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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을 경계하라(살후3:6-15)-2021.2.14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완전하거나 완벽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그런 사람을 기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까이 할 사람이 있고,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만남으로 인생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움이 안 될 자는 피하고 경계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세술입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좋은 동역자는 우리의 신앙을 복되게 하지만 믿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은 믿음을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녀들에게 좋은 친구를 만나라고 당부하는 것이지요. 좋은 친구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윤택하게 해주지만, 좋지 않는 친구들로 인해서 인생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어떤 관계보다도 인간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복 중에 복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믿음 생활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하다가 3주 동안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핍박과 시련이 있었지만 좋은 소문을 내면서 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살전1:3). 사실 이 세 가지는 교회와 믿음의 성도가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좋은 덕목들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는 신앙생활은 물론 인간이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거든요.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음은 필요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다른 차원의 믿음이지만요. 그런데 믿음도 살아 있는 믿음이 있고, 죽은 믿음이 있어요. 죽은 믿음은 아무 능력이 없지만,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흔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거가 있다는 말이지요. 일종의 믿음의 열매이지요.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록 믿음의 연조는 짧으나 믿음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지요.
한마디로 그들의 믿음은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사도들과 주를 본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살전1:6). 또한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살전1:7). 믿음의 좋은 소문이 각처에 퍼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남다른 사랑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사랑을 본받아 피차간에 서로 사랑했던 것이지요. 이른바 사도들의 기도대로 말입니다(살전3:12-13). 그들은 사랑을 위해 수고를 마다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사랑의 수고를 기억한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를 동반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수고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고도 수고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도 이깁니다. 세상에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어떤 것도 이깁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는 힘 때문에 부모님은 어떤 수고도 수고로 여기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요.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소망은 인내를 동반합니다. 내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어려움을 참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장점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교회를 무척 힘들게 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재림논쟁은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 때문에 큰 시련을 겪어야 했지요. 그들 중에 일부는 당장 내일 주님의 재림이 임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이미 주님의 재림이 있었다고 주장(살후2:1-3)하기도 했습니다. 그로인해 상당수의 성도들은 조급한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이지요. 굳이 종말의 때에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업을 버리고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신앙은 정말 위험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재림신앙을 바로 잡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한때 한국교회도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다미선교회라는 단체로부터 큰 홍역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1992년 10월28일에 휴거한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주장대로 휴거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다시 1999년의 지구 종말을 주장했습니다. 상당수의 광신도들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종말론에 심취했지요.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다 헌납했지만 교주 이장림의 통장에는 34억이라는 엄청난 돈이 쌓였습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종교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지요.
아직도 그것에 미련을 갖고 있는 잔류파가 있다합니다. 이렇게 잘못된 재림사상은 가정을 파괴하고 자기 영혼을 파괴하며 사회에 암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르치는 재림신앙은 반드시 종말 이전에 일어날 증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도래해 있지만,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금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을 향하여 달려가는 중인 것이지요. 한마디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쉬지 않고 다가가는 중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종말론적 믿음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종말론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른바 종말론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되 시한부 종말론자들 처럼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종말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요. 호들갑을 떨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특징은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고 흥분시켜서 일상생활을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지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도의 교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의 지체끼리 좋은 교제도 있지만, 좋지 않는 교제가 있기 때문에 모범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믿음 안에서 성도의 교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과는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므로 교제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1) 규모 없이 사는 사람(6절)
가장 슬픈 일은 사람이 사람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경계해야 할 대상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경계해야 할 사람으로 지목한 대상은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입니다(6절). 규모가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쉬운 말로 개념 없는 인간, 혹은 대책 없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고 목표도 없으며, 비전도 없는 인간일 테지요. 한마디로 정상적인 대열이나 궤도에서 이탈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아무 생각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무개념의 인간, 무계획의 인간, 무목적의 인간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대책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하루하루 목숨이 붙어 있기에 살아갑니다.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에요. 생각하는 존재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규모 없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자기 본능에 충실합니다. 그냥 때가 되면 배고파서 밥 먹고, 졸리면 자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한심한 인간이지요. 규모 없는 인간은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도 규모 없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규모 없는 사람이 제일 비참합니다.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의외로 많습니다.
