술팀은 현재로선 아무도 할 수 없지만 미래 제품 개발에 필수적인 기술들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회사가 본격적으로 불가능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 차장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일류기업의 특권”이라고 말했다.
80인치 PDP TV의 가격은 얼마일까? 아무도 자기가 만든 제품이 얼마짜리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직 시제품만 있고 양산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76인치가 1억원 이상이라고 하니까 80인치는….” 4인치는 작다면 작은 차이다. 그러나 디지털 디스플레이 제품들은 크기가 조금만 커져도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특징이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동영 수석연구원은 “예를 들어 LCD(Liquid Crystal Display)의 경우 15인치와 17인치 가격차는 수십달러지만, 20인치와 22인치는 수백달러 차가 난다”고 말했다.
2006년까지 공급이 생산 못따라갈 것
허은기 차장은 과거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기 위해 밤을 새웠다. 그는 2002년쯤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에서 회사가 후지쓰와 비슷한 수준에 닿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은 수십 년 간 PDP를 연구해 왔습니다. 경험이 중요한 분야에선 아직 일본이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대부분 분야에서 일본 업체를 앞질렀다는 의미다. 그는 “2003년에는 회사가 전반적으로 일본 업체들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고 자평했다.
그는 요즘 거꾸로 우리 나라가 일본처럼 변하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일본 경쟁업체에선 40~50대가 개발의 주력군입니다.” 일본 기업들이 힘없이 최고 자리를 내놓은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연구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 연구하는 학자는 30대 말에서 40대 초반까지가 전성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뛰는 사람이 가장 큰 효율을 내는 나이대는 30~35세 정도라고 한다. 물론 회사의 주력은 30대다.
PDP의 호황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미국 모건스탠리는 올해 세계 수요량을 350만대로 잡고 있다. 2005년에는 720만대, 2006년에는 1050만대, 2007년에는 1300만대다. 업계에선 약 2006년까지 공급이 생산을 따라 갈 수 없다는 입장이다. LG증권 구희진 애널리스트는 삼성 SDI가 PDP 성장세에 힘입어 2003년 매출 4조7612억원, 순익 6263억원을 기록했다고 평가했다.
한겨울이지만 SDI 사업장에는 대규모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길이가 250m에 달하는 3번째 생산라인을 만들기 위해 트럭과 기중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경쟁업체들은 이 3라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회사에 드나드는 모든 차량은 트렁크를 열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 외부차량은 3만평 규모의 사업장에서 시속 20㎞를 넘어 달려서는 안된다. 그것도 비상등을 항상 켜 외부차량임을 밝혀야 한다. 건물 내부에는 보안을 강조하는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곳곳에 놓인 TV 화면에도 ‘보안’이라는 두 글자가 떠 있다.
삼성SDI는 지난해 5월 다면취(多面取) 공법을 도입했다고 발표했다. 보통 원판 한 장이 들어가면 완제품 모듈 하나가 나온다. 그러나 다면취 공법을 이용하면 원판 한 장에서 2~3개 제품이 나온다. 말하자면 새 라인을 만들지 않아도 기존 라인에 다면취 공법을 도입하면 라인을 더 세운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삼성SDI가 다면취 공법 도입을 발표할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철저한 보안 덕분이라는 평가다. 새로 생기는 3라인에 원판이 한 장 들어갈 때 얼마나 많은 제품이 나올 것인가는 PDP업계 최대 화제 가운데 하나다.
‘무조건 지출할 수 있는 돈’ 따로 마련
작년 허 차장은 예정에 없던 연구개발비 수십억원을 급하게 당겨 썼다. 회사가 작년부터 기존 사업계획서에 잡혀 있는 내용을 제외하고 기술개발을 위해 무조건 지출할 수 있는 돈을 따로 챙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TDC (Technology Driven Company) 연구개발비이다. “회사란 조직은 예정에 없던 돈을 100원만 더 써도 따지게 마련입니다. 필요한 돈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지 말라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회사도 기술 개발 투자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 꿈은 사람들이 창문 대신 PDP가 걸린 집에 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창을 열지 않아도 바깥 세상을 볼 수 있는 집입니다. 진짜 창문을 열면 항상 같은 강과 산이 보입니다. 그러나 PDP창은 원하는 모든 것을 보여 줄 것입니다. 아예 벽이 PDP인 것도 좋겠지요.” 정작 집에는 아직 PDP TV가 없다는 허은기 차장은 세상을 PDP로 채우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
첫댓글 좋은 기사 고맙습니다 자주 올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