본문 6절을 자세히 보면, 믿음의 규모가 없다는 말은 말씀의 유전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유전대로 행하지 않는 인간이 규모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15절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한마디로 유전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유전은 헬라어로 ‘전해주는 것’, ‘양도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믿음의 유전은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교훈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자체가 거룩한 유전입니다. 그 가르침이 구전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편지로 써서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기록되어진 유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직접 구전으로 가르치기도 했지만, 기록되어진 성경을 통해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유전처럼 지키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전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거짓교사들이 자꾸만 바울이 전하는 말씀의 유전을 거부하고, 가짜 유전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소수였지만 바울이 가르치는 진짜 유전보다 거짓교사들이 가르치는 가짜 유전에 귀를 더 기울였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런 유전 인자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때로는 진짜보다 가짜에 더 큰 매력을 느끼지요.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도 바로 이런 심리 때문이에요. 왜냐면 가짜가 진짜보다 더 매력 있게 보이거든요. 어쩌면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짜 흉내를 냅니다. 완전히 바꾸어버리면 성공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단은 꼬리만 살짝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사단도 하나님의 실체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지요. 창세기에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을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창3:1)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부정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실체는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사단이 하나님의 실체를 부정한다면 아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겠지요. 혹은 너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느냐고 따지겠지요. 그런데 뱀은 그렇게 유혹하지 않아요.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라는 말로 유혹합니다.
물론 그 뒤에 대화하는 장면을 들어보세요. 여자가 뱀에게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창3:3).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미혹합니다(3:4). 그러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미혹하지요(3:5). 한마디로 하나님의 실존을 부정하지 않고 말씀을 왜곡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유전을 부정하는 거지요.
본문에서 말하는 규모 없는 사람들은 바울이 가르치는 유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규모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좋아합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특징이 있어요. 수학시험 앞두고 국어책 펴놓고 있습니다. 영어시험 앞두고 수학책 펴놓고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부를 해도 뭐가 중요한 것인지 덜 중요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거예요. 시급하고 다급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규모가 없는 사람들은 똥오줌을 구분하지 못해요. 영적 분별력이 없는 것이지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전도하지 못합니다. 예배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줏대 없이 흔들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철학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부초와 같지요. 건축의 비유로 말하면 모래위에 세운 집과 같아요. 오히려 규모 없는 사람들이 규모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저렇게 고지식하게 살아가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저렇게까지 믿음생활 해야 하느냐고 비난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자기들은 빨간 신호등에 무법으로 건너면서, 법을 지키기 위해 기다리는 운전자들을 향해 융통성 없는 인간들이라고 오히려 큰 소리를 질러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말하지만 믿음에는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규모 없는 믿음은 위험합니다. 그런 믿음은 오히려 옆에 있는 지체들을 실망시키고 믿음의 독이 됩니다. 때문에 반드시 규모 없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아예 지목하여 사귀지도 말아야 합니다(14절). 오다가다 만나서 인사를 나눌 수는 있을지라도 여러분의 수첩에 명단을 기록하여 사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굳이 지목하여 사귈 필요까지는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가지를 첨부하여 부탁드립니다. 그런 자들이라고 원수처럼 대하지는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는 것입니다(15절).
(2) 누를 끼치는 사람(8절)
그리고 두 번째로 내 인생에 경계해야 대상은 누를 끼치는 사람입니다(8절). 누를 끼친다는 원어적인 의미는 짐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간이 있고, 도움하고는 상관없는 인간이 있으며, 전혀 무익한 인간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간을 곤충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정치가요,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세상에는 세 가지 타입의 인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거미 같은 인간, 개미 같은 인간, 그리고 꿀벌 같은 인간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 세 가지 곤충의 특징을 설명해보면, 거미 같은 인간은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남의 것을 이용하여 제 마음대로 거미줄을 치고서는 결국 자기 배만 채우는 인간이지요. 있어서는 안되는 인간이지요. 또한 개미 같은 인간은 성실과 근면으로 열심히 일해서 자기만 먹고 삽니다. 솔직히 열심히 땀 흘려서 일은 하지만 결국 남에게 베풀지는 않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인간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나벌어서 나먹고 사는 유형의 인간들이지요. 비록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남에게 유익을 주지도 않습니다. 있으나마나 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꿀벌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꿀벌은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개미같이 부지런히 일합니다. 그러나 개미와는 전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모은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전부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꿀벌은 자기가 땀 흘려서 일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좋습니다. 절대 없어서는 안될 인간입니다. 인간의 삶에도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거미형 인간, 개미형 인간, 꿀벌형 인간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누를 끼치는 인간은 어떤 유형의 인간일까요? 최소한 꿀벌 같은 인간은 아니겠지요? 한걸음 양보해서 개미 같은 인간일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거미 같은 인간이 분명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은 거미 같은 인간이에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지요. 아니 도움은커녕 오히려 독이 되는 인간입니다. 내 인생에 짐이 되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부부지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거미 같은 부부들은 서로를 비난합니다. 당신이 내 인생에 끼어들지만 안했다면 내 인생은 날개를 달고 날아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누를 끼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인간들이지요. 우리는 그런 인간을 거머리 같은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며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인간들이지요.
사실 교회가 이런 자들 때문에 비난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 곁에 붙어서 진딧물처럼 신세만 지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신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신세를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를 끼치는 사람들은 신세를 신세로 여기지 않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원망을 하고 원수로 되갚기도 합니다. 전에 청년부 사역을 할 때, 지도하던 청년 하나가 끄떡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리고 도움을 청하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달콤한 말로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려고 한다는 둥, 집안에 무슨 일도 없으면서 우환이 있어서 그런다는 둥, 별별 핑계거리를 다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상당한 금전적인 피해를 주었습니다. 물론 제게도 몇 번이나 거짓말로 접근해서 몇 번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저에게 좋지 않는 비난을 하고 떠났습니다. 주의 종이 사랑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 친구는 그런 일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제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형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안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주변에 이런 사람 없습니까? 미안하지만 혹시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3)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10절)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 번째 인간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10절).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지요. 그래서 성경에는 게으름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게으름은 죄악입니다(마25장의 달란트 비유). 특별히 영적 게으름은 정말 버려야 할 죄악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게으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게으름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린 사람은 경계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일에 관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10절).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일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11절). 이런 사람들은 일거리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군이 안되면 일감이 됩니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 속에서든지 일만 만드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른바 사고치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는 사고만치고 사는 사람을 사고뭉치라고 부릅니다. 그런 자들은 한 가지 일을 수습하고 나면 또 다시 사고를 칩니다. 우리 주변에 일생 사고만 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의외로 많습니다. 평생 사고만 치다가 떠나는 사람도 의외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없이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12절). 종용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조용히 감당합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이지요. 그런 자들은 자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도 않습니다. 내일로 미루지도 않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 말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나 행복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주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을 종용히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베짱이 같은 인간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있어서 매우 단호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10절). 먹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은 규모가 없는 자들입니다(11절). 보통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들은 병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규모 없는 사람들은 게으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요즘 젊은이들은 좀비형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환타지 소설이나 헐리웃의 영화소재 정도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좀비형 인간은 도대체 어떤 인간을 말하는 것일까요?
좀비라는 말은 서인도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마약을 투여해서 되살려 낸 시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인간의 육체적인 몰골은 가지고 있지만 생각할 수 있는 지능을 소유하지 못한 시체형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좀비형 인간들의 특징은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긍정적인 것 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성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움직이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며 어우러져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인생은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남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제입니다. 교제는 너와 나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좋은 교제는 삶을 복되게 하지만, 좋지 않는 교제는 삶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과 교제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교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영적인 교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만 행해야 합니다. 좋은 교제를 위해 가까이해서는 안될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때문에 경계해야 할 대상을 지목해주시는 본문의 말씀을 잊지 말고 마음에 새기어 삼가하십시다. 반드시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여 내 인생에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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